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우리가 관광상품으로 가는 고택 오리 이원익 대감에 대해 몇가지를 알아본다.
오리대감은 전주이씨 이방원의 아드님인 군의 4대 손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음
처음 선조때 영의정을 이어 광해군 인조임금님등 5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대단한 분이다.
그 와중에는 임진왜란 때 빼앗긴 평양성을 다시 찾는데 공헌
인목대비 폐위시키는 겻을 반대하다 유배도 가셨음.
그후 폐위된 연산군이 죽음만은 면하게함
영의정 5 번을 했는데도 비 새는 초가에서 곤궁하게 살아 인조가 내린 집이다.
또한 효종께(?)충현 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리셨음
이가을 이 고댁을 방문한것이 과연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가을바람에 실려
내 영혼에 스며든다.
관감당(觀感堂) 충현관「이원익초상」을 모신 전시실등
'오리영우'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종택(宗宅)이 보존되어 있어 옛 종가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이 어른은 나라에서 내린 불천위제사로 영원히 기제사를지낸다.
큰별님 사진입니다. 감사해요
조촐하게 드러앉은 고택으로 고즈녁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건물 안은 꽤나 넒으며 숲도있어 산에 난 작은 오솔길처럼 단풍이 예쁘게 물이 들어 있으며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 주렁 있었다.
서원터의 주줏돌도 남아있었으며
온갖 생활상의 물건들이 있어 당시에 풍습과 문화를 알수 있다.
난 이 자그마한 창문을 보앗다.
내 집에도 이 창문이 있었다 .(집은 작고 초라햇지만 )
창문을 열면 푸른 하늘 흰구름을 보며 무지개빛 꿈을 꾸었고
밤이면 출렁이는 달빛 물결에 솔베이지송 음률을 날려 한의 정서를 만끽하는 낭만의 세월을 보내기도 한 창문이다.
쟈연은 산 능선, 구름, 흐르는 물, 꽃잎, 과일의 선, 오솔길 풀잎 포물선 그리고 요즘은 강을 보면서 갈대꽃이
흔들리며 만들어 내는 곡선으로 지극히 정적이고 동적인 가을의 선 자체가 세상의 아름다움이라면
이 창문의 작고 가는 나무들 막대가 서로 교차되면서 창출된 질서인 인공의 미를 볼 수있지 아니한가
야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작은 창문이다.
다듬이 돌이다.
그런데 이 돌 옆에는 단순하지만 문양이 다 있다. 조선 여인들의 미를 추구하는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홍두깨가 안보인다. 청백리로 사셔서 그런가 내가 못 본것이겟지.
우리 엄마와 할머니가 비단을 며칠동안 두드렸다는 홍두께 다듬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련한듯 애틋한 그리움의 소리
"토드락 토드락"
"토드락 토드락"
이 축대위에 네모나 구멍이 있어 난 물구멍치고는 너무 크다고 생각햇다.
그런데 이 청백리 대감께서 밥 지을 때 연기가 위로 올라가면 혹여 밥 못짓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아래로 낸
굴뚝이란다. 요즘 이런 고위 관리가 있엇느면 얼마나 좋을까
관감당 觀感堂 진골님 감사합니다.
인조가 내리는 뜻은 모든 관리가 이원익대감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관감당이라 지었으니 400년이 지난 지금 세월에도
얼마나 덕목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골님 감사합니다.
풍욕대 바람에 목욕을 하는것이 아니고 바람이 목욕을 한단다.
또한 400년된 측백나무아래 커다랗고 판판한 탄금대가 잇는데 이돌위에서 대감께서는 거문고를 타셧다고 한다.
주위의 풍경 학문 음악이 어루러져 하나 의 멋인 예술이 태어나는 곳인 그런 장ㅇ소다.
이 건물을 하사 받은 지 4년후에 돌아가셨다하니
나이 많을 적에 이용해셨을 것으로 학같은 마음으로 즐기신 것 같다.
