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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 저 한국문화사 관련 서 중 문학사 부분 일부
●근·현대문학에서 나타나는 종교관(宗敎觀)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 이광수는 초기 과학지향적인 사고형태를 보였으나 점차 불교적 인과론에 빠졌음은
과학사상사 강에서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약하고 그후 세대로서 한국 근·현대문학을 주도적으로 이끈
김동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근·현대문학의 도도한 자연주의 흐름 속에 초과학적 영성(靈性)의
세계로 이 물꼬를 연결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는 흔히 「무녀도(巫女圖)」와 이를 확대
개편한 「을화(乙火)」,그리고 「사반의 십자가(十字架)」 등이 꼽히는데 이중 무녀도와 을화에서는 무당과
그녀의 세습무인 딸,그리고 기독교도가 된 아들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인인 아들이 무당인 어머니를 개종시키려 노력하다 어머니가 신 들려 몰아지경에서 휘두른 칼에 찔려 죽고 종내 어머니 무녀도 사멸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무녀도는 김동리의 35세 때인 1947년도의 작품이고(원작은 24세 때인 1936년이었으나 이즈음 개작) 을화는 78년,그의 나이 66세에 발표한 것인데 골격은 젊은 날의 「무녀도」를 유지하면서 장편의 형태로 살만 붙인 것이고 보면 동리문학의 중핵은 바로 이런 무속신앙방면이었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을화’에서 주인공이 섬긴 신은 ‘선도산신’이라고 명시되었다. 산신이 꿈에 나타나 을화를 인도하여 장승백이에 장승이 있는 곳 밑을 파 본 즉 거기에서 ‘선도성모(仙桃聖母) 대왕마님(大王媽任)’이란 글자가 새겨진 명두와 옥가락지,방울 등이 나왔고 이 인연으로 인근 무녀에게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신비한 징험을 준 선도산이란 본서 혈통사 장이나 토착고유사상사 장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신라의 성산(聖山) 중의 하나로 해당 신은 박혁거세의 어머니라는 전설도 있는 곳임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산신을 모신 무녀라면 토착고유사상의 핵심 줄기를 잇는 인물이 되는 셈이고 그와 외래 기독교의 충돌은 토착고유사상과 기독교간 충돌의 한 상징도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녀는 기독교인이 된 아들과의 대화에서
「신자(神子)는 곧 신령님의 아들이자 딸이라,늬는 야수(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락 했지만,보통 무당이락 하는 우리 신자가 신령님의 아들이라 하는 거와 같은 이치다이.」
(중략)
「우리 주 에수님과 무당을 혼동하지 마십시요.」
(중략)
「늬조차 에미를 무시하는구나.」
「아입니다.어머니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어머니에게 들어있는 귀신을 미워합니다.」
「뭐라꼬? 그거는 늬가 느거 야수귀신이나 하느님 귀신을 무시하는 거나 같은 기라. 들어봐라, 늬도 말했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쳤다꼬. 바로 그거다.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는 거 말이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귀신이 붙어 죽게된 사람,살림을 망치게된 사람을 고쳐왔다. 오구나 푸닥거리를 해서 귀신을 그 사람한테서 떨어지게 해주고 저승으로 천도시켜 주는 기라.(중략) 다른 사람 한테도 물어봐라, 내 푸닥거리에서 귀신이 안떨어진 사람이 있는가. 또 내 오구에서 저승으로 천도 못시킨 귀신이 있는가꼬. 그런데 이 에미가 무슨 몹쓸 짓을 했다 말고? 어째서 늬는 이 에미가 그렇게도 비위에 거슬리노? 나는 느거 야수락하는 사람을 암만 좋게 봐줘도,우리 겉은 신자(神子-무당) 밖에 아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먼 타국에서 온 엣날 신자만 제일이고
살아있는 우리나라 신자는 외면해야 되노 말이다.」
「어머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더이상 모독하면 저는 이 집에서 나가겠읍니다.」
(중략)
「술아,내 아들아,늬조차 나를 괄시할래? 어째서 내 말을 그렇게도 알아들어주지 못하노?」
이렇게 무녀는 기독교를 인정하되 예수를 자신과 동류의 사제 중 일인으로 범주 지우고 공존을 모색하는 듯하나 기독교인 아들은 이를 완강히 부정하고 어머니를 귀신들린 사람으로서 전면 부정,회개시켜야할 대상으로만 몰아간다. 따라서 기독교는 토착고유신앙의 완전한 항복,투항만을 요구하는 쪽으로 그려졌다.
