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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대경상록자원봉사단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9년 9월 24일(화)
장소 : 하동 일원
공무원연금공단 대구지부(07:00 출발) - (166km. 2시간30분. 아침 40분) - 하동 송림(10:00 도착. 관람 40분. 10:40 출발) - (14.3km. 24분) - 평사리(11:04 도착. 관람 1시간. 12:04 출발) - (16.4km. 30분) - 쌍계사(12:34 도착. 점심 40분. 관람 1시간30분. 2:44 출발) - (15.9km. 28분) - 연곡사(3:12 도착. 관람 1시간 10분. 4:22 출발) - (11.3km. 14분) - 석주관(4:36 도착. 관람 20분. 4:56 출발) - (17.0km. 14분) - 운조루(5:10 도착. 관람40분. 5:50 출발) - (164.5km. 1시간 50분) - 대구 도시철도2호선 용산역(7:40 도착. 해산)
현지 사장에 따라 변동 될 수 있습니다.
* 회비 3만원
* 아침(간편식). 점심. 생수 제공
* 간편 복장에 운동화 혹은 등산화 착용
* 신청 :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사무실로
* 선착순 40명 마감되었습니다.
하동 송림 (河東松林. 천연기념물 제445호. 경남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 443-10번지)
하동송림은 조선 영조 21년(1745) 당시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심었던 소나무숲으로, 모두 750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노송의 나무껍질은 거북이 등과 같이 갈라져 있어 옛날 장군들이 입었던 철갑옷을 연상케 한다. 숲 안에는 활을 쏘는 장소인 하상정(河上亭)이 있어 궁사들의 단련장이 되고 있다.
하동송림은 오늘날 국내 제일가는 노송숲으로 넓은 백사장과 맑은 섬진강물이 어우러진 경치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평사리 최참판댁
지리산 거대한 능선이 남으로 가지를 친 남부능선의 대미에 해당되는 성제봉 아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미점리 아미산 아래에서 동정호까지의 넓은 들판, 만석지기 부자를 서넛은 낼만한 악양 '무딤이들'이 그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이다. 평사리가 위치한 지명인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중국에 있는 지명을 따와서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다.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에 소상팔경이 있으며, 평사리들에 위치한 동정호와 악양의 소상팔경은 이곳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형제봉 중턱 300m에 위치한 사적 제151호 고소성은 신라시대 축성한 것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아래 두고 천년의 발자취를 말해준다.
동학혁명에서 근대사까지 우리 한민족의 대서사시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이곳 평사리에 소설속의 최참판댁이 한옥 14동으로 구현되었으며, 조선후기 우리민족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은 토지세트장이 잘 조성되어 있고 인근의 평사리 문학관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전국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문학제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문학마을로써 자리매김 될 전망이며 또한 소설속의 두 주인공을 캐릭터로 개발하여 관광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쌍계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쌍계사 (운수리))
신라 성덕왕 21년에 대비 및 삼법 두 화상께서 당나라에서 육조 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지리산곡 설리 갈화처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범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절을 지어 조사를 봉안하고 옥천사라 이름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에 우리 불교 범패 종장이신 진감국사께서 선사의 도풍을 양모하여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리셨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스님등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 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당사는 국보 1점, 보물 6점의 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천왕상, 정상탑, 사천왕수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부속암자가 있으며 서부 경남 일원의 사찰을 총람하는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로서,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경상남도 하동군 )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거북받침돌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최치원 사산비
1)최치원의 사산 비문의 내용은
최치원의 사산비문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2)최치원의 사산 비문은
경남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비(851 이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
초월산 대숭복사비명(886년 이후),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893년) 등과 함께 ‘사산비명’으로 불린다.
