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18일,
강수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배우 강수연이 1989년 7월 18일 폐막된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작품상, 심사위원특별상, 주연여우상,
주연남우상 등 본 상 4개 부문 중 하나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낸 강수연은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이어 두 번째로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시상식에서 분홍빛이 도는 한복을 입고 나와 “영화 속에서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현지
기자들의 표현대로 독특한 동양미를 과시했다.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받은 강수연. 왼쪽이 임권택 감독(동아일보 DB)
모스크바 영화제는 영화예술의 발전과 국제적인 우호증진을 위해 1959년 창설된 영화제이다. 행사기간은
매년 7월경이며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와 격년제로 번갈아 연다. 수상작들은 대체로 인간과 고결한
자유 또는 방대한 스케일의 대작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데루스 우잘라’, ‘전쟁과 평화’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 경쟁 부문만 1백여 개국이 참가한다. 시상부문은 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남여주연상 등 4개 부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수연에 이어 이덕화가 1993년 영화 ‘살어리랏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국제 영화제의 시초는 1932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열린 베네치아(베니스) 영화제로 알려져 있으며,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다양한 영화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나머지
두 영화제인 깐느(칸)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로 각각 1946년과 1951년에 개최되었다. 이전에는 세계
4대 영화제라고 하면 모스코바국제영화제가 포함되었지만 최근에는 캐나다의 토론토국제영화제를 포함시킨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강수연은 1969년, 4살 때 길거리에서 캐스팅돼 아역 탤런트로 활동을 하다가
1976년 이혁수 감독의 '핏줄'로 은막에 데뷔했다. 당시에는 충무로에 아역 배우가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다. 강수연은 정말 수많은 작품에 출연할 수 밖에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일요일을 편하게 쉬었던 게 딱 두 번"이었다고 회상한다. 아역시절 강수연의 대표작인
'비둘기의 합창'((1978년, 최현민 감독), '어딘가에 엄마가'(1978, 정회철), '슬픔은 이제 그만' (1978,
김준식),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 김준식) 등은 대부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나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아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러다가 1985년 강수연이 이른바 '성인 연기자'로서 처음 시도한 작품은 김수형 감독의 'W의 비극'
(1985)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연기자 지망생으로 출연하여 파격적인 베드신을 선보이며 아역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이어서 '고래사냥2'(1985, 배창호)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1987, 이규형)에 출연하며 '청춘스타 강수연'으로 변신하였다. 또한 같은 해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는
대리모를 연기한 '씨받이'(1987, 임권택)에서의 열연으로 동양권 여배우로는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다.
이어 삭발 투혼이 빛났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임권택)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낭뜨 영화제까지,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를 넘어 아시아 최고의 여배우로, 진정한 '월드스타'로
거듭 났다. 강수연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유연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해갔고, 2000년
대에는 연기자 보다는 영화인으로서의 역할에 보다 치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