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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5편 3절-11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성 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3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자기가 핍박을 받을 때 무엇 때문에 핍박을 당하느냐? 핍박을 당할 때 무조건 ‘상대방이 나쁘다. 싫다’ 라고 하지 말고 먼저 자기의 신앙의 질을 심사해야 한다. ‘내가 일반적인 면으로라도 언행심사적으로 타인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 하고 자기를 되돌아봐야 하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인으로서 내가 이렇게 핍박을 받는 것이 진리 때문이냐, 아니면 단순히 내 잘못 때문이냐?’ 하는 것도 심사를 해야 한다.
진리성도를 핍박할 때 자기를 헐뜯는 자가 일반인일 수도 있고, 믿는 사람일 수도 있는 건데, 일반인들은 신앙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회 윤리 도덕성적인 것을 가지고 헐뜯는 것이고, 믿는 사람의 경우는 일반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을 가지고 헐뜯게 된다. 특히 세상적으로 믿는 자가 신앙적인 것을 가지고 헐뜯을 경우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을 모르기 때문에 ‘네가 본질적인 신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행동을 가지고 따지고 들어온다. 일반적인 것을 가지고 싸움을 걸고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인 신앙으로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일반적인 행동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방이 뭔가 하나를 걸고 헐뜯고 들어올 때 이렇게 하는 이면을 보면 그동안 나에게 뭔가 쌓이고 쌓인 것이 있어서 나의 행동이 자기 눈앞에 뭔가 잘못으로 보이는 게 있을 때 이걸 미끼로 삼아서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상대가 나의 잘못을 걸고 들어올 때 내 입장에서는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자기는 의로 인해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경우도 있는 거다. 이럴 때는 자기는 진리로 나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잘못을 못 보는 경우가 된다.
어쨌든 자기가 진리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이건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시험이다. 그러니 이때는 자기 속에서 진리를 더욱 붙잡을 것이다. 이게 아닌 죄 때문이라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본질로 고쳐나가야 한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안 해야지’ 이게 아니라 자기의 정신 사상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치는 것을 말한다. 그냥 ‘안 해야 되겠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기의 마음이 그리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고쳐질 수 있다. 이건 없이 자꾸 ‘안 해야 되는데’ 하다가는 나중에 크게 당할 수 있다. 이러면 엄청난 후회다. 모든 좋은 것을 다 빼앗긴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4절-5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하나님의 택한 선민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받는 백성을 다스리는 사울 왕이 악한 자들과 함께 악한 짓을 하고 있으니 다윗이 근심과 걱정과 탄식이 나오는 거다.
모든 탄식은 마음이 아픈 데서 나오는 건데, 진리성도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며 선하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안 되고 악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탄식이 나오는 거다. 또한 안 믿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분명한 존재임에도 일반적 사회적 윤리 도덕적으로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볼 때 이로 인해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징벌을 생각을 하니 탄식이 나오는 거다.
교회의 부흥은 단순히 사람이 많이 불어나는 게 아니다. 종기가 생긴 자리는 부풀어 오르는데, 이게 살이 쪄서 부풀어 오르는 거냐, 그 속에 균 덩어리가 있어서 부풀어 오르는 거냐? 균이 있어서 부풀어 오르는 거다. 이건 아무리 부풀어도 살이 안 된다. 결국은 어느 시점에 가서 없애야 한다. 그런 것처럼 육본주의 인본주의 세상주의가 교회 안에서 조직화되는 사상이 666인데, 진리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적으로 이렇게 커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 속에 666의 성질 성분이 없는지 검토해야 한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자기의 생활처지를 보고 이것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는데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들의 이룰구원을 근심 걱정하고 탄식하며 기도를 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내가 이렇게 나가면 그들과 손잡기 쉽겠구나. 그들의 꾀임을 받기 쉽겠구나. 내가 이렇게 가다가는 그들로부터 수치스런 자가 되겠구나’ 이런 깨달음이 되는 거다.
우리는 남을 보기 이전에 자기를 철두철미하게 고치고 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 얼굴에 수치가 되고, 주님의 얼굴에 수치가 되고, 자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목사 같으면 교회에 심판이 들어간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알고 기도를 할 때 말로만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은 끊으려는 마음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현실을 살면서 자기가 끊어야 할 것이 자기 가까이에 있으면 일단은 피해버려라. 피하지 않고 있다가는 크게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정신은 쉽게 말하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다. 그러면 정신을 못 차린 사람에게 제일 좋은 게 뭐겠느냐? 하나님께서 배를 곯리는 거다. 배를 곯리려면 다 뺏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안 듣느냐? 그러면 몸을 치는 수밖에 없다. 병원침대에 눕히는 수밖에 없다.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두렵고 떨리고 공포가 엄습해서 마음 아파하며 밤이 새도록 기도를 했는데, 지금 나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마음 아픈 일이 있었느냐? 하나님의 옳은 길로 가기 위해 밤새도록 기도하느라고 마음 아픈 상태로 날을 세운 때가 있었느냐?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 때의 상황이 매우 다급한 것이 분명한데, 이 때 근심 걱정을 한 것이 자기의 육신생명의 염려가 더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적 신앙생명의 염려가 더 컸기 때문일까? 다윗은 어느 쪽의 다급성을 놓고 기도를 하는 거냐? 영적 신앙생명이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육적인 문제의 심각성에 마음이 많이 기울어진다.
