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曹溪宗)의 종조 도의(道義) 선사
도의 선사 초상화
도의(道義) 선사는 우리나라에 중국 남종 선을 도입해
오늘의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선불교 조계종(曹溪宗)의
종조가 되는 분이다. 그러나 생몰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8세기(선덕왕 때)에 출가해 9세기까지 생존했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형성된 선불교가 처음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7세기 통일신라 초기로서 달마선(達摩禪)이
신수(神秀)의 북종 선과 혜능(慧能)의 남종 선으로 갈라지기 이전인
제4조 도신(道信)대사로부터 선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법랑(法朗)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교종(敎宗) 일색이라
선불교를 받아들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법랑의 제자 신행(神行, 704~779)이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서
신수의 제자 보적(普寂)의 문인 지공(指空)으로부터
선법을 전수 받고 돌아왔으나 이 역시 계승되지 못했다.
그런데 법랑이 선을 유입하려고 할 당시 법랑 외에도
신라의 왕자 김화상(無相大師, 684~762)이 당나라로 건너가
귀화해 중국 선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원효(元曉, 617~686) 대사가 쓴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도
달마(達摩)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신라에서도 부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선의 유입은 신라 말 명적 도의(明寂道義) 선사에 의해서이다.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기원이 되는
남종 선을 최초로 도입한 도의 선사의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북한군(北漢郡-지금의 서울) 출신이다.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 도의는 법명이다.
전기에 의하면, 그 부친의 꿈에 흰 무지개가 집안에 드리우고,
모친의 꿈에는 고승을 친견하는 태몽을 꾸고
어머니가 임신한 지 39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일찍이 출가해 선덕왕 5년(784) 바다를 건너
당나라 오대산으로 가서 공중으로부터 종소리를 듣는 등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은 후, 조계(曹溪)로 들어가서
혜능(慧能)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을 참배했을 때,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강서의 개원사(開元寺)에서 마조(馬祖) 선사의
법사(法嗣)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법을 물어
의혹을 풀고 선법을 배운 후에
지장의 심인(心印)과 함께 법맥을 이어받았다.
이때 서당이 도의선사를 보고 말하기를,
“마치 돌 틈(石間)의 아름다움(美玉)을 취하고,
조개 가운데 진주를 줍는 것과 같도다.
진실로 가히 법을 전하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리오!”라고
했다는 말이 <조당집(祖堂集)>에 전한다.
‘도의(道義)’라는 이름도 이 때 서당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중국 남종 선의 선법은 육조 혜능-남악 회양-마조 도일-
서당 지장-설악 도의로 이어지게 됐다.
그리고 백장산(百丈山)의 백장(百丈懷海, 720~814) 선사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강의 받았는데,
그 때 백장이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됐구나.”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도의(道義) 선사는 37년 간 당 나라에 머물다가
서당에게서 심인을 전해 받고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귀국해 선법을 펴고자 노력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인 선행(禪行)을 허망하고
황당하다고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의 선불교를
마구니의 법이라고 배척했다. 마치 달마(達摩) 대사가
양무제를 만났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신라에 선(禪)이 들어 온 것은
외국인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신라인이 자진해서
입당해 선을 전수받고 돌아와 산문을 열어 선을 전수한 것이다.
신라시대는 당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던 때였으며,
이러한 교역이 승려들로 하여금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의 불교를 전수받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선의 유입을 입당전심(入唐傳心)이라고 한다.
즉, 외국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라인 자신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가져 온 것이란 말이다.
그 당시 중국의 선은 신수(神秀)의 북종 선과 혜능(慧能)의 남종 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북종 선은 그 맥이 끊어지고
혜능의 남종 선법을 받아 돌아왔기 때문에
신라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법맥이 육조 혜능 조사를 잇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수도인 서라벌은 교법의 권위주의에 물든
화엄, 계율 등의 의례적인 불교가 유행하는 가운데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선법은 전혀 믿으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스님이 가진 선사상의 개화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는 가운데
한 세대, 그 다음 세대의 기다림의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리 해서 도의선사가 지피려했던 선불교는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한 가운데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긴 침묵 속에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미래의 꽃을 피울 씨앗을 발아하고 있었는지,
3대 보조 체징(普照體澄, 804~880) 대에 와서
그 꽃을 난만하게 피울 수가 있었다.
불교의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은 그 자체가 왕을 중심으로
서열화ㆍ계급화 된 지배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엇보다 마음을 중시하고 깨달음을 지향하며,
깨닫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도의 선사의 가르침은 외면되거나
심지어 ‘마귀의 소리’로까지 치부되기에 이른다.
