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전서(二程全書) / 주자대전
정군정사(程君正思) 묘표(墓表)
선비는 배움(學)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나 배움(學)을 알더라도 또 선택(擇)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고, 또 그 선택한 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충분하다 해도, 안으로 자기의 사심(私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밖으로 속습(俗習)에 견제(牽制)당하지 않는 것, 이것이 또 어렵다.
오호(嗚呼)라! 번양(番陽) 정군단몽(程君端蒙) 정사(正思)와 같은 사람은 이른바 ‘선택할 줄도 알고 그것을 능히 실천할 수도 있었던 분’이라 하겠다. 정사(正思)는 과거(科擧)에 한번 급제(及第)한 일도 없고 오래 살지도 못하고 죽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덕업(德業)으로 성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슬퍼할만한 일이다.
정사(正思)의 천자(天資)는 단아(端雅)하면서도 신실(信實)했다. 어려서부터 이미 자호(自好)할 줄 알았으며, 조금 장성(長成)해서는 곧 널리 사우(師友)를 구하여 스스로 개익(開益)할 수 있었고 드디어 사예(詞藝)로 그 이름이 추천서(推薦書)에 오르게 되었다.
정사(正思)는 무원(婺源)에서 이미 나를 만나보았으며 또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이 사람들을 가르친 대지(大指)를 듣고 물러나 개연(慨然)히 발분(發憤)하였으며, 구도(求道)와 수신(修身)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토론(討論)과 탐색(探索)에 들인 그의 공력(功力)은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었다.
비록 그는 철저하게 그 정미(精微)함을 궁구(窮究)하지는 못했지만 굳게 지키고 힘써 실천해나간 공력(功力)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처음에 [정단몽(程端蒙)이라는 그의] 이름의 아래 글자가 주정(周程)과 같았으나 이에 그는 급히 그의 부친(父親)에게 청(請)하여 이를 바꾸었다.
정사(正思)는 집에서 어버이를 섬길 때,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의리(義理)을 열어 보이곤 함으로써 어버이를 감오(感悟)케 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어버이의 환심(歡心)을 잃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친(母親)의 상(喪)을 만나, 그는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모두 고경(古經)을 추본(推本)하여 행함으로써 유속(流俗)의 오류(誤謬)를 바로잡았는데, 향인(鄕人)들 중에는 이것을 법으로 여긴 이가 많았다.
士患不知學, 知學矣, 而知所擇之爲難: 能擇矣, 而勇足以行之, 內不顧於己私, 外不牽於俗習, 此又難也. 嗚呼! 若番陽程君端蒙正思者, 其所謂知所擇而能行之者歟. 乃不及一試, 而又無年以死, 使人不得見其德業之所成就, 是可哀已.(7-4607)正思天資端慤, 自幼已知自好. 稍長, 卽能博求師友以自開益, 遂以詞藝名薦書. 旣乃見予於婺源, 聞諸老先生所以敎人之大指, 退卽慨然發憤, 以求道修身爲己任. 討論探索, 功力兼人. 雖其精微或未究極, 而其固守力行之功, 則已過人遠矣. 始時名下之字同於周程, 至是亟請其父而更焉. 其居家事親能開義理於幾微之際, 多所感悟而不失其驩心. 喪母, 葬祭推本古經, 以正流俗之謬, 鄕人多以爲法.
