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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일기 – 3
집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가 현실에서의 이해의 폭을 넓혀갑니다. 이전까지는 어떤 생각의 집약체라 할 굳어진 관념 속에 파묻혀 왔다면 이제는 그런 고정되고 확신해온 생각의 돌덩이들을 내려놓고 물과 같이 어디에나 담길 수 있는 유연함을 향해 노력해보려 결심하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설거지하는 방식에서도 구분해왔습니다. 나는 먹은 것을 바로 물로 헹구어 선반에 올려 물기를 제거하려했지만 집사람은 플라스틱 개수용 설거지통에 물과 함께 그릇을 담가놓고 쉽니다. 그것이 이해가 안 되었으나 베트남에 와서 그런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해를 넘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하노이의 호텔에 하룻밤 머무르고 다낭에 가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tv를 켜고 우리의 방송을 찾아봅니다. ytn방송과 하나는 인기연속극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외국 나라들의 방송채널들이 있으며 베트남 방송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ytn 방송은 뉴스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용산 화재참사의 기획보도였습니다. 다른 모든 나라의 방송과 너무나도 다른 광경을 보여 뜨악한 느낌을 받습니다. 프랑스 방송은 못 알아듣지만 화면과 파리지앵이라는 언어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좌담형식의 프로그램으로 보입니다. 4사람이 나와 이야기합니다. 영상자료도 부실해 보입니다. 시민들의 거리를 걷는 모습만이 사진으로 단순하게 반복해 비쳐집니다.
우리의 용산참사는 9년이 지난 사건이라고 하며 화염병과 화재현장 그리고 경찰진압장면에 돌아가신 분들의 무덤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수많은 영상의 화려함으로 사람들에게 울분과 흥분에 넘쳐 통곡하게 만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안온한 가정을 파괴시키는 가정파괴범이 방송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가정에서조차 편안하게 쉬기 위해서는 방송을 보아서는 안 되는 시절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자 적나라한 우리의 맨얼굴입니다.
방송에는 달랑 젊은 여자분 혼자 나와 원고를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사회적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떠드는 모습에서 시청자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고 우습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나도 쓸쓸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시각인지 헷갈립니다. 그러나 정작 보도하는 분은 차분하게 언론의 도리를 다하듯이 남의 일처럼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거기서 새롭게 느낍니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어떤 사회적 시각을 논하는 자리에서 서로 다른 시각의 패널들이 4명이나 나와서 차분하게 앉아 우리의 시각으로는 노닥거리듯 좌담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이 비쳐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서 빨리빨리 읽어 내려가며 정작 그 내용을 결집하고 종합해 쓴 주인공들은 모두다 어둠속에 숨기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순수한 우리말을 천시하는 조선조 오백년의 양반의 때가 묻어남을 느낍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말은 비천하고 원고로 쓰여 진 글은 우수하다는 잘못된 시각입니다. 말은 순수하고 땅위의 먼지까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글은 개념 속에서 허공을 향해 그림을 그리는 허구성이 난무하는 세계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아시아의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로 그 당시의 대동아전쟁은 그들이 글로 허공에 그려대려 허우적거리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수 백 만 명이 죽어나가는 전쟁에서도 그들에게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념에 찌든 자신들의 우월성만이 글로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존경하는 의사(義士) 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이토 씨는 그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글쟁이였습니다. 그것은 결국 이성으로 발현되는 세계가 그 누적의 결실로 인해 일어난 참화로서의 1차 세계대전의 시대였습니다. 이성의 저주로 서구에서도 수 천만 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읽었습니다. 서구는 정신을 차려 이성을 저주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나 우리는 아직도 이성을 우상화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에서 머지않아 다가올 오욕으로 점철된 파멸의 순간을 예견해봅니다. 지금도 일본은 글의 나라답게 허공에 자주 그림을 그리면서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다에 질려 글로서 읽어 내려가는 양반적인 신념에 파묻혀 허공을 맴돌며 실패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미 실패의 새장에 갇혀있다는 생각은 없는듯합니다.
