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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馮道) 열전 번역 : 그는 현신(賢臣)인가? 아니면 충신도 못되고 간신인가?
2023년 9월 16일
풍도(馮道, 882-954)는 농사짓는 집안(자영농)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 수업을 받지 못하고 높은 관원도 알지 못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특채(辟署)로 낮은 관원을 지내면서 부지런히 근무하고 상당히 말조심하는 태도가 높은 사람 눈에 띄어 점점 높은 관직을 받고 나중에는 황제가 봉록과 작위를 내려주었습니다. 늙어서는 여러 농장(莊園)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또 풍도가 입신양명하여 조상들은 관직을 추증받고 많은 자손도 높은 관원이 되었습니다. 풍도가 68살(950)에 정리한 「장락로 자서(長樂老自敘)」를 보면 본인은 일생을 열심히 살았다고 자평하고 아쉬운 것은 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것이고 아무튼지 여생을 편안히 보냈습니다.
풍도는 관원이 되어 근면하게 일하고 황제에게 가급적 잔소리(諫言)하지 않았기에 재상을 몇 번이나 지낼 만큼 높이 영달하였습니다. 노후에는 경제적 재산과 정치 사회적 자원 곧 부귀를 자손에게 상속하게 되어 행복하다고 자평하였습니다. 늙어서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어 사족(士族)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 풍도는 높은 관원(재상)이 된 뒤에 사족 사회 출신으로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출세한 관원들을 억압하고 빈한한 가정 출신으로서 행정 능력이 유능하고 근면한 관원들을 적극적으로 승진시켰습니다. 풍도 개인의 영달 과정과 관원 생활의 태도를 이해하고 평론하려면 당나라 시기 사족(士族) 사회에서 송나라 시기 사대부(士大夫) 사회로 전환되는 사회계층(social stratification)의 이동(social mobility)과 신하의 가치관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당나라 시기에는 주도적 사회계층을 사족(士族)이라고 부르고 송나라 시기에는 사대부(士大夫)라고 말합니다. 후한 말기부터 경학(經學) 지식을 갖춘 관원, 상업에 종사하여 큰 부를 축적한 상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무인 등이 큰 농장이라는 경제적 기초를 갖고 또 경학 지식을 갖고 사회 여론의 지지를 받아 문벌(門閥)을 세우고 문벌 등급에 따라 관계(官界)에 나가서 관직을 맡는 것이 사회 추세였고 이것이 사족 사회라고 말합니다. 위진(魏晉)시기부터 몇몇 사족은 문벌이 높아 황제가 혼인을 요구하여도 거절할 만큼 황제를 우습게 여겼기에 황제에게 충성하는 태도가 낮았습니다.
그런데 송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시기에는 평민사회가 되어 누구나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관원이 되고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관원 사회를 사대부 사회라고 말합니다. 사대부는 생활비(봉록)를 벌기 위하여 국가에 의존하는 정도가 사족보다 더 컸습니다. 송나라 시기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어 관원이 되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경쟁도 치열하였습니다. 명청시기에 관원들은 좋은 고과(考課) 성적을 받고 승진하여 더 많은 봉급을 받기 위하여 국가가 백성을 억압하여 착취하는 부당한 지시와 명령을 내려도 거부하지 않고 따랐습니다. 사실상 국가의 지시를 따르고 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백성을 닦달하는 혹리(酷吏)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관원들이 황제와 국가에 의존할수록 충성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진시기와 당나라 시기의 뒤를 이은 오대 시기에는 부유한 사족 출신이거나 빈한한 사인(士人)을 막론하고 모두 왕조와 황제에 충성한다는 의식이 빈약하였고 오히려 송나라 사대부 사회가 된 뒤부터 황제에 충성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강조하고 명청시기에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물론 황제를 향한 충성은 황제권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였기에 황제 개인이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전제(專制)정치는 더욱 공고하게 되었습니다.
당나라가 멸망한 뒤부터 북송이 건립될 때까지 중원지역에서 5개 왕조가 명멸하여 오대(五代 : 後梁, 後唐, 後晉, 後漢, 後周, 907-960년)이고 중원지역 밖의 주변 지역에서 10개 국가(902-979년)가 할거하였기에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고 부릅니다. 오대 왕조의 관원들 행적을 보면 앞의 왕조에서 관원을 지냈던 사람들이 뒤의 왕조에서 여전히 관직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풍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풍도가 관원 생활을 하는 20여 년 동안에 4개 왕조의 10명 황제를 모셨고 거란 황제로부터 관직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에 후대 평론가와 역사가 가운데 일부는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어쩔 수 없다고 두둔하고 대다수는 풍도가 염치없는 간신(奸臣)이라고 맹비난하였습니다.
북송시기에는 『춘추』를 연구한 역사학자와 의리(義理)론자는 행실에서 공과(功過)를 묻지도 않고 개인의 심리적인 자발적 동기(motive)를 평가하여 신하의 절개(節介)를 강조하였고, 개인과 가문의 영달과 부유함이라는 외부 보상(incentive)을 추구하였던 태도는 소인이며 간신이라고 보고 아예 평가 대상에 넣지 않았습니다. 북송시기에 『주역』에 근거하여 의리(義理)를 연구하던 성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성리학이 행실에 관하여 사실 조사를 거친 뒤에 내린 도덕적 가치 판단입니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정의롭지 못한 관원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하더라도 재야에서 학문과 수양공부에 힘써서 개인의 도덕심을 수양하는 길을 선택하고 더 가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드시 관직에 나가 영달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북송 설거정(薛居正, 912-981)의 『구오대사(舊五代史)』와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신오대사(新五代史)』를 비롯하여 범중암(范仲淹, 989-1052), 호원(胡瑗, 993-1059), 사마광(司馬光,1019-1086), 소철(蘇轍, 1039-1112), 이정(二程)과 남송 주희(朱熹, 1130-1200), 문천상(文天祥, 1236-1283) 등이 풍도에 대하여 내린 찬반 평론이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북송 의리학은 『춘추』의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충(忠)을 강조하고 여자들에게 정(貞)을 강조하며 풍도를 반면 거울로 삼았습니다. 물론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기에는 풍도를 더욱 열렬하게 논평하고 비난하였습니다.
풍도의 일생 행실에 관하여 찬반 평론으로 갈리고 평론 기준도 다양하였습니다. 북송 호원(胡瑗, 993-1059)은 풍도가 난리 통에도 생민(生民)을 구제하였다고 두둔하였습니다. 또 북송 왕안석(王安石, 1021-1086)과 당개(唐介, 1010-1069) 두 사람이 황제 앞에서 풍도를 평가하였는데 왕안석은 풍도가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이윤(伊尹)이나 부처와 보살 같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나 당개는 풍도가 순신(純臣)이 아니라고 끝까지 비난하였습니다. 대체로 많은 사람은 풍도가 여러 황제를 모신 재상이기에 충(忠)과 정(貞)이 없는 평범한 신하라고 낮게 평론하였습니다. 주희의 평론에 따르면 북송시기에 충의(忠義) 풍조는 범중암(范仲淹, 989-1052)이 일으켰다고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신하를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현(賢)과 능(能)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현(賢)은 정치적 판단력과 도덕성을 말하고 능(能)은 행정능력을 말합니다. 기준에는 또 충(忠)과 간(奸)이 있고 충(忠)과 간(奸) 모두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인데 다만 간(奸)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황제에 그치지 않고 백성의 안녕을 기구(企求)하는 것이 우선이라면 현(賢) 안에 충(忠)을 포함시켰습니다. 군자(君子) 의미는 현(賢)과 충(忠)을 동시에 강조하였고 소인(小人)은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얻으려기에 간(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현(賢)과 간(奸) 모두 지략(智略)과 과감한 실행력이 뛰어난데 자발적인 동기(motive)가 곧 인(仁)이 순수하면 현(賢)이고 외부 보상(incentive)에 개인적 목적을 두면 간(奸)입니다. 다시 말해 어리석은 간신(奸臣)은 없다는 뜻입니다. 권모와 음해를 잘하는 신하가 반드시 간신은 아닙니다.
성리학에서 충신을 강조하고 간신을 욕하였던 사대부 사회의 가려진 실상이었던 황제의 전제정치와 신하의 혹리(酷吏) 변신을 보아야 합니다. 송나라 시기는 물론이고 명청시기에는 관원들이 자발적으로 관직을 사퇴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명청시기에 지식인들의 출로를 보면 다양합니다. 거인(擧人)이 되는 향시(鄕試)에 합격하지 못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과외선생, 골동품 장사, 아전(胥吏)이나 다른 관원의 막료(幕僚) 되기, 지방 관아에 내는 소송장 써주기,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브로커(無賴) 되기, 의원(醫員) 되기, 평민사회에서 유행하는 연예 장르(entertainment world) 소품(小品) 쓰기, 지방정부의 각가지 프로젝트와 서적 출판에 참여하기, 부유한 가문의 족보와 문집 편찬에 참여하기 등등이 있었습니다. 거인이 되면 지방에서 낮은 관원을 하거나 지방 학교의 교원(敎員)이 되었습니다. 향시를 합격하고 또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면 관원이 되는데 회시와 전시의 성적과 등수가 낮은 대다수는 지방관을 지내고 일부는 중앙정부의 행정관서에서 인턴을 하다가 중앙정부 관서의 관원이나 지방관이 되고 성적이 아주 높은 몇 명만이 중앙정부의 인력풀이었던 관각(館閣)에 들어가서 정책 결정 과정을 익힙니다. 현직 관원이거나 퇴직 관원이 되면 다른 관원들과 부유한 집안의 축하 글이나 비문 등을 써주거나 학생들을 가르쳐서 돈을 벌어 생활비에 보탰습니다. 퇴직 관원들은 당연히 소송과 이권에 개입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명청시기에 관원들의 꿈은 뇌물을 받거나 판공비를 받아 집을 사고 땅을 많이 사서 소작료 받는 농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인이나 관원들이 경제적 자유(economic freedom)를 얻으려고 농장을 가지려고 하였으나 농장을 갖더라도 여전히 국가의 간섭과 과도한 세금 때문에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관원들은 황제의 전제정치에 충성하는 혹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실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리학 관점에서 명청시기 관원들을 평론하면 대다수가 소인이며 간신이었습니다.
한국문집총간 자료를 보면 조선에서는 노수신(盧守慎, 1515-1590)이 30살(1544)에 세자 시강원 사서(司書)로서 시강하면서 풍도가 충후(忠厚)하고 지략이 있기에 현(賢)하다고 평가하는데 실제로는 그의 마음속은 순수하지 못하여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추구하는 동기가 있기에 간(奸)이라고 비난하고 왕안석과 당개의 대화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뒤에 정조(正祖, 1752-1800)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놓고 당시 신하들을 풍도처럼 겉으로는 원만하고 후덕하나(圓厚) 속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음적(陰賊)하였던 풍도와 똑같다고 욕하였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이건창(李建昌, 1852-1898)과 홍승헌(洪承憲, 1854-1914) 두 사람은 한(漢)나라 순욱(荀彧, 163-212)이 후한의 신하이면서도 조조(曹操)의 신하가 되었다는 고사를 논의하였습니다. 이건창은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1007-1072)와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배구(裴樞, 841-905) 평론을 들어 자신은 구양수의 후론(厚論)을 지지하고 홍승헌은 범조우의 정론(正論)을 지지한다고 보았습니다. 주희는 풍도가 절개를 잃은(失節) 사람이라는 옛날 사람들의 평론에 근거하여 역임한 관직들과 받은 작록(爵祿)들을 상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는데 이건창도 주희의 평론을 따랐습니다. 황현(黃玹, 1855-1910)은 신하가 군주에게 목숨을 걸고 반드시 간언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풍도가 강력하게 간언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이건창과 황현 모두 조선 말기에 신하의 절개와 태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요즘 홍범도 장군에 관하여 사실 확인과 가치 평가 두 가지를 놓고 둘로 갈려서 서로 비난합니다. 그렇지만 성리학의 평가 기준 곧 자발적 동기 또는 외부 보상 추구 두 가지에서 보면 현(賢) 재(才) 충(忠) 간(奸) 및 군자(君子) 소인(小人) 판단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실과 가치 두 가지 어느 것을 평가하더라도 홍범도 장군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독립군이며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높이 평가하여야 합니다.
