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 장
하희경
카르마란 단어를 좋아한다. 인과응보, 인연, 운명, 업보 등 이런 단어들은 카르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조금은 종교적이면서 난해하기까지 한 단어가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꼭 풀어야 할 숙제처럼 그림자로 따라다닌다. 어쩌면 그건 내가 걸어온 길이 카르마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길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명절이 다가오면 습관처럼 피붙이들이 생각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도,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그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도 그런가 보다. 피도 안 섞인 시댁 식구들과 엎치락뒤치락하다 문득 정신 차려보면 언제 왔는지 그들이 곁을 맴돌고 있다.
내 엄마, 시대의 불운을 뒤집어쓰고 살다 먼지가 된 여인. 안타깝게도 내게 엄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유일하게 남은 기록은, 언젠가 어린 시절에 발견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이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남장을 한 엄마가 어떤 여자와 다정한 연인처럼 찍은 사진. 그땐 무심코 보아 넘겼는데, 엄마하면 그 사진이 함께 떠오른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처녀 시절 친한 친구와 읍내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이지 싶다.
엄마에게 물어봤더라면 뭐라 했을까. 어쩌면 그걸 시작으로 엄마는 자신의 꿈과 사랑을 떠올리고 조금은 따듯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묻지 않았다.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엄마와 나는 친하지 않았다. 친하기는커녕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을 통해 내가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다만 엄마가 남장을 한 걸로 미루어 다소곳하고 얌전한 여인은 아닐 거라고 짐작해본다. 어쩌면 그녀는 남자처럼 세상을 날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꿈 많은 여인이 자신만만하게 생을 펼치려다가, 생활 능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남자를 만나 임신하게 되었다. 순종하기보다 남자처럼 호기롭게 살고 싶었던 엄마는, 자신의 운명이 나락으로 굴러가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발목을 붙들어 맨 자식인, 나를 원망하기로 결정하면서. 그렇게 그녀는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아빠와 나를 미워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렇다, 그녀는 나란 존재를 지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정도로 나를 혐오했다. 단순히 아빠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빠를 향한 애증의 강이 얼마나 깊은 줄 모르는 나는 사랑받기 위해 안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끝내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나는 소원의 방향을 바꾸었다. 제법 긴 시간을 그녀가 내 엄마가 아니길 바라는 걸로. 어쩌면 그녀가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것보다 더 간절하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딸이 서로를 지우고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그런 인연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자식이라는 인연은 끈질긴 면이 있나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토록 싫어하는 엄마를 닮았다. 크는 내내 ‘계집애가 아빠만 쏙 빼닮아서 보기 싫다’던 얼굴이 점점 엄마를 닮아간다. 기질도 그렇다. 지금은 덜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여자라기보다 남자에 더 가까웠다. 난 여자들의 그 복잡 미묘한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알지도 못할 이유로 툭하면 삐지거나,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뒤에서 쑥덕거리는 여자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다짐 몇 번으로 풀어버리거나, 한 잔 술로 털어버리는 남자들의 세계가 더 내 취향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여자 친구들보다 남자친구들과 지내는 일이 편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성격은 꽁하니 말도 안 하고 술만 마시던 아빠보다,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엄마와 닮았지 싶다. 그런데 어째서 엄마는 내가 아빠 닮아서 보기 싫다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남들과 비슷한 엄마였으면, 최소한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었더라면 우린 어떤 사이가 되었을까. 불현듯 그녀가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아파할 때, 나는 사랑을 보채기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자신의 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고 말이다. 그런 안쓰러움에도 불고하고 여전히 엄마를 향한 오래된 질문이 남아 있다. 이제는 대답할 수 없는 그녀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내가 지우고 싶은, 밉기만 한 존재인지를….
내가 오랫동안 엄마 딸이라는 걸 부정하는 마음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명제가 따라붙는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난 아직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지 싶다.
카르마란 말에는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전생과 이생, 내생처럼 말이다. 잊은 듯 지내다가도 간간이 떠오르는 엄마와 나의 관계도 어쩌면, 카르마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지 싶다. 그녀와 내가 전생에 어떤 끊지 못할 인연이어서, 이생에서 아픔과 상처로 남아야만 했는지. 이생에서의 불협화음으로 내생에서 다시 만날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이좋은 혹은 죽고 못 사는 사랑하는 사이가 될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지. 그런 조금은 부질없는 생각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