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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미국 여성불교
카나바로 백작부인
미국 최초 여성 불자되다
제니 김 (본지 취재기자)
‘상가미타 비구니’가 된 백작부인:
그녀는 누구인가 카나바로 백작부인으로 알려진 미란다 마리아 반타 (Miranda Maria Banta, 1849-1933)의 삶은 바다를 넘어, 신념을 넘어, 사회 각계각층을 아우른 여정으로 흥미와 회복력, 그리고 다양한 변화의 장으로 짜여진 한 편의 서사시이다. 미국에서의 소박한 시작에서부터 영성과 사회적 명성에 이르기까지, 마리아 반타의 여정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세계적 변화와 문화적 만남을 상징한다.
1897년 미국땅에서 불교로 개종한 최초의 여성으로, 상가미타 비구니(당시에는 상가미타 수녀 또는 자매로 불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스리랑카 최초의 불교 여자 고등학교를 운영할 계획이었으며, 스리랑카에 상가미타 여학교를 설립하여 수녀원식 불교 교육을 실시하는 데 기여했지만, 내부갈등과 그녀의 사임으로 학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러 종교적 변화를 거치며, 미국내 불교, 바하이교, 힌두교 그리고 밀교 신앙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생과 초기 생애
카나바로 백작 부인, 미란다 데 소자 카나바로(Miranda de Souza Canavarro)로 불린 마리아 반타는 귀족 계층과는 거리가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1849년 텍사스 동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갔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정에서 자란 그녀의 유년 시절과 가족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진취적인 정신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음을 보였다. 이러한 자질들은 인생 여정 곳곳에서 큰 힘이 되었으며, 미국에 있는 동안 그녀는 종종 마리(Marie)로 알려졌다.
결혼과 귀족의 길
마리아 반타의 첫 결혼은 1867년, 17세 되던 해에 우체국장이자 보험 설계사, 사업가인 머릿가죽 사냥꾼이었던 새뮤얼 클렉혼 베이츠 (1841-1891)와 결혼하여 딸 하나와 두 아들을 두었다. 그녀는 이를 통해 호놀룰루의 국제적인 사회를 접하게 되었다. 테사 바르톨로메우스*는 새뮤얼이 학대적인 남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그녀가 그를 떠났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호놀룰루에서 그녀는 1882년 포르투갈 외교관이자 귀족인 안토니오 카나바로 (1849-1914)를 만나게 되었다.
두번 째 결혼
안토니오 카나바로는 하와이 왕국(당시 샌드위치 제도)의 포르투갈 대사로 활동하며, 변화의 시기였던 호놀룰루 사회의 중심에 있었다. 1883년 8월 마리아는 하와이 주재 포르투갈 대사와 결혼을 하였고 11월에 자신을 “미란다 아 데 소자 카나바로”라 불렀다. 마리아는 안토니오와 결혼하며 카나바로 백작부인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이는 그녀의 신분을 한 단계 높였을 뿐 아니라 국제 외교와 문화 교류의 세계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의 역할을 통해 마리아는 상류층과 다양한 문화적 관계를 쌓으며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하와이에서의 외교생활
하와이에서 신지학자들과 교류하며, 서부 해안 상류 사회의 한 인물이었던 그녀의 불교 개종은 당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지아주 매리언 카운티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가제트 어필(Gazette Appeal)조차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여성의 고양을 위해 극동에서 수년간 헌신하고자 하는 이 개종자는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미국인 미란다 드 카나바로 백작부인입니다. 그녀는, 주례 사제가 선언했듯이, 자신이 선택한 삶을 따르기 위해 가족과 재산, 그리고 작위를 모두 포기했습니다.”
포르투갈 대사의 부인으로서, 카나바로 백작부인은 하와이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 시기 하와이는 원주민 왕족, 미국 상인, 유럽 외교관, 아시아 이주민 등이 어우러진 독특한 사회였다. 그녀는 공식 행사, 사교 모임, 자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공동체 사이의 다리를 놓았다. 백작부인은 품위와 매력, 그리고 외교 사회의 예기치 못한 어려운 상황을 능숙하게 넘나드는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하와이는 당시 주권 왕국에서 미국 영토로의 전환이라는 격동의 시기였지만, 그녀는 사회·자선 활동을 지속하며 아동, 교육, 문화 보존 등에 기여하였다.
영적 변화의 시작 :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를 만나다
1896년 3월, 샌프란시스코 외곽 오클랜드에서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가이자 포교사인 헤와비타네 다르마팔라는 미국 강연 순회 중 카나바로 백작부인을 만난다. 다르마팔라는 영적인 양식을 구하던 그녀의 모습을 단호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보았다. 바르톨로메우스*에 따르면, 다르마팔라는 그녀를 만난 지 4개월 후, 스리랑카로 가서 불교 “비구니” 종단을 설립하고, 스리랑카 최초의 불교 여자 고등학교인 상가미타(Sanghamitta)의 전임 교장이 되어 줄 것을 제안했다.
