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분지처럼 답답한 유월 오후에 소낙비가 내렸다. 그 서슬에 들뜬 청각을 억누르고 자꾸 어떤 글을 집중하고 있었다. 글읽기를 마치고 나서야 소낙비가 그친 것을 알아차렸다. 소낙비가 황급히 지나가고 웅크리고 있던 고요 속에서 방금 내가 읽기를 끝냈던 딱딱한 논문의 글자들이 하나둘씩 곤두서고 있다.
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무단정치가 본격화되는 시기에 태어나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에 죽었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서 아장아장 걷고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영남학파의 유학사상으로 우주관과 경세의 도를 익히고 장가를 가 상투를 틀고 후두둑 자식들을 놓고 28세에 죽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본군국주의 파쇼체제가 몰고 온 광폭의 식민지지배가 극으로 치닫던 1943년에 죽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국가이성으로 실재하는 국가실체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식민지백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 임시정부가 존재했으나 아련한 무지개였을 것이다. 이 세월을 견딘다는 것이 참으로 각다분하고 심장이 고래힘줄 마냥 질기지 않는다면 체념하며 사는 것이 보통의 식민지 백성의 삶이었을 테다. 제국주의 통치행위가 어디 그리 만만하고 녹록하던가.
그는 한번도 ‘통치’ 받아본 적이 없는 아련한 ‘무지개’를 쫓아서 '중경대한민국임시정부'로 향하다, 결국 만주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로 송치되고 급기야 고문 끝에 죽는다. 유족들이 그의 시신을 일경에게서 돌려 받았을 때 그의 열 손톱 밑에서 손목위로 뚫고 지나간 대바늘 자국, 눈알은 빠져 있었고, 무명실로 꼬은 심지로 그의 성기마저 유린된 처참한 몰골이었다고 한다. 이른바 조선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잔혹한 고문 중 하나로 알려진 ‘창유계사건’이다. 3년 이상 지속된 고문에 그가 불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련하기도 하다. 1944년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 이 사람에 대한 제국주의 식민지백성으로서 감히 하지 말아야 하는 범법 행위가 소상히 적혀있다.
“…이들 비밀결사조직은 중일전쟁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 결국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정세 판단 하에서 가능하였다. 남원수(南源壽)는 회원을 규합하면서 그러한 정세관을 피력하였다. 곧 “중일전쟁이 일본의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어지고 있고, 전쟁이 더욱 장기화된다면 일본은 물자 부족을 겪게 되어 반드시 패전하게 될 것이다”고 예상하고, 조선의 독립 및 공산주의 사회가 조만간 실현될 때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청년이 하나의 단체에 모여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여 부자도 빈자도 없고, 물자를 평등하게 분배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울진공작당사건으로 잡혀 옥사한 최재소와 창유계사건으로 잡힌 동생 최학소의 부친이 최익환인데, 그는 세칭 ‘장안파 공산당’의 중심인물이다. 이들은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 공산당’과는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대립한 자로 후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사부장으로도 활동하였으며,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 및 기획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그 후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북한으로 올라갔다. 그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일성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최익환의 <실학파와 정다산>은 정다산의 사상에서 유물론적 관점을 추출해 놓은 명저다. 아무튼 그가 최익환의 두 아들과 교류하면서 최익환의 사상을 추종했을 법하다. 유학적 지식이 꽤 높았고, 중국어와 러시아말을 잘 했고 만주정세와 국제정세에 해박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조직인 준향계와 창유계의 대표로 중경임시정부행에 선발될 정도의 그에게서 저서가 한 권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의 지역적 활동무대를 감안해 보면, 조선말 영해 이필제난, 강릉 민용호 의병투쟁, 신돌석의병투쟁에 대한 영웅적 활동을 선대를 통해 들었을 것이고, 일제하의 계몽주의 운동, 신민회, 3.1운동, 신간회활동에 주력하던 선배들을 목도하면서 독립운동사상에 교화되어 갔으리라. 그의 청년기에 울진공작당, 극동공산주의자동맹, 적색농민조합운동에 깊이 관여하면서 끝내는 조국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너무도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가 역사 앞에 선택한 길이었다. 누가 말릴 일은 아니었겠지.
