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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은 황해도 은율지방에 전승되어온 탈춤으로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 되었다 1950년 6.25 한국 전쟁때 연희자들이 월남을 하자 지금은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수봉안길78번지(숭의4동 7-6)에서 은율탈춤 보존회를 결성하고 현재 전승과 보존 그리고 대중화에 힘을 쓰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인천 수봉 은율탈춤이다 해서탈춤 중 유일하게 인천에서 전승 하기 때문이다 이 탈놀이는 200~300여 년 전부터 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중후반에 뛰어난 놀이꾼으로 유명했던 조병모와 박동환 3형제의 활동 시기로 보아 최소 19세기 초반에 놀이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예부터 ‘놀탈’이 센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농민이나 지역 한량들이 놀이의 주체가 되었다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계통의 해서형(海西型) 탈춤이다. 연희자인 장용수(莊龍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300년 전에 있었던 어느 난리 때 난을 피했던 사람들이 섬에서 나오면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탈을 쓴 데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이 탈춤은 인근지역인 사리원·봉산·신천·안악·재령·해주 등지에서 행해졌다고 하며, 「봉산탈춤」 및 「강령탈춤」과 많은 영향관계를 갖고 있다. 춤판이 벌어지는 시기를 보면 단오절을 중심으로 2, 3일 계속하여 놀았고, 그 밖에 사월초파일과 칠월 백중놀이로도 놀았다. 또 은율군수에게 불려가 놀 때도 있었고, 유지들의 회갑잔치 때도 불려가 놀기도 하였다 탈판은 원형의 야외무대로 왼쪽에 악사석이 있고 가운데가 탈판이며, 둘레에 일반 객석이 있고, 또 통나무로 기둥과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멍석 같은 자리를 깐 다락관객석이 설치되었다. 악사석 가까이에 개복청(改服廳)이 설치되었다. 놀이는 보통 저녁을 먹고 어두울 때 시작하여 자정에라야 끝나는데, 구경꾼들이 함께 뛰어들어 소리하고 춤추노라면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기도 하였다 4월 초파일 놀이는 신라 이래의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것 같고, 단오놀이는 계절적으로 씨앗을 뿌린 뒤이며, 모내기 직전의 망중한(忙中閑)의 시기로 벽사(辟邪)와 기년(祈年)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제로 그 민속적 의의를 가진다. 놀이의 내용을 보면, 과장의 순서나 대사의 내용이 대체로 「봉산탈춤」보다 「강령탈춤」에 가깝다.서막(序幕)인 길놀이는 읍에서 1㎞ 가량 떨어진 마숲에 전원이 모여 출발하는데, 등장 순으로 열을 지어 읍내를 한바퀴 돌고 장마당에 마련한 춤판에서 놀이를 시작한다. 제1과장(科場)은 큰 백사자가 등장하여 한바탕 춤을 추고 들어간다.놀이를 개장(開場)의 벽사무인 사자춤으로 시작하는 것은 「강령탈춤」과 같으며, 이는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경우처럼 가면극의 고형(古形)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제2과장은 ‘헛목(상좌)춤’으로, 헛목이 등장하여 사방에 배례하고 춤을 추고 퇴장한다. 