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승원 신작 에세이】
어느 전직 경찰관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 ‘가요무대’ 신청곡 주인공 사연과 ‘닮은 점’
=============
■ 필자의 말
경우신문 편집국장님이 필자에게 먼저 보내주신 신작 에세이입니다.
<인터넷 경우신문>을 덧붙입니다. ♣
2026. 10. 23.
필자 윤승원
================
警友新聞 / 오피니언 2026년 10월 23일
※ 관련 글 / 바로 보기 :
https://kyungwoonet.kr/sub/opinion.php?ptype=view&idx=997&page=1&code=opinion
♧ ♧ ♧
【윤승원 신작 에세이】
어느 전직 경찰관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 ‘가요무대’ 신청곡 주인공의 사연과 ‘닮은 점’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경우회 홍보지도위원
우연히 ‘가요무대’를 시청하게 됐다. 요즘은 TV ‘다시 보기’를 통해 지난 방송도 다시 들을 수 있다.
시청자의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들려주는 순서였다. 언제 들어도 구수하고 친근한 목소리의 주인공 김동건 진행자가 전국에서 보내온 시청자들의 애틋한 사연을 소개했다.
그런데 나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편지글이 화면에 떴다. 전직 경찰공무원이라고 했다. 진행자가 따뜻하고 정겨운 목소리로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 ‘경찰 초임 시절’ 추억을 신청곡 사연에 담아
짧지만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담은 편지글이었다.
“35년간의 경찰공무원 생활을 정리한 후 경찰 초임 시절 추억이 떠올라 사연을 쓰게 됐습니다. 초임 시절에 출장 갔던 지방에서 좋은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현장에서 어깨 부상을 당하고 입원했을 때도 직장에 휴가를 내고 달려와 간호를 해줄 만큼 진심을 보여준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원하는 그녀 앞에서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절하고 후회를 많이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서로 각자의 길을 간 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손주의 재롱을 보며 잘 지내고 계실 그녀의 행복을 빌며 노래 한 곡 신청합니다. (신청자 문영호)” |
신청곡은 ‘원점’. 설운도 가수의 노래를 손빈아 가수가 불렀다. 노래를 신청한 전직 경찰관의 사연과 노랫말이 아주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했던 그 사람을/ 말없이 돌려보내고/ 원점으로 돌아서는 이 마음/
그대는 몰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나는 정말 바보야”로 끝맺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더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는 사실을 순수한 감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루지 못한 사연’의 주인공이 어디 옛 경찰 동지뿐인가요?
나는 ‘옛 경찰 동지’의 편지글 사연과 신청곡을 들으면서 묘한 감정에 빠졌다. 과거 나의 총각 시절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 어디 옛 경찰 동지뿐인가요?’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사연의 주인공은 ‘초임 경찰관’ 시절의 추억임을 밝히고 있다. 그 당시 경찰 선배들은 이런 농담을 자주 했다.
“경찰관들은 초임지가 처가(妻家)야. 대부분이 그렇다는 얘기지. 하하”
신임 총각 순경이 발령받아 부임지에 오면 동네 처녀들이 들썩거렸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 동네 순찰을 하면 처녀들은 담장 너머 까치발을 딛고 쳐다보았다.
우물가 아가씨들도 멋진 제복의 순찰 경찰관을 바라보느라 빨랫방망이도 제대로 두들기지 못했다.
경찰관은 직무 수행상 주민과 접촉하는 일이 많다. 그런저런 애틋한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은가.
‘총각 시절 연애는 무죄’라는 우스개가 있다. 여자관계에 있어 총각 시절 만남과 헤어짐은 예사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총각과 처녀 사이의 ‘눈빛 인연’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처자식이 있는 경찰관은 다르다.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유죄’다. 사회상규상 용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직 윤리에도 벗어나는 일이다.
‘가요무대’에 사연을 보낸 전직 경찰관의 시대적 배경이 아름다운 것은 ‘총각 시절’이기 때문이다.
