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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제 4대 세종대왕 가계도
<태종의 적3남>
정식칭호 :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재위기간 : 1418.8 ~1450.2 (31년 6개월)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1397년 4월 10일에 한양의 잠저에서 출생. 1408년에 충녕군(忠寧君)에 책봉, 1413년에 대군이 되고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 1450년 2월 17일에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서 사망. 능호는 영릉(英陵 - 경기도 여주 성산). #원래 능은 헌릉(서울 강남구 내곡동) 서쪽 산에 조성되었다가 예종 때인 1469년 3월 6일에 경지도 여주 서북편 성산으로 옮겨졌다.
■ 부인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 ∼1446] 청송 심씨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이며,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의 딸이다. 이 일로 소헌왕후에 대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세종의 강력한 반대와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폐하여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헌왕후의 혈족들은 모두 노비로 전락하였고, 어머니 안씨마저 천비로 전락되었다. 어머니 안씨는 1426년 신원이 복원되었고, 아버지 심온은 문종 대에 가서야 영의정의 직책이 회복되고 안효공이라는 작위가 내려졌다. 1446년 3월 24일에 수양대군의 집에서 사망하였는데, 헌릉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에 합장되었다. 휘호는 선인제성(宣仁齊聖)이다. 소생으로는 문종, 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 등 아들 8명과 정소, 정의공주 등 딸 2명이 있다.
▶ 영빈 강씨(令嬪 姜氏) [생몰년미상] 소생으로는 화의군이 있다.
▶ 신빈 김씨(愼嬪 金氏) [1406~1464] 청주 김씨 첨지중추원사 김원의 딸로, 12세에 궁궐에 들어가 세종을 모셨고, 1447년 빈에 책봉되었다. 세종이 죽은 뒤에는 여승이 되었고, 1452년에 단종이 머리를 기르도록 명령했지만 듣지 않았다. 세조 대에 이르러 후한 대접을 받았고 큰 저택을 하사받기도 했다. 소생으로는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군 등 아들 6명을 두었다.
▶ 혜빈 양씨(惠嬪 梁氏) [ ? ~ 1455] 청주 양씨 경(楊景)의 딸로 궁인으로 입궁하였다가 세종을 모셔서 귀인에 봉해지고, 다시 빈에 책봉되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은지 이틀 만에 죽자, 당시 젖먹이였던 둘째 아들 수춘군을 품속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고 단종을 정성을 다해 길렀다. 세종과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내명부의 어른으로서 국상 중에 단종의 가례를 명령하여 성사시켰고, 수양대군과 대립하면서 단종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인 1455년 6월에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같은해 11월에 교수형되었다.
▶ 장의궁주 박씨(莊懿宮主 朴氏) [생몰년미상] 밀양 박씨 강생(朴剛生)의 딸. 1424년 장의궁주에 봉해졌으며, 소생은 없다.
▶ 명의궁주 최씨(明懿宮主 崔氏) [생몰년미상] 최사의(崔士儀)의 딸. 소생은 없다.
▶ 소용 정씨(昭容 鄭氏) [생몰년미상] 동래 정씨 갑손의 딸. 소생은 없다.
▶ 숙원 이씨 [생몰년미상] 소생으로는 정안옹주가 있다.
▶ 상침 송씨(尙寢 宋氏) [생몰년미상] 소생으로는 정현옹주가 있다.
■ 자녀 ▶ <적장남> 문종 - 소헌왕후 심씨 소생
▶ <적2남> 세조 - 소헌왕후 심씨 소생
▶ <적3남>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1418 ∼1453] - 소헌왕후 심씨 소생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居士)·매죽헌(梅竹軒). 함경도에 육진(六鎭)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 측의 무신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실력자로 등장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진필로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발문이 대표적이다. 금석문으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있는 〈세종대왕영릉신도비〉, 용인군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 (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의 〈임영대군묘표 (臨瀛大君墓表)〉가 있다. 부인은 영일 정씨 연의 딸로 아들 2명을 두었다.
▶ <적4남>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 [1419 ∼1469] - 소헌왕후 심씨 소생 자는 헌지(獻之). 1428년 대광보국임영대군(大匡輔國臨瀛大君)에 봉해졌으며,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일찍이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1년 민간 여인에게 남복(男服)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1442년 원윤(元尹)이 되면서 관작이 회복되었다. 무예가 능하여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제작을 감독하였고, 2년 후에는 종성지방의 경재소(京在所)일을 관장하였다. 1450년에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고,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첫번째 부인은 의령 남씨 지의 딸이고, 두번재 부인은 전주 최씨 승녕의 딸이다. 이들에게서 5남 2녀를 얻었다.
▶ <적5남>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1425 ∼1444] - 소헌왕후 심씨 소생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하였다. 같은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써 《효경》·《소학》·사서삼경·《좌전(左傳)》 등에 능통하였고, 《문선(文選)》과 이백(李白)·두보(杜甫)·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 자수의 딸로 아들 1명을 두었다.
▶ <적6남>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1426 ∼1457] - 소헌왕후 심씨 소생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혼인했으며, 같은 해에 태조의 아들인 무안대군 방번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부인은 전주 최씨 사강의 딸로 아들 1남을 얻었고, 첩에게서 아들 1명을 얻었다.
▶ <적7남> 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1427 ∼1445]- 소헌왕후 심씨 소생 자는 진지(珍之). 호는 근행당(謹行堂). 1434년에 평원대군으로 봉군(卒記에는 13세에 봉군된 것으로 기술)되고, 1437년 종학(宗學)에 입학, 호군(護軍) 홍이용(洪利用)의 딸과 혼인하였다.