또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회사에 취직하여 과중한 수동적 일시적 업무뿐만 아니라 윗사람의 꼰대 짓 때문에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싫어서 일찍 돈을 어느 정도 벌어 은퇴하려고 합니다. 경제적 자유(economic freedom)를 얻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사유재산제에 기초하여 개인이 시장에서 자본을 경영한다는 경제 개인주의(economic individualism)이며 자본주의라고 말합니다. 물론 정치적 자유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자유에는 적극적인 의미의 자본주의이며 국가와 집단의 경제적 통제를 반대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경제적 자유가 다양하게 창업하거나 기존의 기업을 스타트업(Start-up)으로 바꾸길 바라며 또는 개인과 사회에 가치 있는 활동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자유가 옛날 지식인이나 관원이 농장(莊園)을 갖고 노후에 은퇴 생활을 하려고 도연명처럼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는 것이 아니고 또 서양 근대의 자유민주주의에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리학에서는 신하에 관한 도덕의 가치 판단을 어떻게 진행하였는지를 알기 위하여 『구오대사(舊五代史)』에 실린 풍도의 전기를 번역하였습니다. 필요한 곳에서는 『신오대사(新五代史)』를 비롯하여 몇 가지 역사서와 필기물 및 최근 발견된 자료를 첨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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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한국 자료 :
盧守慎(1515-1590),『穌齋先生內集』,上篇,「侍講錄」(一)︰
(甲辰年, 1544, 30살)壬戌︰晝講『綱目』自“八月漢河東節度使劉崇”,至“守貞猶以爲然”。臣及韓㞳(1501-1558)入侍,講訖。㞳論馮道事。臣繼曰︰馮道爲人,想是忠厚有智慮者,故時人皆以爲賢,而無知其奸者矣。胡氏(胡瑗)此論,可謂盡之。後人如王安石(1021-1086)文章學行,而猶好馮道,以爲屈身安人,如諸佛菩薩之行。嘗與唐介(1010-1069),於君前論至此人,介曰︰“道易四姓,事十主。豈得爲純臣乎?”安石曰︰“伊尹五就湯,五就桀者,爲安人而已。豈可亦謂之非純臣乎?”介曰︰“有伊尹之志則可。”安石爲之變色。凡人之有忠厚智慮,而無氣節者,鮮不爲馮道者。然人之氣節,在時君培養之如何耳。且因士無賢不肖,有所陳啟,皆溫辭色而受之。違忤不怒,小過不責而言曰︰威之此事,心雖有在,而跡則可觀也。人雖至愚,無不有一得,況賢者之言乎?然亦皆有得失,並須虛懷以聽之,誠心以察之。豈可以違忤而怒之哉?伊尹告太甲曰︰有言逆於汝志,必求諸道。此意極好。孔子告仲弓政曰︰赦小過。夫過,失誤也。朱子釋之曰︰大過,於事或有所害,不得不懲。小過赦之,則刑不濫而人心悅矣。故其效至於歸心則同也。人非堯舜,何能每事盡善,亦是用人之法也,但於人貴赦而於己貴責。書曰︰不矜細行,終累大德,其可忽哉?故孔子曰︰躬自厚而薄責於人,約而盡矣。詳察爲當。
正祖,『弘齋全書』,卷二十六
李建昌(1852-1898),『明美堂集』,卷九,「與洪汶園(洪承憲, 1854-1914)論荀彧書」︰
頃見示荀彧論,義理固醇正,然罪彧過甚。彧漢之忠臣也,其情苦,其跡隱。蘇氏憐其然也,激而贊之,有文王、伯夷比儗之不倫。蘇氏亦以此見罪於朱子。然平心而論,蘇氏之說,固未必皆非也。蘇氏謂漢末,天下大亂,彧以爲非曹操,無可以定天下者,故佐之。操受九錫則死之,此彧之實錄也。
『明美堂集』,卷九,「重論荀彧書」︰
昔歐陽子論裴樞等曰︰使樞等不死,尙惜一卿,其肯以國與人。范純夫(范祖禹)駁之曰︰樞爲全忠薦引至宰相,太常卿小事,視昭宗之死孰重。歐陽之論,可謂厚矣。范之論,可謂正矣。弟之論,似歐陽。兄之論,似范。然彧之時,獻帝未嘗弒也。九錫非小事也,而彧之自殺,又非如樞之見殺,則雖范氏,可以無罪彧矣。兄又謂罪雄不罪彧,不知何義。兄篤信朱子者也。朱子於揚雄之死,書曰︰莽大夫揚雄死,以褚淵、馮道之所不加者加之。其於彧,則曰︰侍中光祿大夫,參軍事,荀彧自殺,所以明漢臣也。彧死未幾而荀攸死,則書曰︰魏荀攸卒。系魏而去官,是攸之所不能而彧得之矣。雄之名濫,故加其罪以彰之。彧之情隱,故伸其死以表之。罪雄不罪彧,朱子義然耳。兄又何以難之?
黃玹(1855-1910),『梅泉集』,卷六,「百里奚論」︰
蓋徒知其君之不可諫而不諫之爲智,而不知其身之仕於不可諫者之國之爲不智。奚(百里奚)而智乎?則裴矩、馮道之倫,將接踵於天下矣。嗚呼,推奚之心則事昏君者,必曰不可諫;事明君者,必曰無所事諫。是無可諫之時也。得智士而爲之臣者,其君亦危矣哉!
중국 자료 :
宋、司馬光,『傳家集』,卷六十七,「馮道爲四代相」(慶歷五年作)︰
忠臣不二君,賢女不二夫,策名委質,有死無貳,天之制也。彼馮道者,存則何心以臨前代之民?死則何面以見前代之君?自古人臣不忠,未有如此比者,然而尊官重祿,老以沒齒何哉?夫爲國家者,明禮義,獎忠良,褒義烈,誅奸回,以厲群臣。群臣猶愛死而忘其君,況相印將節以寵?叛臣其不能永享天命宜矣。然而庸愚之人,往往猶稱其智,蓋五代披攘,人主歲易,群臣失節,比踵於朝,因而譽之,欲以自釋餘,恐後世以道所爲爲合於理,君臣之道,將大壞矣。臣而不臣,雖云其智,安所用哉?
宋、蘇轍,『欒城集』,卷六十一,「馮道」
『二程遺書』,卷四,「遊定夫所錄」︰
馮道,更相數主,皆其讎也。安定(胡瑗,993-1059,人稱安定先生)以爲當五代之季,生民不至於肝腦塗地者,道有力焉,雖事讎無傷也。荀彧佐曹操誅伐,而卒死於操。君實(司馬光,1019-1086)以爲東漢之衰,彧與攸視天下無足與安劉氏者,惟操爲可依,故俯首從之。方是時,未知操有他志也。君子曰︰在道(馮道)爲不忠,在彧(荀彧)爲不智。如以爲事固有輕重之權,吾方以天下爲心,未暇恤人議已也,則“枉己者,未有能直人者也。”
『朱子全書』,卷十九,『論語』(十),「鄉原德之賊章」︰
敬之問鄉原德之賊,曰︰鄉原者,爲他做得好,便人皆稱之,而不知其有無窮之禍。如五代馮道者,此真鄉原也。本朝范質(911-964),人謂其好宰相,只是欠爲世宗一死耳。如范質之徒,卻最敬馮道輩。雖蘇子由議論,亦未免。此本朝忠義之風,卻是自范文正公(范仲淹, 989-1052)作成起來也。
顧炎武,『日知錄』,卷十三,「廉恥」︰
『五代史』、「馮道傳」,論曰︰“禮義廉恥,國之四維;四維不張,國乃滅亡。善乎,管生之能言也!(『管子』曰:“何謂四維?一曰禮,二曰義,三曰廉,四曰恥,禮不逾節,義不自進,廉不蔽惡,恥不從枉。故不逾節則上位安,不自進則民無巧詐,不蔽惡則行自全,不從枉則邪事不生。”)禮儀,治人之大法;廉恥,立人之大節。蓋不廉則無所不取,不恥則無所不爲。人而如此,則禍敗亂亡,亦無所不至,況爲大臣而無所不取,無所不爲,則天下其有不亂,國家其有不亡者乎!”然而四者之中,恥尤爲要,故夫子之論士曰︰“行已有恥”;孟子曰︰“人不可以無恥,無恥之恥,無恥矣。”又曰︰“恥之於人大矣,爲機變之巧者,無所用恥焉。”所以然者,人之不廉而至於悖禮犯義,其原皆生於無恥也。故士大夫之無恥,是謂國恥。吾觀三代以下,世衰道微,棄禮義,捐廉恥,非一朝一夕之故。然而“松柏後雕於歲寒”,“雞鳴不已於風雨”,彼昏之日,固未嘗無獨醒之人也,頃讀『顏氏家訓』,有云:“齊朝一士夫嘗謂吾曰:‘我有一兒,年已十七,頗曉書疏。教其鮮卑語及彈琵琶,稍欲通解。以此伏事公卿,無不寵愛。’吾時俯而不答。異哉,此人之教子也!若由此業自致卿相,亦不願汝曹爲之。”嗟乎,之推(顏之推)不得已而仕於亂世,猶爲此言,尙有「小宛」詩人之意。彼閹然媚於世者,能無愧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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馮道 : 『舊五代史』(宋、薛居正),卷一百二十六,周書,第十七,列傳六
馮道,字可道,瀛州景城人。其先爲農爲儒,不恆其業。道少純厚,好學能文,不恥惡衣食,負米奉親之外,惟以披誦吟諷爲事,雖大雪擁戶,凝塵滿席,湛如也。
풍도(馮道, 882-954)는 자(字)가 가도(可道)이며 영주 경성현(瀛州, 景城縣) 출신이다. 조상들은 농업도 하고 유학도 공부하여 직업이 일정하지 않았다. 풍도는 어려서 순수하고 마음이 깊었고 공부를 좋아하고 글짓기도 잘하였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싸구려 옷과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낮은 관원이 된 뒤에는 봉급을 받아 부모님을 모셨고 그밖에는 책을 펴서 큰소리로 읽고 글을 읊는 것이 일과였다. 겨울에 사립문을 열 수 없을 만큼 큰 눈이 내리거나 의자에 먼지가 가득 쌓여도 마음 편히 공부에 열중하였다.
참고 자료 :
景城縣 :
수나라 開皇 18년(598)에 成平縣으로 고쳐 瀛州의 예속시켰다. 治所는 현재 河北省 滄州市 서쪽 60리에 景城이 있다. 大業 연간 초에는 河間郡에 예속시켰다. 당나라 시기에는 瀛州에 예속시켰다. 北宋 熙寧 6년(1073)에 縣을 폐지하고 鎮으로 강등시켜 樂壽縣에 예속시켰다.
天祐中,劉守光署爲幽州掾。守光引兵伐中山,訪於僚屬,道常以利害箴之,守光怒,置於獄中,尋爲人所救免。守光敗,遁歸太原,監軍使張承業闢爲本院巡官。承業重其文章履行,甚見待遇。時有周元豹者,善人倫鑒,與道不洽,謂承業曰:“馮生無前程,公不可過用。”時河東記室盧質聞之曰:“我曾見杜黃裳司空寫眞圖,道之狀貌酷類焉,將來必副大用,元豹之言不足信也。”承業尋薦爲霸府從事,俄署太原掌書記,時莊宗並有河北,文翰甚繁,一以委之。
당나라 소종(昭宗) 천우(天祐) 연간(904-907, 풍도 22-25살)에 유주(幽州) 절도사 유인공의 아들 유수광(劉守光, ?-914, 盧龍節度使 劉仁恭의 아들, 大燕 건국)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풍도를 막부(幕府)의 보조 관원으로 특채(辟署)하였다. 유수광이 911년에 군대를 이끌고 정주(定州, 中山?)를 공격하는 동안에 막부 관료들이 있는 곳을 찾아 의견을 물었을 때 풍도가 공격의 이해득실을 설명하고 공격을 반대하였다. 유수광이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으나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 곧바로 풀려났다. 건화(乾化) 3년(913, 풍도 31살)에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勖, 885-926)이 유수광을 공격하면서 환관 장승업(張承業, 846-922)에게 태원(太原) 지역의 군대를 감독하는 감군사(監軍使)를 시키고 11월에 유수광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풍도는 유수광이 패배하자 몰래 태원으로 가서 장승업에게 귀순하였고 감군사 장승업이 풍도를 특별 채용(辟署)하여 진왕부(晉王府) 본원의 순관(巡官)에 임용하였다. 장승업은 풍도의 문장과 실행능력을 중시하였기에 풍도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마침 주원표(周元豹, 『舊五代史』, 卷七十一, 列傳二十三, 周元豹傳)가 관상(人倫鑑)을 잘 보았는데 풍도와 서로 맞지 않아 장승업에게 “풍도는 앞길이 없으니까 풍도를 중용하지 말아야 합니다.”고 말하였다. 이때 하동 기실 노질(盧質, 867-942)이 주원표의 말을 듣고 “내가 예전에 사공(司空) 두황상(杜黄裳, 738-808)의 사진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풍도의 모습이 두황상과 흡사합니다. 앞으로 반드시 크게 임용하실 인물에 부합하니까 주원표의 말은 믿지 마세요.”라고 건의하였다. 장승업이 곧이어 풍도를 패부(霸府)에서 일하다가 잠시 뒤에 태원에서 서류 작성에 채용하도록 추천하였다. 당시에 이존욱(李存勖, 923년에 後唐을 세운 莊宗)이 하북지역을 점령하여 문서 작업이 아주 번잡하였는데 모든 문서 작업을 풍도에게 맡겼다.
