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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4> 김상현 / 이종수 | ||||||||||||||||||
불교적 역사관 강조한 한국불교사학 권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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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스승 김상현 교수
필자가 김상현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3학년이던 1997년 3월이었다. 그때 교수님은 한국교원대학교에 계시다가 동국대 사학과로 부임해오셨다. 필자는 당시 늦은 나이에 복학하여 후배들과 함께 ‘한국불교사 연구회’라는 스터디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한국불교사 전공 교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매우 반가워했다. 당시 사학과 내에는 한국 고대사 전공 교수님이 계시고, 또 동국대 불교학과에 불교사 전공 교수가 있는데, 왜 사학과에 불교사 교수가 오느냐며 불만의 목소리도 있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강의하는 시간강사로서는 충분히 그런 불만을 토로할 만했다. 그렇게 교수님은 십여 년 만에 대학원 시절 다녔던 동국대 사학과로 돌아왔지만 별로 환영해주는 사람도 없이 교수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불교사 연구 모임을 이끌고 있던 필자는 관련 전공 교수님이 오셨지만 찾아가지 않았다. 사실 공부 모임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무늬만 공부 모임이었기 때문에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고 싶어도 무식이 탄로 날까 봐, 그리고 초라한 공부 모임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길을 가다가 만나면, 후배들과 함께 한국불교사 공부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한번 찾아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도 졸업 때까지 끝내 교수님 연구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 섭섭해 하시지 않았을까. 필자가 개인적으로 교수님을 찾아간 것은 대학원 석사 과정 때였다. 당시 한국불교사보다 불교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했었는데, 공부하던 중에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보게 되었고, 김상현 교수님이 원효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몇 가지 여쭈어보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레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필자를 반가워해 주셨다. 그리고 시답잖은 질문에도 친절하게 당신의 견해를 말씀해주셨다. 그날 이후 필자는 가끔 교수님 연구실을 드나들었고, 결국 박사과정을 사학과로 진학하여 교수님에게 사사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조선시대 불교사를 전공하였다. 교수님이 그렇게 권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석사과정에서 조선시대 불교사와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또 교수님도 당시에 조선시대 불교사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필자가 조선시대 불교사를 전공하겠다는 뜻에 별다른 반대가 없으셨다. 그러다 보니 지도교수이지만 전공에서는 직접적으로 일치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랬던 탓일까. 필자가 논문과 관련해서 상의할 때면 항상 ‘네 생각대로 해라’고 하실 뿐 별다른 간여를 하지 않으셨다.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뿐, 공부에 방해되는 일이나 간섭은 배제하셨다. 제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셨고 스승으로서 권위를 고집하지 않으셨다. 연구실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늘 불이 켜져 있었다. 이번 이 원고를 통해 교수님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에 대해 처음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공하는 시대가 다르다는 이유로 교수님의 논문을 제대로 읽은 것이 별로 없었다. 남들이 요란스럽게 교수님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속으로 ‘뭐 그리 대단한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 시대를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았던 필자의 학문적 무지의 소치였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별로 해주시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한국 고대 불교사 전공자라고 할 만한 학생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제자들을 모아놓고 별다른 세미나도 진행하지 않았다. 그저 믿고 맡겨두다가 가끔 술 한잔 사주셨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시며……. 