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7.31.(월)
너무 반가운 사람들은 공항으로 나가고 하루 늦게 만난 조촌선생. 대전의 어둠 속의 하늘, 그 별빛이 마음에 드시나요.
약간의 피곤함은 단꿈으로 간 것인가요. 이국의 여수 속에서 미궁을 돈 것인가요. 아침은 김선건,김양주,이춘아,허남주,도경희,필자와 같이 맞이한다.
북대전 인터테인지를 지나 호남고속도로와 대진고속도로를 달려 무주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재군씨의 밭으로 간다. 1,300평. 넉넉한 푸성귀. 애달픈 사랑은 그네로 인하여 가볍다. 우정의 씨앗이여 잘 자라라. 씹히는 오이가 달다.
15분 지나 인근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푸른꿈고등학교(대안학교). 가이드인 이무흔 선생(39세,푸른꿈 고등학교 생태 담당). 그의 안내로 인근 5분 거리의 허병섭 목사님댁으로 간다. 그의 사모님(민주노동당 소속으로 이번 지방선거 출마,낙선)의 첫 인상이 너무 좋다. 논일을 마친 허목사님은 형형하다.
흙벽돌과 구들을 깐 목수 출신의 당신이 손수 지은 집. 여름이 시원하다. 그의 첫삽으로 많은 이들이 이 곳으로 왔고, 학교가 세워졌다. 서울의 노동운동보다 인간이 착취하는 자연으로 돌아와 그의 꿈은 더 깊어졌다. 생태농과 대안학교, 전통문화를 테마로 지난 10년을 정리한다. 분노보다는 사랑이 더 깊어진 것일까. 자주 뵙고 싶은 마음이 든다. 생태를 이해하는 서울을 버리고 이곳으로 온 전교조 선생과 골프장반대투쟁위원장인 젊은 주민을 만났다.
다시 푸른꿈고등학교로 가서 리민잦치를 보고 국수와 돼지고기로 시골의 인심을 먹는다. 반가운 인사를 기꺼이 나누고 이선생의 안내로 몇 년 전보다 발전한 대안학교를 본다. 감히 한일교류 얘기를 꺼내어 본다. 다시 이선생의 부인이 운영하는 취학전 아동과 방과후 학교를 담당하는 공부방을 보고 인근 친환경적 마을회관이 너무 시원하다. 그 곳으로 피서온 사람들도 있다.
안성면 고속도로 건너 덕유산 앞 산너머 무주리조트와 연계개발되는 골프장과 스키장 건립반대집회가 열리는 마을회관으로 간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산 중턱 오지의 농장에서 골프장을 반대하는 아주머니의 한탄을 듣는다. 생태마을을 보고자 하였으나 개념이 정리되지 않아 골프장이 들어설 그 마을 보고 외국인에게 어필하기에는 부족한 그 마을을 둘러보고 정자나무 아래의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그 할머니들의 얼굴이야말로 우리가 보고자했던 생태마을이 아닐까.
다시 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저수지 위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폐교를 활용한 녹색대학 건축학과와 한 도예가를 만난다. 방학이라 대학은 볼 수가 없다. 생태건축을 짓는다는 그 학교는 구들과 흙과 나무와 기와와 억새와 볏단의 원리를 공부할 것이다. 생태적 삶이란 자기집을 손수 짓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허병섭 목사가 지역문화를 위하여 끌어들인 그 도예가는 전통가마 대신 가스가마로 도자기를 굽는다. 아직은 자기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한 것인가. 나중에 만나게 될 전통가마의 장인과 대비된다.
한국의 시골을 보고 싶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찾아간 장수군 경계의 돌담길과 옛집의 할머니의 쓰러져가는 시골집에서 향수를 달랜다. 이무흔 선생과 작별을 하고, 안성톨게이트를 나와 대전으로 와 오경순씨를 만난 일행은 공식환영회를 갖는다. 술을 절제하고, 오늘 본 무주의 생태기행이 괜찮다는 얘기를 나누고, 안목 있는 성공회 신부(아주미술관장)가 지은 한국적인 집을 보기 위하여 대전 인근(유성구 구룡동)을 마지막으로 찾았으나 길을 잃고 실패했다. 김선건 교수와 조촌은 이것으로 인사를 나눈다.
