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생중계하는 해설자, 생각
인도순례 중에 한 3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한 한국 남자분을 만나 며칠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 종일 옆에서 한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행지에서마다 어김없이 곁에서 나도 뻔히 보고 있는 눈앞의 모습을 곁에서 생중계를 하듯이 하나하나 중계방송을 해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런 벗과 24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아니 이런 친구와 평생을 함께 살면서 그 끝도 없는 소리의 홍수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면 또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여기 제가 우려하던 바로 그 상황이 놓여있습니다. 끊임없이 떠들고, 재잘대고, 수다를 떨며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정신없는 그런 친구와 우리는 사실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한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정도가 아니라, 나와 일평생 동안 한 몸을 함께 쓰고 있는 바디메이트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누굴까요? 그 친구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입니다. 생각은 도무지 조용히 하려 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소리를 끊임없이 뿜어내지요. 심지어 참선을 하려고 선방에 앉아 있는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찾아와 지껄여 댑니다. 흡사 축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는 듯 우리 내면에는 눈앞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생중계 해설가가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 한 가지는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해 주는 중계해설이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온갖 생각, 판단, 가치관, 과거 등에 걸러서 자기 식대로 판단함으로써 색안경에 걸러진 것만을 말하는 습성이 있는 것이지요.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이러한 세상에 대한 ‘해석자’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그들은 그 해석자가 뇌의 왼쪽 대뇌반구에 있는 것으로 그 이야기는 진실을 왜곡하며 신뢰하기 힘든 특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인간의 왼쪽 대뇌반구는 진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신경생리학자 칼 프리브램은 원숭이가 받아들이는 시각정보가 시각피질로 바로 보내지는 게 아니라 두뇌의 다른 영역을 거쳐 일단 여과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임이 증명되었고, 심지어 어떤 연구에서는 우리가 보는 내용의 50% 이상은 실제로 눈으로 들어온 정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바람과 기대로부터 짜깁기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현실을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 반 이상이 왜곡된 정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생각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던 모든 관념, 편견 등을 섞어 한없이 왜곡된 설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평생을 살고 있는 우리 내면의 ‘생각’의 실체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속삭이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의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이 곧 나라고 믿을 것도 없습니다. 그건 내 생각도 아니고, 진짜도 아니며, 그저 인연 따라 오고 가는 바람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생각에 깊이 관여하지 마세요. 그럼으로써 보다 명료하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생각을 지켜보는 자
어느 날 하루 남편이 밤늦도록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으면 내면의 목소리는 말합니다.
‘남편이 왜 이리 늦지? 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술 잔뜩 먹고 취해서 오다가 길에서 쓰러져 자나? 아니면, 예전에 빨래 하다가 나온 루주자국이 있었잖아? 혹시 이놈이 다른 여자하고 바람피우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럴 위인도 못돼! 그러면 왜 이리 늦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 몰라 몰라 복잡해...’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남편이 그저 늦게 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의 생각은 끊임없이 속삭이며 남편을 살리고 죽이기를 반복하고, 교통사고에 바람피우는 사람으로까지 몰고 가며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심장은 두근두근 발작을 일으키곤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 경험과 편견 등을 덮씌운 채 내 식대로 왜곡하고 해석해서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곤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식대로 창조해 놓은 가짜의 현실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세상에 살고 있고, 저마다 세상을 보는 필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터를 근사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 또한 내 안에서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에게 생겨나는 모든 문제는 사실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 생각이 만들어낸 거짓된 구조물이요, 마음의 헛된 소란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생각이 만들어내는 허망한 조작과 소란스런 창조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해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무시하면 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그 내면의 목소리가 ‘나’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목소리가 ‘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저 거기에서 무슨 소리가 끊임없이 지껄여지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러면 나는 누구일가요? 그 생각이 나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을 지켜보는 자’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까요? 내면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고요히 앉아 내면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지켜보면 그 소리는 힘을 잃고 침묵하기 시작합니다.
왜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요? 이 몸을 함께 쓰고 사는 이 생각이라는 바디메이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녀석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그 녀석의 꿍꿍이에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지금껏 그 생각이라는 녀석이 온갖 목소리를 지어내며 나를 조종하고 내 안에 거짓된 세상을 창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휘두르고 주인 행세를 해 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저 힘없이 휘둘려 오기만 했습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이지요. 분명히 알았다면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려면 그 내면의 목소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알려면 두 눈 멀쩡히 뜨고 그가 하는 짓을 똑똑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지켜봄으로써 생각과 생각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겨나고, 그 공간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내면은 점차 고요함과 사랑과 번뜩이는 지혜로 물결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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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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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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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온갖 생각, 판단, 가치관, 과거 등에 걸러서 자기 식대로 판단함으로써 색안경에 걸러진 것만을 말하는 습성이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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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빈공간.... 그곳에서 늘... 평온하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그 평온함임을... 가슴에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그 생각이 저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이제는 생각의 특성을 알기에
나쁜 생각에서는 금방 벗어나곤 하는데
기분 좋은 생각은 아직도 한없이 빠져들곤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