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의 생애와 서예
♠왕희지의 생애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句)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智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왕희지의 서예 인생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왕희지의 서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변화 통일 : 왕희지의 글씨를 말할 때 “만자가 같지 않다”고 말한다. 즉, 용필과 결구의 변화가 명확하면서도 통일의 엄밀함을 갖추고 있다.
2.공간 감각 : 글씨를 쓸 때에 물론 검은색의 점과 획을 배분하지만 반드시 고려할 공간은 흰 공간이다. 그런데 왕희지는 이 흰 공간을 삼차원의 심원함으로 글씨가 광활하고 생동적으로 보이는 공간으로 보이게 했다
3.이성과 감정의 배합 : 왕희지의 글씨를 이성파인지 감성파인지 많이 따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이송과 감정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다.
♠당 태종과 왕희지
당 태종은 왕희지의 서를 무척 좋아 하였다. 그는 왕서에 거의 최대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인 데, 단지 당 태종 개인적으로 왕서를 좋아한 점도 많은 비중은 있겠지만, 남북조의 통일 후 양자간의 문화 융합 정책은 대부분 남조의 것을 주로 삼고 북조의 것을 약간씩 가미하는 경향이었으며 사실 왕서의 북 조 유행은 남북조의 말기부터 서서히(앞에서 언급) 싹튼 것이었다. 또한 참고적으로 수와 당은 모두 북조 계통의 왕조로 남조 문화의 융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현상의 결과를 논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여하튼 왕서에 있어서 이러한 위치(구우의 서가 모두 왕서를 근본으로 하고, 왕서에 대한 왕과 귀족의 지나친 숭배)는 왕서 에 대한 반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왕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서 이전에 생성된 전예의 필법을 응용하여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우의 정제된 해서와는 다른 해서를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결과의 문제는 당 태종 당시의 문제가 아니라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중국서예이론체계》 態秉明 동문선出
2.《中國書法發展史》 陳振濂 이화문화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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