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를 기쁨의 띠로 두르셨나이다. 알렐루야.”(시편 30(29),12)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부활시기, 이제는 봄을 지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하는 요즘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을 기억하는 성모 성월 5월의 첫째 토요일인 오늘 성모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같은 오늘,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입당송의 말씀은 부활시기,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입당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를 기쁨의 띠로 두르셨나이다. 알렐루야.”(시편 30(29),12)
입당송의 이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의 슬픔을 춤으로 바꾸어 주시고, 비탄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우리 마음을 당신 기쁨의 띠로 둘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오늘 미사를 시작하는 입당송의 말씀이 알려줍니다.
한편 오늘 제 1 독서의 요한 묵시록의 말씀은 오늘 입당송의 말씀과 같은 맥락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하느님 안에서 누리게 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묵시문학적 표현 방식으로 요한이 본 환시 속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비견하며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3ㄴ-5)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고 그 함께 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곳에서 더 이상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어져 모든 이들이 자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그 세상은 분명 그 이전의 세상과는 다른 새 하늘과 새 땅, 부활의 세상입니다. 특별히 슬퍼하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의 표상은 무거운 짐을 진 채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특별한 위로와 위안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오늘 입당송과 제 1 독서의 말씀의 이 같은 흐름은 오늘 복음에 이르러서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말씀으로서 율법의 할례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간 요셉과 마리아가 그곳에서 만난 시메온과 나눈 대화를 전합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대뜸 이제 갓 아이를 낳은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ㄴ-35)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인지, 아이를 낳은 기쁨에 율법 규정에 따라 할례를 받으러 성전을 찾은 마리아에게 시메온은 어찌 보면 조금은 무례하고 뜬금없는 말을 건넵니다. 이 아기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 일어나게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이며, 반대를 받는 표징이라니. 아직 엄마 젖도 떼지 못한 채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이를 두고 무슨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마리아는 시메온의 이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난해하고 경우에 어긋나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시메온은 이 아기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질릴 것이며, 그 가운데 사람들 생각이 드러난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무례하기 이를 데 없으며,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뜬금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은 왜 마리아의 마음을 뒤흔드는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일까? 무슨 이유로 이 같은 말을 한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메온이 마리아와 아이를 축복하며 건넨 그 앞선 말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을 주님의 구원을 본 것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 아기가 다른 민족들에게는 하느님을 알리는 계시의 빛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모든 민족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인 그들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광을 알리는 존재가 될 것임을 드러냅니다. 시메온의 이 같은 말은 이 아기가 장차 이루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한 예언의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 구원의 은총을 시메온은 예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루게 될 구원의 은총이란 필연적으로 십자가상 제사, 곧 예수님 자신을 희생 제사로 바치는 십자가 상 죽음을 통한 구원의 은총임을 감안할 때, 이어지는 마리아를 향한 시메온의 일련의 말들은 부활이라는 구원의 은총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난과 죽음,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에 대한 예고의 말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씨앗들이 봄의 따스함을 맞아 생동하며 새싹으로 피어나듯,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시련과 고통 인내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삶의 결실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련과 인내 없이 결실로서의 열매가 맺어질 수 없듯이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 안에서 죽음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 없음을, 수난과 고통을 통해 하느님이 이루시는 부활의 은총이 이루어지게 됨을 오늘 복음의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알려주고, 이후 이루어지게 되는 성모 마리아의 삶이 또 역시 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고통 받는 아들의 곁에서, 수난 받는 아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들과 함께, 아니 아들보다 더 큰 고통과 수난을 받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삶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를 몸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
우리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어 주시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들을 기쁨의 띠로 둘러주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고통과 시련의 어두운 옛 땅과 옛 하늘이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로 언제나 기쁨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얻어 누리기 위해 우리에게 인내를 통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24,13)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인내를 가지고 지금의 시련을 견디어 내면 죽음을 통해 부활을 보여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눈의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어 주시고 부활의 기쁨을 은총으로 건네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굳은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모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시는 성모님께 전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총을 하느님께 청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모님을 기억하는 오늘 성모님의 믿음의 모습을 닮아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 희망의 빛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를 그를 통해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를 기쁨의 띠로 두르셨나이다. 알렐루야.”(시편 30(2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