김상현 교수님은 2013년 2월에 정년퇴임을 하시고, 그해 7월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살아 계실 때는 스승의 존재감을 제대로 알지 못했었는데, 교수님이 세상에 안 계시니 모든 풍파가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그 바람을 막아주지 못했다. 오직 스승이어야만 막아줄 수 있었던 그 풍파를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훌쩍 지났고, 이제 교수님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부족한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교수님이 계셨던 연구실을 지날 때마다 힐끗힐끗 쳐다본다. 2. 김상현의 생애 김상현 교수님(이하 존칭 생략)은 1947년 12월 13일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창마부락에서 출생하였다. 광산 김씨 36세손이며 4남 중의 막내였다. 1956년에 숭산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962년에 졸업하였으며, 1962년에 해인중학교에 입학하여 1965년에 졸업하였다. 김상현이 태어난 마을은 해인사로 올라가는 가야산 아래에 있었다.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유명한 강백이었던 환경(幻鏡, 1887~1983) 스님이 그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김상현의 집이 가난하여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운 사정을 알고서 진주 다솔사 조실로 있던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 스님에게 김상현을 보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70년에 진주농과대학(지금의 경상대학교) 임학과에 입학하였고 1974년에 졸업하였다. 대학생 시절에는 불교학생회 활동을 통해 많은 불교 활동가들과 교류하였는데, 김상현의 친구들은 대부분 이때 사귄 분들이다. 이 당시 김상현이 썼던 몇몇 글의 제목을 보면, 〈만해와 눈물〉(〈경상대학보〉 1972), 〈우리는 빛을 찾는 나 젊은 구도자〉(〈진주농대학보〉 99, 1972), 〈만해의 님에 대한 소고〉(《개척자》 10, 1973), 〈화랑유적전을 마치고〉(〈경상대학보〉 1973) 등이다. 당시 김상현의 관심사가 젊은 구도자, 만해 한용운, 그리고 신라 화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3월에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4월에 한국불교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한국불교연구원과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일지사(一志社)에서 펴낸 ‘한국의 사찰’ 시리즈로 《부석사》 《대흥사》 《금산사》 《월정사》 《신라의 폐사》 《낙산사》 《전등사》 《신륵사》 《북한의 사찰》 등의 책을 펴낼 때 공저로 참여하였으며, 석사 논문으로 〈고려시대의 호국불교연구-금광명경 신앙을 중심으로〉(1976년 2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김상현의 최초 학술지 투고논문인 〈초의선사의 다도관〉(《사학지》 10, 단국대 사학회, 1976)이 게재되었다. 1978년 3월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임연구원에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에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하였다. 이후 전임연구원과 전임강사, 그리고 교수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1990년에 〈신라 화엄사상사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당시로써는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은 교수들도 많았고, 박사 논문에만 전념하여 학위를 취득하기보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발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11년 만의 박사학위 취득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전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로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불교사관〉(《한국사연구》 20, 1978), 〈신라 삼보의 성립과 그 의의〉(《동국사학》 14, 1980) 등의 논문도 있었지만, 한국불교연구원의 회보에 〈추사와 불교〉 〈승려였던 솔거와 김생〉 〈탈춤 속의 파계승〉 등 여러 한국불교사 관련 수필들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글들은 훗날 대부분 《한국불교사 산책》에 수록되었다. 1981년 3월에 단국대학교 전임강사로 발령되어 1985년 2월까지 근무하였다. 이른바 교수가 된 것이다. 이후 주옥같은 논문과 수필들을 매년 발표하였는데, 1981~1984년까지 〈만파식적설화의 형성과 의의〉(《한국사연구》 34, 1981)를 비롯하여 1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외에도 수십 편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에 기반하여 1985년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국사학과 조교수로 부임하여 1991년 2월까지 근무하였으며, 다시 자리를 옮겨 1991년 3월부터 1997년 2월까지 한국교원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97년 3월부터 2013년 2월 정년까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사학과에서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동국대 명예교수로서 그해 7월에 별세하였다. 