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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강단교류
평등한 나라
마태복음서 20장 1-15절
이재원 님
(동녘교회)
[인사]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 주관의 평신도 강단 교류활동으로 동녘교회에서 파송 받은 이재원입니다. 먼저 귀한 시간과 자리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가끔 교회에서 특송을 합니다, 할 때마다 떨리고 긴장하는데 지금도 겉과 속이 엄청 떨리고, 낯가림을 하는지 많이 긴장됩니다. 성경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종교개혁 당시의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종교개혁 이야기 : 토마스 뮌처]
1517년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던 마틴 루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총,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으며 혁명가로 알려진 토마스 뮌처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뮌처는 교회의 수사, 신학자로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장 바닥을 살았던 농민, 농노들과 함께 했습니다. 뮌처는 당시에 중하층 민중의 입장을 대표하여 예수님의 삶을 살았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로마교회를 붕괴시킨 것은 신학적인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부패했고, 종교지도자들의 타락한 일상이 민중들의 저항을 불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맨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의 만연한 부패와 타락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며 일종의 주처럼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어서 구심점이 없는 상황인 데다가 스페인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교황청의 간섭과 면죄부 판매가 직접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독일은 로마에 대항도 못 하고 늘 휘둘리고 항상 로마에 빨대 꽂힌 꿀물 같았습니다. 면죄부 판매에 격분한 루터는 “성인들은 면죄부를 최고의 은혜로 칭송하지만 실은 돈벌이 수단이다.”라며 정곡을 찔렀습니다.
같은 시기에 유럽은 농업위기를 불러온 농업불황의 상태였습니다. 나라마다 전쟁으로 사람과 재산이 파괴되고,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구가 감소하며, 전 지역이 폐허가 되어 갔습니다. 대도시들은 거지가 넘쳐 났으며, 아침마다 성문을 열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도시 곳곳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이처럼 사회 경제적 불안이 종교적 불만과 함께 확산되고 봉기로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초기에는 작은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종교개혁과 농민혁명의 만남으로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나 뮌처나 고리대금과 면죄부가 죄악이며, 독일이 로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루터는 다시 봉건 질서를 회복하려고 하고 민중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경건주의로 회귀합니다. 그에 반해 뮌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계급적 차별도 없고 어떠한 사유재산도 없는 사회형태로 이해하면서 더 철저한 종교개혁을 하고자 합니다. 성서와 더불어 성령 중심의 신학을 강조했던 뮌처는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가난을 단지 비유적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팔복 말씀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의 정신이 대단히 가난하여 아무도 그에게서 믿음을 찾을 수 없고, 그가 믿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 발견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겨자씨처럼 작아지는 믿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믿음은 없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만 있는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뮌처는 이러한 믿음을 오히려 인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다가오는 말씀입니까?
농민전쟁이 후반으로 가면서 루터의 입장이 농민의 편이 아니라 영주들의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루터는 “때리고 학살하고 찔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루터는 제후와 영주들이 누리던 것들을 예전처럼 지켜주며 소위 질서와 복종의 신학으로 안전판을 제공합니다.
그에 반해 뮌처는 농민 전쟁 내내 공동소유를 옹호하고 사적소유, 농노제 폐지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농민 지도자들은 지역적인 문제에 치중했지만, 뮌처는 좀 더 거국적으로 사고했고, 이것은 전 지역에 걸쳐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심지어 루터의 후견인 프리드리 현공마저도 그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뮌처에게 복음은 “단지 하늘에서의 행복만 약속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인간의 평등과 형제애를 이루는 약속이기도 했다.”(Heine)는 것이지요.
[성경 이야기 : 포도원 주인이 꿈꾸는 세상과 이 세상의 현실]
제가 다짜고짜 뮌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 성경 본문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농부들이 꿈꾸는 나라, 차별이 없는 실제적인 평등의 세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포도원 주인과 날품팔이 노동자들입니다.
마침 포도원에 수확철이 되어 포도를 수확하는 데 일손이 많이 필요했나 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꾼을 부릅니다. 아마도 아침 6시가 아닐까 합니다. 뒤 이어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일꾼을 부르러 거리에 나가 일꾼을 구합니다. 저녁이 되고 일이 끝나자, 주인은 맨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온전한 하루 품삯)의 삯을 줍니다.