사대독자 하나와 딸 셋을 둔 채 전라도 전주 이씨가문에서 시집온 이제 갓 30을 넘긴 과부 하나를 남기고, 이승을 마지막 하직하는 몸뚱아리조차 걸레조각이 되어 죽었다. 재판 와중에 그를 살리려면 한약방을 팔고 배를 팔고 논도 팔아야 한다며 문중을 드나들던 일인 브로커와 결탁된 조선인에게 가산을 다 탕진하였다고 한다. 그 조선인과 그 후대는 길이 살아 남아 유지로 정치인으로 교수로 족보를 영양가 있게 가지쳐 갔다고 한다. 풍성한 대추나무처럼 말이다. 자식들과 후손을 생각하면 그렇게 목숨 보존하며 사는 것도 얼추 가치 있는 일이긴 하다. 요즘도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나. 그 때라고 해서 별다르게 민족이니 국권회복이니 ‘어설프게 설치는 것’은 패가망신하는 것을 모를 리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이 사람의 후손은 해방이 되고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일제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군사독재시절에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수십 년을 숨죽이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된다. 가산이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거덜났으니 배운 것이 있을 수 없고 입성과 먹성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그의 사대독자는 유신군사독재시대에 기관원의 끈질긴 감시로 얼마 전까지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하니 참으로 가혹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원래 큰 뜻을 품으면 직계, 방계뿐만 아니라 주위가 피곤한 법이다.
그는 1982년 울진과 경북지역 유림들의 탄원과 연판장에 의해 대통령표창을 받아 그의 독립공훈을 인정받았지만 1993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는다. 이때부터 그의 사대독자는 연금을 받게 되고 독립유공자에 관한 예우와 국가보훈처의 공훈법에 따라 명예가 회복된다. 울진에 탑이 세워지고 그를 기나긴 시간 음해함으로써 유지행세를 해야 했던 친일파들도 그 탑 앞에 머리를 형식적으로 조아리면서 그들의 친일파 행위를 은폐하며 동시에 여전히 그 권위를 유지한다고 한다. 뭐 나무랄 일은 아니다. 살아야 하니까.
평생 남편의 사회주의 독립운동전력으로 가슴에 고추장을 담고 살던 미망인은 1983년 별 혜택이 없지만 명예는 회복된 대통령표창 소식을 일년 전에 들었으니 이를 만족해한다며 중풍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의 첫째 딸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보지도 못하고 암 선고를 받고도 아랫배가 까치복처럼 부어 오르는데도 병원 한번 제대로 못 가보고 요강 위에서 용만 쓰다가 죽었으며, 둘째 딸은 1989년 아버지의 대통령표창 추서는 보고 죽었다고 하는데 울진군 정림면이니까 그의 아버지가 적색농민조합운동 활동을 하면서 소비에트해방구를 실험하던 그 동네에서 자연사했다. 아버지의 독립활동 공간에서 죽은 셈이다.
그의 막내딸은 태어나서 두 살 되던 해에 그가 죽었으니 막내딸은 아버지가 감옥소에서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할 때라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을 것인데, 그녀는 이 사실을 천추의 한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고 1993년 울진에 탑이 세워지고 해마다 군수들이 그 탑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소식으로 자위하며 산다. 아버지가 독립운동하는 바람에 풍비박산하고 못 먹고 못 사는 바람에 걸린 결핵을 수십년 간 앓다가 결핵이 나으니 또 위암에 걸렸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더 다행인 것은 언니들 보다 오래 살아서 얼굴도 모르는 ‘웬수덩어리’ 아버지의 칭송과 명예를 울진지역 사회인들이 날이 갈수록 돋구는 바람에 그 소식 듣는 재미로 세월을 버틴다고 한다. 국가유공자 공훈법에는 장자(녀)를 제외하고는 연금이 십 원 땡전도 안나오니까 오로지 그녀는 아버지의 명예만 받들며 사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온 육신마저 걸레가 되어 대한민국독립운동사에 가장 처참한 형태의 개죽음을 당해 참으로 불행하긴 하지만, 그만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수십만 아니 수백만 이상의 연인원이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특히 기록에 없어서 이름도 없이 산화해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수 없이 많음에 비한다면 행복한 편이다. 현재 호주 같이 별 어마어마한 독립운동을 하지도 않은 국가에서도 재정지출의 2.7% 정도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위해 지출한다. 대한민국은 매우 졸렬하게 1.6%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애국민주열사와 호국영령들이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명예롭기는커녕 인간적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세계화와 민족정기고양의 상관관계는 결코 모순적이지 않다. 특히 노무현정부의 개혁정신이란 것도 정정당당하게 원칙과 상식에 의해 사는 삶으로의 환원 혹은 지향이라고 할 때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한 삶은 더욱 특별히 명예롭게 추대되어야 하는 것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화 속에 지켜나가야 할 국가이익에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명예롭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수백 수천만의 애국자들이 준비되어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참여정부가 더욱 분발해 주길 바란다. 우리는 먼길을 가야한다. 어디 민주주의가 그리 쉽게 뚝딱뚝딱 된 적이 있던가 말이다. 적대적 분열을 경계하자.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방일 중이다. 수천만의 애국자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사족> 글 속의 그, 남원수(南源壽)는 필자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세계화와 민족정기에 관한 사상적 문제는 이 글이 길어지는 바람에 쓰지 못했습니다.
첫댓글 서프라이즈에서 퍼왔습니다.
정말 치가 떨리는 고문이었군요 그들이 태운 살과 뼈위에 우리는 무임승차하고 있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