김상현이 남긴 논문은 120여 편에 이르고 시대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필자가 확인한 논문은 총 129편이다). 임종하기 직전까지 논문을 발표하였기에 생전에 발표하지 못한 유고 논문이 3편 있다. 〈신라시대 화엄학승 표훈고〉(《한국고대사탐구》 14, 2013), 〈통일신라시대 팔공산의 불교신앙〉(《정토학연구》 20, 2013)과 〈《고기(古記)》의 사학사적 검토〉(《한국고대사연구》 74, 2014)가 그것이다. 특히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표한 고기(古記) 관련 논문은 필자에게도 여러 차례 《삼국유사》에 나오는 ‘古記’라는 용어가 실재했던 책이 아니겠느냐며 의견을 물어 오신 적도 있었다. 제자에게도 거리낌 없이 질문하실 만큼 학문 앞에서는 겸허하셨다. 그리고 남기신 저·역서로는 《한국의 차시》(1987), 《신라화엄사상사연구》(1991), 《역사로 읽는 원효》(1994), 《한국불교사 산책》(1995), 《조선청년에게 고함》(1997), 《신라의 사상과 문화》(1999), 《원효연구》(2000), 《역주 삼국유사》(공역, 2003), 《일본표해록》(2010), 《교감번역 화엄경문답》(2013) 등이 있다. 경력으로 보면, 1987년 5월부터 1991년 2월까지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소장, 1997년 7월부터 임종 시까지 학교법인 금강학원 감사 및 이사, 2005년 1월부터 한국불교연구원 이사 및 부원장, 2009년 10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2011년 4월부터 2013년까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2011년 3월부터 2013년 2월까지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수상 내역을 보면 1986년에 불이회의 불이상, 1999년에 명원문화재단의 명원차문화상, 2000년에 뇌허불교학술원의 뇌허불교학술상, 2001년 한국다도협회의 차문화학술상, 2006년에 일연학연구원의 일연학술상, 2011년에 초의문화재단의 초의상을 수상하였다. 3. 한국불교사 연구의 지평 확대 김상현은 한국불교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그의 연구는 전 시대에 걸쳐 있고 역사와 종교, 그리고 사상과 문화를 넘나들고 있다. 이제 그 주요한 연구 분야와 내용에 대해 발표된 논문을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김상현은 1976년부터 유고 논문까지 120여 편을 발표하였는데, 이 중에 75편의 대표적인 논문을 분야별로 나누어보면, 고대불교사(43편)·삼국유사(15편)·고려·조선시대(7편)·다도문화(4편)·근대불교(6편)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고대불교사는 다시 사상사(17편)·사찰(9편)·원효(11편)·동아시아불교(6편) 등으로 세분해볼 수 있다. 1) 고대불교사 연구 ① 사상사 한국고대불교사의 사상사 분야에서는 화엄사상사와 관련한 논문이 가장 많다. 김상현의 박사 논문 주제가 ‘신라 화엄사상사’였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까지 화엄사상사와 관련해서는 김지견이 신라 화엄학의 주류가 의상계임을 통설로 정착시킨 것 외에 그다지 심도 있는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김상현은 〈신라 화엄학승의 계보와 그 활동〉(1984)과 〈법계도기총수록고〉(1985) 등의 논문을 통해 화엄 계통의 학승들을 계보로 엮었고, 〈통일신라시대의 화엄신앙〉(1985), 〈석불사 및 불국사의 연구-그 창건과 사상적 배경〉(1986), 〈의상의 신앙과 발원문〉(1989), 〈신라하대의 화엄사상과 선사상-그 갈등과 공존〉(1989), 〈신라 명효의 해인삼매론고〉(1992), 〈신라 중대의 불교사상연구〉(1999)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화엄사상과 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일본의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가 1985년에 《화엄경 문답》을 중국 법장의 저술이 아니라 신라 의상의 저술이라고 주장한 이후, 김상현이 그에 동의하고 더 나아가 〈추동기와 그 이본 화엄경 문답〉(1996)에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추동기》(《지통기》의 異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여러 젊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김상현의 주장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2012년에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에서 편찬한 《화엄경 문답을 둘러싼 제문제》라는 책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김상현은 《(교감번역) 화엄경 문답》(2013)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상현은 신라 화엄사상 및 화엄종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법상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의 관심은 순경(順璟)과 의적(義寂)에게로 모아졌다. 순경과 의적은 7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화엄종의 조사인 의상과 동시대 승려인데, 김상현이 〈신라 법상종의 성립과 순경〉(1993), 〈의적의 법화경집험기에 대하여〉(2000)를 통해 그들이 신라 법상종의 초석을 다졌으며 아울러 화엄사상에 대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대립적인 종파적 경향을 드러내었음을 밝혔다. 