1897년 8월 30일 저녁, 뉴욕 5번가 뉴센추리 홀에서 다르마팔라는 카나바로 백작부인에게 불교 오계(五戒, pansil)를 설법, 수계를 주었고 그녀는 미국 땅에서 불교로 개종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백작부인은 여성 수계가 사라진지 약 7세기 후, 다르마팔라가 스리랑카에 창설하려던 새로운 “비구니” 종단의 첫 번째 비구니(서양에서는 수녀로 불림)가 되었다. 그녀는 고대 선교사이자 자신이 운영하려던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명칭인 “상가미타 자매”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탐구 끝에 마리아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불교에 매료되어, 1897년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제자로서 불교로 개종했고, 출가하여 승려명이었던 ‘시스터 상가미타(Sister Sanghamitta*)’로 불리게 되었다. 그후 이 이름으로 실론 섬으로 이주했다. 그녀의 개종은 서양 여성으로서 불교의 수도 생활을 받아들인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백작 부인이 극동으로 가계된 계기
스리랑카에서 돌아와 미국 시카고에 잠시 방문중이던 백작부인의 근황을 소개한 글을 보면, “호놀룰루에서 카나바로 각하의 아내로 알려졌던 상가미타 수녀는 집을 포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포기한 것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아닌 사교 생활이었다. 남편 백작과는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으나, 서로 서신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세 아들과 딸은 흩어져 있었는데, 외동딸은 성공회 수도회에 입회. 아들 중 한 명은 캘리포니아의 광산 엔지니어, 다른 한 명은 서던 퍼시픽 철도에 근무하고 있다. 세 번째 아들은 두 번째 남편인 백작의 외동으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그녀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는 현재 호놀룰루의 푼하호 대학에 재학 중이다. 카나바로 백작은 포르투갈 외교부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당시의 가족관계를 전했다.
백작부인은 막내아들이 대학에 진학하자 어머니의 삶은 사회적 형식주의로 전락했고, 사교 생활의 공허함을 느낀 그녀는 세상과 인류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었다. 집에서 자선 활동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의 제약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 사상의 요람인 극동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왜 불교 승려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상가미타 비구니’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불교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교 신자가 되었을 때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앞으로도 계속 기독교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기독교 신앙은 더욱 넓어졌고, 신앙심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부처님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정신은 같습니다.”
상가미타 이름의 전승
19세기 말의 ‘상가미타 비구니(상가미타 자매)’는 실론 불교 신자들에게는 매우 신성한 이름 ‘상가미타’를 부여받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 고대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는 상가미타는 기원전 3세기 불교 황제 아쇼카의 딸이다. 인도 각지에 암각화를 새기도록 명령한 것으로 유명한 아쇼카왕은 디아도키아 왕국, 특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시리아의 안티오크에 불교 포교사를 파견했고, 갠지스 강 계곡에서 최초의 종교 의회를 소집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불교로 개종하여 아쇼카왕에게 자신들의 섬에 종교 스승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미타는 종교 생활을 시작하여 실론 섬에 정착했다.. 실론에 도착한 후 상가미타는 스리랑카 여성 최초로 비구니로 출가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비구니 승가를 공식적으로 창립했다. 이는 여성의 영적 참여에 중대한 전환점이었으며, 여성들에게 불교적 수도·교육·봉사에 헌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서 상가미타는 테라(즉, 스승)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고, 버어마와 시암(지금의 태국)으로 포교사들을 파견하는 중심지를 만들었다. 카나바로 백작부인은 이 불교 성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는데, 그녀가 상가미타 성인의 정신으로 같은 종류의 일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불교 승려이자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
미국 백작부인이 어떻게 불교 승려가 되어 스리랑카에 페미니즘을 확산시켰는가
토마스 A 트위드*에 따르면, 백작부인은 개종이라는 행위 자체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엄격한 기독교적 분위기였던 세기말 미국에서는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거의 잊혀졌지만, 당시 그녀는 불교, 바하이교, 힌두교, 그리고 밀교 전반의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백작부인은 3년이라는 짧은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에 미친 영향은 훨씬 더 컸다. 상가미타 여학교는 다르마팔라가 포스터 레인에 부활시킨 남녀공학 마하보디 토착 학교의 분교인 ‘스리 상가미타 발리카 비디얄라야(Sri Sangamitta Balika Vidyalaya)’, ‘펀치 보렐라’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불교 비구니의 모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다사 실 마타스(Dasa Sil Mathas)’ 교단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그들의 복장조차도 백작부인의 원래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상가미타 여학교(Convent)
상가미타 여학교는 짧지만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91년 여성 교육 협회에 의해 설립된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은 케이트 피켓이라는 호주 여성으로 당시 익사했으며, 지역 교사였던 루이자 로버츠는 독일계 미국인 마리 무사에우스 히긴스가 도착할 때까지 임시 교장으로 활동했다. 1893년, 히긴스는 상가미타 여학교를 떠나 무사에우스 칼리지(Musaeus College)라는 자신의 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케이트 피켓의 어머니 엘리스가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백작부인이 도착하기 직전 호주로 돌아왔다.
