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고려 때의 효자 김천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의 두릉동(杜陵洞)은 드롱담 또는 효자리라고도 부르는데, 이 마을에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연이 전해온다.
[고려사 卷一百二十一 列傳 孝友 金遷]
김천은 명주 아전이며 어릴 때 이름은 해장이다(金遷, 溟州吏, 小字海莊). 고려시대 고종말년 몽고군이 명주 땅까지 침입하였다. 이 때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 김덕린이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김천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어머니와 동생을 찾으며 밤낮없이 울고 지내다 포로가 된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도중에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그 후 14년이 지났을 때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사람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시장에서 “명주 사람 있소” 라고 외치며 3일이나 돌아다녔다. 마침 정선 사람 김순(金純)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명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습성은 김순에게 “김씨라는 여자가 동경에서 말하기를 ‘나는 원래 명주 사람인데 해장이란 아들이 있소’(有女金氏吊京云, ‘我本溟州人, 有子海莊). 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당신은 해장을 아는가?”하고 물었다.
김순은 김천은 내 친구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습성은 김순에게 편지를 해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편지는 몽고에 포로로 끌려간 김천의 어머니가 김천에게 보낸 편지였다.
“나는 살아서 어느 주 어느 마을의 누구 집에 와서 노비로 일하고 있다.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하고 낮이면 밭 매고 밤이면 절구질 한다. 그동안 온갖 고생은 다 겪었다. 누가 나의 생사를 알겠는가?”
어머니의 편지를 본 김천은 통곡하였다. 김천은 식사를 할 때에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기 위해서는 속전(贖錢)을 내야했으나 가난한 김천에게는 재물이 없어 이웃사람에게 은을 꾸어 개경으로 올라왔다. 그는 조정에 모친을 찾으러 가겠다고 신청했으나 조정은 허가하지 않아 되돌아와야 했다.
충렬왕이 원나라로 갈 무렵에 김천은 또 다시 개경에 와서 청하였으나 조정의 결정은 지난번과 같았다. 김천은 오랫동안 개경에 머물면서 옷은 헤어지고 식량도 떨어져 우울하게 지내던 중 길에서 같은 고을 스님 효연(孝緣)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정을 하소연 하였다.
효연은 “내 형 천호(千戶) 효지가 이번에 동경에 가니 당신은 따라갈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주선하리다(吾兄千戶 孝至, 今往東京, 汝可隨去).” 하고 형에게 김천을 소개하였다.
어떤 사람이 김천이 편지 받은지 6년이 되었다고 하자 “당신이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지 벌써 6년이 지났는데 그간 모친의 생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도중에 불행히 강도를 만나면 목숨과 돈을 빼앗길 따름이다.”
그러자 김천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시신이라도 수습하여 돌아올 것입니다.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데 목숨과 몸뚱이를 어찌 아끼겠습니까?”
김천은 효지를 따라 동경에 들어가서 고려의 통역 별장 공명(孔明)과 함께 북주 천노채로 가서 모친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은 원의 군졸 요좌(要左)의 집이었다. 한 노파가 나와서 맞이하는데 누더기 차림새가 형편없었고 얼굴에는 때가 덕지덕지 묻었다. 김천은 그 노파가 자기 어머니인줄 몰랐다.
공명이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본시 고려 명주 땅 호장 김자릉의 딸인데 동생인 김용문은 이미 진사 급제하였고 나는 호장 김종연에게 출가하여 해장과 덕린 두 아들을 두었는데 덕린은 나를 따라 이곳에 와서 있은지 이미 19년이 되었소.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백호 천로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소. 오늘 뜻밖에 다시 우리나라 사람을 보게 되었구려(予本溟州戶長 金子陵女, 同産進士金龍聞已登第. 予嫁戶長 金宗衍, 生子二, 曰海莊·德麟. 德麟隨我到此, 已十九年, 今在西隣百戶 天老家爲奴. 何圖今日復見本國人?)”
김천은 이 말을 듣고 엎드려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며 자신이 해장임을 밝혔다. 그러자 어머니는 김천의 손을 쥐고 울면서 “ 네가 진정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죽을 줄만 알았구나.” 라고 하였다.
요좌가 마침 집에 없어서 김천은 어머니를 속신하지 못하고 동경으로 가서 별장 수룡(守龍)의 집에 한 달이나 유숙하다가 수룡과 함께 요좌 집에 가서 속신(贖身)을 요구하였으나 요좌는 거절하였다. 김천이 애걸복걸 하여 은 55냥으로 겨우 속신하였다(遷哀乞, 以白金五十五兩贖之).
김천은 동생 덕린도 만났다. 그러나 가지고 온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은 속신시킬 수 없었다. 김천은 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생 김덕린은 동경까지 배웅하러 와서 울었다.
“지금은 따라가지 못하나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모자가 서로 안고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 때 중찬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렀다. 동경에는 김천의 이야기가 고려인들 사이에 크게 화제가 되었다. 김방경은 김천 모자를 불러보고 칭찬과 감탄을 하고 원나라 관부에 부탁하여 증명서를 만들어 주어 식사와 숙소 이용에 도움을 주었다.
명주 가까이 왔을 때 김천의 아버지 김종연이 이 소식을 듣고 진부역까지 마중 나와 부부가 서로 기뻐하였다. 김천이 술잔을 들어 올리고 통곡을 하니 좌중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김자릉은 나이 79세였는데 딸을 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땅에 엎어졌다. 그 후 6년이 지나 천로의 아들이 김덕린을 데리고 왔으므로 김천은 빚을 얻어 86냥을 주고 아우를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김천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 몇 해 안가서 빚도 다 갚고 아우 덕린과 함께 종신토록 부모님께 효성을 다 하였다.
** 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에 효자비(孝子碑)가 있다.
첫댓글 피눈물 나는 감동의 효자이야기입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내 나라가 온전치 못하면
배성들만 개고생합니다 !
작그의 나라꼴이 풍전 등화인데.....
감동이네요.. 효자비 세우는 것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