이로써 당시 사상계의 중심축인 화엄종과 법상종의 성립을 동시에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종파라는 것이 성격상 대립적인 경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한 성립되기 어렵듯이 7세기 이후 화엄종파와 법상종파의 경쟁 관계로 인해 종파로 발전해갔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상현은 정치가 불교에 미친 영향과 불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 쓴 정치사상사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사학계에서는 불교의 정치적인 측면만을 부각하여 불교의 종교성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었다. 불교학자들은 호교적 경향에 치우치고 사학자들은 불교를 정치적 도구로 서술함으로써 상호 융합적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상현이 그러한 학계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며 불교사상사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미 석사 논문에서 그 단초를 열었으나 본격적인 논문은 〈신라삼보의 성립과 그 의의〉(1980)라고 할 수 있다. 그 논문에서 신라삼보(황룡사장육상·천사옥대·황룡사구층탑)의 의의를 왕권강화, 불교정치 이념, 불연(佛緣)의 호국불교 등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만파식적의 형성과 의의〉(1981)에서는 만파식적 설화를 통해 당시의 호국불교의식, 유교정치 이념, 예악사상, 신라인의 음악관 등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신라 중대 전제왕권과 화엄종〉(1984)에서는 기성 학계가 불교의 정치적 측면에 경도된 관점을 비판하였다. 특히 이 논문은 당시 사학계의 거두였던 이기백의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였으므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 중고기 업설의 수용과 의의〉(1991)에서는 윤회전생 사상이 신라 골품제도를 강력히 뒷받침해 준 이론이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반박하며 윤회의 교리가 신분에 따라 유리하거나 불리한 교리가 아니므로 골품제도와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였다. 즉 정치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불교 교리 측면에서 기존의 주장을 재고하였던 것이다. 〈7세기 후반 신라 불교의 정법치국론-원효와 경흥의 국왕론을 중심으로〉(2007)에서는 신라 승려들의 불교적 정치사상을 밝히고 그 사상이 통치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고찰하였다. ② 사찰 김상현은 고대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의 창건 배경, 왕실의 후원 등을 고찰하여 그 불교사적 의의를 찾고자 하였다. 그 대상은 황룡사, 사천왕사, 미륵사, 불국사, 화엄사, 해인사, 삼화사, 동화사 등이었다. 그리고 백제의 관음상과 미륵사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백제 위덕왕의 부왕을 위한 추복과 몽전관음〉(1999)에서는 위덕왕(554~598)이 아버지 성왕(523~554)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 호류지(法隆寺)의 몽전(夢殿)에 있는 보살상이 바로 그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위덕왕은 부왕(父王)을 위해 능사(陵寺)를 지었는데 그 터인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 등이 출토된 바 있고 일본에 적극적으로 불교문화를 전했으므로 구세관음상 역시 위덕왕이 부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백제 무왕 대 불교계의 동향과 미륵사〉(2009)는 2009년 1월 미륵사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와 관련하여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정리하여 게재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백제 불교계 동향과 서탑 사리봉안기의 명문에 대해 분석하였다. 8세기 이후 조성된 신라 사찰에 대해서도 다루었는데, 〈불국사에 관한 문헌자료에 대한 검토〉(1994)에서는 불국사와 관련한 시대별 문헌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그 사료들을 조목조목 비판하여 불국사 복원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검토하였다. 〈삼화사 철불과 화엄업 결언대대덕〉(1999)에서는, 당시 삼화사 철불의 명문을 둘러싸고 그 조성 시기에 대해 9세기 후반설과 고려 초기설이 대립하였는데 김상현은 9세기 후반 화엄학승 결언(決言)에 주목하여, 9세기 후반설을 지지하였다. 〈화엄사의 창건 시기와 그 배경〉(2002)에서는 지리산 화엄사의 창건 시기를 8세기로 비정하고 그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9세기 후반의 해인사와 신라 왕실의 후원〉(2006)에서는 신라 후기 왕실의 후원을 받은 해인사와 비로자나불상을 재조명하였다. 〈팔공산과 동화사의 가풍과 종지-심지의 점찰경 신앙을 중심으로〉(2001)에서는 진표의 교법을 계승한 심지(心地)가 동화사에서 《점찰경》의 교설에 의거하여 수행한 사실을 논증하고 그 불교사적 의의에 대해 고찰하였다. ③ 원효