다르마팔라와 백작부인은 로마 가톨릭 수녀원 학교와 같은 방식으로 상가미타(Sanghamitta) 학교를 설립하고, 비구니들이 여학생들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학교는 기존 위치인 티치본 홀(Tichbourne Hall)에서 “수녀원”인 상가밋타 우파시카라마야(Sanghamitta Upasikaramaya)와 같은 위치로 이전했다.. 다르마팔라와 백작부인은 달리 레인(Darley Lane, 현재 포스터 레인)의 1헥타르 규모의 정원 가운데 자리 잡은 단층 건물인 건터 하우스(Gunter House)를 선택하고.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는 이 건물을 스리랑카 루피 2만 5천 루피( 2010년 현재 가치로 3천만 루피)에 매입했다.
수도원, 학교, 그리고 고아원이 곧 문을 열었고, 개원식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학교에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스스로를 원장 수녀라고 칭했던 백작부인은 아이들에게 노나 암마(또는 마담 모친)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마딘나 비구니(시빌 라브루이라는 부르주아 여성)가 집안을 돌보았고, 여러 명의 싱할라족 “비구니”가 교직원을 보충했다.
1898년 중반, 보스턴 엘리엇 병원의 간호사인 캐서린 시어러가 그녀와 합류하여 “수녀원장” 파드마바티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백작부인은 시어러가 자신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해 주기를 기대했고, 자신은 마하보디 협회 활동에 바빴다.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더 깊은 태도 차이를 드러냈다. 바르톨로메우스*에 따르면, 백작부인은 시어러를 “몽상가’로 여겼지만, 불교 비구니에게 기대되는 규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뜻과는 달리, 시어러는 다르마팔라와 함께 캘커타로 갔고, 어느 시점에는 그를 유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어러는 건터 하우스를 떠나 스스로 수도원을 세웠다. 이는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상가미타 수녀원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카나바로 백작부인이 수녀원 원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들어온 이후 여학교(수녀원)는 쇠퇴를 하였다. 다르마팔라는 계속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분교의 현황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19년 스리랑카 최초 불교여자대학 ‘상가미타 여자 칼리지’ 스리 상가미타 발리카 비디얄라야(Sri Sangamitta Balika Vidyalaya)가 설립되었는데 ‘상가미타 여학교’의 정신이 모태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세번 째 결혼(동반 결혼)
1900년 11월, 상가미타 수녀원 파동 이후 백작부인은 미국으로 돌아와 동부 해안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불교와 동양 전반에 대해 강의했고, 그녀의 강의 중 몇몇은 출판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부인은 동료 신지학자이자 변리사인 마이런 H. 펠프스와 동반 결혼을 하였다. 두 사람은 남매처럼 행세하며 스리랑카로 떠났으며, 여전히 자신을 불교 “비구니(수녀)"라고 소개했다.
후기 생애와 종교적 변화
1902년 12월, 백작부인은 펠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아카로 가서 바하이 지도자 압바스 에펜디를 만났다. 백작부인은 압바스의 여동생 베히아 카눔을 인터뷰했고, 그녀는 펠프스의 저서 『압바스 에펜디의 삶과 가르침』에 들어갈 전기 자료를 제공했다. 1903년 말, 그녀는 여전히 “상가미타 자매(비구니)”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바하이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선언했다.
2년 후, 백작부인과 펠프스는 영향력 있는 힌두교 부흥 운동가이자 현대화 운동가인 폰남발람 라마나탄과 그의 호주 비서 릴리 해리슨을 초대했다. 릴리 해리슨은 후에 라마나탄의 아내가 되어 릴라와티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라마나탄의 힌두교에 대한 지적인 관점은 펠프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908년경 펠프스는 자신을 힌두교도로 여겼다. 펠프스는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카운테스 성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
거의 파산 직전이었던 백작부인은 듀엘 스페리와의 따뜻한 결혼 생활 (네번 째 결혼)을 위해 버지니아주 블랙스톤의 한 농장으로 이주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가장 오랜 연애 관계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강의를 했지만, 글쓰기에 집중했으며 여러 권의 소설과 자서전 『극동에 대한 통찰』(Insight into the Far East)을 썼다. 1922년, 백작부인은 하와이에서 돌아와 로스앤젤레스 교외 글렌데일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와미 파라마난다가 인근 라 크레센타에 세운 아난다 아쉬라마로 향했다. 카나바로 백작부인, 마리아 반타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베단타 힌두교를 받아들였다. 1933년 7월 25일 글렌데일에서 세상을 떠났다.