3)최치원의 사산비문의 개요는
경남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비(국보 제47호)
국보 제47호로 통일신라 고승 진감선사 혜소(774∼850)의 주요 행적을 담고 있다. 이 비는 최치원이 당에서 귀국한 후 3년 만인 31세 때 직접 짓고 쓴 것으로, 행서 필의가 가미된 해서체로 총 38행 2,414자이고 글자 한자의 자경(字徑)은 2.3㎝이다. 비문은 유교 불교 도교를 하나로 파악하고 있는 최치원이나 당시 신라하대 지식인의 사상적 경향을 담고 있어 더없이 중요하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8호)
성주산문의 개조 무염(無染, 801∼888)의 공덕을 기린 묘탑비이다. 무염의 제자들이 기록한 행장을 바탕으로 최치원이 비문을 만들고, 글씨는 최언위가 썼다. 주요내용은 무염의 입적과 비문찬술과정, 무염의 생애와 공덕, 오언고시체 70구가 적혀 있는데, 최치원의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의식을 볼 수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138호)는 지증대사 도헌(道憲)의 공덕을 기록한 탑비. 지증은 다른 선문의 개산조들과 달리 당나라에 가지 않고 혜은으로부터 북종선의 법을 이어 희양산문을 이루었는데 882년 입적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다.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315호)
희양산 기슭 봉암사에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는 진성왕 7년(서기 893년) 무렵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시 경주 분황사 노스님이었던 혜강(慧江)이 글을 쓰고 새긴 것으로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생애와 신라불교 선종사(禪宗史)가 기록되어 있다. 비의 높이는 무려 2.73m, 너비 1.64m로 비문에 새겨진 글자만 무려 1만3500자가 넘는다.
초월산 대숭복사비
앞의 세 비와 달리 최치원이 왕명으로 신라 왕실 사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유래를 기록한 것인데, 인정과 효례, 유불의 상통성, 풍수설, 동인(東人)의식을 담고 있다. 헌강왕11년(885년)부터 시작하여 진성여왕때 완성하였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河東 雙磎寺 大雄殿. 보물 제500호.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쌍계사 (운수리) )
쌍계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1년(722) 대비화상과 삼법화상이 세워 옥천사라 불렀다고 하며 정강왕(재위 886∼887)이 두 개의 계곡이 만나는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쌍계사로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에 탔던 것을 벽암대사가 인조 10년(1632) 다시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의 중심 법당으로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대웅전은 이 때에 다시 지은 건물로 짐작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들의 형태가 비교적 우아한 곡선과 오래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가운데 3칸에는 4짝의 여닫이문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2개씩 놓고 있으며, 양쪽 끝 칸은 2짝씩 문을 달아 공포를 1개씩 놓았다. 건물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안쪽을 가린 우물천장으로 꾸몄고 불단 위로 지붕 모형의 닫집을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기둥이 높아 건물의 규모가 크게 느껴지는데 조선시대 불교 목조 건축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河東 雙磎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四菩薩立像. 보물 제1378호.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그리고 일광·월광·관음·세지보살로 추정되는 네 보살입상이다.
중앙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은 본존불로서 삼불상 중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육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동그스럼해진 머리는 이마 위쪽과 머리 꼭대기에 중앙계주(계珠)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둥글넓적한 얼굴에는 근엄한 듯 온화한 미소가 엿보인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통견(通肩)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도록 함으로써 17세기 전반 경 이후 불상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옷 입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실제 인물의 손처럼 표현되어 사실성이 돋보여 조성 화원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느끼게 한다.
정면을 향하여 본존불의 오른쪽에 모셔져 있는 약사불은 굽어보는 듯한 자세와 머리 모양, 얼굴 표정, 짧아진 목과 당당한 어깨, 넓은 무릎, 사실성 넘쳐나는 손의 표현, 밋밋한 듯 부피감이 있는 신체 등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석가모니불에 비하여 크기가 다소 작아지고 아미타인(阿彌陀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얼굴과 귀가 약간 길어지고 변화된 옷 입는 방식과 보다 복잡해진 옷주름 등만이 다를 뿐이다.
사보살입상은 약사불과 아미타불 좌·우에 서 있는 네 구의 보살입상으로 일광·월광보살상과 관음·세지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네 구의 상 모두 배를 앞으로 약간 내민 듯한 S자 모양의 늘씬한 체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귀걸이·목걸이·팔찌 등의 장식을 하였다. 약사불의 양 옆에 있는 일광·월광보살상은 보관 중앙에 해와 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왼손을 어깨 위로 들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의 양 옆에 있는 관음·세지보살상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을 아래로 내렸는데, 각각 연꽃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다.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천의 자락, 양 손·발 등의 조각 수법이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이어서 석가모니불 및 약사불상과 함께 작품성이 뛰어나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인조 17년(1639)에 청헌(淸憲)비구를 비롯한 11명의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쌍계사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조선시대 17세기 전반 경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쌍계사 대웅전 삼세불탱 (雙磎寺 大雄殿 三世佛幀. 보물 제1364호.. 경상남도 하동군 )
쌍계사대웅전(보물 제500호)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약사불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도를 배치한 삼세불탱화이다.