참고 자료 :
劉守光(?-914) :
유수광은 심주 낙수현(深州 樂壽縣) 출신이며 노룡 절도사(盧龍節度使, 幽州節度使를 范陽節度使 또는 盧龍節度使라고도 부름) 유인공(劉仁恭, ?-914, 盧龍의 鎮將 劉晟의 아들)의 아들이며 五代時期에 대연(大燕) 정권을 세웠다. 유수광은 아버지 유인공의 애첩 나씨(羅氏)와 간통하여 부자관계가 단절되었다. 당나라 천우(天祐) 4년(907)에 선무 장령(宣武將領) 이사안(李思安, ?-912)가 유주(幽州, 현재 北京市)를 공격하였는데 유인공은 성밖이 대안산(大安山)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유수광이 성밖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사안을 격퇴한 뒤 스스로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를 자칭하였다. 군대를 대안산에 보내 아버지 유인공을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뒤에는 그의 형 의창절도사(義昌節度使) 유수문(劉守文)과 싸웠고 909년에 유수문을 체포하여 얼마 뒤에 살해하고 노룡절도사와 의창절도사를 겸임하였다. 909년에 후량(後梁) 태조 주전충(朱全忠)이 유수광을 연왕(燕王)에 봉하였다. 유수광은 성격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의창절도사를 겸직한 뒤에는 더욱 자만하였으며 아버지와 형이 자신에게 절도사를 빼앗긴 까닭은 하늘의 뜻이라고 변명하였다. 911년에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 자리에 올라 대연(大燕) 국가를 세우고 응천(應天) 연호를 사용하였다. 건화(乾化) 3년(913)에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勖, 885-926)에게 멸망 당하고 아버지 유인공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서 이듬해 피살되었다.
李存勖(885-926)︰
後唐莊宗李存勖(885年12月2日-926年5月15日),小名亞子,生於晉陽(今太原南晉源鎮),西突厥沙陀族人。晉王李克用之子。五代時期後唐開國皇帝。
李存勖自幼喜騎馬射箭,膽力過人,爲李克用所寵愛。少年時隨父作戰,與父親到長安向唐廷報功得到唐昭宗的賞賜和誇獎。成人後狀貌雄偉,稍習『春秋』略通文義,作戰勇敢。尤喜音聲、歌舞俳優之戲。908年正月,父李克用病死,李存勖於同月襲晉王位。辦完喪事,後設計捕殺了試圖奪位的叔父李克寧。911年,李存勖攻破燕地。於923年,攻滅後梁,統一北方。同年四月,李存勖在魏州(河北大名縣西)稱帝,國號爲唐,年號“同光”,史稱後唐。
稱帝後,認爲父仇已報,中原已定,不再進取,開始享樂。常常面塗粉墨,穿上戲裝,登台表演,不理朝政;並自取藝名爲“李天下”。926年,皇甫暉在鄴都叛亂,李存勖親征反擊。這時擔任指揮使的伶人郭從謙趁機叛變,火燒興教門,存勖被流箭射中,葬於雍陵。
李存勖能詩文,亦有膽略,主要作品有『全唐詩』存詞4首,『全唐詩補編、續拾』補詩5首。在嵩山地區的一些舊戲班裡一直保留著莊宗的木雕神像,奉爲優伶祖師。這是對莊宗爲戲劇事業所做貢獻的最高獎賞。
李存勖的整頓措施從軍事方面擴展到了政治、經濟等方面。在任期間下令罷黜地方上的貪官污吏,平反冤獄,打擊盜賊,同時不斷減輕賦稅,百姓安居樂業。在提升軍隊戰鬥力的同時,穩定了政治局勢,推動了經濟發展,並贏得了民心,爲後來一統北方奠定了雄厚的基礎。
興教門之變︰
同光四年(926)二月,魏博戍卒在貝州譁變,推裨將趙在禮爲首領,攻入魏州。邢州、滄州也相繼發生兵變,河北大亂。元行欽帶兵進討,但卻連連失利。李存勖本欲親征,被宰臣勸阻,只得起用李嗣源,讓其率侍衛親軍北上平叛。李嗣源在魏州城下遇到親軍譁變,被劫持入城,與叛軍合勢。他本無反意,但迫於內外形勢,又無以自明,只得率變兵南下。
三月,李存勖親自率軍東征,欲坐鎮汴州指揮平叛。但李嗣源已搶先佔據汴州,得到大批唐軍將領擁戴。李存勖知道局勢已不可挽回,行至萬勝鎮(在今河南中牟西北)便下令回師,倉皇返回洛陽。他再三撫慰士卒,許以厚賞,但已爲時太晚。士卒均不感皇帝恩德,沿途逃散過半。當時,李繼岌已率徵蜀大軍班師,途中因平定後軍康延孝叛亂,被耽誤了歸程。
四月,李存勖決定前往汜水關(在今河南滎陽西北),與李繼岌會合,再聯兵進剿李嗣源。他命扈從軍兵候於宮門外,自己在內殿進食。從馬直指揮使郭從謙突然發動叛亂,率所部攻入興教門。李存勖親率宿衛出戰,殺死數百亂軍,最終被流矢射中,死於絳霄殿,時年四十三歲。伶人善友將樂器覆蓋在李存勖身上,縱火焚屍。李繼岌軍至渭南,因部屬潰散,被迫自縊而死。徵蜀大軍則在副使任圜的率領下,歸附李嗣源。是月,李嗣源進入洛陽,在李存勖靈前稱帝,史稱後唐明宗。七月,李嗣源將李存勖葬入雍陵,上廟號莊宗,追謚爲光聖神閔孝皇帝。
周元豹︰『舊五代史』,唐書四十七,列傳二十三︰
周元豹者,本燕人,世爲從事。元豹少爲僧,其師有知人之鑒,從遊十年餘,苦辛無憚,師知其可教,遂以袁、許之術(漢、許負, 唐、袁天綱)授之。大略狀人形貌,比諸龜魚禽獸,目視臆斷,咸造其理。及還鄉,遂歸俗。初,盧程寄褐遊燕,與同志二人謁焉。元豹謂鄉人張殷袞曰:“適二君子,明年花發,俱爲故人。惟彼道士,他年甚貴。”至來歲,二子果卒。又二十年,盧程登庸於鄴下。元豹歸晉陽,張承業信重之,言事數中。承業俾明宗易衣列於諸校之下,以他人詐之,而元豹指明宗於末綴言曰:“骨法非內衙太保歟!”咸伏其異。或問明宗之福壽,惟云末後爲鎮州節度使,時明宗爲內衙都校,才兼州牧而已。昭懿皇后夏氏方侍巾櫛,偶忤旨,大爲明宗檟楚。元豹見之曰:“此人有籓侯夫人之位,當生貴子。”明宗赫怒因解,後其言果驗。太原判官司馬揆謁元豹,謂揆曰:“公五日之中,奉使萬里,未見回期。”揆數日後,因酒酣,爲衣領扼之而卒。莊宗署元豹北京巡官。明宗即位之明年,一日,謂侍臣曰:“方士周元豹,昔曾言朕諸事有徵,可詔北京津置赴闕。”趙鳳奏曰:“袁、許之事,元豹所長者,以陛下貴不可言,今既驗矣,餘無可問。若詔赴闕下,則奔競之徒,爭問吉凶,恐近於妖惑。”乃止。令以金帛厚賜之,授光祿卿致仕。尋卒於太原,年八十餘。
莊宗與梁軍夾河對壘。一日,郭崇韜以諸校伴食數多,主者不辦,請少罷減。莊宗怒曰:“孤爲效命者設食都不自由,其河北三鎮,令三軍別擇一人爲帥,孤請歸太原以避賢路。”遽命道對面草詞,將示其眾。道執筆久之,莊宗正色促焉,道徐起對曰:“道所掌筆硯,敢不供職。今大王屢集大功,方平南寇,崇韜所諫,未至過當,阻拒之則可,不可以向來之言,喧動群議,敵人若知,謂大王君臣之不和矣。幸熟而思之,則天下幸甚也。”俄而崇韜入謝,因道爲之解焉,人始重其膽量。莊宗即位鄴宮,除省郎,充翰林學士,自綠衣賜紫。梁平,遷中書舍人、戶部侍郎。
장종(莊宗, 이존욱)이 917-919년에 황하를 사이에 두고 후량(後梁)과 대치하였을 때 어느 하루는 이존욱을 보좌하여 따라온 곽숭도(郭崇韜, 약 865-926)는 이존욱이 여러 장교과 자주 회식하니까 음식 담당자가 모든 회식을 감당하지 못하자 이존욱에게 회식을 줄이자고 건의하였다. 이존욱이 화를 내며 “내가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과 회식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니, 황하 이북에 있는 삼진(三鎭)의 삼군을 거느린 장군들 가운데 한 명을 골라 통수권자로 삼으십시오. 나는 태원으로 돌아가서 새로 뽑을 통수권자에게 길을 양보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곧바로 풍도를 만나 초안을 작성하라고 시키고 군사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풍도가 작성하는 데 오래 걸리니까 이존욱이 정색하고 재촉하였다. 풍도가 천천히 일어나서 말하길 “제가 문서 작성을 맡았으나 이런 일은 못 하겠습니다. 현재 대왕(이존욱)께서는 큰 군공을 여러 번 세워 남쪽 적대세력을 토벌하셨는데 곽숭도의 충고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거절하시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과거 했던 말을 꺼내 군중을 선동하시려는데 적군이 안다면 대왕과 신하들이 서로 불화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잠시 보류하였다가 생각하신다면 천하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고 건의하였다. 잠시 뒤에 곽숭도가 들어와서 풍도에게 고맙다고 말하였는데 풍도가 대왕의 의심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풍도의 용감함을 존중하였다. 이존욱이 923년 업궁(鄴宮)에서 황제위에 즉위한 뒤에 풍도를 성랑(省郞)에 제수하고 한림학사로 삼아 낮은 관원(綠衣, 唐 관제 6-7품 관원의 옷)에서 높은 관원(紫衣)로 승진시켰다. 후량(後梁)이 평정된 뒤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또 호부 시랑(戶部 侍郞)으로 승진시켰다.
丁父憂,持服於景城。遇歲儉,所得俸餘悉賑於鄉里,道之所居惟蓬茨而已,凡牧宰饋遺,斗粟匹帛無所受焉。時契丹方盛,素聞道名,欲掠而取之,會邊人有備,獲免。
풍도가 아버지 상을 당하여 경성(景城)에서 삼년상을 지냈다고 한다.(宋、孔平仲이 지은 『談苑』에는 풍도가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워 걸어갔고 가족들도 옷 가방을 들고 뒤따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談苑』에는 없음.) 흉년이 들자 풍도는 받은 봉록에서 남은 것을 모두 고향 사람들을 진휼하는 데 썼기에 풍도가 사는 집은 갈대 풀로 엮었고, 지방관들이 보내준 곡식과 비단은 일절 받지 않았다. 당시에 거란이 강성하였는데 풍도의 소문을 듣고 잡아가려고 하였으나 변경 방비 때문에 풍도가 잡혀가지 않았다.