정사(正思)가 태학(太學)에 있을 때, 그 동년배(同年輩)들은 모두 세속에서 애호(愛好)하는 것들만 추구하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외면했다. 이에 정사(正思)는 말이 통할만한 동년배를 골라 일마다 정성(精誠)을 다하고, 또 이들을 설득하고 유도(誘導)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사(正思)의 노력으로 인해 교화된 자가 자못 많았다. 또 정사(正思)의 사람됨은 강개(剛介)하여 구차히 영합(迎合)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학문을 강론하거나 정사(政事)를 의론하는 것을 듣고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을 때는, 문득 그 사람의 집에 찾아가 논변(論辨)하고 질정(質正)하거나, 편지를 보내 비유(譬喩)로 풀거나 분명하게 따졌는데, 반드시 그 시비(是非)와 가부(可否)를 지극히 분명히 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때마침 대신(大臣) 중에 호종(豪縱)을 즐기고 명검(名檢)을 천시하는 자가 있어, 도덕을 수양하는 선비를 보면 곧 이를 사기(邪氣)라고 지목(指目)하는가 하면, 또 주상(主上)께 “이런 무리들이 장차 나라를 망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학관(學官)에서도 대신의 그 풍지(風旨)를 받들어 [학생들에게] 시험(試驗)을 부과(賦課)했으니, 곧 왕(王), 정(程), 소씨(蘇氏)의 학(學)으로 질문(質問)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대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향배(向背)를 기준으로 취사(取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응대(應對)하는 자들은 미연(靡然)히 이런 풍지(風旨)를 쫓기만 하고 감히 그 잘못에 대해 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사(正思)는 홀로 이 일에 대해 분연(奮然)히 직언(直言)하고 반론(反論)을 제기하여 의위(依違)하는 바가 없었고, 정(正)과 사(邪)의 차이를 구분하고 심천(深淺)의 정도를 따진 그의 논변(論辯)은 모두 이치에 맞았다.
정사(正思)는 비록 끝내 이 일 때문에 그들과 영합(迎合)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당시 선비들이] ‘사(邪)를 억제하고 정(正)을 따르는 기풍’을 조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其在太學, 儕輩類趨時好, 不復知有聖賢之學. 正思擇其可告語者, 因事推誠, 誨誘不倦, 從而化者亦頗衆. 然其爲人剛介, 不苟合. 聞人講學議政有所未安, 輒造門辨質, 或移書譬曉, 必極其是非可否之分而後已. 會大臣有樂豪縱而賤名檢者, 見修士卽以邪氣目之, 而又言於上曰: ‘是屬且能亡人之國.’ 於是學官承其風旨, 因課試發策, 直以王 ․程 ․ 蘇氏之學爲問, 蓋將以其向背爲取舍, 對者靡然, 無敢正言其失. 正思獨奮筆抗論, 無所依違, 而所以分別邪正之間, 輕重淺深又皆中理. 雖竟以是無所合而歸, 然其抑邪與正之助亦多矣.
고향으로 돌아오자, 정사(正思)는 곧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 때가 소희(紹熙) 11월 1일이니, 향년(享年) 49세였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바야흐로 병이 위독해지자, 정사(正思)는 직접 편지를 써서 내게 보내와 말하기를 “단몽(端蒙)은 죽음을 한(恨)하지 않습니다.
다만 끝까지 수양(修養)하여 선생의 문(門)에서 학업(學業)을 마칠 수 없는 것이 한(恨)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선생께서는 부디 자애(自愛)하시어, 좀 더 일찍 많은 저서(著書)에 착수(着手)하시어 후세의 철인(哲人)을 기다려 주십시오.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하늘조차 어찌 나를 알아주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부터 ‘정사(正思)가 도(道)를 자임(自任)한 것이 용감했고 그의 용지(用志) 또한 전일(專一)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정미(精微)함이 온축(蘊蓄)된 [우리의 유교적 진리를] 마침내 궁구(窮究)하여 이 도(道)를 널리 전(傳)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편지를 읽고서는 나도 모르게 목이 쉬고 눈물이 흘렀다. 잠시 후에 그 필적(筆跡)을 살펴보니 평일(平日)과 다름없이 근엄(謹嚴)하면서도 훌륭하였다. 이에 또한 ‘그가 생사(生死)의 즈음에 틈을 내어 쓴 필적이 이와 같음’을 깨닫고는 그 때문에 더욱 통석(痛惜)하였고 오랫동안 평안(平安)하지 않았다.