8.1.(화)
이른 아침 조촌선생의 한 테마인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찍는다. 새로 조성된 대규모 단지(대덕 테크노밸리)라 볼 것이 많은지 열심히 카메라가 돌고 내친 김에 관평천을 본다.
다시 일행은 김양주,도경희,필자가 되어 북대전나들목을 지나 2시간 거리의 담양으로 간다. 대전,논산,연무,여산,익산,봉동,삼례,전주,김제,정읍,장성,광주를 지나 창평나들목을 나와 전남 담양군 대덕면에서 가이드인 노동운동 출신의 이장인 오봉록을 만난다.
그의 안내로 담양군 창평현 전통마을이 남아 있는 곳. 돌담길과 고래등같은 기왓집과 2층누각을 본다. 그 곳 기왓집을 지키는 사람을 만나 신축 중인 기왓집과 옛기왓집을 본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 중이란다. 창평면 사무소 부지의 새로 지은 문화회관도 좋다. 점심은 담양으로 가서 떡갈비로 남도의 첫 먹거리를 접한다.
이어 죽녹헌으로 가서 대나무숲을 보고 향교를 스쳐 긴 풍수적인 방풍림을 본다. 그 방죽을 조금 지나 대나무 숲을 거느린 찻집으로 가서 죽노차를 마시고 방금 천렵의 흥을 나누고 졸아온 주인의 예쁜 얼굴을 보고 그의 판소리를 듣는다. 춤도 본다. 신명이 살아있다. 같이 온 사물놀이 단장은 딸들과 즉석에서 꽹과리와 장구,북으로 한바탕 논다. 이것이 누구나 가진 남도의 신명이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담양,광주 경계의 영산강 상류 유네스코 지정 습지에서 지는 노을 속의 철새를 만난다. 생물종다양성이 확인된 자연학습장이다. 마지막은 원림의 하나인 명옥헌. 그 정자와 어우러진 아름드리 배롱나무 군락을 본다. 조선의 문화공간. 정자는 지금은 황지우 시인의 공간이 되었다.
1박지로 가는 도중 남도정식집에서 뜻밖의 60년대식 카바레 아코디언 연주자를 만났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속에 진한 그 시대의 문화가 그 사람과 같이 뭍어 있다. 살려야 될 전통은 이조의 것만이 아니다. 고된 삶이 있는 한 그 여운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잠시 남도의 흥을 본 일행은 아리랑으로 간다. 차 안 테이프가 아리랑을 부르면 여기는 듣고 같이 부를 수 있는 남도. 그 날 밤은 그 흥으로 가고 싶다. 그리하여 찾아간 노래방은 흥이 없다. 진도 소포리의 할머니가 그립다. 아니라면 지난주 만난 그 가객이 보고 싶다. 오선생은 혼자라도 그 남도의 흥을 막걸리로 풀고 싶다.
그러나 손바닥이 같이 울 수 없는 이문화의 밤은 그 막걸리마저 제쳐두고 아쉬운 사람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던 그 곳은 전남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 고도 300미터의 그 산골은 1950년대 인근 파르티잔의 백아산의 전설을 남기고 그 때의 사람들을 같은 날 제사지내는 돌아와 이장이 된 그의 고향. 그는 그 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8. 2.(수)
이른 아침 조촌 선생에 이끌려 인근 운산리를 걷던 중 우연히 전통가마 도예가를 만나 그의 삶은 듣는다. 무명의 도예가는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도자기를 구울 뿐이다. 그의 차로 다시 이장댁으로 와서 3년된 그 집 김치를 그의 부인이 내어준다. 광주의 선생인 그의 부인은 기꺼이 시골로 와서 돈벌이 없는(이장의 월급은 37만원이다) 그의 아내가 되어 주었고, 4살된 아들을 낳아 주었다. 예쁘다.