이와같은 양인의 태도는 오늘날 천주․기독교의 토착화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인데 최근의 추세는 종교다원주의가 세계적 대세로 정착되면서 타지(他地)의 토착신앙도 하느님에 대한 그 나름 개성적 신앙의 한 형태로 인정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서구사상수용사 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동리(東里)문학에서는 모자간이라는 천륜(天倫)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타협 없는 대결로만 그려졌고 기독교는 긍정적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토착고유신앙은 신비성만
잔뜩 부풀린 가운데 음산·저질스럽게 묘사되다
종내 참혹한 패배로 귀결시키고 만 것은 김동리가 기독교의 편을 들고 전통 무속신앙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시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될 법하다.그러나 평상시 그의 문학이론에서는 반대로 무속신앙에 기초한 ‘제3의 휴머니즘’을 역설하고 있어 혼돈을 주는데 그는 그의 문학이론을 제시한 대표적 언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늘날 내가 말하는 순수문학의 본질적 기조가 될 휴머니즘이란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과 위치에 서는 것인가. 간단히 요약해 보면 우선 서양적인 범주에 제한하여 다음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제1기는 고대의 휴머니즘이니 그리스계로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을 대표로 하는 이성적 인간정신이 그것이며 히브리계로는 기독을 대표로 하는 고차원적 영혼 생장의 인간 확립이 그것인데,이 시기의 내용적 특징은 신화적 미신적 궤변과 계율에 대한 타파로써 가장 원본적인 인간성의 기초가 확립되었던 것이요,제2기는 르네상스로서 표현된 소위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대한 인본주의의 승리가 그것이다.
이 제2기 휴머니즘의 특징은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써 시작되었으느니만치 제1기적 휴머니즘의 부흥이라고는 해도 특히 헬레니즘계의 이성적 인간정신이 위주되었던 것이며 이 이성적 인간정신의 개화로써 과연 오늘날의 난만한 과학시대를 초래한 것도 사실이나 현대 과학정신의 구경적 발달과 발화의 난숙은 다시 공식주의적 변쇄(煩鎖)이론과 과학주의적 기계관을 산출하게 된 것이니 고대의 신화적 우상,중세의 규율화한 신성 등에 대치된 새로운 현대적 우상이
즉 「과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지게된 것이요,특히 과학주의 기계관의 결정체인 유물사관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철학에 있어 니체,하이데가,딜타이,문학에 있어 헤세,만,지드,헉슬리 등으로서 제3기 휴머니즘에의 지향이 선명(宣明)되었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팽배한 데모크라시의 조류도 개성의 자유와 인간성의 존엄을 목적으로 하는 휴머니즘에의 세계사적 의욕의 일면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하 조선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특수성과 이에 대한 부자연한 관련에서 지금 바야흐로 과학주의적 기계관이 성행하는 후진 사회의 특유의 병상(病狀)을 정출하고 있는 바(중략) 그러나 이러한 과학주의적 현대 우상 숭배열이란 세계사적 문화창조의욕에 저해될 뿐 아니라 진실로 민족문화 수립에 있어서는 암이 된다는 것을 반성해야한다.