백작부인의 유산과 영향
그녀의 유산은 미국 동양 종교의 미래뿐만 아니라, 1849년 골드러시 당시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중국인들과 함께 이미 미국에 전해진 불교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작부인은 다른 유형의 불교도를 대표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본보기가 스리랑카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에 짓눌려 있던 당시, 여성은 성적 장난감이나 출산 기계로 여겨졌다.
바르톨로메우스*에 따르면, “백작부인과 그녀의 '자매들'은 출가자가 되기로 선택함으로써 독실한 불교 여성에 대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그들은 실론 섬의 불교 여성들에게 출가가 존경받는 선택이 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여성의 깨달음 능력과 여성 아라한의 존재를 강조했지만, 이후 경전에 추가된 내용들은 여성의 신체가 법(Dhamma)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리랑카 불교 전통에는 7세기 동안 여성 승가가 없었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정신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을 강화했고, 교리로 자리 잡았다.
카나바로 백작부인의 생전 활동은 다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외교관의 아내와 사교계 인사로서 하와이에서 문화 간 이해 증진에 기여했고, 스리랑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비구니 승단 부활의 첫 비구니로서 자리매김, 영성을 추구하는 불교 수도자로서 동양 철학에 깊이 천착하기를 원하는 서양인, 특히 여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마무리
기독교인 마리아 반타에서 카나바로 백작부인, 그리고 비구니 상가미타에 이르는 여정은 문화적 만남, 개인적 변화, 영적 염원의 성취에 이르는 놀라운 이야기다. 3년이라는 짧은 출가자의 생활, 기독교적 서구문화에서 성장하고 이미 결혼하여 자식을 둔 여성이 비구니계를 수지하며 영적 활동과 동시에 불교확산을 위해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은 대륙, 계층, 신념체계를 넘나들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뿌리를 넘어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비록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본보기는 경계를 넘어 진정성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등불이 될 것이다.
(백작부인의 스승 다르마팔라는 힌두교로 개종한 제자가 숨을 거둔해(1933)에 정식으로 출가를 하여 비구계를 받고 그해 말에 입적한다.)
*다르마팔라(1864-1933)의 미국방문 : 1893년 다르마팔라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 의회에 “남방 불교” 대표로 초대받았다. 당시 남방 불교는 테라바다 불교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힌두교인인 스와미 비베카난다를 만나 매우 친하게 지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처럼 그는 의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30대 초반에 그는 이미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이후 40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며 강연을 하고 비하라(사찰)를 설립했다. 동시에 그는 실론 섬(스리랑카)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인도에 사원과 비하라를 건립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 Bodhi Society, 1891)를 설립하여, 사원 재건 운동을 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신 사르나트(녹야원)에 있는 사원과 보드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템플(Maha Bodhi Temple)이었다. 당시 실론과 인도는 영국 속령이었으며 아직 독립국가가 되기 이전이다. 다르마팔라는 신지학회를 창설한 헨리 스틸 올콧,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함께 싱할라 불교의 주요 개혁가이자 부흥 운동가였으며, 불교의 서구 전파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B. R. 암베드카르보다 반세기 앞서, 타밀족을 포함한 남인도 달리트 계층의 불교 개종 운동을 촉진했다. 말년에는 스리 데바미타 다르마팔라라는 이름의 비구로 1933년 사르나트에서 출가하였고, 그 해 12월 사르나트에서 6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재 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
* 바르톨로메우스(1958-2001): 종교학 교수이자 작가, ‘보리수 아래의 여성들(Women Under the Bo Tree’)’
* 토마스 트위드(1844-1912): 종교학 교수이자 작가, ‘불교와 미국의 만남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 참고자료: 1. Postings by Ruth Fuller(1892-1967), Alan Watts
2. Reprinted from Tricycle, original from Roar Media: Moonesinghe, Vinod. “How an American countess became a Buddhist nun and helped spread feminism in Sri Lanka”
3. Tricycle and Wikipedia; Life of Sangamitta, Anagerika Dharmapala, Maha Bodhi Society.
*백작부인의 저서들 : 카나바로 백작부인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극동에 대한 통찰》(1925), 《독난초》(1930), 《아즈텍 족장》(1931), 《깨진 꽃병》(193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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