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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그리운 사람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16년 전 떠나간 아내와 딸을 찾아 산샤(三峽)로 접어든 남자, 산밍. 아내가 써놓고 간 주소는 이미 물에 잠겨버리고, 수소문 끝에 찾아간 처남에게 아내의 소식은 커녕 문전박대만 당한다. 낮에는 산샤의 신도시개발 지역에서 망치를 들고 휴일에는 아내를 찾아 헤매는 이 남자 산밍. 아내를 만나고 딸과 재회할 수 있을까. 소식이 끊긴 지 2년 째 별거중인 남편을 찾아 산샤로 찾아든 또 한명의 여자, 셴홍. 그를 만나러 찾아 간 공장의 허름한 창고에는 자신이 보낸 차(茶)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마치 자신의 존재처럼... 가까스로 남편과 조우한 셴홍은 그의 곁에 이미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각기 다른 듯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산샤로 찾아 온 산밍과 셴홍의 여정은 어떻게 될까. 홀로 산샤의 강을 처연히 내려다보는 두 사람. 강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유유히 흐른다.
과거와 함께 현실까지 붕괴되는 신도시. 영화의 배경인 산샤(三峽)는 길이가 무려 6,300km에 달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 양쯔강 중상류의 세 협곡을 통칭하는 지명이다. 중국 인민폐 10위안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 산샤. 매년 되풀이되는 홍수로 가난이 세습되는 이 지역은 중국정부의 개발정책으로 거주민 113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게 되었고 수많은 유적지가 수장되고 있는 현실. 영화의 원제인 삼협호인(三峽好人)이 ‘세 협곡(산샤)에 사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영화는 산샤 지역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동시에 ‘산샤’라는 지역 자체가 영화에 풍부한 정서를 불어넣고 있다. 마치 파레트 위 다채로운 물감들의 조화처럼 삶에 대한 단상을 아름답게 표현해 낸다.
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깜짝 상영작으로 참가한 스틸라이프는 영화제 최고의 상인 황금사자상 수상발표와 함께 영화제 안팎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관객과 비평가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뒤늦게 참가한 데다 쟁쟁한 작품들이 물망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6년 베니스는 중국의 젊은 거장 지아 장 커 감독을 선택했고 전 세계는 그를 ‘차세대’ 아시아영화의 주자가 아닌, ‘현세대’ 주류감독으로 인정했다. 도시화와 고도의 산업화를 우려하는 감독의 시선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이라는 영예를 안고도 자국개봉이 불투명한 중국에서 소신 있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펼치고 있는 감독 지아 장 커. 중국은 삼협댐건설정책으로 2000년의 역사를 2년 만에 허물고 있다. 산샤 지역의 황량하게 붕괴되어가는 건물들과 대조적으로 아름다운 풍광. 이 속에 감독의 비판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영어제목은 스틸 라이프(Still Life)다. 스틸 라이프는 ‘정물화’라는 의미와 함께 ‘고요한 삶’을 말한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산샤 지역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 영화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절망과 가난이 뚝뚝 묻어난다. 인적 없는 건물을 허물고 그 더미에 사람이 깔려도 오열과 눈물도 없다. 가던 길을 마저 향하고 있는 그들의 처진 어깨를 보면서 삶의 희망을 곱씹게 하는 놀라운 영화. 스틸 라이프. 산밍, 아내를 찾는 남자의 힘겨운 여정... 돈에 팔려왔지만 사랑했던 아내. 그리고 16년 전 나를 떠났던 아내. 그녀를 찾으러 강의 조류처럼 찾아든 산샤에서 그녀의 종적은 오간 데 없고... 나날이 부서지는 도시처럼 내 마음도 허물어지는 듯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 셴홍, 남편을 찾는 여자의 고요한 여정... 남편은 일을 찾아 떠난 지 2년이 지났다. 결국 그를 만나러 산샤로 왔지만 쉽게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던 그는 보이지 않고 흔적만이 남아 있다. 예상은 했지만 이미 골이 깊어져 버린 우리의 관계. 그를 어서 ‘만나고 싶다.
