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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스크랩 왕의 여자 ‘궁녀’…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임광자 추천 0 조회 29 07.10.22 11: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Why] 왕의 여자 ‘궁녀’…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입력 : 2007.10.19 23:13
    • 최근 개봉된 영화‘궁녀’를 계기로‘궁중 여관(女官)’의 줄임말인 궁녀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공무원’이었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영화 속에서 강렬하게 묘사된다는 궁녀들의 신고식‘쥐 부리 글려’는 어떤 의식이었을까.

      궁녀는 궁중음식, 궁중복식, 궁중자수, 궁중육아 등 조선시대의 최고급문화인 궁중생활문화를 전승, 창조한 주역이었다. 왕의 사적 생활과 밤 생활은 궁녀에게 달려 있었기에 궁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컸다. 궁녀가 정치적 야심가들의 표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특히 왕의 최측근인 지밀궁녀와 제조상궁이 야심가들의 표적이었다. 왕의 사생활을 조종하거나 왕의 동정을 염탐하려는 야심가들은 반드시 지밀궁녀나 제조상궁을 포섭하려고 했다. 지밀(至密)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이 지밀궁녀였다. ‘지극히 은밀하다’는 의미의 지밀보다 침실의 내밀한 분위기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지밀궁녀 중에서 최고궁녀가 제조상궁이었다. 침실에서 근무하는 지밀궁녀야 말로 왕의 밤 생활을 지키는 측근 중의 측근이었으니 이들이 야심가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궁녀는 한 왕 밑에 보통 500~600명 정도 있었다. 입궁은 대체로 10살 전후였다. 10살 이상의 여자 아이들이 궁녀로 입궁할 때에는 처녀 감별을 하였다. 궁녀는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처녀 감별은 의녀가 앵무새의 생혈(生血)을 여자 아이의 팔목에 묻혀서 묻으면 처녀이고 안 묻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이런 처녀 감별은 사실은 남녀가 얼마나 잘 화합하고 정답게 살지를 앵무새 피로 점쳤던 것이다. 잉꼬부부라는 말처럼 앵무새는 남녀 간의 화목을 상징하는바, 앵무새의 피가 잘 묻지 않는다는 것은 처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장차 남녀 간의 불화가 예상되었기에 불합격시켰던 것이다.

    • ▲ 조선시대 궁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궁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궁녀'의 한 장면. /영화사 아침 제공

    • 새로 입궁한 신참 궁녀가 섣달 그믐날 밤에 치르는 신고식이 ‘쥐 부리 글려’였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섣달 그믐날에 악귀들을 쫓기 위해 나례(儺禮)와 처용놀이 그리고 불꽃놀이를 하였는데, 그때 신참 궁녀들은 ‘쥐 부리 글려’를 했던 것이다.

      ‘쥐 부리 글려’는 다음과 같이 치러졌다. 그 해에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밀떡을 물린 다음 그 위에 수건을 접어 양쪽에 삼실로 끈을 달아서 마스크 같이 귀에 걸게 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대궐 뜰에 길게 한 줄로 세워 두었다. 그러면 수십 명의 젊은 내시들이 긴 바지랑대 끝에 횃불을 붙이고 궁녀들에게 다가와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면서 ‘쥐 부리 글려, 쥐 부리 지져’라고 위협했다. 겁에 질린 신참 궁녀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데, 이것을 왕비 이하 궁녀들이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이런 신고식은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일깨우기 위한 행사이며 동시에 궁녀들 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잡귀들을 몰아내기 위한 주술적 행사였다.

      신참 궁녀가 정식 나인이 되기 위해서는 수습 기간이 15년이나 걸렸다. 수습 시기에는 ‘각시’로 불렸으며, 선배 궁녀가 개인적으로 지도해 주거나 선배 궁녀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고 따라 하는 식으로 필요한 기능을 익혔다.

      정식 궁녀는 ‘나인’이라고 하였다. 나인은 격일제로 근무했으며, 12시간을 일한 다음에는 36시간을 쉬었다. 이렇게 많은 여가 시간을 궁녀들은 궁체라고 하는 글씨 연습을 하거나 투호 등의 놀이 또는 바느질이나 뜨개질 등을 하면서 보냈다. 나인이 된 후 궁녀로서 최고직위인 상궁이 되려면 또 30년이 필요했다.

      궁녀는 한 번 입궁하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는 종신직이었다. 각종 의복 제작, 곤룡포의 흉배 등 각종 자수 제작, 수라 및 음식물 준비, 세숫물, 수건 등 빨래담당, 불 때기 및 촛불 담당, 침실 청소 등을 맡았다.

      품계는 5품~9품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하위직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궁녀의 품격은 처소의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형식적으로 가장 높은 품격은 대비전의 궁녀였고 그다음이 대전의 궁녀, 중궁전의 궁녀, 세자궁의 궁녀였다. 비록 왕이라고 해도 대비전의 궁녀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명분상 어머니가 되는 대비를 모시는 궁녀에게 함부로 하면 불효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궁녀의 성(性)은 어땠을까. 궁녀는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히 금지됐다. 궁녀가 왕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갖게 되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녀와 내시 사이에 연애사건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것은 궁녀와 내시들만의 특별한 처지와 인연 때문이었다. 궁녀와 내시는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마치 절해고도에 고립된 사람들처럼 외부인과 격리된 채 내전에서 근무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서로 낯이 익고 정이 들어 성을 초월한 애정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세종 때의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도 그런 관계였다. 둘은 정이 깊어지자 미래를 언약하기도 했다. 그 징표로 내은이는 세종이 쓰던 청옥관자(靑玉貫子)를 손생에게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사실이 적발되자 세종은 무시무시한 처벌을 내렸다. 두 사람을 참형으로 다스린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세종이었지만 궁녀들의 성문제에 대해서만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듯 혹독하게 다스렸기에 조선시대 궁녀들의 성 금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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