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는 이곳의 보안은 매우 철저해서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습도
와 온도도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더구나 지난 120여 년간 이 금속이 저장실 밖으로 나온
것은 단 3번뿐이다.
이 금속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세상의 공기 한 점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셈
이다.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물건의 무게를 잴 때 사용되는 저울은 정기적으로 표준분동을 이용해 교정을 받게 되어 있다. 처음
제작시에는 저울 눈금이 정확히 매겨지지만 사용하다보면 오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울의 오차를 교정하는 표준분동은 한국표준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는 질량원기를 기준으로
만들어 진다. 또 한국표준연구원의 질량원기처럼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모든 질량원기들은 ‘국제 킬로
그램 원기 ((International Prototype kilogram, IPK)’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즉, IPK는 이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의 어머니 같은 존재인 셈이다. 앞에서 말한 국제도량형총국의 지하
에 보관된 작은 원기둥형 금속이 바로 IPK이다.
물리적 대상을 표준으로 삼는 유일한 단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단위들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에는 7가지가 있다.
길이의 단위인 미터(m),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kg), 시간의 단위인 초(s),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A),
온도의 단위인 켈빈(K), 광도의 단위인 칸델라(cd), 물질량의 단위인 몰(mole)이 거기에 속한다.
이 7가지 단위를 국제표준계의 기본단위라고 한다.
그런데 질량이라는 단위의 표준이 되는 IPK는 물리적인 대상을 표준으로 삼는 유일한 단위이자,
19세기에 만들어진 정의가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는 유일한 단위이다.
1879년 국제 킬로그램 원기와 함께 만들어진 국제 미터 원기는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1
천만분의 1을 기준으로 삼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구는 그 자체가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
가 아니다. 즉, 냉각이 되면 지구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 수 있고 반대로 운석이 떨어지는 등의 변화가
생기면 더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3년 1미터의 기준은 빛이 진공에서 299,792,485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바뀌
었다.
그런데 가장 안정적인 3.984도의 온도에서 물 1리터가 갖는 무게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티끌 하나 묻지
않게끔 철저하게 보관되어 온 IPK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IPK와 복사본들을 서고 정밀하게 비교
해본 결과 IPK의 질량이 지난 한 세기 동안 50마이크로그램(1마이크로그램은 100만분의 1그램)이 줄어
든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과학자들이 왜 그런 오차가 생겼는지 조사했지만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보관 용기 속의 기체가 조금씩
빠져나가 IPK의 질량이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공기 중의 미세먼지가 복사본들에 조금씩 묻어서 그런
오차가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
이에 따라 2011년에 개최된 국제도량형 총회에서는 그동안 킬로그램 정의로 사용돼 온 IPK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의를 도입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도 다른 기준들처럼 물리적 정의로
바꾸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현재 IPK를 대체하기 위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은 아보가드로 구와 와트 저울의 2가지 방식이다.
질량원기 대체 방식의 새로운 후보 등장
앞의 것은 규소 원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1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아보가드로 구를 만들어 그
속에 있는 실리콘 원자들의 정확한 개수를 세는 방식이다. DNA 구조를 알아내는 데 쓰였던 X-선으로
규소 원자 간의 거리를 재면 구 속에 얼마나 많은 규소 원자가 들어있는지 계산할 수 있다.
두 번째 방식인 와트 저울은 기본적인 플랑크 상수를 이용해 질량을 전류와 전압에 관련시켜 정의하는
장치이다. 즉, 자기장이 흐르는 코일 위에 1킬로그램짜리 물건을 올려놓은 후 중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전자기력이 생기게 한 다음 거기서 발생한 전류와 전압을 측정해 중력값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현재 독일, 호주, 일본, 이탈리아 등의 국제공동연구진은 아보가드로 구 방식을 제안하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 스위스, 프랑스, 한국 등은 와트 저울 방식을 지지하고 있다.
어느 방식이 측정값의 불확정한 정도인 불확도를 더 낮출 수 있는지가 관건인데, 두 방식 모두 단점으로
지적되는 사항이 있다. 아보가드로 구의 경우 여러 개의 동위원소로 이루어진 규소에서 순수한 종류의
동위원소 규소원자를 얻어내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으며, 와트 저울은 매우 복잡한 장치여서 실용적이지
않다는 게 단점이다.
그런데 최근 여기에 한 가지 방식이 추가 후보로 거론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단일 원자의 질량에 의존
해 작동되는 최초의 시계인 ‘콤프턴 시계’가 바로 그것. 콤프턴 시계는 8년마다 1초 정도 어긋나 빅뱅
때부터 지금까지 단 4초만 어긋날 정도의 가장 우수한 원자시계보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이 시계의
주파수가 원자의 질량에 의존하므로 무게 측정 단위로 쓰일 수 있다.
즉, 이 시계의 세슘 원자 질량이 콤프턴 주파수 및 플랑크 상수, 광속으로부터 10억분의 4 정도의 정밀도
로 계산될 수 있어서 원소 1킬로그램 안에 얼마나 많은 원자들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게 가능
하다. 이르면 2015년쯤에는 킬로그램의 정의가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의 두 가지 유력한 후보 방식
에다 콤프턴 시계까지 추가 후보 방식으로 거론되면서 과연 어느 것이 IPK를 대체할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