이에 도의 선사는 아직 때가 아님을 알고,
달마 대사가 숭산에서 9년간 침묵 속에서 기다렸듯이,
설악산의 동남쪽 줄기인 관산(冠山)에 은거, 진전사(陳田寺)를 창건해,
40여 년 동안 수행을 하다가 제자 염거(廉居, ?~844)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했다.
도의 선사는 기존의 교종불교가 의례화 형식화되는 가운데
중국의 선불교가 수용되는 전환기에 사상적 선구자로서
인고의 세월을 살다가 간 것이다.
도의 선사로부터 법을 받은 염거(廉居) 화상 또한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면서
선법의 전파를 위해 노력했으나
공식적인 선문(禪門)을 개설하지는 못했다. 염거 화상 역시
아직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음을 알고 긴 침묵 속에
수행에 전념하다가 제자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했다.
그 후 보조 체징(普照體澄)은 신라 제43대 희강왕 2년(837)에
당 나라로 들어가서 새로운 선법을 배우고자 했으나
종지(宗旨)가 조사 스님인 도의 선사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3년 만인 문성왕 2년(840)에
고국으로 돌아와서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으로 옮겨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고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해
크게 선풍을 떨쳤다. 그런데 이 때 도의를 제1세, 염거를 제2세,
자신을 제3세라고 해서 도의를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았다.
당시 유행하던 교학 교단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시대의 흐름은 점차적으로 선불교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는 장흥 보림사의 <보조체징선사창성탑비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비문은 당시 선법이 허망하고 황당하다고 해서 신앙하지 않았던 모습을 전하고 있지만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지나면서 새로운 선불교의 물결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후 도의 선사의 선사상과 수행법은 한국불교의 정통이 되면서
수많은 수행자의 눈을 뜨게 하고 깨달음의 불빛이 됐다.
도의 선사가 살았던 신라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방계 김씨 왕실이 등장해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등
어지러움에 빠져든 시기였다. 중앙정부의 권력구조가 와해되면서
육두품 이하의 많은 인재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 새로운 사상의 흐름인 선종불교에 매료돼 수행을 했고,
다시 귀국해 신라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유도했다.
이렇게 해서 신라 말에 열기 시작한 선문(禪門)은 신라가 망하고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이후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모두 아홉 곳의 산사(山寺)를 중심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며, 이들 선문은
모두 육조 혜능의 법맥(法脈)을 이은 하나의 종파로서
기존의 교리 중심의 종파인 교종(敎宗)에 대비되는 말로
선종(禪宗)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 말에 본격적으로 선종이 들어오면서
지방의 사찰을 중심으로 선문이 형성되는데,
당나라에서 선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으나 그 당시까지도 중앙에서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교종의 자리가 너무도 컸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선문(禪門)을 열게 됐다.
이것이 구산선문이 시작된 이유이다.
따라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으로,
구산문(九山門)이라고도 하며, - 가지산(迦智山) · 실상산(實相山) · 동리산(桐裡山) ·
봉림산(鳳林山) · 사자산(獅子山) · 성주산(聖住山) · 사굴산(闍崛山) ·
수미산(須彌山) · 희양산(曦陽山)을 말한다.
이리하여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됐다.
즉, 신라 불교가 침체돼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선(禪)불교가 유입돼 산문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의 성립에 의해 비로소 구산선문이 완성됐다.
이것은 구산선문이 신라 말에 한꺼번에 형성이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에 걸쳐 형성됐음을 말하며, 구산선문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며, 중국 조계 혜능 계통의 남종 선을 들여와서
해동에서는 도의 선사를 선불교의 종조로 하게 된 것이다.
도의 선사의 부도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진전사지와 울산시 상북면 석남사(石南寺)에 있다.
석남사는 가지산 남쪽에 있는 절로서,
신라 헌덕왕 16년(824년) 도의(道義) 선사가 호국기도를 위해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도의 선사는 37년간 당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선법을 펴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설악산 남쪽 자락 관산(현재 양양군 강현면)에
진전사(陳田寺)를 창건해 때를 기다리면서
먼 남쪽 땅에 석남사까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도의 국사의 손제자인 체징(體澄)이 전남 장흥의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해 신라 말 9산 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파를 창설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전남 장흥의 가지산과 울산 상북면의 가지산 이름이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두 산 모두 남종선 내지는 도의 선사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