제3과장은 ‘팔목중춤’이다. 8명의 목중들이 등장하여 순서대로 불림하며 군무(群舞)를 추고 퇴장한다. 제4과장은 양반춤이다. 일반적으로 4과장은 ‘노승춤’으로 되어 있으나 이 탈춤에서는 강령탈춤과 같이 ‘양반춤’으로 되어 있다. 말뚝이가 양반과 새맥시를 채찍으로 치며 농락할 때, 원숭이가 나와 말뚝이를 내쫓고 새맥시와 어울려 춤추다 아이를 낳으니 최괄이가 나타나 자기 아이라고 어르는 양반풍자마당이다. 파계승보다 양반을 모욕하는 대목을 강조하여 양반과 상놈간의 대립을 더욱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제5과장은 ‘노승춤’인데, 말뚝이와 목중 한 명이 새맥시를 데리고 나와 술취한 노승을 유혹하면서 희롱하고 최괄이가 나타나 노승을 내쫓고 새맥시와 어울려 춤추는 풍자마당이다. 노승은 보통 무언으로 몸짓과 춤으로 소무와의 파계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탈춤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국화주를 취하게 마시고 등장하여 중타령과 진언을 소리내어 부른다. 노승 스스로가 파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6과장은 ‘영감·할미춤’이다. 3년 만에 영감을 만난 할멈이 뚱단지집에 의하여 죽자 무당이 와서 진오귀굿을 하고 출연자 전원이 나와 뭇동춤을 추는데, 남녀처첩간의 갈등과 무속의식을 나타낸 마당이다. 대사의 내용은 양반춤과 영감·할미춤에서 호색적인 면이 심하다. 말뚝이와 최괄이가 양반·노승·영감·할미춤에 계속 등장하여 일관되게 서민을 대표하는 등장방식을 갖추고 있다.대사는 우리말의 묘미를 구사한 구어체(口語體)가 주로 되어 있으며, 호색의 노골적인 표현은 구비문학(口碑文學)으로서의 민속극의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연출방식은 육재비를 갖추면 피리(2)·젓대·북·장구·행금(해금)의 반주로 되고, 그 밖에 새납(태평소)·징·강쇠(꽹과리)가 추가된다. 염불·타령·굿거리 등에 맞추어 춤을 추고 몸짓·동작·재담(대사)과 노래가 따른다. 춤은 중부지방에 남아 있는 산대놀이춤이나 해서탈춤형의 「강령탈춤」보다는 「봉산탈춤」의 깨끼춤에 가깝다.그러나 「봉산탈춤」의 다리 동작은 바깥 쪽으로 발을 옆으로 제끼고, 「강령탈춤」은 발끝을 위로 드나, 이 탈춤은 발을 옆으로 제끼지 않고 앞으로 바로하고 다리를 직선으로 상하로 움직인다. ‘헛목춤’은 염불곡(念佛曲)에 맞추어 추나 ‘팔목중춤’은 타령곡과 굿거리의 한 변주곡으로 보이는 굿거리보다 빠른 돔부리 장단으로 춘다.양반춤은 돌장단으로 추는 대목이 있고, 노승은 염불과 타령곡으로 추고, 영감도 돔부리장단으로 추는 대목이 있는데, 돔부리장단과 돌장단이라는 장단 이름이 따로 쓰이는 것이 특징이다. 목중들의 등장과 퇴장은 순서대로 하는데, 춤을 추고 그대로 탈춤판에 남아 있다가 나중에 뭇동춤을 춘다. 춤사위는 「봉산탈춤」과 비슷하여 큰 차이가 없다. 팔목중의 외사위·곱사위·양사위·만사위·도무(跳舞)·뭇동춤, 최괄이의 깨끼춤, 미얄의 궁둥이춤 등의 춤이 있다. 그러나 춤사위 명칭은 자세하지 않다.탈에는 혹들이 있는데, 노승·말뚝이·최괄이·마부·목중·양반·영감들은 3, 4개씩 있다. 이러한 혹이 있는 탈들은 봉산탈의 이른바 ‘목탈’로 귀면형(鬼面形)이다. 혹에 5색(황금색·녹색·붉은색·흰색·검은색)의 띠가 둘린 것은 해주탈의 경우와 같다.반면 새맥시·헛목·뚱단지집·할미탈들은 이른바 ‘인물탈’로 해주와 강령탈에 가깝다. 목중뿐만 아니라 노승·말뚝이·양반·영감탈 등 남자탈은 모두 요철(凹凸)이 있고 혹이 있는 ‘목탈’이다. 목중·말뚝이·최괄이탈은 붉은 바탕의 색이고, 양반·영감·헛목·새맥시·뚱단지집 등의 탈은 흰바탕색으로 다른 탈과 같다. 