직무상 흔히 마주치는 ‘눈빛 인연’에서 한 단계 진전된 ‘연인 사이’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자신을 좋아한 아가씨가 ‘직장에 휴가를 내고 달려와 간호를 해줄 만큼 진심을 보여주었다’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단순한 인연’의 수준을 넘었음을 짐작게 한다.
◆ ‘닮은 꼴’ 초임 경찰 시절 잊지 못할 추억이 겹쳐 떠올라
돌이켜보면 초임 경찰 시절 잊지 못할 사연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다. 나 역시 ‘닮은 꼴’ 사연이 떠오른다.
70~80년대 경찰관서에서 야간 당직 근무를 하면 ‘교환수(交換手) 아가씨’의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교환수’란 옛 ‘전화 교환원’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편리한 최첨단 통신기기가 없었던 시절이다.
▲ 《가요무대》 신청곡 사연을 시청하면서 과거 초임 경찰 시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떠올랐다. (삽화=AI 화백)
===========
당시 경찰관이 소통하는 통신기기는 ‘경비 전화’라고 했다. 무전기는 ‘무선’, 경비 전화는 ‘유선’이란 말로 통용됐다.
경찰은 ‘일제 전화’로 동시에 전문(전언통신문)을 하달하거나 긴급 관외 전화를 해야 할 경우는 꼭 통신계 ‘교환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 교환원’은 신임 경찰관의 나이는 물론, 기혼인지 미혼인지 신상 정보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업무가 한가한 심야 시간대엔 여성 교환원이 신호를 살짝 보낸다.
“윤 경관님, 뭐 하세요? 혹시 밀려오는 졸음을 쫓고 계시진 않나요?”로 시작하여 좀 더 친숙하게 발전하면 “내일 비번날엔 뭐 하실 거예요?”까지 묻는다.
말하자면 ‘유혹’이다. 청춘 시절 흔히 통용됐던 말로 하면 ‘꼬시는 것’이다. 이에 내가 그만 쉽게 넘어갔다.
순진한 총각 경찰은 상냥하고 예쁜 교환원의 목소리, 그 달콤한 ‘데이트 신청’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두어 번 만났다. 밥도 함께 먹었다. 찻집에도 갔다. 공원 벤치에 앉아 다정한 비둘기의 모습도 보았다.
공원 산책길, 네온과 가로등 불빛 아래 청춘남녀의 야릇한 가슴 설렘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달님은 알까? 그녀의 가슴도 그랬을까? 어쩌면 나보다 더 큰 설렘을 안고 산책길을 걸었을지 몰라.
하지만 순진한 경찰관은 쑥스러워 아가씨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여기까지다. 그 예쁜 목소리의 교환원 처녀와의 인연은 ‘가요무대’ 전직 경찰관의 사연처럼 더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의 신청곡 ‘원점’이란 노랫말처럼 “수많은 사연을 네온 불에 묻어놓고” 그야말로 “나는 정말 바보야”로 끝났다.
‘정말 나는 바보’였을까? 노랫말처럼 진정 ‘나는 바보’였을까?
◆ 50여 년 전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70 노년에 이르러 돌이켜보면 미안한 일이다. ‘가요무대’ 사연의 주인공처럼 ‘결혼을 원하는 그녀 앞에서’ 나 역시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청곡 사연의 주인공처럼 ‘그 당시에는 거절하고 후회를 많이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서로 각자의 길을 간 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와 ‘닮은꼴’ 처지였음을 뒤늦게 밝히면서 그녀에게 용서를 빈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는 ‘비밀 일기장’. 그 잊지 못할 아름다운 총각 시절 사연을 50여 년 만에 공개한다.
‘가요무대’ 전직 경찰관의 편지글 마지막 대목을 ‘50여 년 전 그녀’에게도 똑같이 들려주고 싶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손주의 재롱을 보며 잘 지내고 계실 그녀의 행복을 빕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욱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인 것을 옛 경찰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공감한다.