明宗入洛,遽謂近臣安重誨曰:“先帝時馮道郎中何在?”重誨曰:“近除翰林學士。”明宗曰:“此人朕素諳委,甚好宰相。”俄拜端明殿學士,端明之號,自道始也。未幾,遷中書侍郎、刑部尙書、平章事。凡孤寒士子,抱才業、素知識者皆與引用;唐末衣冠,履行浮躁者必抑而鎮之。有工部侍郎任贊,因班退,與同列戲道於後曰:“若急行,必遺下『兔園冊』。”道知之,召贊謂曰:“『兔園冊』皆名儒所集,道能諷之,中朝士子止看文場秀句,便爲舉業,皆竊取公聊,何淺狹之甚耶!”贊大愧焉。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 43살)이 흥교문(興敎門) 반란(926년 4월)을 진압하는 동안에 화살에 맞아 죽었기에 4월에 이사원(李嗣源, 867-933, 李克用의 양자)가 낙양에 들어와 즉위하여 후당 명종이 되었다.〕
명종(李嗣源, 867-933, 沙陀族, 李克用의 양자, 926년 4월 흥교문 반란에 장종 이존욱이 죽었기에 이사원이 낙양에 들어와 즉위하여 명종이 됨)이 926년 4월 낙양에 들어와 즉위하고 곧바로 가까운 신하 안중회(安重誨, ?-931, 粟特族人)에게 “선제 장종 시기에 풍도 낭중은 어디에서 근무하였는가?”라고 물었다. 안중회는 “가까이 두려고 한림학사에 임명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명종은 “내가 이 사람을 상세하게 아는데 재상에 아주 적합하다.”고 말하고 잠시 뒤에 단명전(端明殿) 학사에 임명하였는데 단명(端明)이라는 이름은 풍도부터 시작되었다. 얼마 뒤에는 풍도를 중서성 시랑 또 형부 상서 다시 평장사(平章事)로 승진시켰다. 풍도는 출신이 낮고 가난한 지식인들 가운데 능력과 업적이 있으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모두 추천하여 임용하였다. 또 당나라 말기에 관원을 지냈으면서 행실이 건방진 사람들은 반드시 꺾고 눌렀다. 예를 들어 공부 시랑 임찬(任贊, 字希度, 명종 天成 원년부터 4년까지 工部 侍郎을 지냄)이 퇴근하면서 동급 관원(劉岳)과 함께 풍도 뒤를 따라가며 농담하여 “풍도가 왜 저렇게 급하게 갑니까? 저렇게 빨리 걸어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과거시험 교재 『토원책(兔園冊)』을 길에 떨어뜨려 잃어버렸나 봐요.”라고 깔보았다. 풍도가 듣고 임찬을 불러 “『토원책』에 실린 글은 모두 유명한 학자들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고 저도 배웠기에 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직 관원들과 초학자들은 과거시험에 자주 나오는 글귀만 보며 과거시험을 공부하고 관원이 되면 높은 관직들을 차지하려는데 얼마나 천박하고 협소합니까?”라고 꾸짖었다. 임찬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新五代史』, 「劉岳傳」에는 풍도가 임찬을 散騎常侍로, 유악을 秘書監으로 좌천시켰다고 한다. 또 당시에 문풍을 반성하였는데 『舊五代史』, 「李琪傳」에서 李琪가 18살에 賦 몇 편을 李溪에게 보여주니 李溪가 “吾子入句見題,偶屬典麗”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
李嗣源(867-933)︰
後唐明宗李嗣源(867年10月10日-933年12月15日),小字邈佶烈,沙陀族,應州(今山西應縣)人,被河東節度使李克用收爲養子,賜名嗣源,稱帝後,改名爲李亶。五代十國時期,後唐的第二位皇帝。
中和四年(884),李嗣源在汴州上源驛救護李克用,從此受到李克用賞識。李嗣源在與後梁的爭戰中屢立戰功,被授予蕃漢內外馬步副總管,加同平章事。同光元年(923)十月,李嗣源率先攻入汴梁,滅了後梁。後唐建立後,李嗣源受到猜忌。同光四年(926)二月,趙在禮爲首的魏博戍卒譁變於貝州,李嗣源受命平叛,軍隊譁變,擁李嗣源爲主。後唐莊宗李存勖死後,李嗣源稱帝,改元天成,改名李亶,是爲後唐明宗。長興四年(933)末,李嗣源病重。其次子秦王李從榮發動兵變,戰敗被殺,李嗣源聞訊驚逝。
李嗣源即位後,志在與民休息,共享承平,在文化上命令國子監校正“九經”,提倡儒家學術。在政治上積極籠絡各集團人員,擴大統治基礎,爭取地方藩鎮支持。在經濟上實行寬鬆的經濟政策,減輕民眾稅負,促進農業生產,穩定糧價,准許鄉間百姓自造酒麴,放寬諸如鑄鐵業在內的民間手工業限制,允許百姓自由鑄造鐵質農具,減輕鐵稅,其在位期間“天下屢稔,朝廷無事”,中原經濟逐漸復甦,司馬光在其『資治通鑒』中贊其“校於五代,粗爲小康”。但李嗣源也有嚴重錯誤,他疑忌太重,隨便誅戮大臣,晚年連續殺了宰相任圜和樞密使安重誨,使群臣離心,父子互相猜疑。
安重誨(?-931)︰
安重誨(?-931),河東應州(今山西應縣)人,粟特族人。五代時期後唐大臣,晉王李克用大將安福遷的兒子。驍勇善戰,才能過人,跟隨李嗣源征戰四方。後唐明宗即位,憑藉擁戴功勛,出任左領軍大將軍、樞密使、山南東道節度使,累任侍中兼中書令、護國軍節度使,總攬政事。不通文墨,剛愎專斷,力主削藩,誣殺宰相任圜等,在處理潞王李從珂的問題上與後唐明宗發生了意見分歧,受到皇帝嫌忌,調任河東節度使,以太子太師致仕。長興二年(931),李從璋親赴河東,將安重誨誅殺。
任贊︰
字希度。後梁太祖開平初,登進士第,累遷翰林學士。入後唐,莊宗同光元年貶房州司馬。明宗天成元年,自太子左庶子爲工部侍郎。四年,改左散騎常侍,判大理卿事。長興四年,歷任戶部、刑部、兵部侍郎。坐秦王李從榮事而長流。後晉高祖天福四年,自工部侍郎改兵部侍郎。能詩,詩一首。(『全唐詩』無任贊詩,傳據『舊五代史』卷三十、卷三六、卷四十、卷四四、卷七八、卷一二八擬)
劉岳︰
(當初,唐明宗死,太常卿崔居儉,按舊例當任禮儀使,崔居儉以祖父名蠡應當避諱作推辭。)
劉岳,字昭輔,洛陽人也。唐民部尙書政會之八代孫,崇龜、崇望其諸父也。岳名家子,好學,敏於文辭,善談論。舉進士,事梁爲左拾遺、侍御史。末帝時,爲翰林學士,累官至兵部侍郎。梁亡,貶均州司馬,復用爲太子詹事。唐明宗時,爲吏部侍郎。故事,吏部文武官告身,皆輸硃膠紙軸錢然後給,其品高者則賜之,貧者不能輸錢,往往但得敕牒而無告身。五代之亂,因以爲常,官卑者無復給告身,中書但錄其制辭,編爲敕甲。岳建言,以謂“制辭或任其材能,或褒其功行,或申以訓誡,而受官者既不給告身,皆不知受命之所以然,非王言所以告詔也。請一切賜之。”由是百官皆賜告身,自岳始也。
(馮道改崔居儉任秘書監,崔居儉因失去原有職位而怏怏不樂。)
宰相馮道世本田家,狀貌質野,朝士多笑其陋。道旦入朝,兵部侍郎任贊與岳在其後,道行數反顧,贊問岳:“道反顧何爲?”岳曰:“遺下『兔園冊』爾。”『兔園冊』者,鄉校俚儒教田夫牧子之所誦也,故岳舉以誚道。道聞之大怒,徙岳秘書監。其後李愚爲相,遷岳太常卿。
(中書舍人李詳爲崔居儉起草誥詞,有“聞名心懼”的話,劉啊就改成“有恥且格”。)
初,鄭餘慶嘗採唐士庶吉凶書疏之式,雜以當時家人之禮,爲『書儀』兩卷。明宗見其起復、冥昏之制,嘆曰:“儒者所以隆孝悌而敦風俗,且無金革之事,起復可乎?婚,吉禮也,用於死者可乎?”乃詔岳選文學通知古今之士,共刪定之。岳與太常博士段顒、田敏等增損其書,而其事出鄙俚,皆當時家人女子傳習所見,往往轉失其本,然猶時有『禮』之遺制。其後亡失,愈不可究其本末,其婚禮親迎,有女坐婿鞍合髻之說,尤爲不經。公卿之家,頗遵用之。至其久也,又益訛謬可笑,其類甚多。岳卒於官,年五十六,贈吏部尙書。子溫叟。
(崔居儉申訴說:“名字避諱有規定的格式,我有什麼罪?”當時聽說的人都傳爲笑談。)
嗚呼,甚矣,人之好爲禮也!在上者不以禮示之,使人不見其本,而傳其習俗之失者,尙拳拳而行之。五代干戈之亂,不暇於禮久矣!明宗武君,出於夷狄,而不通文字,乃能有意使民知禮。而岳等皆當時儒者,卒無所發明,但因其書增損而已。然其後世士庶吉凶,皆取岳書以爲法,而十又轉失其三四也,可勝嘆哉!
(等到任僕射時,入朝遇雨,改在屋廊下列隊,御史台官吏帶僕射站在中丞御史後,劉昫責問官吏根據什麼舊例,從宰相到台省都不知道。)
구양수, 『신오대사(新五代史)』 「유악전(劉岳傳)」에 풍도의 모습과 걸음걸이 두 가지를 기록하였다. 풍도 모습이 시골에서 농사짓는 집안 출신이기에 촌놈처럼 투박하게 생겨 예쁘장한 관원들이 풍도를 못생겼다고 비웃었고 출근길에 앞서 빨리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는데 병부 시랑 임찬(任贊)이 동료 관원 유악(劉岳)에게 “신임 재상 풍도가 빨리 가면서 왜 자꾸 뒤를 돌아봅니까?”라고 물었더니 유악이 “아마도 『토원책(兔園冊)』을 집에 놓고 왔는가 봐요.”라고 대답하며 비웃었다. 『토원책』은 시골 학교에서 수준 낮은 학자(俚儒)가 농사꾼이나 목동을 가르치면서 읊던 책이기에 유악이 이 책 이름을 들어 풍도를 나무랐다. 풍도가 이를 듣고 크게 화를 내더니 유악을 비서감으로, 임찬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좌천시켰다. 뒤에 이우(李愚)가 재상이 되어 유악을 태상경(太常卿)으로 승진시켰다.
『兔園冊』︰
宋、孫光憲,『北夢瑣言』,卷一九:“宰相馮道,形神庸陋。一旦爲丞相,士人多竊笑之。劉嶽與任贊偶語,見道行而復顧,贊曰:‘新相回顧何也?’嶽曰:‘定是忘記持『兔園冊』來。’道之鄉人在朝者,聞之告道,道因授嶽秘書監,任贊授散騎常侍。北中村墅多以『兔園冊』教童蒙,以是譏之。然『兔園冊』乃徐、庾文體,非鄙樸之談,但家藏一本,人多賤之也。”
兔園是漢文帝之子梁孝王劉武的園囿,又稱梁園。宋、王應麟『困學紀聞』卷一四:“『兔園冊府』三十卷,唐、蔣王惲令僚佐杜嗣先(634-712)仿應科目策,自設問對,引經史爲訓注。惲,太宗子,故用梁王‘兔園’名其書。馮道『兔園冊』謂此也。『舊五代史、馮道傳』:“有工部侍任贊,因班退,與同列戲道於後曰:‘若急行,必遺下『兔園冊』。’”唐代作爲啟蒙課本,因此受到士大夫的輕視。宋、晁公武『郡齋讀書志』稱:“『兔園冊』十卷……一皆偶儷之語,五代時,行於民間村塾,以授學童,故有‘遺下兔園冊’之誚。”
敦煌寫本『兔園策府』共有5個殘卷,保存了該書的序文及卷一「辨天地」、「正曆數」、「議封禪」、「征東夷」、「均州壤」。5個殘卷散藏于英國倫敦博物館(s.614、s.1086、s.1722),法國巴黎國家圖書館(p.2573),俄羅斯科學院東方研究所聖彼得堡分所(Дx.05438)。其中略抄本有s.614、s.1722、p.2573、Дx.05438共4個寫卷,雙行小註本僅號1個寫卷,且與可綴合。
『兔園策』,又稱『兔園策府』、『兔園冊府』、『兔園冊』、『兔園冊子』等,是中國古代的一部類書,在唐代迄五代時用作民間私塾學童的啟蒙讀本,共30卷,分48個門類。已佚。唐太宗之子李惲命屬下杜嗣先編撰,也有傳爲虞世南所寫。書名中的「兔園」是李惲的園林名。全書以對偶形式記述古今知識,通俗易懂。元代以後失傳。淸朝時在敦煌石窟發現殘卷,後失竊。現僅存序文殘篇。『兔園策』因內容膚淺,故常被輕視,稱之『兔園冊子』。朱彝尊在『重刊玉篇、序』評價爲“今之塾師『說文』、『玉篇』皆置不問,『兔園冊子』專稽於梅氏『字彙』」。”五代時的馮道歷仕多朝,擔任大官。時人素輕之。後唐時一次上朝,他總回頭看身後的兵部侍郎任贊和劉嶽,任贊不解,劉嶽說馮道必定是丟了『兔園策』。以此嘲諷馮道沒有才學,只能靠『兔園策』上朝應對。馮道知道後大怒,將劉嶽左遷爲秘書監。留下了“遺下兔園”的典故。王季思『集評校注西廂記』“釋故典處,不免兔園冊子陋學”。
『宋史』,卷二百八,藝文志第一百六十一,藝文七,別集類︰杜嗣先,『兔園策』十卷。
『宋史』,卷二百九,藝文志第一百六十二,藝文八,總集類︰杜嗣先,『兔園策府』三十卷。
『文獻通考』,卷二百二十八,『兔園策』十卷︰晁氏曰︰唐、虞世南撰,奉王命纂古今事爲四十八門,皆偶麗之語。至五代時,行於民間,村墅以授學童,故有“遺下兔園策之誚”。
『郡齋讀書志』,卷八,『兔園策』十卷︰
右唐虞世南撰,奉王命纂古今事爲四十八門,皆偶儷之語。
杜嗣先(634-712年10月9日)︰
唐朝偃師(今屬河南)人。撰『兔園策』三十卷。西晉杜預之後代。貞觀八年生,十八歲舉孝廉,貞觀年間擔任蔣王李惲僚佐。累官至禮部侍郎,徐州刺史。先天元年(712)九月六日卒。
杜嗣先,唐、河南偃師人。太宗時,爲蔣王李惲僚佐,官至禮部侍郎。撰類書『兔園策府』三十卷,仿應科目策,自設問對,引經史爲訓注。唐五代時流傳甚廣,宋以後失傳,淸末於敦煌遺書中發現殘卷。
「在唐朝發現“日本”」,張程,『中華讀書報』,2021年11月10日
「洛陽偃師新出土《杜嗣儉閻夫人墓志》及相關問題研究」,毛陽光,『敦煌學輯刊』,2014年01期
「杜嗣先墓誌」(葉國良,「徐州刺史杜嗣先墓志」,台灣大學,『中文學報』,1995年)︰
公諱嗣先,京兆人也。高祖,魏、龍驤將軍、豫州刺史,惠公諱遇,字慶期,晉、鎭南大將軍,當陽侯預之六代孫。預生新平太守躋,躋生南陽太守冑,冑生燕郡太守嶷,嶷生中書侍郎、新豐侯銓。銓生中書博士振,振生遇,有賜田于洛邑,子孫因家于河南之催師寓,凡四代臭。曾祖,周、新城太守琳。祖,隋、朝散大夫,行昌安縣令款。考,皇朝、滑州長史業。