마치 맞춤양복과 기성복의 운명 같습니다. 기성복의 편리성 앞에 모두다 줄을 섬으로서 맞춤의 따듯하고 온정적이며 안정감의 세계는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이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시절입니다. 결국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고통스러운 사건사고는 그처럼 이기적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잘 맞을 것 같고 편리하며 바로 사서 입는 수월함에 가려 그 내부적 내막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하며 활동의 어려움은 유행이라는 허구적 트렌드로 또 한 번 가려져버렸습니다. 결국 그러한 어색함의 느낌은 사회적 고통을 예고하는 미세한 떨림 들입니다. 그러한 떨림 들이 거리로 나와 합쳐지면서 세상의 커다란 진동을 형성합니다. 씽크홀은 그런 세계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지진은 근원지도 없습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알 수없이 터질 수 있습니다.
그처럼 세상에 처음 씽크홀이라는 땅꺼짐이 나타났을 때 이념에 찌든 인생들은 주변에서 원한의 대상을 물색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만만에 콩떡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잠실 석촌호수 인근에서 땅 꺼짐이 발생하자마자 지하철공사다 고층건물 건설 때문이다 혼란스럽게 외쳐대다 못해 그 당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던 만만해 보이는 공사 중인 건물로 처 들어가서 난리를 쳐댔듯이 세상의 혼란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거기에 주동자들은 당연히 정치에 연줄을 대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거짓성과였으며 우중의 시민들을 동원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들에게 정확한 원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행위 자체가 애국이고 멸사봉공입니다. 그들에게 땅꺼짐이 일어나기까지의 오랜 세월의 경과에 대한 통찰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전문가를 천시해야합니다. 빨리빨리 찾아내려 혈안이 된 마음에 전문가는 오히려 방해꾼일 뿐입니다. 그것은 개선의 영역을 벗어남으로서 또 다른 허구적 유행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죽창은 자연적으로 시간의 경과를 통해 소멸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세상의 순환원리를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간여할 능력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합니다.
그 보도를 맡은 사람은 부족한 열정을 직업적인 어투로 보충하며 남이 써준 원고를 시간에 쫓기어 읽어 내려가기에 바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생각이 부족한 한 인간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여 지는 연출이 ytn만이 아니라 모든 방송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리사회의 본 모습입니다. 젊음의 이념에 근거한 열정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뀐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요즘 사회의 근거논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젊음이 부족한 인간들은 침묵해야합니다. 피해대상자들의 원통함과 원망이 가득한 언어들이 무수하게 쏟아지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며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추상해봅니다.
한 쪽에서는 죽은 다음에 부관참시라도 해서 세상의 진리를 밝히려 결과론적 시각에서 영웅이나 된 것처럼 세상의 전면에 나서 재단하기에 온몸을 불사르고 있으며 다른 쪽에서는 죽은 다음에도 풀리지 않는 한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 산자들에게 추상같이 죄를 물으려는 한을 품고 살아가는 분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고개를 넘어가지 못하고 고갯길에서 서낭당의 바람에 날리는 천 조각들의 흔들림처럼 우리의 심성은 너머세계를 가지 못한 원귀들의 굿거리 판이 매일같이 언론을 장식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시절을 바라봅니다.
원고를 보고 읽기에 바쁜 사전에 각색된 이념적 시각의 보도를 보며 그런 미묘하고 갈등을 증폭시킬 보도에서는 여러 다양한 시각들의 제시에만 머물러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결과까지 반드시 자기들이 의도하고 각색한 길로 몰아가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도된 결과적 시각의 보도일수록 써놓은 글을 읽어내려 가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그것은 방송의 공정한 보도요건을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 보도를 벗어날 수밖에 없는 보도프로그램에서는 외부의 객관적 시각이 반영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외부 인사들의 결과를 지향하지 않는 객관적 시각만을 보여주는 토론마당이 죽음의 굿판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보도의 내용들은 차분하게 마음으로 담겨지기 이전에 흥분과 격앙의 고통이 먼저 다가옵니다. 방송사에는 그런 시청자의 마음에 대한 배려하는 생각 자체가 부족합니다. 오직 빨리빨리 진행해야 되고 신속하게 전해 주어야할 내용들이 성급하게 나열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런 내용에서는 결과의 한풀이만을 원하는 모습들만이 두드러지게 보여 질 뿐입니다. 억울하니 한을 풀어야겠다는 다짐만이 보여 집니다. 조금도 변화가 없는 우리의 적나라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제도와 토론을 통한 합의점은 없습니다. 결과에 대한 원망과 그 해결책으로서의 책임자 처벌만이 그들의 시각입니다.