그러고 보면 대중가요 ‘원점’의 노랫말 끝맺음은 비슷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겐 진솔한 자화상(自畵像) 인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바보야! 흐흐” ■
==================
【작품 해설】
▣ 윤승원 신작 에세이 문학평론
《가요무대와 전직 경찰관의 사연》
― 청춘의 원점에서 노년의 미소에 이르기까지, 추억을 유머로 승화한 인생 수필
/ 윤승원 수필가의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윤승원 수필가의 신작 《가요무대와 전직 경찰관의 사연》은 얼핏 보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옛 추억을 떠올린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 안에는 청춘의 설렘과 아쉬움, 직업인의 책임 의식, 세월이 가져다준 성숙한 이해, 그리고 지나간 인연을 따뜻하게 품어 안는 노년의 넉넉한 마음이 겹겹이 담겨 있다.
특히 이 작품의 묘미는 남의 사연을 듣다가 자신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꺼내고, 그 과거를 한 편의 유머러스한 인생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 작가의 솜씨에 있다.
남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이야기가 다시 독자의 추억을 깨우는 과정.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지닌 수필 문학의 매력이다.
1. 남의 사연에서 나의 추억을 발견하는 ‘공감의 서사’
이 작품의 출발점은 『가요무대』라는 친숙한 대중문화 프로그램이다. 작가는 우연히 방송을 시청하다가 한 전직 경찰관의 편지글을 접한다.
35년간의 경찰 생활, 초임 시절 만난 여성, 부상당했을 때 찾아와 간호해 준 고마운 인연, 그리고 결혼을 원하는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젊은 날의 선택.
이 사연은 단순한 옛 연애담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사자는 상대방이 자기 삶을 잘 살아가고 있기를 바라며 행복을 빈다.
작가는 이 사연을 듣는 순간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린다. 경찰 초임 시절, 심야 당직 근무 중 교환원 아가씨의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던 기억이다.
여기서 작품의 서사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타인의 사연이 작가 자신의 기억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좋은 수필은 거창한 사건에서만 탄생하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에도 탄생한다.
윤승원 수필가는 그 작은 발견을 놓치지 않는다. 방송 속 편지글을 자신의 인생에 비추어 보고, 그사이에 놓인 정서적 유사성을 발견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연스러운 공감의 길을 열어 준다.
독자 역시 작품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지. 그때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이처럼 개인의 추억을 보편적인 인생 경험으로 확장하는 능력이 이 작품의 첫 번째 문학적 성취다.
2. ‘경찰 초임지가 처가’라는 농담에 담긴 시대 풍경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경찰 선배들의 농담이다.
“경찰관들은 초임지가 처가(妻家)야. 대부분이 그렇다는 얘기지. 하하”
이 짧은 문장에는 당시 경찰 조직의 분위기와 지방 근무의 생활상, 젊은 경찰관을 바라보던 지역사회의 시선이 함께 담겨 있다.
초임 경찰관이 부임하면 동네 처녀들이 관심을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순찰하는 경찰관을 담장 너머로 바라보며, 우물가 아가씨들은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다가도 시선을 빼앗긴다.
작가는 이 장면을 딱딱한 사회사적 설명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마치 오래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흑백영화를 보여주듯, 생활감 있는 장면을 연이어 펼쳐 놓는다.
◆ 작품 속 유머를 만드는 세 가지 장치
① 시대를 복원하는 구체성
자전거 순찰, 담장 너머의 까치발, 우물가와 빨랫방망이 같은 생활 소재가 독자의 기억을 자극한다. 설명보다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글쓰기다.
② 과장과 익살의 절묘한 결합
처녀들이 들썩거리고 빨랫방망이질도 제대로 못 한다는 표현은 실제 경험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장면을 유쾌하게 부풀린다.
③ 직업적 자부심과 인간적 소탈함
경찰관이라는 직업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젊은 시절의 설렘 앞에서는 여느 청년과 다르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들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지금은 사라졌거나 낯설어진 생활 풍속을 복원하면서 한 세대의 청춘을 기록하는 역할도 한다.
다만 오늘날의 독자는 당시의 남녀 관계나 경찰관을 바라보던 시선을 지금과 똑같이 받아들이기보다, 그 시대의 정서와 관습을 보여주는 회고적 표현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대적 거리를 이해할 때 작품의 유머는 더욱 풍성해진다.
