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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당 (四宜堂)
기계면 덕동에 있다. 이공 강 자 대계 농재聾齋 이언괄의 현손彦适이고 향단香壇 이의주宜澍의 손자이다. 그는 아정하여 맑은 덕성과 높은 행실이 있었다. 부인은 농포農圃 충의공 忠毅公정문부文孚의 손녀이고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외종손녀이다. 국왕으로부터 일찍이 재능이 있어서 선발하려는 의논이 있었다. 공의 외척이 왕비로 있어서 권세에 의존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으려 하였기에 마침내 양좌동(良佐洞) 고향마을에서 덕동(德洞)에 은거하여 그 시내와 돌의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취하여 사의라 스스로 호를 삼았다. 정자를 지어 노년을 마쳤다. 당시에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하였다.
在杞溪面德洞 李公壃字大啓聾齋彦适玄孫 香壇宜澍孫 雅有淸德高標 夫人鄭氏農圃忠毅公文孚之孫女 宣祖大王外從孫女也 自上嘗有甄拔之矣 公戚在椒房 不欲因勢進取 遂自良佐故里 隱于德洞 樂其泉石之勝 取春夏秋冬四時之宜 因以自號 築亭以終老 時論以是偉之(김희준 옮김)
-<<迎日邑誌>> 권6 (金鎔濟, 1929)
◈사의정기(四宜亭記)
동도(東都) 경주에 명승지가 많으나 모두가 점유되어 지금은 각기 주인이 있다. 홀로 덕협(德峽)이 깊은 산 무성한 숲속에 있어서 속세와 떨어져 있다. 할아버지 처사공(四宜堂 李壃, 1621-1688)께서 거주하여 처음으로 사람들이 깃들어 살게 된 시내와 산이다.
시냇가에 공이 늘 작은 정자를 짓고 싶어 하셨는데 만년에야 비로소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1687) 공사가 반쯤 진행되어 공이 돌아가시고 10년이 지나 완공(1698)을 보았다. 정자의 이름은 사의라 했는데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으로 공이 정하신 것이다.
정자 동쪽 8-9걸음에 작은 못이 있고 서쪽엔 솔밭이 있다. 창가의 벽 아래가 모두 절로 못을 이루고 있는데 막지도 파지도 않았다.
정자 앞의 푸른 이끼 낀 바위벽은 병풍 같고 정자 뒤엔 흙이 꽃을 심기에 알맞다. 못가에서 낚시하고 마주 서 있는 솔밭 가의 작은 시냇물이 예쁘고 예뻐서 서북쪽에서 흘러 앞 시내로 들어오니 시냇물 가운데에 큰 돌이 물길을 역류시킨다. 이 돌의 모양이 거북이 형상인데 물이 이르러 머금었다가 뿜어낸다.
푸른 이끼 낀 바위벽의 좁은 언덕은 아래쪽으로 뻗어 마을 입구와 이어진다. 산 밖에서 오는 사람은 반드시 솔숲을 지나서 정자에 이르게 된다.
아! 할아버지께서는 곧고 바른 절개의 모습과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40여 년을 산과 언덕과 시내와 돌 사이에서 성정을 기르시며 이 정자를 짓는 것이 진실로 평생의 바람이셨지만 하루도 이 정자에 머물 수가 없으셨으니 자손으로 이 골짜기에 사는 사람이 이 일에 느낌이 없겠는가?
정자가 이루어진 지 10년에 한 마디의 기문도 없어서 못난 내가 삼가 전말을 남겨두어 좋은 기문을 쓰는 사람이 상고하는데 도움이 되게 한다.
경진년(1700) 월 일 못난 손자 성균관 진사 시중(時中, 1667-1738) 삼가 지음.
