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경 : 시 113:1-9절
제 목 :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일 시 : 2023. 6. 14.
시편 113:1-9/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1. 시편 113편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는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편 111-112편과 함께 할렐 시입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겸손과 낮아지심입니다. 빌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함과 낮아지심이 우리의 받은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그렇다면 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까?
본 시편의 말씀이 권고하는 찬양을 육하원칙(六何原則)에 근거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누가 찬양해야 합니까?
1절을 보시면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이란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을 뜻할 수도 있으나(시134:1), 보다 넓게는 여호와께 예배 드리는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표현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그들의 의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특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종들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표현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의 인격과 성품과 능력 등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음받았으나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그분의 영광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찬양하라는 권고가 반복되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라는 의도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2) 언제 찬양해야 합니까?
2절을 보시면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라고 하셨기 때문에 언제든지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특정한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언제든지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피조물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대상16:36/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상29:10-13/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모든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영원히 송축을 받으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과 주권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송축을 받으셔야 할만큼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3) 어디에서 찬양해야 합니까?
3절을 보시면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찬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살고 있고 머물러 있는 공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고 거처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이 유대민족이라는 특정 집단에게만 찬양받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행사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고 또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말1: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4) 무엇을 찬양해야 합니까?
4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라고 했습니다. 4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의 높으심에 대한 노래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찬란한 영광을 찬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불경건한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왜 그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는가? 하는 책망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에 등한히 하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5) 어떻게 찬양해야 합니까?
본 시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른 성경구절을 보시면 사42:11/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높여서 즐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6)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4-9절을 보시면 거기에 대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라고 했습니다. 4-9절까지는 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세상을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4-6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라고 했습니다. 이 수사의문문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분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대답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에 하나님과 비교할 만한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유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 위에 초월해 계신 영광의 하나님이 연약하고 미천한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아버지 같은 관심으로 그들을 돌보시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한 순간이라도 돌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즉시로 혼란과 무질서, 범죄와 악으로 파멸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을 세밀하게 살피시고 돌보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먹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②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백성의 지도자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7-8절에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라고 했습니다.
먼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허약한, 파리한, 가난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멸시받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부당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출23:3).
그리고 진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는 흙이나 먼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비천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땅과 티끌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사 47:1/처녀 딸 바벧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비천하고 가난하여 땅의 티끌과 같은 자들을 일으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궁핍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비욘은 부족한, 가난한 등의 뜻으로서 앞에서 말한 가난한 자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리고 거름 무더기에 해당하는 아쉐포트는 싹 쓸어 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솨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잿더미, 쓰레기 더미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그러했으며,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사건들을 접했을 때 우리는 이를 단순히 우연으로 돌려 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③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시면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한나의 기도를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삼상2:5).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무자(無子)함을 흔히 수치 혹은 심지어는 하나님의 저주로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거하게 하사 라고 했는데 집이란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합니다.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부귀영화나 쾌락보다 자손을 갖는 것이 더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과 같이 잉태치 못한 여자를 어머니가 되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어머니가 아니라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즐거움이란 기쁨, 특히(종교적인)환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냥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는 복되고 존귀한 어머니가 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창21:5-7/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고 했으며, 창25:21/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라고 했으며, 창30:22-23/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7-9절까지는 그 당시의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외면 당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버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와서 만나 주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이 우리 각자에게 해당되는 말씀도 있고 그렇지 않는 말씀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시에서 말씀하시는 방법대로 하나님을 언제 어디에 있든지 큰 소리로 그리고 즐겁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