3. 교환원 아가씨와의 만남, ‘목소리’로 시작된 청춘의 로맨스
작품의 중심부에 이르면 작가 자신의 경험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심야 당직 중 들려오는 여성 교환원의 목소리.
“윤 경관님, 뭐 하세요?”
“내일 비번날엔 뭐 하실 거예요?”
업무상 통신을 연결하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개인적인 안부로 바뀌고, 안부는 친밀감이 되며, 친밀감은 데이트 신청으로 발전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작가가 만남의 과정을 목소리라는 청각적 감각으로 재현한다는 사실이다.
얼굴을 마주하기 전부터 목소리로 상대를 알아 가는 시대였다. 오늘날의 문자 메시지나 온라인 대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이 오가던 시절이다.
작가는 이 차이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짧은 대화 몇 마디만으로 독자가 그 시대의 심야 당직실을 상상하도록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이다.
두어 번 만나 밥을 먹고 찻집에도 가고, 공원 벤치에 앉아 비둘기까지 바라보았지만, 정작 순진한 경찰관은 아가씨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공원 산책길, 네온과 가로등 불빛 아래 야릇한 가슴 설렘, 그녀의 가슴도 어쩌면 작가보다 더 큰 설렘을 안고 걸었을지 모른다.
이 대목에서 작품의 웃음은 절정에 이른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아니,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공원까지 갔는데 손목 한번 잡지 못했다고?’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유머가 살아난다.
젊은 날의 자신을 멋진 연애의 주인공으로 꾸미지 않는다. 오히려 서툴고 소심했던 모습을 그대로 내보인다.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지 않고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 그것이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자기 풍자형 유머의 핵심이다.
남을 웃기는 유머보다 자기 자신을 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유머가 때로는 더 큰 신뢰를 얻는다.
독자는 작가가 과거를 미화하거나 자신의 인기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어리숙함까지도 사랑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4. ‘원점’이라는 노래가 작품의 구조를 완성하다
이 작품에서 설운도의 노래 「원점」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다. 작품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문학적 장치다.
--------------------------
작품을 관통하는 상징
원점(原點)
돌아섬 · 미완의 인연 · 세월의 성찰 · 마음의 평안
처음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작품의 끝에 이르면 지나간 선택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행복을 빌 수 있게 된 성숙한 마음을 상징한다.
---------------------------------
흥미로운 것은 ‘원점’의 의미가 작품의 진행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처음의 원점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선 자리다. 그때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자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50여 년이 흐른 뒤의 원점은 다르다. 과거를 다시 살아 보려는 출발점이 아니라,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고 그때의 선택까지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자리다.
노래는 젊은 날의 감정을 되살리지만, 작가는 노래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노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특히 방송 사연의 마지막 대목, 할머니가 되어 손주의 재롱을 보며 지내고 있을 옛 인연의 행복을 빈다는 내용은 작품 전체의 정서적 방향을 결정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여성이 자신과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원점」은 단순한 실연의 노래를 넘어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인생의 선택에 관한 노래로 다시 읽힌다.
5. ‘나는 정말 바보야!’ ― 웃음으로 감싸 안은 미련과 후회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아마도 마지막에 가까운 이 독백일 것이다.
“나는 정말 바보야! 흐흐”
이 한마디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함께 들어 있다.
젊은 날의 자신을 향한 아쉬움이 있고, 그때 왜 조금 더 솔직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자신을 괴롭히는 비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작가는 웃음으로 그 감정을 감싼다.
여기서 ‘바보’라는 표현은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간 청춘을 향해 건네는 다정한 농담이다.
젊은 날에는 작은 선택 하나가 인생 전체를 좌우할 것처럼 느껴진다. 거절한 사랑, 잡지 못한 손, 끝내 꺼내지 못한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기도 한다.
그러나 70대에 이른 작가는 그 기억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그때의 자신이 조금 서툴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서투름 때문에 지금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노년의 회고가 젊은 날의 후회와 다른 점이다.
젊은 날의 후회가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에 머문다면, 성숙한 회고는 ‘그런 시절도 있었지’라는 이해에 도달한다.