그보다 일찍 온 일꾼들은 맨 마지막에 와서 1시간만 일한 그 사람보다는 더 받을 것을 예상했는데, 주인은 그들이 온 시간이나 일한 양과는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온 사람들이 온 종일 더위를 견뎠다며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주인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일꾼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노동시간으로 노동의 가치를 계산하는 사회에서는 너무도 부당하고 황당한 한 처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 포도원의 일의 양을 계산하지 못해 다섯 번이나 거리로 나가 사람을 구한 주인을 보면, 일머리도 없는 것 같고, 경영자의 마인드도 부족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번이고 거리로 나선 주인은 일손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장터에서 온종일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주인이 거리로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접근이 아닙니다. 수요와 공급의 교차점에서 임금이 결정된다고 하지만, 이 포도원 주인은 공급자의 입장에서 가격을 결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의 최저 생계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은 지금 노동자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생계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역지사지에서 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빈둥거리던 사람들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일하려고 해도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빈둥거렸던 겁니다. ‘빈둥거리다’는 말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의 입장에서는 그날 벌지 못하면 굶게 되는 가족들 때문에 가슴이 타고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겠죠. 거리에서 하루 종일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그들의 처지는 날품을 팔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잠시 동안 인력사무소를 통해 건설현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에 나온 순서대로 현장을 배치 받기 때문에 매일 하는 일과 현장이 들쑥날쑥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아파트 현장 공구리(콘크리트 타설), 오피스텔 현장 발아시(거푸집 제거), 각종 자재정리 및 현장청소, 포크레인 안전원 닥치는 대로 일감이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물론 기술과 능력이 있다면 순서에 얽매이지 않기도 합니다만 날품팔이 일꾼은 현장 선택권은 없습니다. 일감을 고르다가는 자기차례를 지나치기 때문에 공치는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인력시장 일군들은 안전모, 안전화, 안전벨트, 작업복, 각종 연장 등을 매일 매일 가지고 현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한 짐 되는 무거운 가방을 늘 메고 있습니다. 대개의 일꾼들은 봉고차에 그날의 현장마다 내려주는 것으로 배치가 끝납니다. 현장이 안전한가, 고약한 현장은 아닌가 하면서,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은 못 됩니다. 때때로 매우 위험한 작업이나 고된 노동이 따르는 경우에는 품을 조금 더 처서 받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또 중대한 사고나 생명을 잃는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지난 2013년 방화대교 건설 중 상판이 무너진 사고로 인부들이 죽었습니다. 그 인부들은 제가 나갔던 그 사무실 소속이었던 분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다행히 다른 현장에 나가서 화를 면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어쩌면 예수 당시에도 일하고 싶은 구직자는 넘쳐나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품을 팔지 못하고 자꾸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젊은 날 예수 또한 거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수가 자란 나사렛은 세포리스라는 도시로부터 약 1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목수일을 배울 때, 세포리스 도시는 한창 재건 중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종종 세포리스로 일하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치는 날이 일하는 날보다 더 잦았던 탓에, 시름에 가득 차서 되돌아 와야 하는 예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해는 저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예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딱 합니다. 예수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가난과 불평등이 없는 평등의 나라여야 한다고 마음깊이 새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바로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 됩니다. 사람을 능력과 생산량과 노동시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그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가난의 문제는 경제 논리나 효율성 논리로 접근해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안전한 상황 속에서 작업할 수 있는 조건, 자연자원을 균등하게 활용할 수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생계를 누릴 권리, 즉 인종, 문화, 종교, 여성,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직업과 자원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존재로 대우 받을 수 있어야 가난을 끊어 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포도윈 이야기는 누가 몇 시에 와서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후 5시에 온 일꾼은 일자리 정보를 다른 이들처럼 보다 일찍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공정한 기회를 같지 못한 것이지요. 포도원 주인이 계속 거리로 나가 구직자를 찾습니다. 일자리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직접 고용까지 합니다. 지금과 같이 발전이니 성장이니 하는 경제논리로는 결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예수]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일관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 자신이 당시에 농민이자, 목수이고, 목동이자, 날품팔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했기에 하층민의 생활을 생생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오늘날 우리 곁에 있다면, 그는 막노동꾼이며, 비정규직이며, 택배 기사요, 실업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농민의 삶들은 갈수록 팍팍합니다. 수확철인데도, 오이며, 참외며, 배추며, 철마다 나오는 농산물들을 팔지도 못한 채 통째로 밭을 갈아 업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돼지를 키우는 양돈 농가는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수천수만 마리를 하루아침에 살 처분하며, 생석회로 농장 전체를 방제하는 인부들은 작업반장 빼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입니다. 우리들의 밥상에 올라오는 돼지를 키우는 이들도 이주 노동자입니다. 돼지가 없어지면서 그들도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돼지 열병으로 돼지가 죽고 농가가 휘청거릴 때 축산 대기업, 방제용 생석회 생산업체 관련 기업 모두의 주가는 상한가를 치는 현실, 누군가의 비극을 먹고 자라는 “이상한 정상”입니다.
기업의 회계를 조작하여 사익만을 챙기고 국민연금의 손실을 안긴 기업가는 떵떵거리고, 불법으로 해고당한 노동자들만 죽음으로 내모는 이 비참한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정치권력은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살피기는커녕 바퀴벌레 보듯 하며, 대기업과 자본의 하수인 노릇한 지가 이미 오래 됐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연애, 결혼, 주거, 출산과 미래 희망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N포 세대, 제주의 이민호 군의 죽음, 태안 화력 발전소의 김용균 군의 죽음, 과연 우리는 이런 세상을 언제까지 마주해야 하는가요?
예수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 매우 중요한 팩트 하나는, 만약 이 땅에 모든 노동자 농민들이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모두가 빈둥거린다면, 세상은 단 하루도 온전히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권력자도 정치가도 엘리트 집단 모두가 어리석은 자들이며,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못돼먹은 자들인 것입니다.
진정 예수가 꿈꾸고 선포했던 하늘나라는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농민, 노동자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서로 다른 예수들이 함께 어깨 겯고,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이 한 걸음씩 내딛으며 걸어가는 더욱 더 위대하며 가치 있는 길입니다. 끝으로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이라는 시를 읽는 것으로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감사합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가족과 친구를 주시고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아직도 다양한 이유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할 거리를 찾아 헤매어도 누구하나 일자리를 주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 알바로 하루하루 보내며 불안에 떨어야 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시며,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도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한 몫 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손과 발이 사용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날에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만나고자 나온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일렁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평화와 위로가 우리를 감싸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각과 진실한 마음을 드리려고 나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징표로 드리는 이 예물을 온전히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으로 하루가 고단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힘을 주소서. 그 때 우리가 드린 예물을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선한 일을 하시는 주님을 따라 이웃을 후하게 대하는 우리가 됩시다.
* 축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정의와 생명, 평화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생명사랑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