김상현의 원효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던 것 같다. 원효처럼 젊은 시절 출가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환속 후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기 때문일까. 그는 원효에 대해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또 여러 곳에서 초청받아 원효와 관련한 특강을 했다. 그리고 그 글들을 모아서 대중서로는 《역사로 읽는 원효》(1994)를, 연구서로는 《원효연구》(2000)를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꾸준히 연구를 진행하여 고대불교에서 원효 연구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김상현의 원효 논문은 1987년부터 시작된다. 그 첫 번째 논문인 〈원효의 미타증성게〉(1987)는 원효가 대중을 교화하며 불렀던 미타증성게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연구물이다.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그 사상적 배경과 의의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 논문 발표 이후로 원효의 행적, 저술, 화쟁사상, 그리고 원효에 대한 후대인의 인식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원효 행적과 관련해서는 〈신라 서당화상비의 재검토〉(1988), 〈원효 행적에 관한 몇 가지 신자료의 검토〉(1988), 〈삼국유사 원효 관계 기록의 검토〉(1993), 〈원효 제명호고(諸名號考)〉(1993) 등이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원효 비문의 파편 및 《삼국유사》 등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원효 행적을 재구성하였다. 그리고 원효 저술과 관련한 논문으로 〈원효 저술의 일본 유통과 그 의의〉(1995)에서는 원효 저술 가운데 일본 학승들이 인용한 원효 저술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해 고찰하였다. 또한 후대의 여러 문헌 속에 나타난 원효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는데, 〈고려시대 원효인식〉(1994)과 〈효진나후신설(曉陳那後身說)의 검토〉(1998)가 그것이다. 앞의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여러 지식층에서 원효를 보살(菩薩)이나 성사(聖師)라고 칭한 문헌을 검토하였고, 뒤의 논문에서는 고려와 일본에서 원효를 진나의 후신이라고 기록한 문헌을 제시하고 그 근거를 원효가 지은 〈결정상위(決定相違)〉에서 찾았다. 원효의 사상과 관련해서는 다른 원효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화쟁사상에 주목하였다. 이와 관련한 논문들은 문헌을 검토하여 발표한 논문들에 비해 늦은 시기에 발표되었다. 이는 문헌 사학자인 탓도 있겠지만 원효의 사상을 충분히 음미한 이후에 발표하려고 한 데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원효 화쟁사상의 연구사적 검토〉(1995)를 발표하고 〈동서문명의 소통과 원효의 화쟁사상〉(2008)과 〈원효의 무애행과 화쟁사상의 현대적 의의〉(2009)에 대해 글을 썼다. 김상현은 원효의 일생을 무애행과 화쟁사상으로 정리하고 그에 대해 평가하기를 “원효에게 있어서 화쟁은 세계와 인생의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는 당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 방법론이자 실천행의 목표”라고 하였다. ④ 동아시아불교 김상현은 평소 제자들에게 ‘고대 동아시아 사회는 오늘날과 같은 국가와 국민의 개념이 있지 않았으므로 그 출신에 매달려 하나의 나라 안으로 그 역할을 가둘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가령 승랑이나 원측은 고구려와 신라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나이에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입적하였으므로 한국불교사의 시각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라는 큰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7세기 신라 서역구법 고승고〉(2001)에서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등장하는 신라 승려 7명과 고구려승 1명의 구법 활동을 조명하고 그 구법 정신을 고찰하면서 그 초기적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7~8세기 해동 구법승들의 중국에서의 활동과 의의〉(2005)에서 “중국에서 활동한 해동 구법승의 역사적 의의를 민족사관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동아시아 불교라는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열린 시각으로 볼 때, 동아시아 불교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해동 구법승의 역할을 보다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이러한 시각이 더욱 확장되고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그 대표적 논문은 〈동아시아 불교에서의 한국불교의 정체성〉(2007), 〈신라와 당의 불교전적 교류〉(2008), 〈《유가사지론》의 전래로 본 7세기 전반의 실크로드〉(2009), 〈9세기 재당 신라인과 불교〉(2010) 등에서는 동아시아 불교 속에서 신라불교를 바라보고, 또 신라불교에서 동아시아 불교를 조명하려는 그의 역사관이 논문 속에 내재하여 나타나고 있다. 2) 《삼국유사》 연구 김상현이 일생 동안 가장 애정을 가지고 연구했던 문헌은 《삼국유사》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필자에게 ‘《삼국유사〉를 백 번은 들여다봐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평소 늘 옆에 두고서 보았으며 《삼국유사》에 관한 강연을 수없이 하였다. 