公少好經史,兼屬文筆,心無偽飾,口不二言。由是鄉閭重之,知友親之。年十八,本州察孝廉。明慶三年,釋褐,蔣王府典籤。麟德元年,河南道大使,左相竇公,旌節星移,州郡風靡,出轘轅之路,入許穎之郊,官僚之中,特加禮接。時即表薦,馳驛就徵,逐於合璧宮引見,制試乾元殿,頒即降恩旨,授昭文館直學士。借馬茾(?)人,仍令於洛城門待制,尋授太子左率府倉曹參軍,又除國子監主簿。□入芳林門內,與學士高若恩、孟利貞、劉禕之、郭正一等供奉。威亨元年,鑾輿順動,避暑幽岐,沛王以天人之姿,留守監國,遂降敕日、駕幸九成宮。□令學士劉禕之・杜嗣先於沛王賢處參侍言論。尋授雍王記室參軍。與侍讀劉訥、功曹韋承慶等參注『後漢』。上元二年,藩邸昇儲,元良貞國。又遷太子文學,兼攝太子舍人。永崇元年,以官僚故事,出爲鄆州鉅野縣令,又除幽州薊縣令。還私後,除汝州司馬,又除蘇州吳縣令。尋加朝散大夫、簡州長史入計。又除太子洗馬、昭文館學士,又遷給事中、禮部侍郎。以前數官,咸帶學士。其所撰『兔園策府』及雜文筆,合廿卷、見行於時。每至朝儀有事,禮申大祀,或郊丘展報,或陵廟肅誠,上帝宗於明堂,法駕移於京邑。元正獻壽,南至履長,朝日迎於青郊、神州,尊於黑座。公凡一攝太尉,三攝司寇,重主司空,再入門下。或獻替於常侍,或警衞於參軍,典禮經於太常,修圖書於大象矣。又屬皇明、遠被,日本來庭,有敕令公與李懷遠、豆慮欽望、祝欽明等賓於蕃使,共其語話。至神龍元年,又除徐州刺史,預陪祔廟,恩及追尊,贈公皇考滑州長史。公於是從心自逸,式就懸車,立身揚名,其德備矣。藏舟變叡壑,歸居奄及。粵以先天元年九月六日薨於列祖舊墟偃師之別第,春秋七十有九。以二年二月二日,與夫人鄭氏祔葬於洛都故城東北首陽原當陽侯塋下,禮也。孤子貝州司兵維驥,失其孝養,痛貫骨髓,伏念遺訓、實録誌云。
(釋文、句読點は高橋継男「最古の「日本」‐‐「杜嗣先墓誌」の紹介」(専修大学、西北大学共同プロジュクト編『遣唐使の見た中国と日本』朝日新聞社,2005所収)による。
復有梁朝宰臣李琪,每以文章自擅,曾進「賀平中山王都表」云:“復眞定之逆賊”。道讓琪曰:“昨來收復定州,非眞定也。”琪昧於地理,頓至折角。其後百僚上明宗徽號凡三章,道自爲之,其文渾然,非流俗之體,舉朝服焉。道尤長於篇詠,秉筆則成,典麗之外,義含古道,必爲遠近傳寫,故漸畏其高深,由是班行肅然,無澆漓之態。繼改門下侍郎、戶部、吏部尙書、集賢殿、弘文館大學士,加尙書左僕射,封始平郡公。一日,道因上謁既退,明宗顧謂侍臣曰:“馮道性純儉,頃在德勝寨居一茅庵,與從人同器食,臥則芻槁一束,其心晏如也。及以父憂退歸鄉里,自耕樵採,與農夫雜處,略不以素貴介懷,眞士大夫也。”
또 후량(後梁) 재상 이기(李琪, 字台秀, 李縠의 아들, 李珽의 아우)가 평소에 문장을 잘 짓는 것을 자랑하였고 「중산국 왕도를 평정한 것을 축하드립니다(賀平中山王都)表」는 표문을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진정(眞定)의 역적을 평정하여 수복하였다.”고 적었다. 풍도가 이기를 타일러 “최근에 정주(定州)를 수복하였고 진정(眞定)이 아닙니다.”고 말하였다. 이기가 지리에 어두워서 풍도와 논쟁에서 금방 졌다. 뒤에 모든 관원이 명종의 존호(尊號, 다른 이름 徽號) 3장(章)을 올렸는데 풍도 역시 지어 올렸다. 그의 문장 내용은 규모가 크고 평범하지 않아 조정 관원들이 감복하였다. 풍도는 시가(詩歌)를 잘 지었는데 붓을 들자마자 곧바로 완성하였고 문체가 전아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내용이 옛날 도리를 담고 있기에 멀리에서도 베껴갔다. 그래서 그의 문장이 수준 높고 뜻이 깊다는 것을 사람들은 점차 두려워하였고 근무하는 동료 관원들도 그에게는 조용하고 경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문하성 시랑, 호부 이부 상서, 집현전 홍문과 대학사를 역임하였고 죽은 뒤에는 상서 좌복야(尙書 左僕射)에 추서하고 시평군(始平郡) 군공(郡公)에 봉하였다. 하루는 풍도가 명종을 알현한 뒤에 물러나자 명종이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 “풍도는 성격이 순박하고 검약하며 최근에는 덕승채(德勝寨)의 작은 초가집에 머물며 아랫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돗자리에 누워 자면서도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가서도 몸소 농사짓고 땔나무 하며 농부들과 어울리고 평소에 높은 관원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로 훌륭한 사대부(士大夫)입니다.”고 칭찬하였다.
참고 자료 :
李琪︰『舊五代史』,卷五十八︰
昭宗時,李溪父子以文學知名。琪年十八,袖賦一軸謁溪。溪覽賦驚異,倒屣迎門,出琪「調啞鍾」、「捧日」等賦,謂琪曰:“余嘗患近年文士辭賦,皆數句之後,未見賦題,吾子入句見題,偶屬典麗,吁!可畏也。”琪由是益知名,舉進士第。天復初,應博學弘詞,居第四等,授武功縣尉,闢轉運巡官,遷左拾遣、殿中侍御史。自琪爲諫官憲職,凡時政有所不便,必封章論列,文章秀麗,覽之者忘倦。
天成、長興中,天下屢稔,朝廷無事。明宗每御延英,留道訪以外事,道曰:“陛下以至德承天,天以有年表瑞,更在日慎一日,以答天心。臣每記在先皇霸府日,曾奉使中山,徑井陘之險,憂馬有蹶失,不敢怠於銜轡;及至平地,則無復持控,果爲馬所顛僕,幾至於損。臣所陳雖小,可以喻大。陛下勿以淸晏豐熟,便縱逸樂,兢兢業業,臣之望也。”明宗深然之。他日又問道曰:“天下雖熟,百姓得濟否?”道曰:“穀貴餓農,穀賤傷農,此常理也。臣憶得近代有舉子聶夷中「傷田家詩」云:‘二月賣新絲,五月糶秋穀。醫得眼下瘡,剜卻心頭肉。我願君王心,化作光明燭。不照綺羅筵,遍照逃亡屋。’”明宗曰:“此詩甚好。”遂命侍臣錄下,每自諷之。道之發言簡正,善於裨益,非常人所能及也。
천성(明宗 天成, 926-930)과 장흥(明宗 長興, 930-933) 연간에는 전국적인 농사가 풍년이 들고 조정에도 큰 일이 없었다. 명종이 연영전(延英殿)에 올 때마다 풍도를 붙잡고 조정 밖의 일들을 물었다. 풍도가 “폐하께서는 지극한 공덕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후당을 건국하셨으며 하늘에서도 해마다 상서로움을 나타내시는데 하루하루를 조심하셔서 하늘의 뜻에 보답하셨야 합니다. 제가 선황시기에 패부(覇府)에서 근무할 때 중산국에 사신을 가면서 태행산(太行山)의 정정산(井陘山)의 험지를 가로질러 가면서 말이 넘어질까 걱정하여 말고삐를 꼭 잡았는데 평지에 와서는 방심하고 고삐를 꼭 잡지 않았더니 과연 말이 엎어져 떨어졌고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일은 작으나 국가를 다스리는 큰일에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조정에 큰일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안일하지 마시고 열심히 근무하시길 바랍니다.”고 건의하였다. 명종이 깊이 동의하였다. 또 어느날에는 명종이 풍도에게 “해마다 전국적인 풍년이 드는데 백성들은 생활이 나아집니까(濟, 救濟)?”고 물었다. 풍도가 “시장에서 곡물 가격이 비쌀수록 농민은 많은 돈을 벌려고 많은 곡물을 팔기에 배를 곯고 곡물 가격이 쌀수록 농민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데 이것이 시장 가격변동의 법칙입니다. 당나라 시기에 과거시험 준비하던 학생 섭이중(聶夷中, 837-?)이 지은 「농가를 안타까워하며(傷田家)」 시(詩)에서 ‘2월인데 벌써 올해 생산할 비단을 미리 팔고 5월에는 걷지도 않은 가을 곡식을 미리 파네. 눈앞의 종기를 고치자고 가슴살을 도려내는구나. 임금님 마음이 밝은 등불이 되시길 바랍니다. 비단옷 입은 관원들만 이야기만 듣지 마시고 세금을 내지 못하여 도망간 농민들도 비추어주시길 바랍니다.”고 읊은 것을 기억합니다. 명종이 “이 시가 아주 좋습니다.”고 말하고 가까운 신하에게 기록하라고 시키고 자주 읊었다. 풍도의 건의는 내용이 간결하고 올바르기에 임금에게 도움이 많았는데 일반인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
李琪︰『舊五代史』,卷五十八︰
李琪,字台秀。五代祖憕,天寶末,禮部尙書、東部留守。安祿山陷東都,遇害,累贈太尉,謚曰忠懿。憕孫寀,元和朝,位至給事中。寀子敬方,文宗朝,諫議大夫。敬方子縠,廣明中,爲晉公王鐸都統判官,以收復功爲諫議大夫。……
莊宗入汴,素聞琪名,累欲大任。同光初,歷太常卿、吏部尙書。三年(925)秋,天下大水,國計不充,莊宗詔百僚許上封事,陳經國之要。琪因上疏曰:
“臣聞王者富有兆民,深居九重,所重患者,百姓凋耗而不知,四海困窮而莫救,下情不得上達,群臣不敢指言。今陛下以水潦之災,軍食乏闕,焦勞罪己,迫切疚懷,避正殿以責躬,訪多士而求理,則何思而不獲,何議而不臧?止在改而行之,足以擇其善者。
臣聞古人有言曰:‘穀者,人之司命也;地者,穀之所生也;人者,君之所理也。’有其穀則國力備,定其地則人食足,察其人則徭役均,知此三者,爲國之急務也。軒黃已前,不可詳記。自堯湮洪水,禹作司空,於時辨九等之田,收什一之稅,其時戶一千三百餘萬,定墾地約九百二十萬頃,最爲太平之盛。及商革夏命,重立田制,每私田十畝,種公田一畝,水旱同之,亦什一之義也。洎乎周室,立井田之法,大約百里之國,提封萬井,出車百乘,戎馬四百匹。畿內兵車萬乘,馬四萬匹,以田法論之,亦什一之制也。故當成、康之世,比堯、舜之朝,戶口更增二十餘萬,非他術也,蓋三代以前,皆量入以爲出,計農以立軍,雖逢水旱之災,而有凶荒之備。
降及秦、漢,重稅工商,急關市之徵,倍舟車之算,人戶既以減耗,古制猶以兼行,按此時戶口,尙有千二百餘萬,墾田亦八百萬頃。至乎三國並興,兩晉之後,則農夫少於軍眾,戰馬多於耕牛,供軍須奪於農糧,秣馬必侵於牛草,於是天下戶口,只有二百四十餘萬。洎隋文之代,兩漢比隆,及煬帝之年,又三分之一。
我唐太宗文皇帝,以四夷初定,百姓未豐,延訪群臣,各陳所見,惟魏徵獨勸文皇力行王道,由是輕徭薄賦,不奪農時,進賢良,悅忠直,天下粟價,斗直兩錢。自貞觀至於開元,將及一千九百萬戶,五千三百萬口,墾田一千四百萬頃,比之堯、舜,又極增加,是知救人瘼者,以重斂爲病源;料兵食者,以惠農爲軍政。仲尼云:“百姓足,君孰與不足。”臣之此言,是魏徵所以勸文皇也,伏惟深留宸鑒。如以六軍方闕,不可輕徭,兩稅之餘,猶須重斂,則但不以折納爲事,一切以本色輸官,又不以紐配爲名,止以正耗加納,猶應感悅,未至流亡。況今東作是時,羸牛將駕,數州之地,千里運糧,有此差徭,必妨春種,今秋若無糧草,保以贍軍。
臣伏思漢文帝時,欲人務農,乃募人入粟,得拜爵及贖罪,景帝亦如之。後漢安帝時,水旱不足,三公奏請,富人入粟,得關內侯及公卿以下散官。本朝乾元中,亦曾如此。今陛下縱不欲入粟授官,願明降制旨下諸道,合差百姓轉倉之處,有能出力運官物到京師,五百石以上,白身授一初任州縣官,有官者依資遷授,欠選者便與放選。千石以上至萬石,不拘文武,明示賞酬。免令方春農人流散,斯亦救民轉倉贍軍之一術也。”
莊宗深重之,尋命爲國計使,垂爲輔相,俄遇蕭牆之難而止。
『新五代史』,卷五十四,雜傳第四十二︰
李琪,字台秀,河西燉煌人也。……
唐莊宗滅梁,得琪,欲以爲相,而梁之舊臣多嫉忌之,乃以爲太常卿。遷吏部尙書。同光三年(925)秋,天下大水,京師乏食尤甚,莊宗以朱書御札詔百僚上封事。琪上書數千言,其說漫然無足取,而莊宗獨稱重之,遂以爲國計使。方欲以爲相,而莊宗崩。
『五代會要』,卷二十五,「租稅」︰
吏部尙書李琪上疏曰︰……按同光三年(925),是爲莊宗既滅梁蜀之後,驕侈自恣,賞賚無節,倉廩空虛,軍民諮怨,孔謙復行,尅剝之政,民力重困,而國用不支,將以危亡之時也。然則琪言雖美,詔敕雖再祗,虛文耳。以此疏敘述歷代勸農、寬徵、生聚之事,辭簡而義備故錄之。
時以諸經舛繆,與同列李愚委學官田敏等,取西京鄭覃所刊石經,雕爲印版,流布天下,後進賴之。
당시에 구경(九經)에 오탈자가 많기에 풍도는 동료 관원 이우(李愚, ?-935)와 함께 상의하여 학관(學官) 전민(田敏, 880-?, 鄒平人, 長興 3년에 評勘官이 되어 馬鎬 등과 함께 太學의 九經을 교감하고 인쇄하여 천하에 반포하였다.)에게 서경(西京, 長安) 정담(鄭覃, ?842)이 판각한 석경(石經)에 근거하여 교감하고 출판하여 천하에 유포하는 일을 맡겼는데 후학들이 큰 도움을 받았다.