그러나 노승탈이 검지 않고 흰색인 것이 다르며, 할미탈이 검으면서 흰점·붉은점 등이 나타나 있는 것은 봉산탈의 경우와 비슷하다. 의상은 악사가 고깔을 쓰고 푸른 쾌자를 입고 노란띠를 띤다. 노승은 회색장삼에 붉은 가사를 메고 회색 바지저고리를 입는다. 양반들은 삿부채[草扇]를 든다. 나머지는 봉산탈춤의 의상과 비슷하다. 은율탈춤은 고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무능하고 권위적인 양반을 풍자하며, 불교를 민중적 시각에서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중의 타락과 파계승 풍자, 가부장제하의 남성의 횡포에 대한 여성의 핍박을 보여준다. 그러나 갈등의 고조에 의한 극단적인 대립보다 일시적인 화해의 양상으로 이끌어 가며 놀이의 성격을 유지한다.은율탈춤은 탈놀이의 일반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신명을 풀어나가는 대동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전승하면서 세시놀이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197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보유자로는 장용수(영감·양반역 및 가면제작)와 김춘신(金春信:헛목·상좌역·의상제작)이 있다. 1998년 현재는 김춘신(金春信:헛목·상좌·가면제작)·김영택(金永澤:피리·장구)이 지정되어 있다. 이두현(李杜鉉)·김기수(金琪洙)가 연희자 장용수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대본이 있다.
출처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은율탈춤 (殷栗─)
사진 출처 : 문화재청 & 문화유산채널 & Google & 은율탈춤 보존회
은율탈춤의 탈들 (진흙과 종이(창호지,초배지,곽종이)로 만듬)
노승 (은율탈춤의 노승은 산간에서 내려와 속세俗世를 이리저리 구경하고 나서 광덕산廣德山 청룡사靑龍寺로 가는 도중에, 국화주를 취하게 먹고 기력이 없어 비틀거리며 놀이판에 당도하여 쓰러진다. 그리고 <중타령>을 부르고, “정구업진언凈口業眞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오방 내외 안위제신진언…….” 하며 목탁을 치고 <천수경>의 진언을 왼다 다른지역 탈놀이에서 노승은 무언극 가면이지만 은율탈춤에서는 노승이 대사를 읇는다고 한다)
할미 (영감과 할미는 오랜만에 상봉하는데, 할미는 <나니가타령>을 부르며 반가워한다. 봉산 탈춤에서는 이 대목에서 할미가 <보고지고 타령>을 부르지만, 은율에서는 <나니가타령>을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그런데 영감이 첩인 뚱딴지집을 데리고 나타나기 때문에, 할미와 뚱딴지집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그만 사고로 죽는다)
영감 (다른 해서 탈춤에서 영감은 가죽모자에 장삼과 먹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와 부채를 들지만 은율탈춤에서 영감은 말총갓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합죽선과 장죽을 들고 나온다)
상좌(헛목) (다른 가면극의 상좌를 은율 탈춤에서는 헛목이라고 부른다. 상좌 역이 봉산 탈춤에서는 네 명, 강령 탈춤에서는 두 명이지만, 은율 탈춤에서는 한 명뿐이다. 헛목은 흰 장삼에 흰 고깔을 쓰고 꽃 가사를 양어깨에 메고 흰 바지를 입었다. 등장하면 사방에 배례拜禮하고서 춤을 시작한다. 염불장단, 늦타령장단, 자진타령장단의 순서로 춤을 추며 퇴장한다. 지금은 헛목도 가면을 쓰지만, 원래 헛목은 가면을 쓰지 않았고 여자 기생 하나가 나와서 춤을 췄다고 한다.)