그의 《삼국유사》 연구는 크게 일연의 생애와 사상, 서지적 고찰, 사학사적 의의, 체제와 성격, 그리고 자장과 의상에 관한 기록 검토로 나눌 수 있다. 두 번째로 서지적 고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간행과 유통〉(1982), 〈삼국유사의 서지학적 고찰〉(1987), 〈삼국유사의 편찬과 간행에 대한 연구〉(2007), 〈삼국유사 고판본과 파른본의 위상〉(2013) 등의 논문이 있다. 이 중에 2013년의 논문은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논문이었다. 더구나 2013년 4월 26일 연세대에서 파른 손보기 소장본 《삼국유사》 기증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발표한 논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논문은 다른 여러 고판본과 비교한 파른본의 가치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세 번째로 사학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논문으로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불교사관〉(1978), 〈삼국유사의 역사방법론적 고찰〉(1993), 〈일연의 사관과 삼국유사〉(2001), 〈일연의 일통삼한 인식〉(2011) 등이 있다. 거의 10년의 간격을 두고 발표된 이 논문들을 통해 일연의 불교사관과 역사방법론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체제와 성격에 관해 〈삼국유사 왕력편 검토〉(1985), 〈삼국유사 효선편 검토〉(2000), 〈삼국유사 피은편의 의미〉(2010), 〈삼국유사의 찬 연구〉(2005), 〈유사의 체제와 편목 구성〉(2005)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다른 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편제인 효선 편과 피은 편이 《삼국유사》에서 갖는 성격과 위상 및 그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일연의 역사 서술의 관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3) 고려·조선시대 연구 김상현의 한국불교사 연구는 신라 화엄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차츰 시대를 넘나들며 연구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 가운데 고려시대는 천태불교사에 관한 연구로 집중되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논문은 〈고려 초기 천태학과 그 사적 의의〉(1983), 〈의천의 연학과 학술사적 위상〉(1998), 〈의천의 천태종 개창 과정과 그 배경〉(2000) 등을 들 수 있다. 대체로 기존의 연구 성과에 기반하면서도 의천의 위상과 천태종 개창과 관련해서 문헌적 근거를 보강하고 불교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였다. 조선불교사와 관련해서는 조선 중·후기의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그 대표적인 논문은 〈서산문도의 태고법통설 천명〉(1998), 〈건봉사와 사명당〉(2000), 〈조선불교사 연구의 과제와 전망〉(2002),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2010) 등이다. 이 가운데 2002년의 논문에서는 조선불교사 연구의 과제를 제시하였는데, 자신의 연구 분야가 고대불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가 미진한 점을 지적하고 흩어져 있는 문헌의 집성과 번역이 시급하다며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실제로 김상현의 제자들이 대부분 조선시대를 전공하고 있는 점도 이러한 그의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4) 다도문화 연구 김상현 학문의 특이점 중의 하나는 다도(茶道)에 대한 연구물이 많다는 점이다. 더구나 2001년 한국다도협회로부터 차문화 학술상을 수상하였고, 2011년에는 초의문화재단으로부터 초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이력은 스승이었던 효당 최범술과 연관이 깊다. 효당은 다솔사에서 다인회(茶人會)를 만들고 자신의 차를 반야로(般若露)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다도무문(茶道無門)’이라는 글을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상현은 젊은 행자 시절 효당에게서 배운 다도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가 〈초의선사의 다도관〉(1976), 〈지리산 화개차의 역사적 고찰〉(2003), 〈호남의 차문화 전통〉(2004), 〈목은 이색의 차시〉(2008) 등의 논문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저서로는 1987년에 출간한 《한국의 차시》가 있다. 정년퇴임 후에는 《한국 차문화의 향기》라는 제목의 저서를 간행하기 위해 준비하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다도에 관한 그의 논문과 강연 등의 활동은 다도를 정신의 영역으로만 머물지 않고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5) 근대불교 연구 김상현 학문의 또 다른 특이점은 만해 한용운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근대불교사를 평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역시 스승이었던 효당 최범술과 연관이 깊다. 