明宗崩,唐末帝嗣位,以道爲山陵使,禮畢,出鎮同州,循故事也。道爲政閒淡,獄市無撓。一日,有上介胡饒,本出軍吏,性粗獷,因事詬道於牙門,左右數報不應。道曰:“此必醉耳!”因召入,開尊設食,盡夕而起,無撓慍之色。未幾,入爲司空。
명종이 죽고 민제(愍帝)가 황제위에 오르자 풍도를 명종의 무덤을 짓는 산릉사(山陵使)에 임명하고 장례를 마치자, 말제(廢帝)가 민제를 몰아내고 황제위에 오르자 풍도를 동주(同州) 절도사에 임명하였는데 관례에 따른 것이다. 풍도의 정책은 간단하고 담백하였으며 옥송(獄訟)과 시장 교역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높은 무직 관원 호요(胡饒, ?-936)는 본래 군리(軍吏) 출신이며 성격이 거칠고 사나웠는데 어떤 일 때문에 관아 앞에서 재상 풍도에게 욕하기에 주변 관원들이 몇 번이나 풍도에게 보고하였으나 풍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풍도가 “이 사람이 반드시 술에 취하였을 것이다.”고 말하며 불러들여서 술상을 차려주고 함께 마시면서 저녁에야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얼마 뒤에 폐제(廢帝)가 풍도를 사공(司空)에 임명하였다.
及晉祖入洛,以道爲首相。二年,契丹遣使加徽號於晉祖,晉祖亦獻徽號於契丹,謂道曰:“此行非卿不可。”道無難色。晉祖又曰:“卿官崇德重,不可深入沙漠。”道曰:“陛下受北朝恩,臣受陛下恩,何有不可!”及行,將達西樓,契丹主欲郊迎,其臣曰:“天子無迎宰相之禮。”因止焉,其名動殊俗也如此。
후진(後晉) 고조(高祖, 石敬瑭, 892-942, 후당 명종의 사위, 936년 11월에 거란에 국토를 베어주고 신하와 아들을 자청하는 조건을 걸고 도움을 요청하자 거란이 석경당을 후진 황제에 임명하였다. 석경당 재위 936-942년)가 936년 윤11월에 낙양에 들어와서 풍도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천복(天福) 2년(937, 풍도 55살)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 석경당에게 존호를 내렸기에 석경당도 천복 3년(938) 10월 거란에 존호를 바치려고 풍도를 사신으로 결정하면서 풍도에게 “이번 사신 파견은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고 말하였고 풍도는 아무런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석경당이 풍도를 전별하면서 다시 “당신은 관직이 높고 덕망도 높으니 사막 깊숙이 들어가지는 마십시오.”라고 말하였더니 풍도가 “폐하께서는 북조(거란)의 은혜를 받으셨고 저는 폐하의 은혜를 받았는데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풍도가 길을 떠나 서루(西樓)에 이를 즈음에 거란국 황제가 교외에 나가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그의 신하가 “천자가 재상을 맞이하는 예의는 없습니다.”고 아뢰고 말렸다. 풍도의 명성이 거란에서도 이렇게 컸다.
及還,朝廷廢樞密使,依唐朝故事,並歸中書,其院印付道,事無巨細,悉以歸之。尋加司徒、兼侍中,進魯國公。晉祖曾以用兵事問道,道曰:“陛下歷試諸艱,創成大業,神武睿略,爲天下所知,討伐不庭,須從獨斷。臣本自書生,爲陛下在中書,守歷代成規,不敢有一毫之失也。臣在明宗朝,曾以戎事問臣,臣亦以斯言答之。”晉祖頗可其說。道嘗上表求退,晉祖不之覽,先遣鄭王就省,謂曰:“卿來日不出,朕當親行請卿。”道不得已出焉。當時寵遇,無與爲比。
천복 4년(939) 2월에 풍도가 돌아왔고 조정은 추밀사를 폐지하고 당나라 관제에 따라 중서성에 귀속시키고 추밀원의 도장을 풍도에게 주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맡겼다. 조금 뒤에 풍도에게 사도(司徒)로 승진시키고 시중을 겸하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하였다. 후진 고조 석경당이 정벌 전쟁을 풍도에게 물었더니 풍도가 “폐하께서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시고 후진(後晉)을 창업하셨기에 뛰어나신 무용(武勇)과 밝으신 전략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근(朝觐)하지 않는 정권을 토벌하시려면 반드시 임금께서 독단하셔야 합니다. 신하 저는 서생 출신이며 폐하의 임명을 받아 중서성에서 근무하며 역대 규범을 지키며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합니다. 신하 저는 명종(李嗣源, 867-933) 연간 근무하는 동안에 명종께서 전쟁을 물으셨을 때 신하 저는 똑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고 말하여 대답을 회피하였다. 후진 고조가 풍도의 말에 상당히 동의하고 더 묻지 않았다. 풍도가 퇴직하겠다고 표를 올렸는데 후진 고조는 들쳐보지도 않고 먼저 정왕(鄭王)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고 “경(卿, 풍도)께서 내일 출근하지 않으시면 짐이 반드시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고 전달하였다. 풍도가 어쩔 수 없이 출근하였다. 당시에 풍도가 받은 총애는 누구도 비교할 수 없었다.
참고 자료 :
晉祖(石敬瑭,892-942)︰
後晉高祖石敬瑭(892-942),沙陀族,太原人。後唐明宗李嗣源的女婿,五代十國時期後晉開國皇帝(936-942)在位。
石敬瑭以善射被李嗣源倚爲心腹,後唐莊宗同光四年(926),李嗣源討趙在禮,至魏州,石敬瑭統親軍擁李嗣源爲主,迅速佔領汴州。李嗣源不久即位,是爲明宗。石敬瑭因此先後被任命爲保義、宣武、天雄、河陽、河東節度使。長興四年(933),李嗣源死,子李從厚繼位,是爲閔帝,加石敬瑭中書令,調任成德節度使,後又鎮守太原。次年,李從珂反,閔帝出奔,路遇石敬瑭,被石敬瑭挾留在衛州。不久,閔帝爲李從珂所殺,李從珂即位,是爲末帝。末帝猜忌石敬瑭,於淸泰三年(936)命石敬瑭移鎮天平軍。石敬瑭遂與桑維翰、劉知遠等謀反,以割地、稱臣、稱兒爲條件,請求契丹出兵相助。十一月,契丹主耶律德光立石敬瑭爲帝,國號晉,史稱後晉,改元天福。後晉割幽雲十六州給契丹,並每年獻帛三十萬匹。閏十一月,後晉和契丹合兵攻克洛陽,後唐滅亡。天福二年(937),石敬瑭遷都汴州。天福三年(938),升汴州爲東京,置開封府,改洛陽爲西京。石敬瑭在位期間,連年發生兵亂,且依附契丹,使中原地區動蕩不安。天福七年(942),吐谷渾(退渾)活動於河東,對契丹造成威脅,石敬瑭因此受到責問,憂鬱成疾而死,享年五十一歲。廟號高祖,謚號聖文章武明德孝皇帝,葬於顯陵。
晉少帝即位,加守太尉,進封燕國公。道嘗問朝中熟客曰:“道之在政事堂,人有何說?”客曰:“是非相半。”道曰:“凡人同者爲是,不同爲非,而非道者,十恐有九。昔仲尼聖人也,猶爲叔孫武叔所毀,況道之虛薄者乎!”然道之所持,始終不易。後有人間道於少帝曰:“道好平時宰相,無以濟其艱難,如禪僧不可呼鷹耳!”由是出道爲同州節度使。
후진 소제(少帝, 石重貴, 914-974, 재위 942-946, 석경당 양자)가 942년 6월에 즉위하고 풍도를 수태위(守太尉)에 임명하고 연국공(燕國公)으로 올려 봉하였다. 풍도가 조정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람에게 “제가 국가 정사을 보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평가합니까?”라고 물었고 그 사람이 “찬반이 반반입니다.”고 대답하였다. 풍도가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과 같으면 찬성하고 서로 다르면 반대합니다. 저를 반대하는 사람이 열에 아홉일 것입니다. 『논어、자장편』에 공자께서 성인이셨으나 숙손무숙에게 명예를 훼손당하셨는데 저처럼 실력 없고 공적도 부족하여 허박(虛薄)한 사람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자평하였다. 그러나 풍도는 자신의 주장과 태도를 시종일관 지켰다. 어떤 사람이 후진 소제에게 풍도를 몰아내려고 “풍도는 평화시기에는 좋은 재상이나 국가가 어려울 때(소제 석중귀가 거란에 도전하려는 어려움)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니 마치 선승에게 전투에 쓰는 솔개를 날리라고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고 재상을 상유한(桑維翰, 898-947)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풍도를 광국절도사(匡國節度使)로 내보냈다. 연말에는 남양(南陽)절도사로 옮기고 중서령을 첨가해주었다.
契丹入汴,道自襄、鄧召入,戎王因從容問曰:“天下百姓,如何可救?”道曰:“此時百姓,佛再出救不得,惟皇帝救得。”其後衣冠不至傷夷,皆道與趙延壽陰護之所至也。是歲三月,隨契丹北行,與晉室公卿俱抵常山。俄而比主卒,永康王代統其眾。及北去,留其族嘉里以據常山。時漢軍憤激,因共逐出嘉里,尋復其城。道率同列四出按撫,因事從宜,各安其所。人或推其功,道曰:“儒臣何能爲?皆諸將之力也。”道以德重,人所取則,乃爲眾擇諸將之勤宿者,以騎校白再榮權爲其帥,軍民由是帖然,道首有力焉。道在常山,見有中國士女爲契丹所俘者,出橐裝以贖之,皆寄於高尼精舍,後相次訪其家以歸之。又,契丹先留道與李崧、和凝及文武官等在常山,是歲閏七月二十九日,契丹有詔追崧,令選朝士十人赴木葉山行事。契丹麻答召道等至帳所,欲諭之,崧偶先至,知其意,懼形於色。契丹麻答將以明日與朝士齊遣之,崧乃不俟道,與凝先出,既而相遇於帳門之外,因與分手俱歸。俄而李筠等縱火與契丹交鬪,鼓槊相及。是日若齊至,與麻答相見,稍或躊躇,則悉爲俘矣。時論者以道布衣有至行,立公朝有重望,其陰報昭感,多此類也。
946년 10월에 거란 황제 야율광덕(耶律光德, 902-947)이 후진(後晉) 수도 변(汴, 938년 汴을 東京으로 삼음)을 함락시킨 뒤에 풍도를 양번 등주(襄樊、鄧州)에서 불러들였다. 거란 황제가 편안대로 풍도에게 “천하의 백성을 어떻게 구제하여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풍도가 “현재 백성은 부처가 다시 나오시더라도 구제할 수 없고 오직 황제께서만 구제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추켜세웠다. 멸망한 후진의 관원들이 크게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은 거란에 항복하여 태부(太傅)가 된 풍도와 항복하여 유주 절도사가 된 조연수(?-948)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947년 3월에 풍도는 거란 군대를 따라 북으로 가는데 후진의 소제와 황실 및 공경 관원들 모두 진주(鎭州)의 상산(常山, 河北省曲阳에 있는 옛날에 北岳이라고 불렸던 恒山)에 이르렀다. 갑자기 북쪽 임금(比主는 北主의 오자, 戎王, 耶律光德)이 죽자 영강왕(永康王, 兀欲, 耶律解里)이 대신하여 포로들을 통솔하였다. 북쪽으로 떠나자 풍도는 가족을 가리(嘉里)에 남겨두고 본인은 상산에 들어갔다. 당시에 유지원(劉知遠이 太原에서 건국한 왕조 後漢, 존속기간 947-950)의 군대가 분격하기에 풍도도 참여하여 가리(嘉里)에서 거란 군대를 몰아내고 곧이어 성곽을 수복하였다. 풍도는 동료 관원들과 함께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달랬고 사정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진정되었다. 사람들은 공로를 풍도에게 돌리자 풍도는 “유신(儒臣)이 어떻게 할 수 있나요? 모두 여러 장군의 공로입니다.”고 사양하였다. 풍도의 덕행(德行)이 커서 사람들이 풍도에게 모여들자 풍도가 군중을 조직하기 위하여 여러 장수 가운데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을 뽑았는데 기교(騎校) 백재영(白再榮, ?-960)을 통수권자(留後)로 삼았더니 군대와 백성 모두 순종하였고 풍도의 공로가 가장 컸다. 풍도가 상산(常山)에 있는 동안에 거란의 포로가 된 중국인 백성들을 보고 개인 주머니의 돈을 주고 구제하여 고니정사(高尼精舍)에 묵게 하고 뒤에 차례대로 집 주소를 물어보고 돌려보냈다. 또 거란이 풍도, 이송(李崧, ?-948, 後晉의 추밀사), 화응(和凝, 898-955, 後晉의 좌복야) 3명과 문무 관원들을 상산(常山)에 구류하였는데 947년 윤7월 29일에 거란에서 조서가 내려와서 이송(李崧)을 붙잡고 이송에게 관직 높은 신하 10인을 골라 함께 거란에 있는 야율광덕의 목엽산(木葉山) 장례식에 참여시키라는 것이다. 거란 영강왕 마답(永康王, 麻答, 耶律解里)이 풍도 등 고급관원 몇 명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와서 목엽산 장례식에 보내는 일을 알려주려고 하였다. 이송이 우연히 먼저 처소에 와서 계획을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거란 마답이 내일 이송과 관원 10명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송은 풍도를 기다리지 않고 화응과 함께 먼저 처소에서 나왔고 처소 문밖에서 헤어져 돌아갔다. 갑자기 장군 이균(李筠, ?-960, 初名 李榮) 등이 불을 지르고 거란 병사들과 싸우자 북소리가 울리고 창 싸움이 일어났다. 이 날에 세 명이 함께 와서 마답을 만나고 처소에서 조금이라도 주저하였다면 모두 포로가 되어 거란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풍도가 포의 시절에 행실이 아주 좋았고 관원이 된 뒤에 명성이 높아서 음덕(陰德) 덕택이라고 평론하였는데 다른 일들도 이렇게 설명하였다.