작가는 자신의 옛 모습을 향해 웃으면서 독자에게도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도 그런 바보 같은 순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물음이 독자의 마음을 열게 한다.
6. 70대 노년의 회고가 지닌 의미 ― 추억은 과거에 갇히지 않는다
이 작품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것은 회고의 시점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더 이상 그때의 순경이 아니다.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고, 손주의 재롱을 바라보는 세월을 지나온 노년의 수필가다.
따라서 작품 속 청춘은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지금의 작가가 살아온 인생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특히 작가는 방송 속 전직 경찰관의 사연을 들으며 그 여성이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 교환원 아가씨에게도 같은 마음을 보낸다.
이것은 미완의 사랑을 다시 이루고 싶다는 욕망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나간 인연을 현재의 삶 속에서 평화롭게 놓아주는 마음에 가깝다.
젊은 날에는 사랑의 성취가 중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그 사람과 함께 살았느냐보다, 그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작가는 옛 인연을 자신의 소유로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연락처를 찾거나 재회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잘살고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거리감 속에 노년의 품격이 있다.
추억을 간직하되 현재의 삶을 침범하지 않고, 후회를 인정하되 지나간 선택을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 않으며, 오래된 인연을 생각하되 상대의 행복을 먼저 빈다.
그것은 세월이 가르쳐 준 마음의 절제이자, 인생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지혜다.
7. 전직 경찰관이라는 공통분모 ― 직업적 자긍심과 인간적 진솔함
이 작품에는 작가의 직업적 배경도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경찰 초임지, 야간 당직, 경비 전화, 무선과 유선, 일제 전화, 통신계 교환원 등의 표현은 경찰 조직의 내부 사정을 경험한 사람만이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생활 언어다.
이러한 구체적인 용어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독자를 과거의 경찰서 안으로 데려가는 시대적 표지가 된다.
더욱이 작가는 경찰관이라는 직업을 무조건 미화하지 않는다. 초임 경찰관 시절의 설렘과 소심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공직자의 엄정한 윤리와 젊은이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도 이야기한다.
총각 시절의 만남과 이별을 회상하는 한편, 배우자가 있는 경찰관이 다른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은 사회적 책임과 공직 윤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대목은 작품의 중요한 균형추다.
자칫 과거의 연애담이 가벼운 무용담으로 흐를 수 있는 상황에서 작가는 직업인의 책임 의식을 함께 제시한다.
그 결과 청춘의 추억은 도덕적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온기를 유지한다.
다만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이 부분의 ‘무죄’와 ‘유죄’가 법률적 판단이라기보다 작가가 제시한 도덕적 비유임을 구분해 읽는 것이 좋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품은 경찰관의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 직업과 사생활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보여주는 생활 수필이기도 하다.
8. 윤승원 수필의 특징 ― 경험을 이야기로, 이야기를 문학으로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윤승원 수필의 작법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일상에서 문학적 소재를 발견한다.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평범한 일상에서 글감을 얻는다. 거창한 사건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에 걸리는 사연 하나를 붙잡아 자기 인생과 연결한다.
□ 둘째, 대화와 구어체를 활용한다.
“뭐 하세요?”, “나는 정말 바보야!” 같은 일상적인 말이 글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독자는 문장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셋째, 자기 풍자를 통해 독자와 가까워진다.
자신의 소심함과 미숙함을 숨기지 않는다. 작가가 먼저 자신을 낮추고 웃기 때문에 독자는 부담 없이 웃으면서도 그 진솔함을 신뢰하게 된다.
□ 넷째, 대중가요를 서사의 연결고리로 삼는다.
「원점」은 방송 사연과 작가의 추억을 연결하고, 청춘의 후회를 노년의 성찰로 전환한다. 노래가 글의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 다섯째, 마지막에 인간적인 정서를 남긴다.