효당은 일제강점기에 만해 한용운과 함께 청년비밀결사 조직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김상현이 효당으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실제로 김상현은 효당으로부터 물려받은 만해 한용운의 친필 서신도 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만당(卍堂)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효당이 원효의 제자를 자처하며 ‘효당’이라고 불렀듯이, 스스로 만해의 제자라는 자부심으로 ‘만당’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초기에 만해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한용운의 독립사상〉(1981), 〈한용운과 공약삼장〉(1986), 〈삼일운동에서의 한용운의 역할〉(1994), 〈효당 최범술의 독립운동〉(2002), 〈김법린과 한국 근대불교〉(2009), 〈한국 근대사의 전개와 불교〉(2011) 등이 있다. 특히 2002년에 효당의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배경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관련이 있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효당 최범술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려 하자 김상현이 이에 반발하여 학문적으로 효당의 독립운동을 규명함으로써 그 부당성을 알리려 하였던 것이다. 4. 김상현의 불교사관(佛敎史觀) 다음의 글은 온전히 김상현의 글이다. 2012년 11월 30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불교의 역사관’이라는 제목으로 고별 강연을 하였는데 그 원고의 앞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평생 한국불교사 연구에 매진한 학자의 불교사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역사적 사건, 역사의 심판, 역사의식,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역사의 의미도 조금씩은 다르게 쓰일 때가 있습니다만, 역사란 대개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기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희망만으로 살 수 없고, 현재에 부딪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흘러간 과거사는 알아서 어디에 쓸 것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로 끝나버리지 않고 오늘에 이어져 있고, 현재 속에 살아 있기에 문제가 됩니다. 인류가 경험했던 수많은 과거사는 개인이나 집단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장식(藏識), 혹은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합니다. 그 종자들은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싹이 트고 꽃을 피울 것이며, 때로는 가시가 되기도 하고 혹처럼 불거지기도 할 것입니다. 또 한편 역사란 일종의 기억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은 자신의 과거를 인식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을 상실해 버린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역사관은 신을 중심으로 하지도 혹은 인간만을 그 대상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수없이 다양한 세계와 중생들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현상계에서 사건의 영속적인 고리들은 계속적으로 서로 뒤섞이고 쉬지 않고 앞으로 회전하며 거대한 거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역사란 중생들의 온갖 행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면서 여기에 기후 변화 등 대자연의 힘까지도 더해지는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나는 것도, 소쩍새의 울음과 먹구름 속의 천둥, 그리고 간밤에 내린 무서리 등의 수많은 사건의 연속이며 영향임을 압니다. 그러기에 국화꽃의 피어남을 단순히 신의 섭리라고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신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사건이나 행위, 혹은 영향력의 집합에 의해서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나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토대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역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연기론(緣起論)에 입각하여 설명합니다. 역사도 이와 같은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든 세계든 혹은 역사든, 연기의 도리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발생합니다. 