及自常山入覲,漢祖嘉之,拜守太師。
풍도가 상산에서 돌아오니 후한(後漢, 존속기간 947-950) 개국 황제 유지원(劉知遠, 895-948)이 칭찬하고 수태사(守太師)에 임명하였다.
乾祐中,道奉朝請外,平居自適。一日,著「長樂老自敘」云:
余世家宗族,本始平、長樂二郡,歷代之名實,具載於國史家牒。余先自燕亡歸晉,事莊宗、明宗、閔帝、淸泰帝,又事晉高祖皇帝、少帝。契丹據汴京,爲北主所制,自鎮州與文武臣僚、馬步將士歸漢朝,事高祖皇帝、今上。顧以久叨祿位,備歷艱危,上顯祖宗,下光親戚。亡曾祖諱湊,累贈至太傅,亡曾祖母崔氏,追封梁國太夫人;亡祖諱炯,累贈至太師,亡祖母褚氏,追封吳國太夫人;亡父諱良建,秘書少監致仕,累贈至尙書令,母張氏,追封魏國太夫人。
余階自將仕郎,轉朝議郎、朝散大夫、銀靑光祿大夫、金紫光祿大夫、特進、開府儀同三司。職自幽州節度巡官、河東節度巡官、掌書記,再爲翰林學士,改授端明殿學士、集賢殿大學士、太微宮使,再爲宏文館大學士,又充諸道鹽鐵轉運使、南郊大禮使、明宗皇帝晉高祖皇帝山陵使,再授定國軍節度、同州管內觀察處置等使,一爲長春宮使,又授武勝軍節度、鄧隋均房等州管內觀察處置等使。官自攝幽府參軍、試大理評事、檢校尙書祠部郎中兼侍御史、檢校吏部郎中兼御史中丞、檢校太尉、同中書門下平章事、檢校太師、兼侍中,又授檢校太師、兼中書令。正官自行台中書舍人,再爲戶部侍郎,轉兵部侍郎、中書侍郎,再爲門下侍郎、刑部吏部尙書、右僕射,三爲司空,兩在中書,一守本官,又授司徒、兼侍中,賜私門十六戟,又授太尉、兼侍中,又授戎太傅,又授漢太師。爵自開國男至開國公、魯國公,再封秦國公、梁國公、燕國公、齊國公。食邑自三百戶至一萬一千戶,食實封自一百戶至一千八百戶。勛自柱國至上柱國。功臣名自經邦致理翊贊功臣至守正崇德保邦致理功臣、安時處順守義崇靜功臣、崇仁保德寧邦翊聖功臣。
先娶故德州戶掾褚諱濆女,早亡,後娶故景州弓高縣孫明府諱師禮女,累封蜀國夫人。亡長子平,自秘書郎授右拾遺、工部度支員外郎;次子吉,自秘書省校書郎授膳部金部職方員外郎、屯田郎中;第三亡子可,自秘書省正字授殿中丞、工部戶部員外郎;第四子幼亡;第五子義,自秘書郎改授銀靑光祿大夫、檢校國子祭酒兼御史中丞,充定國軍衙內都指揮使,職罷改授朝散大夫、左春坊太子司議郎、授太常丞;第六子正,自協律郎改授銀靑光祿大夫、檢校國子祭酒兼御史中丞,充定國軍節度使,職罷改授朝散大夫、太僕丞。長女適故兵部崔侍郎諱衍子太僕少卿名絢,封萬年縣君;三女子早亡。二孫幼亡。唐長興二年敕,瀛州景城縣莊來蘇鄉改爲元輔鄉,朝漢里爲孝行里。洛南莊貫河南府洛陽縣三州鄉靈台里,奉晉天福五年敕,三州鄉改爲上相鄉,靈台里改爲中台里,時守司徒、兼侍中;又奉八年敕,上相鄉改爲太尉鄉,中台里改爲侍中里,時守太尉、兼侍中。
靜思本末,慶及存亡,蓋自國恩,盡從家法。承訓誨之旨,關教化之源,在孝於家,在忠於國。口無不道之言,門無不義之貨。所願者下不欺於地,中不欺於人,上不欺於天,以三不欺爲素。賤如是,貴如是,長如是,老如是。事親、事君、事長、臨人之道,曠蒙天恕。累經難而獲多福,曾陷蕃而歸中華,非人之謀,是天之祐。六合之內有幸者,百歲之後有歸所。無以珠玉含,當以時服斂,以籧篨葬,及擇不食之地而葬焉,以不及於古人故。祭以特羊,戒殺生也,當以不害命之物祭。無立神道碑,以三代墳前不獲立碑故。無請謚號,以無德故。
又念自賓佐至王佐及領藩鎮時,或有微益於國之事節,皆形於公籍。所著文章篇詠,因多事散失外,收拾得者,編於家集,其間見其志,知之者,罪之者,未知眾寡矣。有莊、有宅、有群書,有三子可以襲其業。於此日五盥,日三省,尙猶日知其所亡,月無忘其所能。爲子、爲弟、爲人臣、爲師長、爲夫、爲父,有子、有猶子、有孫,奉身即有餘矣。爲時乃不足,不足者何?不能爲大君致一統、定八方,誠有愧於歷職歷官,何以答乾坤之施?時開一卷,時飲一杯,食味別聲、被色,老安於當代耶!老而自樂,何樂如之!
時乾祐三年朱明月長樂老序云。
건우(乾祐, 948-950, 풍도 66-68살) 연간에 풍도는 봄가을에만 조현(朝見)하는 퇴직 관원(奉朝請)이 되어 한가롭게 지냈다. 하루는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고 장례식을 부탁한 「장락노 자서(長樂老自敘)」를 지었는데 :
우리 집안(宗族)은 대대로 시평(始平)과 장락(長樂) 2군(郡)에 살았고 역대의 사실은 국가 기록과 족보(家牒)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먼저 대연(大燕, 劉守光 건국)이 멸망하여 후진(後晉, 石敬瑭 건국)에 귀순한 뒤 장종(莊宗, 後唐의 李存勖), 명종(明宗, 後唐의 李嗣源), 민제(閔帝, 後唐의 閔帝), 청태제(淸泰, 後唐 末帝의 연호)를 모셨고 또 후진(後晉) 고조(高祖, 石敬瑭)와 소제(少帝, 石重貴)를 모셨다. 946년 거란이 변경(汴京)을 함락하여 후진을 멸망시킨 뒤 거란에 끌려가다가 진주(鎭州) 상산(常山)에서 탈출하여 문무 관원들 및 기마병과 보병 군인(馬步)들과 함께 후한(後漢, 劉知遠 건국)에 귀순하여 고조 황제(劉知遠)와 현재 황제(後漢 隱帝, 劉承祐)를 모셨다. 돌아보니 오랫동안 봉록과 작위를 받고 각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위로는 조상을 빛내고 아래로는 친척들을 돌봐주었다. 돌아가신 증조부(이름 湊)는 태부(太傅)까지 추증되셨고 증조모 최씨도 양국 태부인(梁國 太夫人)까지 추봉 받으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이름 炯)는 태사(太師)까지 추증되셨고 할머니 저씨(猪氏)는 오국 태부인(吳國 太夫人)까지 추봉 받으셨고, 돌아가신 아버지(이름 良建)는 비서소감(祕書少監)으로 퇴직하셔서 상서령(尙書令)까지 추증되셨고 어머니 장씨(張氏)는 위국 태부인(魏國 太夫人)까지 추봉 받으셨다.
나는 관직 품계가 장사랑(將仕郎)에서 시작하여 조의랑(朝議郎)、조산대부(朝散大夫)、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특진(特進)、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까지 승진하였다. 관직 직위는 유주 절도사 순관(幽州節度巡官)、하동 절도사 순관(河東節度巡官)、장서기(掌書記)를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다시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태미궁사(太微宮使)가 되었고 다시 홍문관 대학사(宏文館大學士)가 되었고 또 제도염철전운사(諸道鹽鐵轉運使)、남교대례사(南郊大禮使)、명종 황제(明宗皇帝)와 진고조황제(晉高祖皇帝)의 산릉사(山陵使)가 되었고 다시 정국군 절도사(定國軍節度)、동주 관내 관찰처치사(同州管內觀察處置等使)가 되었고 잠시 장춘궁사(長春宮使)가 되었다가 다시 무승군 절도사(武勝軍節度)、등수균방 등 관내 관찰처치사(鄧隋均房等州管內觀察處置等使)가 되었다. 겸직한 관직은 섭유부 참군(攝幽府參軍)에서 시작하여 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검교상서사부낭중 겸 시어사(檢校尙書祠部郎中兼侍御史)、검교이부낭중 겸 어사중승(檢校吏部郎中兼御史中丞)、검교태위(檢校太尉)、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검교태사 겸 시중(檢校太師兼侍中)을 거쳐 검교태사 겸 중서령(檢校太師兼中書令)까지 맡았다. 정관(正官)으로서는 행태중서사인(行台中書舍人)부터 호부 시랑(戶部侍郎)을 거쳐 병부 시랑(兵部侍郎)、중서시랑(中書侍郎)을 지내고 다시 문하 시랑(門下侍郎)、형부 이부 상서(刑部吏部尙書)、우복야(右僕射)를 지냈으며 사공(司空)을 세 번, 중서성에서 두 번, 수본관(守本官) 한 번 지내고 다시 사도 겸 시중(司徒兼侍中)을 지내면서 사문 16극(私門十六戟)을 하사 받고 다시 태위 겸 시중(太尉兼侍中)을 지냈고 다시 거란 조정에서는 태부(太傅)가 되었다가 후한 조정에서는 태사(太師)를 지냈다. 작위는 개국남(開國男)에서 시작하여 개국공(開國公)、노국공(魯國公)까지 받고 다시 진국공(秦國公)、양국공(梁國公)、연국공(燕國公)、제국공(齊國公) 작위를 받았다. 식읍(食邑)은 3백호(三百戶)에서 시작하여 1만1천호(一萬一千戶)까지 받았고 실제 식읍은 1백호(一百戶)에서 1천8백호(一千八百戶)를 받았다. 훈급(勳級)은 주국(柱國)부터 시작하여 상주국(上柱國)까지 받았다. 공신(功臣) 명칭은 경방치리익찬공신(經邦致理翊贊功臣)에서 시작하여 수정숭덕보방치리공신(守正崇德保邦致理功臣)、안시처순수의수정공신(安時處順守義崇靜功臣)、숭인보덕영방익성공신(崇仁保德寧邦翊聖功臣)까지 받았다.