東都多名勝 閑者皆占之 今各有主人 獨德峽在深山茂樹中俗疎焉 跡先王父(사의정 이강, 1621-1688)處士公居之 溪山始爲人所奇 臨溪公常欲立小亭 始晩而搆(1687) 事半而公沒后十年就焉(1698) 亭名曰四宜 義取宜於四時 公所定也 亭東八九步有小塘 西松壇 臨窓壁下皆自成塘 不封不鑿 前蒼壁如屛 後負土宜花卉 塘上鈞磯 對立壇邊小澗帶娟娟 西北流入于前溪 溪中有巨石泝流 而伏狀如龜 水至帶噴焉 蒼壁夾岸成行下連洞口 自山外來者必穿松而後至亭焉 嗚呼 先王父以耿介之標潚酒之想 四十年扲養於丘山泉石之間 是亭之作 固平生之願 而不能一日居 子孫居是谷者 其無感耶 亭成十年 無一言記 不肖謹存顚末 以資善記者考 歲 庚辰(1700) 月 日 不肖孫 成均館 進士 時中 謹撰
(김희준 옮김)
사우당
사우당 원운(이헌순)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1호. 정문부의 아버지 정신(鄭愼: 문화재 안내판에는 정문부의 조부 정언각이 청송부사 재직 때 집을 지었다고 하지만, 정언각은 청송부사를 역임하지 않았다. 정언각의 아들이고 정문부의 아버지 정신은 청송도호부사로 1592년 4월에 부임하여 1593년 12월에 파직되었다. 그는 청송부사로 재직하며 임진왜란 때 청송 읍성을 방어하고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다.(선조실록, 청송군읍지(1899) )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때 길지를 일러주는 사람이 있어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정문부의 손자사위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이 집을 주었고 그의 셋째 아들 이덕삼(李德三)이 살림집으로 물려받았다. 그의 손자 이헌순(李憲淳)의 아호를 따 집의 당호를 사우정(四友亭)이라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현존하는데, 특히 안채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법을 남기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배치에서도 날개집의 T자형이긴 하나 |부분과 一부분이 분리되어 있다. 안방이 1칸이면서도 앞에 툇마루가 없고, 방의 안마당에 면한 창의 얼굴은 안동 임청각 등에서 볼 수 있는 연귀한(면과 면을 맞추려고 문짝 등의 귀 끝을 모질게 엇벤) 맞춤의 도끼별(원목을 산판에서 도끼로 제재한 것) 구조를 보이고, 대청 기둥은 모기둥이면서도 흘림을 주어 고대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의 또 하나의 특색은 건넌방이 없다는 점이다. 방 대신에 내고(內庫)가 시설되어 있고 옛날 독들이 가득하다. 이 집이 있는 지역은 옛날의 성법부곡(省法部曲)이었다. 부곡에서는 도자기를 비롯한 경공업의 제조가 활발하였다.
이웃한 죽장부곡(竹長部曲)에서는 무쇠 솥 등 비교적 중공업에 속하는 제품을 만들고, 임진왜란 때 사용한 경주성 전투의 비격진천뢰를 제작했다고 전할 정도였다고 하니, 성법부곡의 경공업과 잘 조화되던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부곡은 경주부(慶州府)에 소속되었다.
오덕동은 부곡을 관리하는 이들이 집단으로 대대로 살던 곳이며 그 가운데 사우정이 입향 시조 이래 우두머리 구실을 하고 있었고, 임진왜란 이전부터 부곡이 해체되던 시기까지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안채 |형과 분리된 一형에 사랑채가 있다. 이 건물은 근세에 중건된 것이어서 안채와 같은 학술적인 가치에는 이르지 못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우정(四友亭)
在杞溪面德洞 李公憲淳字萬式 驪州人聾齋后四宜堂壃曾孫 天資篤 厚德之志 不樂仕進 嘗構是亭於山之下水之上 手植松菊梅竹 扁其楣曰四友亭 自爲記曰
기계면 덕동에 있다. 이공 헌순(憲淳) 자 만식(萬式)은 여주인 농재(聾齋) 이언괄의 후손으로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의 손자이다. 그는 천품이 돈독하고 덕이 두터워 관직에 나아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 정자를 산 아래 물 위에 짓고 손수 솔, 국화, 매화, 대를 심고서 그 정자에 편액하기를 사우정이라 하였다. 스스로 정자 기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夫子有言曰 仁者樂山 智者樂水 吾雖仁不及樂山 智不足樂水 亦愛山水者也 於是乎 構小亭於山之中水之上 其花樹之勝 巖石之奇 眞林下別一區也
공자님이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비록 어짐이 산을 좋아할 정도는 아니고 지혜가 물을 좋아하기에 모자라지만 또한 산수를 아끼는 사람이다. 이러한 까닭에 산의 속, 물의 위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니 그 꽃과 나무의 빼어남과 바위와 돌의 기이함은 참으로 숲의 특별한 한 구역이다.
名其亭曰四友 皆取諸四時之所可宜也 蓋東君即位 瓊蘂先開 西湖梅也 傲雪之高致 堪嘉蓐收 按節 金葩先開 東籬菊也 凌霜之貞操可愛 月旅蕤賓 特出竹也 不㧞之直節足尙 歲寒窮陰 獨也靑靑 徂徠松也 後凋之淸標 獨取 是所謂 所可宜者四也
정자의 이름을 사우라 하였는데 모두 사계절의 아름다움에서 따온 것이다. 대개 봄의 신이 오면 어여쁜 꽃떨기가 먼저 피어나는데 임포(林逋)가 가꾼 서호(西湖)의 매화이다. 눈을 무릅쓰고 피는 고아한 풍치이다. 갸륵하구나! 가을 기운이여, 계절을 헤아려보면 금빛 꽃송이 먼저 피어나니 도연명(陶淵明)이 딴 동쪽 울타리 아래의 국화이다. 서리를 이겨내는 정조(貞操)를 아낄만하다. 달은 바뀌어 유빈(蕤賓, 음력5월)이니 특출한 것이 대이다. 꺾이지 않는 곧은 절개를 숭상할 만하다. 날이 차갑고 음의 기운이 차는 겨울이면 홀로 푸르고 푸르니 조래산(徂徠山)의 솔이다. 뒤에 시드는 맑은 모습을 홀로 가졌다. 이들은 이른바 아름답다고 할 네 가지이다.