석가모니불도는 화면 상단 중앙에 큼직하게 본존불을 그린 다음, 좌우 대칭이 되게 문수·보현을 비롯한 8대보살과 제석·범천, 2위의 타방불,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용왕·용녀와 6금강, 2위의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은 17∼18세기 유행의 전형적인 키 모양의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뾰족하며,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귀·눈·입·코 등은 단정하나 몸의 형태가 네모꼴을 이룸으로써 18세기 후반의 불화들에서 나타나는 경직성을 느끼게 한다.
약사불도는 아미타인과 같은 손모양을 하고 왼손에 약합을 든 약사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게 일·월광보살을 비롯한 6대보살과, 2위의 사천왕, 12신중을 그려 놓았다. 전반에 걸쳐 인물의 형태와 색채 및 표현기법 등은 석가모니불도와 유사함을 보이나, 아미타불도와 함께 화면 구성이 다소 느긋함을 볼 수 있다.
아미타불도는 주불을 비롯하여 주위에 빙둘러서 관음·세지보살을 포함한 8대보살과 2위의 사천왕, 2위의 타방불, 마치 16나한의 모습과도 같은 10대제자를 배치시켜 놓았다.
이 삼세불도는 18세기 전반 전라도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대표적 불화승 ‘의겸’으로부터 1780년대의 ‘승윤’ ‘평삼’으로 이어지는 불화승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형태를 갖춘 18세기 후반의 대형불화로서 비교적 정교한 필치와 화려하면서도 은은함을 보여주어 화풍파악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하동 쌍계사 동종 (河東 雙磎寺 銅鍾. 보물 제1701호. 경상남도 하동군 )
현재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작품은 전체높이가 94cm이고, 입지름이 62cm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그 규모가 대형에 속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빛이 감도는 쌍계사 동종은 둥글고 높게 솟은 천판위에 단룡과 음통을 갖춘 종뉴가 있으며, 천판 아래로 승형의 입상화문대를 촘촘하게 표현하였다. 동종의 종형을 살펴보면, 외선이 천판 아래에서 종신 중단까지는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지만, 종신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직선에 가깝게 처리하고 있어 시각적으로 종구가 좁아진 형태이다.
종신은 다양한 도안이 고부조로 장식되었는데, 천판 아래에는 2줄의 연주문사이로 연판문과 당초문을 빽빽하게 부조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4개의 연곽과 원권(圓圈)의 범자(梵字)를 교대로 장식하였다. 연곽의 전체형태는 사다리꼴이며 연화당초문의 연곽대를 구획하여 그 내부로 만개된 9개의 연뢰를 표현하였고, 원권의 범자는 2단으로 상단에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하단에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주회하였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있는 빈 공간에는 4구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패가 장식되어 있는데, 보살입상은 두 손에 연꽃을 쥐고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며, 위패에는 왕실의 안녕과 불법의 전파를 기원하는 ‘종비반석왕도미륭혜일장명법주사계(宗啚磐石王道彌隆惠日長明法周沙界)’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다. 마지막 하단에는 연화당초문을 사용하여 한 줄의 띠 장식을 둘렀다.
쌍계사 동종은 종신 중간에 양각으로 제작연대와 봉안사찰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을 통해 동종
은 ‘신사년(辛巳年)’에 현재의 쌍계사 대종으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를 간지인 ‘신사(辛巳)’로만 간략하게 기록하였는데, 1857년에 작성된『영남하동쌍계사사적기문(嶺南河東雙磎寺事蹟記文)』현판에 따르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숭정년간(1628~1644)에 조선후기 유명한 선승인 벽암당각성(碧巖堂覺性, 1575~1660)과 소요당태능(逍遙堂太能, 1562~1649)이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동종은 중창이 진행되었던 기간에서 간지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1641년(인조 19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제작 장인을 기재하지 않았지만, 숭정연간 쌍계사 중창불사에 동원된 승장이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이 범종은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겪고 난 후 새로운 조선 후기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면서도 그 크기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단정한 주조기술과 문양이 돋보이면서도 조선 후기 전통형 범종을 고수하고 있는 1641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인 점과 17세기 승려 장인 사회를 연구하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하동 쌍계사 승탑 (河東 雙磎寺 僧塔. 보물 제380호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목압길 103, 쌍계사 (운수리))
쌍계사 북쪽 탑봉우리 능선에 위치한 이 탑은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승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고 위는 머리장식부분이다.