첫째 부인은 돌아가신 덕주(德州) 호연(戶掾) 저분(褚濆)의 딸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부인은 돌아가신 경주 궁고현(景州弓高縣) 손사례(孫師禮)의 딸이고 촉국부인(蜀國夫人)까지 추봉 받았다. 세상을 떠난 큰아들 평(平)은 비서랑(秘書郎)에서 시작하여 우습유(右拾遺)、공부 탁지 원외랑(工部度支員外郎)까지 지냈다. 둘째 아들 길(吉)은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郎)에서 시작하여 선부 금부 직방 원외랑(膳部金部職方員外郎)、둔전 낭중(屯田郎中)을 지내고 있다. 세상을 떠난 셋째 아들 가(可)는 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에서 시작하여 전중승(殿中丞)、공부 호부 원외랑(工部戶部員外郎)을 지냈다. 넷째 아들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아들 의(義)는 비성랑(秘書郎)에서 시작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검교국자감 좨주 겸 어사 중승(檢校國子祭酒兼御史中丞)이 되어 정국군 아내 도지휘사(定國軍衙內都指揮使)가 되었다가 파직된 뒤에 다시 조산대부(朝散大夫)、좌춘방태자사의랑(左春坊太子司議郎)이 되었다가 태상승(太常丞)을 지내고 있다. 여섯째 아들 정(正)은 협률랑(協律郎)에서 시작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검교국자감 좨주 겸 어사중승(檢校國子祭酒兼御史中丞)이 되어 정국군 절도사(定國軍節度使)가 되었다가 파직된 뒤에 다시 조산대부(朝散大夫)、태복승(太僕丞)을 지내고 있다. 큰딸은 세상을 떠난 병부 시랑 최연(崔衍)의 아들 태복 소경(太僕少卿) 최순(崔絢)에게 시집가서 만년현 현군(萬年縣君) 작위를 받았다. 아래 딸 3명과 손자 2명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후당 장흥(長興) 2년(931)에 칙서가 내려와 내가 태어난 영주 경성현 장래소향(瀛州景城縣莊來蘇鄉)을 원보향(元輔鄉)으로, 조한리(朝漢里)를 효행리(孝行里)로 개명하였다. 낙양 남쪽의 농장(農莊, 洛南莊)들이 하남부 낙양현 삼주향 영대리(河南府洛陽縣三州鄉靈台里)에 줄줄이 있는데 후진 천복(天福) 5년(940)에 칙서가 내려와 삼주향(三州鄉)을 상상향(上相鄉)으로, 영대리(靈台里)를 중대리(中台里)로 개명하였다. 당시에 사도(司徒) 겸 시중(侍中)을 지내고 있었다. 천복 8년(943)에도 칙서가 내려와 상상향(上相鄉)을 태위향(太尉鄉)으로 중대리(中台里)를 시중리(侍中里)로 개명하였다. 당시에 태위(太尉) 겸 시중(侍中)을 지내고 있었다.
내가 입신양명하여 돌아가신 조상님들과 후손들까지 경사스러운 복록(福祿)이 미친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두 국가의 은혜를 받고 가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잘 받들라는 뜻은 가정의 효(孝)이고, 국가 교화에 관련된 근원은 국가의 충(忠)이다. 입으로는 도의가 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대문에는 정당하지 않은 재물을 들이지 않았다. 바라는 것은 아래로는 땅을 속이지 않고 중간에는 사람을 속이지 않고 위로는 하늘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속이지 않는 것을 기본바탕으로 삼았다. 빈천할 때도 이렇게 하였고 부귀할 때도 이렇게 하였고 장년이 되었을 때도 이렇게 하였고 늙어서도 이렇게 하였다. 부모님을 모시고 임금을 모시고 윗사람을 모시고 아랫사람을 부렸던 방법 모두 하늘의 관대함을 널리 받았다. 몇 번이나 어려움을 겪었으나 많은 복을 받았고 거란에 잡혀갔으나 중화(中華)로 돌아왔던 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고 하늘이 도와주신 덕택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세상을 떠나면 주옥(珠玉)으로 염하지 말고 입은 옷으로 염습하고 내가 쓰던 돗자리로 말아서 묻되 곡식이 자라지 않는 땅을 골라 묻기를 바란다. 왜냐면 나는 도덕과 행실이 옛날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살생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는 것이니까 반드시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물건으로 제사를 지내길 바란다.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말아야 하는데 3대 조상의 묘지에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국가에 시호(諡號)를 요청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또 내가 빈좌(賓佐)에서 왕좌(王佐)를 거쳐 절도사가 될 때까지를 떠올려 생각하면 더러 국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던 사실들은 모두 국가 기록에 남아있다. 내가 지은 문장과 시가(詩歌)는 전란에 잃어버린 것 이외에 수집한 것을 모아 개인 문집을 편집하여야 한다. 문집에서 내가 품었던 생각들을 보고 지지하는 사람과 죄주려는 사람 가운데 누가 많고 적을지는 모르겠다. 농장(農莊) 집(宅) 서적 셋은 아들 셋(둘째, 다섯째, 여섯째)이 각기 상속받도록 한다. 날마다 다섯 번 손을 씻고 날마다 세 번 반성하면서 날마다 잘못한 것들을 알고 달마다 하여야 할 일들을 잊지 않는다. 아들로서 아우로서 신하로서 스승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또 조카들을 둔 사람으로서 손자를 둔 사람으로서 내 여생을 잘 보내는 데는 넉넉하다. 때로는 부족하였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임금이 천하를 통일하고 세상을 평정하도록 돕지 못하였던 것이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낸 사람으로서 정말로 부끄럽고 하늘과 땅이 내려주신 복에 어떻게 보답하랴? 때로는 책을 펴보고 때로는 술을 마시면서 『예기、예운』에서 말하였듯이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오행(五行) 물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면 당대(當代)에서 늙어서도 행복할 것이다. 늙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데 더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때는 건우(乾祐) 3년(950, 풍도 68살) 여름 4월 장락로(長樂老) 서(序)를 쓰다.
참고 자료 :
淸泰帝 :
宋、歐陽修,『歐陽文忠公集』,卷十七,「爲君難論(上)」(慶歷三年)︰
近五代時,後唐清泰帝患晉祖之鎮太原也,地近契丹,恃兵跋扈,議欲徙之於鄆州。舉朝之士皆諫,以爲未可。帝意必欲徙之,夜召常所與謀樞密直學士薛文遇問之,以決可否。文遇對曰:“臣聞作舍道邊,三年不成。此事斷在陛下,何必更問群臣。”帝大喜曰:“術者言我今年當得一賢佐助我中興,卿其是乎!”即時命學士草制,徙晉祖於鄆州。明旦宣麻,在廷之臣皆失色。後六日而晉祖反書至,清泰帝憂懼不知所爲,謂李崧曰:“我適見薛文遇,爲之肉顫,欲自抽刀刺之。”崧對曰:“事已至此,悔無及矣!”但君臣相顧涕泣而已。
及太祖平內難,議立徐州節度使劉贇爲漢嗣,遣道與秘書監趙上交、樞密直學士王度等往迎之。道尋與贇自徐赴汴,行至宋州,會澶州軍變。樞密使王峻遣郭崇領兵至,屯於衙門外,時道與上交等宿於衙內。是日,贇率左右甲士闔門登樓,詰崇所自,崇言太祖已副推戴。左右知其事變,以爲道所賣,皆欲殺道等以自快。趙上交與王度聞之,皆惶怖不知所爲,惟道偃仰自適,略無懼色,尋亦獲免焉。道微時嘗賦詩云:“終聞海岳歸明主,未省乾坤陷吉人。”至是其言驗矣。
후한(後漢) 은제(隱帝, 劉承祐, 931-950)가 천웅군 절도사(天雄軍節度使) 곽위(郭威, 904-954, 後周 太祖, 재위 기간 951-954)도 죽이려고 싸우다가 패배하고 도망가다가 950년 11월 차주사(茶酒使) 곽윤명(郭允明)에게 피살되었다. 곽위가 변경(汴京)에 입성하여 태후(太后, 李太后, 李三娘)와 상의하여 유지원(劉知遠)의 조카 서주 절도사(徐州節度使, 武寧節度使) 유윤(劉贇)을 황제로 추대하기로 의결하고 맞이하려고 풍도를 비롯하여 비서감 조상교(趙上交, 895-961)와 추밀원 직학사(樞密直學士) 왕도(王度) 등을 보냈다. 곧이어 풍도가 유윤과 함께 서주(徐州)에서 출발하여 변경(汴京)으로 오다가 송주(宋州)에 왔을 때 곽위와 병사들이 단주(澶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곽위를 황제에 추대하고 변경에 입성하였다. 곽위는 추밀사 왕준(王峻, 902-953)을 시켜 부하 장군 곽숭(郭崇, 906-965, 본명 郭崇威)을 송주에 보내 유윤을 감금하도록 하였다. 곽숭의 병력이 송주 관청 아문(衙門) 밖에 주둔하였을 때 풍도와 조상교 등은 관아에서 묵고 있었다. 이날에 유윤이 주변의 갑사를 이끌고 관아 문을 닫고 누각에 올라가서 곽숭에게 병사를 이끌고 온 까닭을 나무랐다. 곽숭은 곽위가 이미 황제 추대에 동의하였다고 말하였다. 유윤의 주변 사람들은 풍도에게 속았다고 여기고 풍도 등을 죽여 화를 풀려고 들었다. 조상교와 왕도가 듣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풍도는 아무렇지 않게 활동하며 두려운 기색이 없었고 잠시 뒤에 풀려났다. 풍도가 높은 관원이 되기 이전에 지은 시(詩)에서 “천하는 결국에 현명한 군주에게 귀속된다고 배웠고 하늘이 복 많은 사람(풍도)을 죽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읊었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
廣順初,復拜太師、中書令,太祖甚重之,每進對不以名呼。及太祖崩,世宗以道爲山陵使。會河東劉崇入寇,世宗召大臣議欲親征,道諫止之,世宗因言:“唐初,天下草寇蜂起,並是太宗親平之。”道奏曰:“陛下得如太宗否?”世宗怒曰:“馮道何相少也!”乃罷。
及世宗親征,不及扈從,留道奉太祖山陵。時道已抱疾。及山陵禮畢,奉神主歸舊宮,未及祔廟,一夕薨於其第,時顯德元年四月十七日也,享年七十有三。世宗聞之,輟視朝三日,冊贈尙書令,追封瀛王,謚曰文懿。
후주 태조는 광순(廣順, 951-954) 초년에 풍도를 태사(太師)와 중서령(中書令)에 다시 임명하고 태조가 아주 존중하였는데 풍도와 대화할 때도 이름을 부르지 않을 만큼 존중하였다. 현덕(顯德) 원년(954) 정월에 후주 태조(郭威)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곽위 양자 柴榮, 921-959)이 계승하고 풍도를 태조 능묘를 짓는 산릉사(山陵使)에 임명하였다. 이때 하동절도사 유숭(劉崇, 895-954, 後漢 高祖 劉知遠의 아우, 劉贇의 아버지, 951년 北漢 건립)이 장례식을 기회로 거란 군대의 도움을 받아 남하하였다. 후주 세종이 대신들을 불러 친정(親征)을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풍도는 친정을 말렸고 세종이 “당나라 초기에 천하에는 온갖 반란군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모두 당 태종이 친히 평정하였습니다.”고 말하자 풍도는 “폐하께서는 당나라 태종처럼 되실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세종은 화를 내며 “풍도 당신은 어찌 나를 도우려고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회의를 마쳤다. 세종이 친정하면서 풍도를 호위(扈從) 인원에 포함시키지 않고 남겨두어 태조 산릉을 짓도록 하였다. 이때 풍도는 이미 병이 깊이 들었다. 산릉 일이 끝나고 태조 신주(神主)를 구궁(舊宮)에 모시고 아직 종묘(宗廟)에 모시기 전에, 풍도가 어느날 저녁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현덕 원년(954) 4월 17일이고 향년 73살이다. 세종이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조정 근무를 멈추고 풍도에게 상서령(尙書令)으로 높이고 영왕(瀛王)에 추봉하고 시호 문의(文懿)를 내렸다.
道歷任四朝,三入中書,在相位二十餘年,以持重鎮俗爲己任,未嘗以片簡擾於諸侯,平生甚廉儉。逮至末年,閨庭之內,稍徇奢靡,其子吉,尤恣狂蕩,道不能制,識者以其不終令譽,咸嘆惜之。
풍도는 4개 왕조(後晉, 後唐, 後漢, 後周)에서 근무하였고 3번 중서성에 들어가서 재상으로서 20여 년간 근무하였다. 덕망을 갖고 세상을 진정시키려고 책임을 다하고 글로써 제후들을 선동한 적도 없고 평생 아주 청렴하고 절약하였다. 말년에는 집안에서 조금 사치하였고 둘째 아들 길(吉)이 방자하고 방탕하였으나 풍도가 억제하지 못하였다. 평론가들은 풍도가 말년에 좋은 명예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였다.
史臣曰:道之履行,鬱有古人之風;道之宇量,深得大臣之禮。然而事四朝,相六帝,可得爲忠乎!夫一女二夫,人之不幸,況於再三者哉!所以飾終之典,不得謚爲文貞、文忠者,蓋謂此也。
사신(史臣)이 평론하길 “풍도의 행실에는 옛날 성현의 풍모가 남아있고 풍도의 생각에는 높은 대신들의 예의가 있다. 그러나 4개 왕조를 모시고 6명 황제를 모셨으니 충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여자가 한 번 개가하는 것도 불행이라고 여기는데 두 번 세 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풍도의 장례식에서 시호를 문정(文貞)이나 문충(文忠)이라고 지을 수 없었는데 이런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