충현관 전시실에는 이원익초상, 친필로 주고 받은 문서 그리고 책 등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ㆍ목가구
제기ㆍ집기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언도 얼마나 자세하게 썼는지 죽은 후 제사의 물품도 약과등은 올리지 말라는
것도 잇다
글 가운데는 84까지 사셨는데 늙어 오래 사는 고통을 적으신것을 보면 너무 오래사는 것이 축복은 아닌 모양이다.
요강
옆의 작은 요강은 시집갈때 가마속에 넣고 사용햇던 것으로
너무 작아 요강의 소변이 넘치면 어쩌나 ??? 재미있어 올린다.
언덕 같은 뒷 마당에는 대감의 부모님 형님부부묘 그리고 대감님의 묘가 있었으니
죽음 과 삶이 한 공간에 있는것은 정말 색다르나 너무나도 고택과 잘 어룰리고 현대와 과거의 같은 숨결을
마시고 있는 나 자체도 신기하게 느낀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고 또한 서로 불가불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지만
죽음이 오히려 삶보다 우리에게 더 다정하게 느낀다는 것이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진골님 감사합니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묘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이름이 똑같은
무의공 이순신장군이시며
태종의 큰아들인 양녕 대군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밑에서
옥포, 당항포 , 한산도 대첩에서 열심히 싸워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며
노량 해전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충무공을 대신해 조선 수군을 독려해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은 훌륭한 장군이었기에
1604년에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선무공신 3등에 인정된 분이다.
하지만 무덤을 보아라 목숨을 걸고 열심이 싸워 이 나라를 구한 분의 무덤치고는
얼마나 허술하고 엉성한가, 돈은 도대체 어디에 쓰고 잇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든다.
네이버 인터넷에서 퍼옴
해군에 따르면 해군이 보유한 전함(戰艦) 가운데 전투함에도 이순신호가 있고 잠수함에도 이순신호가 있다.
네이버 인터넷에서 퍼옴
전투함은 충무공의 이름을 땄고,
잠수함은 무의공의 이름을 땄다.
오철식 해군 정훈공보실장은 “잠수함 이순신은 해군들도 종종 충무공의 이름을 딴 전함으로 혼동하고 있다”
고 말했다. ( 설명 인터넷에서 퍼옴 )
400년 이순신 장군의 혼이 들어 우리나라 바다를 지키는 현대의 이순신이다.
또한 이자리에 밝히는 것은
나주 출신 무관출신인 나대용이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튼튼하고 강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을 물리친 충의 사상 열정 과학이 이루어 내어 지금 밫나는 역사를 이룩하게 한 분들
바로 무공 이순신 무의공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는 이 세분의 공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으로 이번 광명시 충현 박물관과 무의공 다녀온 후기를 마친다..
(후기를 글만 쓰면 장이 딱딱 할 것 같아 사진을 올려 설명드리나 사진을 잘 못찍어 회원님들의 사진을
빌립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사진 빌려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으시면
내리겠습니다. )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2014 10월 18일 낭만씀
첫댓글 낭만님의 후기글을 보며 늘 복습하고 있습니다
낭만선배님 지가 좋아하는것 알랑가유? ㅎㅎㅎ
글 잘 쓰는 선배님이 있어 언제나 든든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낭만님 사진에 설명까지 깃들여서 자세하게 올려주신 후기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애 쓰셨고요...덕분에 역사공부 많이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다음탐방때 뵐게요....
항상 후기~~좋은글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불참한 역탐방 낭만님 통해 공부 합니다.
나두요~~ 사진과 설명 곁들인 낭만님 후기글 잘 보고 가면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역시 훌륭하시어요.
역사탐방후 낭만님의 자세한 후기글이 훌륭한 복습의 기회가 되고 있읍니다.!감사합니다.
浪漫 친구님 글솜씨가 너무 아름답다.
그 가느련 몸매에 이런 날렵한 글 솜씨를 가졌다니 항상 건강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