젊음의 열정적이고 타자 원망적인 시각을 전 국민을 상대로 협박해대고 그런 모습이 베트남에까지 적나라하게 보여 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며 이것이 요즘 우리사회의 트렌드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됩니다. 개인의 삶에서 원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회적 잘못으로 그런 분들이 나왔다면 언론사에서는 당연히 사회적인 공론화에 집중해야겠으나 그들의 시각은 오직 피해자로서의 사람들의 원한에 찬 언어의 구사를 아무런 가감 없이 내보내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제도적 창안의 표출이 아니라 원초적이고 단순한 그것도 한편의 감각적이고 온정적인 시각으로 보도하기에 바쁠 뿐입니다.
그러한 보도는 또 다른 원망과 무관심만을 양산하고 반복되는 원한의 사회를 만들어갈 뿐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면 그 반대편의 이익도 있습니다. 그 이익에 대한 추적보도를 통해 희생의 고귀함이 두드러지도록 인도해 나아가야겠으나 그 보도에는 희생의 고귀함만을 한풀이식으로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음으로 인하여 희생의 고귀함을 소멸시키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만이 두드러지게 보여 집니다.
그런 시각적 보도는 아무런 세상을 보는 눈이 없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맹목의 세계입니다. 세상을 단순화하고 극단화함으로써 자극적인 보도를 통해 시청자를 잡아보려는 상업적 영악함이 난무합니다. 그런 관점은 열정이 넘쳐나는 젊은이들에게는 세상의 진리로 다가오겠으나 열정이 부족하고 세상사 경험이 늘어가는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는 불쾌감과 불안감에 안타까움까지 덧붙여줌으로서 시청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어갈 뿐입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기위해 위로하기위해 사람들로부터 기쁨을 구걸하고 원한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언 발을 녹여보려고 오줌을 누어대는 꼴처럼 보일 뿐입니다. 보도는 냉정함이 우선입니다. 언 발은 손으로 비벼서 온도를 올려야겠으나 우리는 말로써 원한으로써 앙갚음만을 결과론적 시각으로 외쳐대기에 바쁩니다. 발이 얼은 이유를 어렵게 캐내려하기 보다는 얼어가는 발에는 아무 관심도 주지 않고 편히 살아가다가 갑자기 동상 걸린 발을 보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꼴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실재를 향해야 하며 그 실체에의 접근을 통해 결과의 기쁨이 아니라 과정의 기쁨을 갈망해야할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에서 기쁨을 구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허탈만이 가득합니다. 원한에서 기쁨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신체에서 기쁨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인식된 우리의 굳어지고 경직된 마음은 아무리 위로와 보복의 성취와 한풀이로도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용서와 잊음으로 잦아들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현실의 물질적인 충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만이 실체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실재를 향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 됩니다.
실체는 물질이나 사회적 구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원리이며 바르게 동작하는 원리에 접근하는 세계입니다. 실재의 세계는 그런 현상들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 궁극적인 좋음의 세상이 너머세계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터전에서 정기를 받듯이 우리의 사회에서 삶에서 일어나는 정기로서의 실체와 그 궁극적 종합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의 너머세계가 있다는 신념을 가집니다. 현실이 잘 돌아가게 하기위한 어떤 원리로서의 세계를 실체의 세계라 하겠습니다. 그런 실체의 세계는 손으로 잡히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고투의 과정을 통해 깨닫는 세계이며 보여 질 수 없는 세계이자 직감으로 느껴지는 세계임에 의해 규명될 수 없으며 제시될 수 없는 그러나 이해될 수 있는 삶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들이 누적되고 합산되며 새롭게 종합되어 실현되는 궁극적인 합일의 세계를 나는 실재의 세계라고 표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