감독의 변(辯) : 언젠가 나는 누군가의 방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책상위에 놓인 먼지 쌓인 기사를 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이곳이 한 폭의 정물화 같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낡은 가구와 책상 위의 잡동사니들, 창틀에 놓여있는 빈 병,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장식품 ... 모두가 내겐 어떤 시적인 슬픔을 지닌 풍경으로 느껴졌다. <스틸 라이프>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런 현실의 풍경을 담고 있다. 깊은 시간의 흔적을 새긴 채, 고요하게 인생의 비밀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스틸 라이프>의 촬영은 펑지에의 오래된 마을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중국정부의 삼협 댐 건설 계획으로 장강의 수로가 바뀜에 따라 대부분이 수장된 곳이다. 몇 세대에 걸쳐서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토박이들은 모두 다른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펑지에의 오래된 마을이 이렇게 영원히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통해 내가 목격한 파괴를 고발하려 한다. 나는 고함소리와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삶이란 어떠한 좌절 속에서도 저마다의 아름다운 색으로 피어난 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영화 <스틸 라이프>는 중국의 현대화가 劉小東의 작업의 행보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東>에서 시작한다. 산샤댐을 배경으로 11명의 노동자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촬영하다 감독은 지폐에 새겨진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됨과 동시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정작 풍경을 돌아볼 새도 없이 불행 속에 유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시나리오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아 장 커 감독은 <동>의 촬영은 조감독에게 맡겨두고 산샤의 노동자들과 함께 건물을 허물고 땀을 흘리며 시나리오를 3일 동안 완성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스틸라이프>이다.
망치 소리 가득한 그곳 ‘산샤’ 매일 허물어지고 또 새롭게 탄생하는 도시. 과거를 붕괴시키고 미래를 건설하는 이곳, 하지만 화려한 문명을 위해 순간순간의 망치질로 2000년의 유구한 중국의 역사와 유물도 함께 수장시키는 곳, 그곳이 지금의 산샤이다. 파괴와 탄생, 생과 멸이 공존하는 산샤. 단순한 영화의 배경 이상으로 강력하게 발산하는 힘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영화를 움직인다. 산샤의 수묵화 같은 산수는 2009년 완공될 삼협댐건설과 함께 이제 우리 기억 속에서는 사라지고 중국 인민폐 10위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실제 산샤의 주민들이 출연한 영화 <스틸 라이프>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지아 장 커 감독은 그의 페르소나인 두 배우 자오 타오와 한산밍을 불러들였다. 이 둘은 모두 2000년도부터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한산밍은 감독의 이종사촌형으로 실제로 고향에서는 광부생활을 하고 있다. 그 외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모두 산샤 지역을 터전으로 살고 있는 주민들이다. 담배(烟) 술(酒) 차(茶) 사탕(糖) 영화는 이렇게 네 자막을 통해 네 개의 시퀀스로 나뉘고 있다.
관람객들의 리뷰
1. 지난 베니스 영화제에 뒤늦게 출품되었음에도 최고 작품상의 영예를 안은 천재 감독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 (원제 : 三峽好人)" 는 역사의 새로운 물결 속에 수몰되어 가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이야기한다. 세계최대의 수몰마을인 샨샤 에 찾아든 산밍과 셴홍. 산밍은 16년전에 가출한 아내와 딸아이를 찾으러 주소 한장 딸랑 적힌 쪽지를 들고 이곳을 찾았다. 돈만 내면 어디든 데려다 준다던 오토바이 택시는 이미 수몰되어 데려다 줄 수 없는 주소지를 가르키며 "저 곳" 이라며 돈을 요구한다. 오랜 광부 생활로 그의 말투는 취한 듯 느리고 행동은 탄광처럼 어둡다. 물어물어 간신히 찾은 처남은 뭐하러 16년이나 지난 지금 이 곳에 왔느냐며 버럭 화를 낼 뿐이다. 배에서 일한다는 16년 전의 아내.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 배가 들어올 때까지 이 지역 철거를 위한 일용직 근로자가 된다. 셴홍은 2년전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 샨사로 오는 길이다. 그녀는 남편의 친구를 따라 남편이 있음직한 장소를 돌아다니며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남편은 수몰되어가는 마을 사람들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는 책임자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세계 최대의 댐 건설을 위해 2000년 유구한 풍광을 자랑하는 샨샤지역이 불과 2년 만에 잠기고 있다. 역사속에서는 언제나 큰 것을 위해 작은 것들이 희생되어 왔고 그 작은 것들은 보상을 받든 안받든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것들" 이 될 뿐이다. 16년이 지나서야 아내와 딸을 찾아 이 마을까지 찾아온 산밍의 사연은 알 수 없다.그리고 돌아온다던 남편을 2년이나 기다린 셴홍의 마음도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샨샤지역이 중국부흥을 위해 가라앉고 사라져 버리는 것과는 달리, 그 두 사람은 가라앉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과거의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동네 건물 벽 곳곳에는 수몰 후의 수위를 나타내는 눈금이 그어져있고, 그렇게 점차 높아오는 수위는 숨통을 조여오지만, 아내를 향한 미련은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이어진다. 반 이상이 물에 잠겨 있는 샨샤의 음침하고 축축한 모습과, 희망없는 떠남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물먹은 스폰지 같은 어깨는 보는 이의 마음을 얼마나 우울하고 쓸쓸하게 하는지 모른다.