소쇄원으로 가던 중 정자나무 아래의 정자가 있는 풍경이 일행을 붙잡고, 인근 전통기와집을 짓는 전교조 선생들의 집단 거주지로 가서 전통목수들과 같이 완성 전의 내부를 보았다. 인근 흙벽돌집도 보았다. 소쇄원 가기 전 송강 정철(이조시대 대문학가)등의 가사문학의 무대인 식영정을 다리 위에서 보고, 가사문학의 무대가 된 정자들과 조대를 보았다.
최고의 원림 소쇄원은 미학과 상념을 남기고, 인근 광산김씨 집성촌에서 옛마을의 뒤안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드리 버들을 보고 남양토건 회장의 집인 새로 지은 대궐 같은 기왓집을 보았다.
순천 가는 길은 동복호를 지난다. 순천 낙안면 선암사 입구의 기사식당에서 남도점심을 먹고 수박을 한 통 사서 산길을 20분 이상 달려 한원식 선생의집으로 간다. 잘 생긴 선생은 장죽으로 첫인사를 나누고, 그의 철학과 농법은 복잡한 설명을 요하나 결론은 간단하다. 혼자 돌아와 방안을 꽈리튼 구렁이와 독사를 보고 울었던 그 사나이는 그 둥지를 지켰고, 3,000평을 일구었다. 자연농법. 자연의 일부인 삶. 1년에 300명에 방문한단다. 많은 귀농인들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주었단다.
밤이 늦어 아치형 다리와 최고의 친환경적 변소를 가진 선암사를 보리고 낙안읍성으로 가서 그 곡선의 이조의 집을 보았다. 다음은 보성군 문덕면 해발 300미터의 외딴집. 천수씨의 공동체의 꿈이 실험 중인 곳.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이 모였다. 장에 나가 어려운 살림에 오리를 삶았다.
고달픈 1980년대를 보내고 농사를 짓겠다고 몸 하나로 들어왔다. 공동체의 종잣돈으로 3만평으로 대안학교와 택견도량을 가진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공동체의 꿈은 지금도 씨름 중이다. 그의 눈은 자연과 맞서 있고 포근한 그의 부인이 그를 어루만졌으리라. 지금 송전탑 반대운동을 이끌고 있다. 밤은 깊으나 나눌 수 없고, 전라도 사람들만 남은 소주를 비웠다.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남고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잘 수 밖에. 그 마음만은 알지만.
8. 3.(목)
아침에 일어나 그의 복잡한 공동체 운동이 남긴 쓰러진 표고하우스를 보고, 우연히 송전탑이 지나는 일제시대 금광굴을 보았다. 아침이 없다는 것을 일행은 이해한다. 그 대신 효소를 마시고, 같이 찍은 사진만은 오늘의 우리를 기억할까. 순수 지은 집 툇마루에 앉아 포즈를 취하는 두 부부의 꿈이 애틋한 이별.
화순 쌍봉사에 들러 장중한 예불과 함께 창건자인 나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이 절의 시조인 철감선사 부도와 탑비를 본다. 마지막 일정은 화순 운주사의 와불이다. 미륵불. 백제 시대마저도 비켜간 이후 한번도 중앙으로 나가지 못했던 남도의 꿈이다. 언젠가는 일어설 와불.
오선생은 온 김에 남도의 볼거리 중 하나인 영암으로 가 구림마을이라는 전통마을을 보자는 자신의 생각을 접고 아전의 고장 나주를 지나 도로변 식당으로 간다. 처음 만난 곳에서 뒤껏없는 인사를 나누고 차수선을 한다.
다시 대전으로 와 변호사사무실을 찍고 인근 법원과 둔산의 아파트를 찍은 후 공식송별식이다. 이춘아,권선정,허남주,오경순,윤재군,양은동이 작별을 준비한다. 조촌선생은 일본식으로 소회를 피력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정감을 나눈다. 오늘따라 김선생은 말이 없다. 홈플러스에서의 마지막 쇼핑은 유스하라 사람들의 것이다.
8. 4.(금)
이른 아침 조촌 선생의 아파트 찍기가 마무리되고, 오경순씨의 개량한복과 윤재군씨의 담배가 아쉬운 공항행 버스가 떠난다. 다음주에 만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짧지 않은 여정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