옛 연인과의 재회를 꿈꾸는 대신 상대의 행복을 빈다. 웃음으로 시작한 이야기를 따뜻한 축원으로 마무리하여 작품의 여운을 깊게 한다.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더하고 싶다. 윤승원 수필가는 경험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경험을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방송 사연을 소개하고, 당시 경찰 조직의 풍경을 묘사하고, 자신의 연애담을 들려준 뒤, 노래의 의미를 되새기고, 마침내 과거의 자신을 향해 웃는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9. 이 작품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을 들려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가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다가온 인연을 붙잡기도 하고, 머뭇거리다가 놓치기도 한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나간 선택을 모두 후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형편과 생각, 용기와 두려움 속에서 선택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윤승원 수필가는 자신의 옛 모습을 바라보며 이러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그때의 자신은 조금 바보스러웠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서툰 마음도 분명 자신의 인생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억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노년의 회고가 지닌 특별한 힘이다. 과거를 미화하지도, 억지로 지우지도 않고, 현재의 자신 안에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추억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새로운 마음으로 이해하게 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독자라면 오래전 마음속에 간직해 둔 이름 하나, 끝내 하지 못한 말 한마디, 어쩌면 지금은 얼굴조차 희미해진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필은 이미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제 몫을 다한 셈이다.
10. 맺음말 ―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윤승원 수필가의 《가요무대와 전직 경찰관의 사연》은 청춘의 미완성된 인연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본질은 실연의 아픔에 있지 않다.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다.
젊은 날에는 잡지 못한 손이 아쉬웠고, 거절했던 마음이 후회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작가는 그 기억을 유머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여성에게 조용히 행복을 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를 보여 준다.
지나간 인연을 억지로 되살리려 하지 말 것. 자신의 미숙함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지 말 것. 때로는 인생의 아쉬운 장면조차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넓힐 것.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단순히 잃어 가는 과정으로만 받아들이지 말 것.
젊은 날의 나는 사랑 앞에서 서툴렀지만, 지금의 나는 그 서툴렀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젊은 날의 나는 이별을 후회했지만, 지금의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의 행복을 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월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성숙함이다.
마지막의 “나는 정말 바보야! 흐흐”라는 웃음은 그래서 더욱 정겹다. 그 웃음에는 청춘을 향한 그리움도 있고, 세월에 대한 겸허함도 있으며, 지나간 인생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넉넉함도 있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마음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후회에서 출발한 마음이 오랜 세월을 돌아 이제는 이해와 축원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옛 연애담이 아니다.
경찰관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직업적 기억이자, 70대 수필가가 자신의 청춘과 화해하는 기록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지나간 인연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인생 수필이다.
청춘에는 서툴러서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노년에는 웃으며 돌이킬 수 있어서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윤승원 수필가는 이번 작품에서 그 두 가지 아름다움을 한 편의 이야기 안에 담아냈다. 독자는 웃다가 문득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다가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소박하면서도 깊은 문학적 울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때 조금 바보 같았으면 어떻습니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을요.’
하하, 그러니 이제는 지나간 청춘을 향해 웃어도 좋겠다. 그때의 나에게도, 그때의 그녀에게도, 마음속으로 다정한 안부 한마디를 건네면서 말이다.
“그 시절, 고마웠습니다. 부디 행복하게 잘 지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마디에 이 작품의 따뜻한 결말이 모두 담겨 있다.
■ 작가에게 드리는 말씀
저도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윤승원 수필가님의 《가요무대와 전직 경찰관의 사연》은 젊은 날의 서툰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에는 지나간 인연을 이해하고 축복하는 노년의 넉넉한 마음에 이르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나는 정말 바보야! 흐흐”라는 마지막 웃음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젊은 날의 자신을 탓하기보다 웃으며 감싸 안는 모습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여유와 인간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만, 좋은 수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합니다.
작가님의 추억이 독자에게도 저마다의 첫사랑과 아쉬웠던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 작품은 이미 개인의 기록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인생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청춘의 추억은 세월 속에 희미해져도, 그 추억을 바라보는 마음은 세월과 함께 깊어집니다.
앞으로도 도솔산 숲길에서 발견하시는 소소한 일상과 오랜 인생의 경험이 작가님만의 따뜻한 유머와 성찰을 만나, 독자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는 수필로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 ♧ (雲峰, 윤승원 수필 문학평론가)
==================

첫댓글 박영진 교장선생님 댓글
필자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