*북송의 은사(隱士)인 임포(林逋)는 항주(杭州) 전당(錢塘) 사람으로,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막을 짓고는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숨어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일컬었는데, 그가 매화를 읊은 〈산원소매(山園小梅)〉 시에 “맑고 얕은 물 위에 성긴 그림자 가로 비끼고, 황혼 녘 달빛 속에 은은한 향기 떠도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명구가 나온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고 동쪽 울타리 아래의 국화를 딴다.(悠然見南山 採菊東籬下)’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에 “저 기수 가 언덕을 보니, 푸른 대가 아름답고 무성하도다. 문채 빛나는 우리 님이여, 짐승의 골각을 끊고 갈듯, 옥석을 쪼고 갈듯 하도다.[瞻彼淇奧 綠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본디 위 무공(衛武公)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칭찬하여 노래한 것으로, 전하여 학문과 덕행을 절차탁마하는 뜻으로 쓰임.
*조래(徂徠): 중국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동량(棟梁)이 될 재목이 자라는 큰 산의 뜻으로 쓰인다. 《시경》 〈비궁(閟宮)〉에 “조래산의 소나무와 신보산의 잣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재고 맞추어서, 커다란 재목 만드니 웅장한 궁궐이 완성되네.〔徂徠之松 新甫之栢 是斷是度 是尋是尺 松桷有舃 路寢孔碩〕”라는 말이 나온다.
柴門晝掩 碧山無語 則登斯亭也 與四友而逍遙 書窓夜開 綠水長流 則臥斯亭也 對四友而翫賞 何羨李愿之盤谷 無異希夷之休亭 則樂於斯友於是者 不其宜乎
사립문을 낮에도 닫고 푸른 산은 말 없으면 이 정자에 오른다. 네 벗과 더불어 소요자적한다. 서창(書窓)을 밤에는 열고 푸른 물이 길게 흐르면 이 정자에 눕는다. 네 벗을 마주하여 완상한다. 어찌 이원(李愿)의 반곡(盤谷)을 부러워하며, 희이(希夷) 선생 진단(陳摶)의 휴정(休亭)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 정자에서 이들 벗에게서 즐거움을 찾음이 알맞지 않겠는가?
*이원(李愿) : 당(唐) 나라 임담(臨潭) 사람으로 반곡(盤谷)에 은거했다. 한유(韓愈)가 이원(李愿)을 반곡에 보내면서 지어 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가 전해진다.
*희이(希夷): 당말 송초의 도사 진단(陳摶)의 호이다. 무당산(武當山)의 구실암(九室巖)과 화산(華山)의 운대관(雲臺觀) 등지에서 은거하며 문을 닫고 혼자 누워 있는 때가 많았는데, 한번 잠자리에 들면 수개월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宋名臣言行錄 前集 卷10 陳摶》. 한(漢) 나라 위백양(魏伯陽)이 만든 태극도(太極圖)가 그에게 전수되고, 다시 여러 사람을 거쳐 주돈이(周敦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若乃雪滿庭 畔一枝素蘂 半開未開 霜落籬邊 萬朶黃葩 欲發未發 於此之時 玩而友之 愛而友之 不知是何春是何秋也 風來亭上戛玉淸響 非琴非瑟 雨鎖窓前 篩金䟽影 若管若絃 於此之時 唱而友焉 和而友焉 不覺夏自夏冬自冬也
눈이 뜰에 가득 내리면 두둑 가의 한 가지 하얀 매화꽃이 반쯤 핀 것과 채 피지 않은 것이 있고, 서리가 울타리 가에 내리면 일만 송이 노란 국화 꽃송이 피어난 것과 채 피지 않은 것이 있네. 이러한 때에 음미하고 벗하고, 아끼고 벗하니 이것이 봄인지 가을인지를 알지 못하네. 바람이 정자에 불어와 옥을 치면 맑은 울림이 거문고인 듯 큰 거문고인 듯하고 비가 내려 창 앞을 잠그니 금을 체질하는 성근 그림자가 피리인 듯 비파인 듯 하니 이러한 때에 노래 부르며 벗을 삼고 어울리며 벗하니 여름이 절로 여름이고 겨울이 절로 겨울인줄을 깨닫지 못하네.