사자 (대바구니로 얼굴을 만들며 옷은 두꺼운 흰 무명천으로 잘라서 만든다 3명이 들어가서 춤을 춘다)
원숭이 (은율 탈춤에서는 양반 과장에서 말뚝이에게서 아씨 역인 새맥시를 빼았아 음란한 수작을 하여 아이를 낳게 만든다. 원숭이는 소무와 어울려 춤을 추다가 소무의 등에 올라타서 업힌다. 이는 소무와 원숭이의 성행위를 의미한다. 얼마 후 소무가 아이를 낳으면, 최괄이가 등장해서 자기 아이라고 하며 아이를 들고 어른다)
먹중 (8개 첫째 먹중부터 여덟째 먹중까지 차례로 등장하여 한문구가 섞인 유식한 대사를 노래조로 읊은 다음 춤을 춘다. 봉산 탈춤에서는 첫째 먹중이 무언無言으로 춤만 추지만, 은율 탈춤에서는 첫째 먹중의 대사가 가장 길다. 그리고 첫째 먹중의 대사에 자신이 돌아다닌 지명들을 열거하는 노정기路程記가 나오는 것도 특징이다.)
새맥시(뚱딴지집) (봉산 탈춤 등 여러 가면극에서는 ‘용산 삼개(서울 마포) 돌머리집’ 또는 ‘제밀지(제물포집)’ 등 첩의 출신지를 부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은율에서는 첩의 이름이 뚱딴지집으로 이색적이다 은율탈춤에서 새맥시 또한 다른 지역 탈춤의 소무처럼 파계승을 유혹하는 역할로 나온다)
최괄이 (은율 탈춤의 최괄이는 경기도의 양주 별산대놀이·송파 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 탈춤·강령 탈춤 등에 등장하는 취발이의 본래 이름이다. 취발이는 체괄이(최괄이)─취괄이─취발이의 변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의 10월령에 나오는 ‘체괄體适이’를 가면극의 ‘취발이’와 ‘최괄이’의 옛 표기로 보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강이천姜彛天(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1789)에서는 취발이를 ‘술 취한 중’이라 표현했다. 작자 미상의 『기완별록奇玩別錄』(1865)에 ‘체괄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 시의 노장과장에서 “팔뚝 짓에 다리 짓에 머리를 뒤흔들며 가로 뛰고 세로 뛰고 사지 육신을 흔들흔들”하는 등장인물이 있다. 이는 바로 오늘날의 취발이 모습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등장인물의 이름을 “체괄인가, 취괄인가?”라고 표현하여, 당시에 취발이를 체괄이나 취괄이로 불렀음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은율 탈춤의 최괄이는 취발이의 잘못된 표기가 아니고, 오히려 예전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파계승을 풍자하고 영감 할미춤에서 말뚝이이와 함께 재판장으로 나온다)
첫째양반
셋째양반 (바보에 병신에 반신불구이며 셋째 양반이 말뚝이를 부르면, 말뚝이는 팔과 다리가 비틀어진 반신불수의 셋째양반을 올라타서 깔아뭉개고는 “양반님이 넘어지실까 봐 다리를 보호했댔습니다.”라고 변명한다. 그러면 셋째 양반이 이상하게 웃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우리 말뚝이지. 말뚝아…….” 하는 내용을 통해 어리석고 힘없는 양반층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더구나 셋째 양반은 몸이 온전치 못한 처지이기 때문에, 말뚝이에게 새맥시를 양보하기도 한다.)
둘째양반
말뚝이(마부) (은율탈춤에서의 말뚝이는 사자춤에서 마부로 나오고 양반춤에서는 양반을 조롱하는 역할로 노승춤에서는 파계승을 풍자하는 역할로도 나오며 영감 할미춤에서는 재판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사진 : 김수남 기념사업회
첫댓글 여기까지 산대놀이와 해서탈춤이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야류와 오광대를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