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예진당 / 황해숙
엊그제 입춘 절기를 맞이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봄이 왔다는 말이 무색하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우리나라 곳곳에 함박눈이 내렸다. 그러나 날씨가 아무리 얼었다 한들 문 앞에 와 있는 봄이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소복하게 쌓인 눈 밑 흙 속에서 새싹이 꼬물꼬물 자라고 있을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여기저기서 맡은 임무로 동분서주했다. 내가 원하지 않았으나 임무가 주어졌고 딱히 거절할 사유가 없었기에 억지춘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무엇 하나 만만치 않았다. 단체에서 해야 할 사무적인 일은 물론이거니와 회원들이 요청에 일일이 응대하면서 발단을 지나 맞춤 서비스를 하면서 전개를 넘어 호흡을 몰아쉬면서 절정과 위기에 다다르고 마지막 숨 고르기를 하면서 결말에 당도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어려운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생기면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일에 빠져드는 것이 내 강점인 동시 약점이다. 나는 늘 그렇게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양날의 칼날처럼 외줄 타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곤 했다. 어떤 날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위태위태했으며 어떤 날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등줄기가 흥건하게 땀에 젖곤 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짜릿한 환희의 순간도 있었다. 늦은 밤 산더미처럼 산적했던 일을 마무리 짓고 창문 너머 칠흑 같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본 순간은 천하를 품에 안은 듯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정산한 자료를 기관 담당자에게 전달했을 때 기준에 맞추어 꼼꼼하게 잘해서 손댈 곳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을 때 환호하며 전율했다. 어려운 임무를 맡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에 파묻혀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임기를 마칠 즈음이 되면서 홀가분한 기쁨과 품 안의 자식을 내려놓듯 허전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산더미 같은 일이 얽히고설킨 실마리를 푸는 것처럼 힘이 들고 고단하였지만 하나씩 해결하면서 자신이 굵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작은 나무가 햇살과 비바람을 교대로 받으면서 강하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크고 깊고 넓어지고 있었다.
두 손에 쥐고 있었던 이것과 저것을 내려놓았을 때 내 손이 텅 빈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손에서 하나를 내려놓았을 때 더 큰 다른 것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하여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내 손에 무엇을 잡을 수 있을까. 작고 이름 없는 들꽃을 만나게 되면 그 작은 몸짓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게 살포지 힘을 주어 잡으련다. 설령 내가 감당하기조차 힘든 큰 별을 손에 잡으라 한다면 그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어떠한 뒷담을 듣게 될지 모르겠으나 거머쥐고 그 빛과 향기를 감당하고자 혼신을 다할 것이다. 내가 예가지 오는 동안 꿈이 등대가 되어 주었고 그 꿈이 나를 살게 했다. 하여 다는 다시 고단하나 찬란한 꿈을 꾼다. ♠
2. 봄이 오는 길목에서
예진당 / 황해숙
겨우내 꽁꽁 닫았던 창문을 활짝 열고 기지개를 켠다. 얼굴을 휘감는 기온은 화들짝 움츠릴 만큼 차갑다. 그 찬 기온을 타고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겨울 햇살과 다른 빛깔이다. 그 빛을 받은 대지의 생명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상상이 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봄이다! 불현듯이 외마디를 뱉었다. 예까지 오는 동안 한 여인의 삶을 반추해 본다.
한없이 감사가 넘친다. 이렇다 할 명예를 가져본 적 없다.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살면서 천륜에 역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욕심을 부릴 만큼 한가한 적 없었다. 대천에서 나고 자라고 일순간도 떠난 적 없었다. 하늘을 섬기는 부모님과 우리 형제 6남매는 풍족하지 않았으나 결핍을 모르고 살았다. 물질적인 결핍쯤은 부모님 사랑과 형제지간의 우애로 넉넉히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운명의 한 남자를 만나 성가하여 친정을 떠났다. 남편 형제 8남매와 시집살이를 하면서 4남매를 두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얽히고설킨 내 삶의 편린들이 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내 삶의 여정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부모님 뜻 받들면서 시댁 형제간에 우여곡절이 있을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듯 살피고 삼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가시밭길을 걷듯 위태위태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호흡조차 멈추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은 몇 번이었던가. 하늘만 알고 땅만 아는 한 여인의 여로가 안갯속에서 일렁인다.
이순(耳順)의 고갯길 중턱에 걸터앉아 자조 섞인 실소를 머금는다. 누군들 이만한 사연이 없을까. 저마다 삶의 보따리 펼쳐 본다면 굽이굽이 눈물의 골짜기가 있으리라. 가파른 협곡을 건너온 인생역전의 신화 몇 개쯤은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으리라.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시간이 흘러 이만치 나앉고 보니 모두 사랑이었다. 궂은일도 좋았던 일과 같이 그리운 추억일 뿐이다.
시간이 나를 철들게 했나 보다.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4남매를 키우면서 매사 노심초사했다.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가정이 평안하고 자식들이 무탈하기만을 빌고 빌었다. 세상을 향하여 욕심을 부릴 겨를이 없었다. 내 자녀들이 반듯하게 성장하여 있어야 할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선하게 지내기만을 바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 말이 맞아떨어졌다. 자녀들은 건강하게 성장했으며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성인이 되었다. 더 이상 바람 없다.
가문에 들어와서 가정을 탄탄하게 지켜낸 일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 혼자서 해낸 일이 아닐 것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고자 노력한 내 노력이 일등공신이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으리라. 한없이 나약하기만 했던 여인이 강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외조가 큰 몫을 했다. 매사 언행심사 조심하는 내 성격을 답답하다고 탓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늘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남편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그 사랑으로 4남매를 두었고 그 자녀들이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게 하고 있다.
잠시 지난 시간을 되돌려 보니 일장춘몽이었다.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던 순간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순간도 찰나처럼 느껴진다. 아픈 기억도 이불속에서 몰래 눈물을 닦아내던 슬픈 기억도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이 또한 시간이 부리는 마법인가. 시간이 지닌 위력인가. 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되뇌어 본다.
봄바람이 폐부로 파고들면서 나를 설레게 한다. 호미를 찾아들고 양지쪽으로 나가봐야겠다. 황톳빛 고슬고슬한 밭고랑에 냉이가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을 것이다. 야트막한 능선 어딘가에 달래가 푸릇푸릇하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있을 것이다. 성미 급한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나를 반길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는 식탁에 냉이된장국과 달래간장을 올려야겠다. 한가한 노부부는 식탁에 마주 앉아 봄을 먹으면서 자녀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봄밤을 맞이하겠지. 식탁 옆에 있는 창문의 커튼을 열어야겠다. 봄별이 내려와 우리 부부의 대화를 엿듣고 자녀들의 창가에 가서 도란도란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
첫댓글
황해숙 수필가님 원고 1편 추가하여 재편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