然則春秋迭代 不無新舊之友 夏冬交遷 自有今昔之友 則不待自遠 日夕左右者 不亦悅乎 然吾之不以人爲友 而惟以物爲友者 抑獨何哉 友道久息 飜雲覆雨者比比 交宜已絶 下井落石者滔滔 膠漆之雷陳不見 金石之管鮑已無 則比諸友人之友者 不如友物之友者 然後覽察草木之不世情 而爲友如吾者 雖爲之取友 必端可也 吾是以亭其亭而友焉 友其友而亭焉 四時之序 每有良朋 永矢不諼
그런즉 봄가을이 교대하여 새 벗과 옛 벗이 없지 않고, 여름과 겨울이 번갈아 오니 절로 지금과 예전의 벗이 있으니, 먼 곳으로부터 오는 벗과 낮과 저녁과 좌우의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또한 즐겁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사람으로 벗을 삼지 않고 오직 자연물로 벗을 삼는다는 것이 유독 무엇 때문인가? 벗의 도가 사라진지 오래라서 뒤집히는 구름과 엎어지는 비와 같은 사귐이 비일비재하여 사귐의 도리가 이미 끊어져 우물에 넣고 돌을 떨어뜨리는 것이 도도한 흐름이 되었다.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의 아교나 옻보다 끈끈한 사귐은 볼 수가 없고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와 같은 쇠나 돌과 같은 사귐은 이미 없어졌으니 사람을 벗하는 우정과 비교하면 자연물을 벗하는 우정만 못하다. 그런 뒤에 초목이 인간 세상의 정이 아니니 나와 같은 자를 벗으로 삼는 것이 비록 그것을 위하여 벗을 취하여도 반드시 단서가 있다 할 것이다. 나는 이리하여 그 정자를 정자로 하는 것으로 벗한다. 그 벗을 벗하는 것으로 정자로 삼는다. 사계절의 차례마다 좋은 벗이 있으니 나는 오래 은거하기로 깊이 마음먹었다.
*뇌진(雷陳)은 후한(後漢) 때의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이다. 이 두 사람은 젊어서부터 교정(交情)이 매우 두터워 일찍이 태수가 진중을 효렴(孝廉)으로 천거했을 때는 진중이 이를 뇌의에게 양보하여 뇌의 또한 그 명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뒤에 둘이 똑같이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다가 뇌의가 파출되자 진중 또한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후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어서는 이를 진중에게 양보했으나 자사가 들어주지 않자, 뇌의는 마침내 거짓으로 미치광이가 되어 무재의 천거에 끝내 응하지 않았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말하기를 “교칠이 스스로 견고하다고 하지만, 뇌의와 진중의 사이만은 못하리라.〔膠漆自謂堅 不如陳與雷〕”라고까지 했다 한다. 《後漢書 卷81 陳重雷義列傳》
*은거하기로 깊이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거하는 곳이 시냇가에 있으니, 큰 사람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어 말하나, 길이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考槃在㵎 碩人之寛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噫 今日 此亭之以四友爲名 其義不一者 我得之矣 有孫四人 難兄難弟 和樂且湛 則人間至樂 無加於此矣 亭以四友者 不亦可乎 自此後來 四友之子孫 繼繼而承承 克堂衍宇 振振而繩繩 宜室宜家 式遵世德 不墜先烈 以至千萬歲之無窮則宜爾 四友之子孫 豈不感慕而體得耶哉 遂書之玆以記
아! 오늘 이 정자를 사우로 이름 하는 것은 그 뜻이 하나가 아닌 것을 내가 얻었다. 네 명의 손자가 있는데 누가 형인지 아우인지 모를 만큼 사이좋게 지내니 인간 세상의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서 더할 것이 없다. 정자를 사우라 하는 것이 또한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뒷날의 사우정의 자손이 잇고 또 이어서 마루에 가득하고 지붕에 넘치도록 하고, 자손대대로 도리 있는 방과 도리 있는 집이 되어 세상의 덕을 지키고 따라서 선열(先烈)을 추락시키지 않아서 천만 년 무궁토록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우정의 자손들은 어찌 추모하여 체득하지 않으리오. 이제 이러한 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역주: 김희준)
-<<迎日邑誌>> 권6 (金鎔濟, 1929)
◈사우정 원운 四友亭 原韻
四時光景與誰同 사계절 광경 누구와 함께할까
愛玩亭前花樹中 정자 앞 꽃과 나무 가운데서 애완하네.
欣欣向榮無世態 생기발랄한 초목에 세상 때가 없으니
莫如爲友坐春風 봄바람 벗을 삼아 앉아 있음만 못하리.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무는 흐드러지게 녹음이 지려하고 샘물도 졸졸졸 흘러가기 시작하네.(木欣向榮 泉涓始流)”라는 구절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