旣歸, 卽以病不起, 紹熙二年十一月一日也, 享年四十有九. 聞者莫不哀之. 方疾革時, 手書來曰: ‘端蒙死不恨, 恨不克終養而卒業於門耳. 然已無可言, 願(7-4608)先生自愛, 蚤就羣書以竢來哲. 世不我知, 天豈亦不我知也哉’ 予雅意正思任道勇而用志專, 必能卒究精微之蘊, 以廣斯道之傳者. 遽讀其書, 不覺失聲流涕. 旣而視其筆跡謹好如常日, 又知其間於死生之際如此, 爲之痛惜, 久而不能平也.
그 명년(明年)에 정사(正思)의 부친(父親)은 그의 고향 어느 곳에 정사(正思)를 장사(葬事)했다. 그리고 정사(正思)의 두 동생인 단림(端臨)과 단본(端本)을 시켜 정사(正思)의 일을 기록하게 한 다음, 이 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정사(正思)의 묘표(墓表)를 부탁하게 했다.
이에 나는 그들의 말과 글에 따라 이 글을 쓴다. 정사(正思)의 증조(曾祖) 굉(宏)과 조부(祖父) 여능(汝能)은 모두 고향에서 훌륭한 행실로 이름이 있었다. 정사(正思)의 부친(父親) 역(易)은 지금 수직랑(修職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어머니는 유씨(兪氏)이다.
처(妻)는 왕씨(王氏)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그 이름은 사성(師聖)이다. 또 딸 하나가 있는데, 그녀는 같은 현(縣)에 살던 동준(董濬)에게 시집갔다. 그 나머지도 모두 내가 들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또 그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정사(正思)는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근신(謹愼)하고 신실(信實)하였다.
이에 정사(正思)의 대부(大父)는, 자신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정사(正思)가 [집안을] 맡길만한 아이임을 알고 한 늙은 여종에게 그를 특히 부탁(付託)했다. 그 때 정사(正思)는 14-5세였는데 눈물을 흘리며 조부(祖父)의 명(命)을 들었고 근실(勤實)하고 간절(懇切)하게 조부(祖父)를 보호하며 돌보았다.
그 이후 16년 동안 시종(始終) 조금도 나태(懶怠)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때쯤 병(病)이 났는데, 비록 병중(病中)이라도 존친( 尊親)이 왕림(枉臨)하면 반드시 두건(頭巾)을 쓰고서야 감히 만나 뵈었다. 정사(正思)가 장차 세상을 떠날 무렵, 그는 부녀(婦女)를 모두 문 밖으로 물리친 후, ‘치상(治喪)에는 부도(浮屠)의 법을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계(警戒)하였다.
두 동생과 붕우(朋友)에게도 모두 인륜(人倫)의 대법(大法)과 연관된 것을 고(告)했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마땅히 글로 써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에 이를 앞에서 논한 것과 함께 써서 묘(墓) 위에 새겨 두나니, 후세(後世)의 군자(君子)들이 거의 상고(上考)함이 있을 것이다. 소희(紹熙) 3년 가을 9월 을해(乙亥)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술(述)하노라.
明年, 正思之父將葬正思於其鄕之某處, 使其二弟端臨․端本狀其事以來, 請所以表其墓者. 予按其言, 正思曾祖宏, 祖汝能, 皆有鄕行. 父易, 今以修職郞致仕. 母兪氏, 妻王氏. 生一男, 師聖, 一女, 適同縣董濬, 而它則與予所聞者皆不異. 又觀其言, 正思自少謹信異常兒, 大父將沒, 知其可託, 以一老婢諉焉. 正思時年十四五, 涕泣受命, 護視勤懇, 十有六年, 始終無少懈. 至是屬疾, 雖病, 尊親臨之, 必冠巾乃敢見. 將卒, 悉屛婦女戶外, 戒治喪無用浮屠法. 所以告二弟朋友, 皆人倫大法所繫, 不雜它語. 是皆宜書, 因幷前所論者書之, 使碣墓上, 後之君子庶有考焉. 紹熙三年秋九月乙亥, 新安朱熹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