이것이 인연소기(因緣所起)이고, 연기(緣起)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사물, 혹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창조적인 업적들까지도 연기의 도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독립적이고 개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모든 구성원 혹은 구성 부분들 간의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유기적 관계로써 존재합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곧 연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원효화상연기(元曉和尙緣起)》라는 책이 있었고, 일본에는 《삼국불교전래연기(三國佛敎傳來緣起)》라는 책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룡사 창건 연기 설화라는 사용 예에서 보듯, 연기는 곧 역사입니다. 연기란 제석천의 그물처럼 수많은 인연이 얽히고설키면서 전개되는 사건들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역사 사건도 단순한 한두 원인으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역사란 통합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인간 삶의 발자취를 탐구하는 역사 전공자들은 누구보다도 통합적인 안목이 필요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연기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밝히고 있는 것으로 화엄교학 중의 중요 테마인 육상(六相)의 이론이 있습니다. 즉,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이 그것입니다. 만유의 모든 법에는 낱낱이 육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총상은 전체적인 모습을, 별상은 개별적인 모습을, 동상은 동질적인 양상을, 이상은 서로 다른 양상을, 성상은 이루어진 상태를, 괴상은 각각의 위치를 잃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의 집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집, 그 전체는 총상입니다. 그 집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 기둥, 대들보, 그리고 기와 등을 하나하나 보면 그것은 별상입니다. 그러나 집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서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집을 이룹니다. 그 동질적인 모습이 곧 동상입니다. 그렇다고 기둥과 대들보 등이 같은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기둥은 서 있고 대들보는 걸쳐 있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상이성이고 특수성입니다. 이를 이상이라고 합니다. 기둥과 대들보 등은 서로 의지하며 하나의 집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이루어진 모습, 이것이 곧 성상입니다. 그러나 기둥은 기둥대로 대들보는 대들보대로 자기의 역할을 지키되 그 기능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것이 괴상입니다. 전체와 부분은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설명됩니다.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입니다. 하나 속에 전체가, 그리고 전체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즉 일과 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호 관계는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에도 꼭 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개별적인 기관이 모여서 이룩한 하나의 전체입니다. 그러나 인류라는 집합체인 또 하나의 전체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의 개별이고 부분입니다. 하나의 작은 세포로부터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전체와 부분은 중첩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와 그 전체를 이룩하는 부분은 다 같이 독립된 개체가 아닙니다.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다수의 개별적인 존재로 이룩된 한 전체, 그것이 한 인간이건, 하나의 사회이건, 하나의 국가이건, 인류이건 간에 두루 통하는 연기의 도리입니다. E. H. 카가 사회와 개인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라고 말하기 훨씬 이전인 신라의 원효와 의상, 그리고 고려시대의 의천과 지눌 같은 이들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이와 같은 육상의 이론에 입각해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진리는 불교의 이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그 어느 분야에도 적용이 가능한 보편적인 도리이기에 역사 이해에 적용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
이종수 /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HK교수. 동국대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역임. 주요 논저로 〈조선후기 불교 이력과목의 선정과 그 의미〉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의 논문과 역서 《운봉선사 심성론》 등이 있음. |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