왜 그러냐 하면 민족문학이란 원칙적으로 민족정신이 기본이 되어야하는 것이며 민족정신이란 본질적으로 민족단위의 휴머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과거 반세기 동안 이족(異族)의 억압과 모멸 속에 허덕이다가 오랜 역사에서 배양된 호매한 민족정신이 그 해방을 초래하여 오늘날의 민족정신 신장의 역사적 실현을 보게 되었거니와 이것은 곧 데모크라시로써 표방되는 세계사적 휴머니즘의 연속적 필연성에서 오는 민족단위의 휴머니즘으로써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민족정신을 민족단위의 휴머니즘으로 볼 때 휴머니즘을 그 기본내용으로 하는 순수문학과 민족정신이 기본되는 민족문학과의 관계란 벌써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제3기 휴머니즘의 본격적 출발은 동서 정신의 「창조적 지향」에서의 새로운 정신적 원천의 양성으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제 역사적으로 신장하려는 민족정신에 입각하여 동양적 대(大) 예지의 문학을 수립하고 제3기 휴머니즘의 세계사적 성격을 천명함으로써 민족문학이면서 곧 세계문학의 지위를 확립하는데 이 땅 순수문학의 정신적 지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문학의 진의」<문학과 인간-김동리전집7-,민음사,pp.79-81)
장황하지만 김동리의 문학사적 비중과 한국문단의 주류격으로 군림하는 이른바 ‘순수문학’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요긴할 듯하여 좀 길게 인용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김동리는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을 동궤어로 쓰고 있는 점인데 덧붙여 유의할 것은 이는 또한 일생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큰형 김범부의 사상과도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범부는 한 강연에서 「세계사회는 ‘코스머폴리턴’이나 공산당이 망상하는 그런 세계사회가 되지는 않습니다.(중략) 모든 국가가 전부 제 개성을 가지고 제 자주독립을 유지하면서 완전한 국제사회라는 것이 이로부터 오는 세계사회의 형태입니다.」(화랑외사,부록,pp.196-202)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가졌던 범부는 일찌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도움으로 도일(渡日)하여 일본에서 신학문을 섭렵,귀국하였던 바 백산상회라면 백산 안희재선생이 경향하던 기관이요 안희재선생은 또한 민족신앙인 대종교 핵심 지도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범부선생 역시 민족종교 - 본서에서 ‘토착고유사상’으로 분류한 방면 - 에 연결 개연성 짙은 인물임을 알게한다. 그는 경상도 일원에 명성이 높은 학자였으나 막상 저술은 제자가 그의 구술을 받아적었다는 ‘화랑외사(花郞外史)’ 한편 밖에 없는 정도로 화랑방면에 일생 집중된 관심을 보였었다. 이는 민족주의자로서 그 출신지가 경주인데서 오는 일종의 지역적 개성(個性)으로 볼 것인데 동리 또한 이런 경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는 일찌기 회고담에서 「내가 인생에 대해서 득력(得力)하게된 것은 내 백씨(伯氏)의 화랑담에서이다. 백씨는 주석에서나 좌담 중에서 단편적이나마 화랑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남다른 감격을 받았었다. 그것은 내 핏줄 속에 화랑이 숨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하는 내 백씨의 신념적인 화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p.180)고 하였거니와 그의 데뷔작 제목이 「화랑의 후예」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점 해방 후 한국문단의 주조음이 된 동리의 이른바 ‘순수문학’이란 그가 기 언급한 바 ‘민족문학’의 한 갈레임이 확실하며 그 민족문학은 또한 본서에서 살핀 ‘토착고유사상’ 류를 계승·발전시켜 세계 사상사에 민족 고유의 개성으로 당당히 합류하려는 범부류의 역사관을 배후에 깔고 있었다고 보겠다. 범부는 정치적으로 우익의 요인으로 활동하였고 2대 민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형의 노선에 충실하였던 동리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과정에 「임정」의 귀환을 기다려 참여를 결정하자는 유보논을 펴다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던 바 모두 상기 사실과 맥을 같이하는 행위 노선들이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필 때,그의 소설에서 나타난 무속신앙의 패배는 그의 진정한 소망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뷰작인 ‘화랑의 후예’에서도 화랑의 후손인 한국인들이 일제시대 저질·타락됨을 냉철히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어떤 구원의 암시도 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화랑의 몰락을 내심 기원한 것이 아님은 화랑교도적인 그의 주변 환경을 감안치 않더라도 재언 불요인 것이다. 평론가 김병익이 동리문학을 ‘개성의 자유와 인간성의 존엄’보다는 차라리 ‘동양적 자연관과 신비한 운명론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심증을 굳혀’주고 결국 이를 ‘이론과 작품과의 괴리’로 평가(김병익,앞책,p.43)한 것은 그의 상기 이율배반성을 설명하는 적절한 평가이긴 하지만 다만 괴리 자체가 그의 진의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평자가 오해할 정도로 그의 이론과 작품은 서로 다른 경향을 보였던가?