▶ <적8남>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1434 ~ 1467] - 소헌왕후 심씨 소생 1441년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지고,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최종 개봉되었다. 소헌왕후의 소생 중 막내였기에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1450년 부왕 세종의 죽음도 그의 저택인 동별궁에서였다. 첫번째 부인은 해주 정충경(鄭忠敬)참판 중경의 딸로 소생은 없으며, 두번째 부인은 여산 송씨 판중추 복원의 딸로 딸 1명을 낳았다. 첩에게서 1남 2녀를 얻었다.
▶ <적장녀>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 ~ 1424]- 소헌왕후 심씨 소생 출가도 하기 전에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 세종은 정소공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친히 제문을 지어 영혼을 달랬다.
▶ <적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 ~ 1477] - 소헌왕후 심씨 소생 1428년에 죽산 안씨 망지의 아들인 연창군 양효공 맹담에게 출가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정의공주는 역산에 밝아 천문을 알았고,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어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하였다. 세종은 정의공주의 그런 지혜를 무척 아꼈고, 자주 공주의 집으로 이어하여 지냈다.
▶ <서장남> 화의군 영(和義君 瓔) [1425 ~ 1460] - 영빈 강씨 소생 자는 양지(良之). 박중손(朴仲孫)의 사위로 박팽년(朴彭年)의 매부이다. 부인은 밀양 박씨 중손의 딸로 소생은 없다. 첩에게서 아들 3명을 얻었다.
▶ <서2남> 계양군 증(桂陽君 ?) [1427 ~ 1464] - 신빈 김씨 소생 자는 현지(顯之). 1434년에 계양군에 봉해졌다. 아버지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도 잘 썼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나, 주색에 빠져 일찍 죽었다.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부인은 청주 한씨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인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로 3남 3녀를 얻었고, 2명의 첩에게서 1남 1녀를 얻었다.
▶ <서3남> 의창군 공(義昌君 王工) [1428 ~ 1460] - 신빈 김씨 소생 세조의 반정에 적극 협조하여 세조가 매우 아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에 연루되어 도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신, 은거하여 암자와 사찰을 전전하면서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고초가 극심하여 1460년(세조 6)에 병을 얻어 귀경, 사망했다. 1872년(고종 9) 숭록대부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 <서4남> 한남군 어(漢南君 王於) [1429 ~ 1459] - 혜빈 양씨 소생 자는 군옥(群玉). 1441년 세종이 왕비와 더불어 온수현(溫水縣) 가마곡(加?谷)에 행차하였을 때 임영대군과 함께 궁궐의 수비를 관장하였으며, 1442년에 한남군에 봉해졌다. 부인은 안동 권씨 예빈녹사 권격의 딸인 양원군부인(梁源郡夫人)으로 1남 1녀를 두었다.
자는 문지(文之).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다른 아들들보다 부왕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부인은 여흥 민씨 승서의 딸인 풍덕군부인(豊德郡夫人)으로 4남 2녀를 두었다.
▶ <서6남> 수춘군 현(壽春君 玹) [1431 ~ 1457] - 혜빈 양씨 소생 1437년(세종 19) 12월 8일 수춘군으로 봉해졌다. 안평대군과 친했으며, 혜빈 양씨와 함께 단종을 보호하려다 수양대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어 죽었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부인은 영일 정씨 자제의 딸인 영천군부인(榮川郡夫人)으로 딸 1명을 두었다. 영일 정씨는 홀로 된 후 단종의 비 정현왕후가 홀로 되자 같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정업원이라는 승방을 차리고 단종대왕과 수춘군의 명복을 빌며 대궐에서 거느린 궁녀들과 같이 일생을 보냈다. 세종의 서5남 밀성군의 아들 수안군으로 후사를 이었다.
자는 광지(光之). 1437년에 익현군에 봉해졌다. 성격이 윗사람의 뜻을 잘 맞추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도왔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정되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 철산의 딸인 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으로 1남 1녀를 두었다.
▶ <서8남> 영풍군 전(永豊君 ?) [1434 ~ 1457] - 혜빈 양씨 소생 1441년 영풍군에 봉군되었다. 정치·군사권을 장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왕위에 나아가려는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는데, 세조 즉위 후 단종과 그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혜빈 양씨·금성대군 등이 제거될 때 이와 관련되어 예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안성에 이배되었다. 1712년(숙종 38) 단종의 복위와 함께 관작이 복구되면서 신원되었고, 1743년(영조 19) 정렬(貞烈)의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순천 박씨 팽년의 딸로 딸 1명을 얻었다.
▶ <서9남> 영해군 당(寧海君 ?) [1435 ~ 1477] - 신빈 김씨 소생 처음 이름은 장(璋), 후일 당(?)으로 바꾸었다. 자는 옹지. 1442년 영해군에 봉해지고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성격은 화목한 것을 좋아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고 진기한 놀이와 춤 · 여색 등은 삼가했다. 평소에 중풍기가 있었는데 1478년(성종 9) 4월에 더욱 심해져서 그 해 5월 5일에 사망했다. 1872년(고종 9)에는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 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으로 2남 1녀를 얻었다.
▶ <서10남> 담양군 거(潭陽君 王渠) [1439 ~ 1450] - 신빈 김씨 소생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효심이 뛰어났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거처에 법도가 있고 시서를 좋아하였으며 성장할수록 기품이 활달하고 매사에 경건하였다. 금지옥엽으로 자라났으나 주야로 게으른 빛이 없었으니 대왕과 모친의 총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장래의 여망과 공론은 심상에 비할 바 아니었다. 계양군의 차남 강양군(江陽君)으로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 <서장녀> 정현옹주(貞顯翁主) [1424 ~ 1480] - 상침 송씨 소생 1436년 파평 윤씨 은의 아들인 영천군 사로에게 출가하여 딸 1명을 낳았다.
청송 심씨 선의 아들인 청성위 안의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