희망을 잃은 샨샤의 청년들은 그 와중에도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꿈꾸며 조폭들 처럼 패를 나누어 서로를 찔러대고, 한 꼬맹이는 죄책감 없이 담배를 피워문다. 지아장커 감독은 개발! 발전! 만 부르짓는 중국의 거침없는 행보가 마냥 못마땅 하다. 2년이나 기다렸던 셴홍의 남편은 그녀가 걱정한 것과는 달리 너무나 폼나게 살고 있다.남편은 그녀가 목이 타서 하루 종일 마셔댔던 물이나 차와는 다른 와인을 마시고 전망 좋은 곳에서 파티를 열고 호텔에서 손님을 만나고 도요타 자동차를 탄다. 긴 시간 마음을 짓눌렀을 남편에 대한 원망과 걱정은 그를 만나는 순간 배신과 분노로 변하고 준비해 오지 않은 이혼이라는 단어가 쉽게 오고 간 뒤에, 굳은 얼굴과 빠른 발걸음으로 떠나는 배에몸을 싣는다.
영화 중간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UFO 나 하늘로 발사되는 건물 장면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지아장커 감독은 이렇게 믿고 싶지 않은 상황 속에서 UFO가 날아다니고 건물이 날아오른다고 한 들 뭐가 이상하냐고 되묻는다.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왜 산밍은 16년전에 떠나버린 아내를 만나 그 때 집을 나간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일까. 샨샤를 도망치듯 떠나간 셴홍과는 달리 산밍은 16년 동안 뇌리를 맴돌던 의문에 대한 답을 아내에게서 듣고는 그녀를 다시 찾겠다는 희망을 갖는다. 부서진 고층 건물 한켠에서 아내와 사탕 한 조각을 나눠먹는 슬프고 다정한 모습은 잊지못할 명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희망은 있되, 기약은 없는 산밍과 그를 따라 탄광으로 떠나는 인부들의 모습. 무너져 가는 두 건물 사이로 외줄을 타는 남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산밍의 표정이 담긴 엔딩 또한 최고의 엔딩씬 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산밍의 아내의 대답처럼 "그 땐 정말 어리석고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흘려보냈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후회로 눈물짓는 날이 올지 모른다. 중국의 차세대 감독으로 추앙받던 지아장커를 현세대의 천재감독으로 추앙받게 만든 영화인 <스틸 라이프> 는 역사의 [커다란 것들]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작은 것들]을 따스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으로 어루만져 주는 걸작임에 틀림이 없다.
2. 무한정 비판의 날만 세워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 같은 이 영화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럼에도" 희망을 꿈꾸고 있다. 아내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3만 위안을 벌어 갚아야 하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삼협댐에 물이 가득 차는 날 일거리를 잃고 다른 도시로 일을 찾아 떠나야 하지만 건물 사이에 가로 놓인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의 사내처럼, 삼협의 좋은 사람들(三峽好人)은 삶의 굴곡은 있을지언정 조금씩 그러나 계속해서 시간이 펼쳐 놓는 길을 따라 여전히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 술, 차, 사탕이라는 행복의 열쇠들을 늘 곁에 두고서...
3. 한산밍의 처소 텔레비전에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홍콩 느와르 <영웅본색>이다. 청년 마크는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고 한산밍과의 대화에서는 폼나는 대사를 지껄이는데 이건 주윤발의 모사이다. 주윤발의 킬러 캐릭터는 자본주의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협객의 의라는 시대착오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가는 실패자의 자조적 성격이 강하다. 당연히 청년은 죽는다. 일터인 건설현장의 무너진 파편에 깔려서. 주윤발은 총탄에 맞아죽고 마크는 콘크리트 무더기에 짓눌려죽는데 둘은 이로서 근대화의 피해자로서 동일시된다. 노동자들은 검게 탄 근육을 놀리며 곡괭이질을 하고 부수고 부순다. 그들은 부적응자는 아니라도 사회의 하찮은 일을 도맡는 하층민이다. 비관 일변도일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을 균형있게 잡아주는 요소 중 하나가 이들의 건강한 육체다. 그들은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며 튼실한 몸으로 세파를 견뎌나갈 것이다.