기단은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8각의 가운데받침돌을 올렸다. 그 위로 다시 솟은 연꽃무늬를 새긴 윗받침돌을 올려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기단 위에는 두꺼운 괴임돌이 삽입되어 눈에 띄는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있다. 탑신의 몸돌은 밋밋한 8각이다. 지붕은 넓으며 밑면에는 서까래인 듯 보이는 받침을 두고 있다. 추녀는 끝에서 위로 들려있고 여덟 곳의 귀퉁이 끝에는 아름다운 꽃조각이 앙증맞게 솟아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있고 짧은 기둥 위로 타원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모든 부재를 8각형으로 조성한 탑이며, 각 부의 비례가 적당하지 않고 조각도 생략되거나 형식화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탑비와 함께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곡사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774)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는 연곡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화엄사종주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습니다.
1981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경내에는 동부도, 북부도가 국보로 연곡사삼층석탑, 현각선사탑비, 동부도비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동부도는 도선국사의 사리를 보관하던 것으로 전하며 연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 말기의 부도이며, 이 시기에 만들어진 부도 중 조각이 정밀하고 가장 아름답습니다. 또한 동부도와 나란히 서 있는 북부도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따라 정교하게 조각 되었고, 부도에 새겨진 문비, 향로, 사천왕상 등의 윤곽이 섬세하여 우리나라 부도를 대표할 만큼 아름답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 (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 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내동리))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승탑은 유명했던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승탑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승탑은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 승탑은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求禮 燕谷寺 東 僧塔碑.보물 제153호.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연곡사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승탑이 3개 있는데, 이 비(碑)는 동승탑 앞쪽에 서 있는 비로, 비몸돌이 없어진 채 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다. 받침돌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엎드린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실성이 떨어지며, 잘려진 것을 복구해 놓아 부자연스럽다. 용의 등에는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조각해 놓아 새로운 느낌이다.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된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머릿돌은 용무늬를 생략하고 구름무늬만을 새겼으며, 꼭대기에는 불꽃에 휩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놓았다. 작고 아담해진 규모와 통념을 벗어난 조각형태를 지닌 고려시대의 비로, 통일신라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인다.
구례 연곡사 북 승탑 (求禮 燕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 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승탑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승탑은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 승탑은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등을 꾸며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승탑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 승탑’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은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求禮 燕谷寺 逍遙大師塔. 보물 제154호. 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전기까지 선을 닦는 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다. 이 탑은 연곡사 서쪽에 있으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에 새겨진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 효종 원년(165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괴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은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8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지막하게 꽃장식을 얹어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연곡사 부도밭에는 소요대사탑(逍遙大師塔) 이외에 3기의 승탑이 더 있는데, 소요대사탑 (逍遙大師塔) 탑들에 비해 조형성은 떨어지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연곡사에 있는 비(碑)로,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비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이 웅장하며,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안상(眼象)과 꽃조각이 새겨져 있다.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 비의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앞면의 가운데에는 탑이름이 새겨져 있어, 현각선사의 탑비임을 알수 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비는 고려 경종 4년(979)에 만들어졌다.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求禮 燕谷寺 三層石塔.보물 제151호.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354)
연곡사의 법당 남쪽에 서 있는 석탑으로, 3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의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마다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다. 또한 윗면에는 경쾌한 곡선이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도 우아하다. 맨 윗기단이 매우 넓어졌으며, 이에 반하여 탑신부는 줄어든 느낌이 있지만, 맨 아래 기단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도 온화하며 안정감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탑이다. 탑에 사용된 돌의 구성양식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후기로 짐작된다. 석탑의 3층 지붕돌은 밑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1967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에 복원되었다. 이 때 윗층 기단 안에서 동조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求禮 石柱關 七義士墓.사적 제106호.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171 )
정유재란 때 전라도지방의 관문이었던 석주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출신 의사(義士) 7명의 무덤이다.
석주관은 경상도지방에서 전라도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안음의 황석산성·진안 웅치·운봉 팔량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때부터 이곳에 진영이 설치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을 집중공격하였다. 그러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후 왕득인(王得仁)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졌다.
구례 운조루(求禮雲鳥樓.중요민속문화재 제8호.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오미리))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 이라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 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에서 따온 글 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있다.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 (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 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의 누 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 평 129평 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 자형의 사랑채와 ㄷ 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있는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조들의 유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첫댓글 금년도 하반기 첫 문화 탐방계획입니다..뜻있는 회원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화요일이라 합창부는 동참 못 하겠습니다
잘 다녀 오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