정확히 판단키는 어려우나 이는 순수사학자에 비정되는 진단학회 회원들이 우리 민속(民俗)과 무속(巫俗)에 객관적 분석·연구만 하고 주관적 의미부여나 감동을 서두르지 않았던 태도와도 연관될 개연성이 있지 않나 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문화의 세례를 받은 진단학회와 문학에 있어서의 과학지향적 자연주의에 영향받은 순수문학그룹은 객관적 고찰·묘사에는 철저하되,이에 대한 주관적 감정표출은 가슴에 끓어오르는 것이 가득하더라도 최대한 이를 절제하려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점 동리문학에 나타난 토착신앙의 참혹한 패배는,이들 세력이 괴멸·능욕되던 당대 현실을 입술을 물고 그려낸 객관적 정황묘사이지 그의 주관적 신념 방향의 표현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사실 그의 가슴 밑바닥 신앙에 대해서는 오히려 한 수필류의 글에서 진격히 토로되었으니
나는 문학과 철학을 공부해서 사람 사는 일과 종교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널리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신(神)이랄지 불(佛)이랄지 천(天)이랄지에 대해서 그 기능을 믿고 있지만,특정 교단에 귀의하지 않고 있다. 나는 사람에게 혼이 있는 것처럼 이 우주에도 혼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단순히 부모한테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 근원은 천지 혹은 우주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또 나는 사람의 혼과 우주의 혼은 근원에 있어 둘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기도와 치성의 효용성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 혼의 이름을 신·불·천 그 어느 것으로도 부르고 싶지 않다.
나는 기도드릴 때마다 천지신명 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다. 천지신명은 태고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불러오던 우주 혼의 이름이요,관세음보살은 외래 종교의 그것으로서 가장 오래이며,그만큼 친근미가 느껴지기 때문(나를 찾아서,전집8,p.19)
이라고 고백한 바 있는데 여기서 그의 본심은 우리 토착고유신앙에 뿌리 박고 있음을 재확인케 하는 것이다. 그가 부르는 신(神) 명호가 「천지신명(天地神明)」이었고 이는 「태고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불러오던 우주 혼의 이름」이기 때문이라 함에서 재언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방 또 다른 각도에서 이런 방면에 짙은 관심을 들어내었던 인물로 최근의 이문열을 들 수 있다. 그는 데뷰작 「사람의 아들」 에서 종교학자에 방불한 조예와 박식을 들어내었는데 정작 보면 그의 유년기 이래 사상적 기저가 된 유교적 신관(神觀)이 배경에 깔린 듯하나 번다하여 여기서 상론치는 않겠다. 아무튼 초기 이광수의 뷸교적 신관과 짝하여 동서문명의 물결이 서로 부딪치고 취사선택되는 과정이 한국근·현대문학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 흔적들로 볼 만하다.
본서는 문화사서로서 사상사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사상사 내부의 양대 지주가 되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추이가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그 한 축인 종교부분을 근·현대문학의 주류로 지칭되는 이른바 순수문학 핵심부 쪽을 중심으로 간단히 조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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