산밍이 안개낀 산하를 바라볼 때 영화의 축은 그 건너편에서 다른 길을 향하는 센홍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센홍은 남편이 일하던 공장을 찾지만 그곳은 가동되지 않은지 오래이다. 남편은 떠났다. 여자는 망실된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재결합이 실패할 것은 자명하다. 남편의 친구와 대화하는 센홍을 잡는 카메라는 멀리 서있는 가건물 중앙을 비추는데 건물은 밤에 로켓처럼 쏘아올려진다. 건설이 진행중인 미래의 구축물은 가망없는 영영 미완성의 상태에서 머물게 되는 것이다.
회복의 꿈은 헛되고 기약없다. 바람을 피우고 있음을 알게 된 센홍은 포기하고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상하이로 발걸음을 돌린다. 미련없이 새 삶을 찾으러. 남편은 건설회사의 임원이고 그의 정부가 회사의 여사장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지아장커는 영화에서 산밍과 센홍을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서 영화가 치정극으로 전락하는 교과서적인 실수를 회피하고 있다. 영화 중간에 꼬마가 흥얼거리는 싸구려 가요나 길거리 가수의 노래는 산밍과 노동자들에겐 고향에 대한 회한과 향수의 노래다. 그러나 과거의 복귀는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힘겹기 그지 없으며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산밍과 노동자들은 벅차다.
이점은 산밍이 도망간 아내와 딸을 되찾으려는 장면에서 천명된다. 그녀는 오빠가 진 빚을 대신하려 붙들려있고 산밍이 그녀와 혈육을 되찾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인민들의 구질구질한 일상 속에서도 자본의 논리는 있다. 인정상 대가를 받지 않고 넘겨주는 법따위는 없다. 죽음의 그림자는 자본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에게 드리워진 체제의 그림자다. 지금은 실감나지 않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으며 수위를 높여가는 강물처럼 언젠가는 그들을 덮칠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유랑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다. 뒤돌아보는 산밍의 눈가에 외줄을 타는 사람이 잡힌다. 다른 영역의 세계로 건너가려는 자의 길은 마치 외줄타는 광대의 그것과 닮았다. 한번에 도약해 넘어갈 수 없으며 제자리에서 멈추거나 느린 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줄 아래 나락으로 추락해 한많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 수밖에 없을 터. 광부가 되어 떠나는 일행의 장래가 위태로울 것이란 예고다. 인간적인 결단에도 빚갚을 돈을 다 모을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미래는 달라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4.영화의 엔딩은 외줄을 타는 어떤 남자를 뒤로 한 채 떠나는 주인공 산밍을 보여준다. 영화의 모든 내용을 압축하고 있는 이 장면은 보는 이들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신선하고 뒤통수를 치는듯한 충격적인 장면임에는 분명하다. 극장에 들어가기전, 막 나오는 사람들로부터 줄타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가 안간다는 사람들이 있어 뭐가, 왜 그런가 싶었는데 그 이유는 그런 에필로그의 강렬함에 익숙치 않아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줄을 타는 이는 산밍과 등장하는 모든 인물, 그리고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다. 이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는 외줄위에 홀로 선 존재들이다. 위태롭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슬 아슬해 보이는 줄위에 선 우리 모두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줄을 타는 그 남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감독은 끝까지 나아가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이 꼭 정답이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낮은 목소리의 나레이션처럼 지아장커가 얘기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관조적이고 비판적이다. 보여지는 것은 무척 느리고 객관적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이미지들은 비판적이고 음울하다. 어찌되었건 줄위에 선 이상 아래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산밍은 앞으로 나아가는걸 선택한다. 그는 지금껏 보아 온 영화들 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인간적이며 사실적인 주인공이라 생각한다. 작은 키에 햇빛에 그을린 못 생긴 얼굴, 막노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신체, 순수하면서도 진실어린 눈망울. 이런 주인공을 일상에서는 종종 접하지만 영화에서는 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그는 세상의 진실인지도 모른다. 감독의 그 시선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