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발달한 도시 문명 혜택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고, 모든 것이 안정되어 안전과 편리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제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21:1)”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의 뜻이 담겨 있는 명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음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섬김의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람은 배고픔이 없고 등이 따뜻하면 현실의 즐거움으로 내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 고집과 생각이 강해지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말하며 남보다 편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 생각합니다. 더 성장하고 형통할 수 있음에도 과거 힘들고 고달팠던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같은 삶의 허점은 인생 목적과 믿음의 방향을 잃고 육신의 편안과 안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남들에 대한 배려 없는 고집과 아집만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부르심’ kalevw (2564 칼레오 VPPPNMS kalouvmeno")
초대하다. 불러모으다. 호출하다. ~라고 부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불러 모으십니다. 말씀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호출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합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 자기 고집으로 부르심을 거절하거나 보류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으며 평안의 삶을 지속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난 육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며 축복의 자리로 호출하십니다. 말씀으로 축복하시는 그곳으로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 순종이요 섬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지체하지 않는 순종으로 복의 근원이 되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각이 무디어 말씀을 좇아 순종과 섬김을 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삽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지체하지 않는 순종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후배 목사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헌신하지 않는 자를 축복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고집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헌신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복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기대 이상으로 펼치신 장래의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히 11:8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기업’ klhronomiva (2817 클레로노미아 NAFSklhronomivan)
상속. 재산. 구원.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지를 알려주며 아브라함을 불러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신 뜻을 깨닫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떠나야 하는 이유와 목적지도 모르고 떠납니다. 이것이 아
브라함의 순종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요? 자기 욕심 가득한 고집과 생각입니다. ‘이래서 저래서’ 할 수 없는 핑계와 변명입니다.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의 이유를 달면서 믿음 생활을 자기 관점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오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을 부풀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말씀의 순종이 우선이었습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려고 부르셨음을 깨닫습니다.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는 구원받았기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구원받았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므로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아브라함의 구원을 이루어 하나님의 복을 상속받게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분명한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고집과 아집에 눌러앉아 있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모습으로 머물러 살라고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은 답답하고 소극적 사고의 사람에게 어떠한 복을 베풀까요? 이러한 사람은 지금의 현실에서 자신에게 생명이 붙어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의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우십니다. 지금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나갔으며’ ejxevrcomai (1831 엑셀코마이 VNAA ejxelqei'n)
떠나다. 끊어지다. ~에서 나오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감’은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주하고 싶은 자리에서 나와 하나님의 원하는 장소로 자리를 옮기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고리타분한 고집과 아집을 끊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막막하여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함께하시고 우리를 이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를 망하게 두지 않으십니다. 가나안의 풍성한 복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믿음 생활일지라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과 그러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이 정도 믿음이면 괜찮아’라고 말하며 만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에서 떠나 골고다 언덕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험한지 “아버지여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네게서 옮기시옵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곧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며 순종합니다. 믿음은 자기의 편리대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분명한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 태도와 생각은 실패의 인생이 되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하는 기도와 그 복을 위해 날마다 입술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은 현실에 주저앉아 머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갈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홀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가족과 조카 롯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지 않은 가족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나라로 함께 떠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