우리는 설령 육적인 문제에 심각성이 왔더라도 이 때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육적인 일로 인해 신앙정조를 팔아먹지 않게 도와주시고, 이 문제를 여하히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라. 이건 육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믿는 우리가 영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 해결해 주고, 영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이를 위해 육에 관한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 이 기도는 안 들어주는 거냐? 하나님께서 어느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겠느냐 그 말이다.
육의 문제를 위해 기도를 하면 무조건 육덩이 기도냐? 그게 아니라 기도를 하면서 자기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는 거다. 이걸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하라. 우리들에게 일을 허용하시는 것은 신앙 믿음이 올라갈 수 있는 재료감으로 주시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어떤 일을 왔으면, 사건이 왔으면 신앙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면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생활을 하는 것은 영 주격으로 이룰구원을 이뤄가기 위한 방편이다. 육신생활을 무시하고 어떻게 이룰구원을 이루느냐?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걸 생각을 못하고 어찌하든 교회에서 충성봉사 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믿는 사람이 진리의 정신을 가지고 밥 먹고 일을 하는 것은 전부가 이룰구원으로 통과되는 것인데, 육본주의 사고방식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걸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어려운 일을 다 해결해 주실 것 같으면 자기에게 뭐 하려고 일이나 사건을 주시겠느냐? 믿는 자기에게 사건과 환경과 일을 준다는 것은 ‘네가 믿음을 써서 한 번 해결해 봐라’ 이게 있는 거다. 그러면서 이룰구원이 되어나가는 거다. 학교에서 학생의 시험지에 선생님들이 답을 다 쓸 것 같으면 뭐 하려고 학생에게 시험지를 나눠주겠느냐?
이런 지혜는 다 성경에 있는 건데, 예수 믿는 자기가 성경을 안 읽어서 이런 지혜가 없다면 이 면을 통분히 여기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여하히 이기고 나가는데 자기는 푹 주저앉아서 무조건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하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없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하는 육본주의 신앙으로 믿는 것은 예수를 믿으나 마나다. 이러면 어떻게 신앙이 자라겠느냐? 어떻게 신앙에 힘이 있겠느냐?
마지막 시대에 세상 속화된 비진리의 악한 자들이 많은데, 사실 개인적으로 보면 내 속에도 세상 속화된 비진리의 성질이 많다. 우리 속에 인간 합리주의나 자기 주관적인 것이 자기도 모르게 깊이 숨어있을 수 있다.
세상 마지막 시대에 조직화된 악한 무리들이, 육본주의 신앙사상들이 마치 서산에 해가 넘어갈 때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어오듯이 진리신앙을 죽이려고 밀려올 때 나는 어느 쪽 생명이 끊어질까봐 두렵고 공포감이 드느냐? 육신의 생명이냐, 영적 신앙생명이냐?
세상명절 때 예수 믿는 며느리들이 제사문제 때문에 상당히 공포감이 있는데, 이 때 며느리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누구냐? 남편이다. 그런데 믿는 남편인데도 자기 아내에게 서둘러서 고향에 내려가자고 한다면 며느리가 얼마나 힘이 들까? 이건 일종의 핍박이다. ‘진리신앙 정조를 끊을래, 안 끊을래?’ 하는 일종의 핍박이다. 신앙정조를 팔아먹으라는 의미가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믿는 남편이라면 신앙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아내와 합세해서 안 믿는 가족들을 진리로 공격해서 먹어버려야 하는 건데 어느 쪽으로 붙었느냐 그 말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진리신앙을 지키려면 평소에 가족들에게 잘 해야 한다.
6절-8절: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성도다윗은 평화를 원하고 안식을 원하고 있는데, 믿는 우리가 ‘평화’ 라고 할 때 누구와 평화를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평화를 하게 되면 인간과는 어찌 되는 거냐? 인간과는 원수가 될 수 있다.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진리로 나가려고 하는 성도를 안 믿는 일가친척들이 낮이나 곡괭이로 죽이려고 한다면 이게 굉장히 무서우냐? 이런 일로 실지로 죽이는 것을 봤느냐? 진리성도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인간을 보고 무서워하지 말아라. 믿는 성도가 신앙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아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제사를 지내러 오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형제들이 ‘너 왜 제사하러 안 왔느냐?’ 라고 하면서 죽인다면 일반법이 그 사람을 그냥 두겠느냐? 법이 와서 잡아가 버린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자기가 사람을 죽이면 잡혀간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죽이겠느냐 그 말이다. 제사를 안 한다고 성도를 핍박할 때 그 이면을 보면 믿는 내가 평소에 인인관계성에서 성격이나 성질에 문제가 있어서 밉게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꼬투리를 잡히도록 살면 안 된다.
성도가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과 평화인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부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들어가지를 않으니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는 불목상태요, 진리성도와도 대립이 되는 거다. 이들은 신앙의 질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종교적인 세상 것을 위해 열심을 부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평화로 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의 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선악과 따먹은 세상 사상적 평화의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된 게 아니라 일반적인 정신 사상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감화 감동성은 없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방 불신 세상사람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면 하나님과 평화가 되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게 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종노릇을 하면 그들이 예수를 믿겠느냐?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과 평화가 되는 거냐? 부모가 고집이 강한 어린아이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면 ‘참 고맙습니다’ 하며 그 고집이 없어지느냐, 아니면 고집이 엄청나게 더 강해지느냐? 어느 쪽이냐?
어린아이라고 무조건 그냥 놔두면 안 된다. 어린아이라도 엄마가 야단을 치는 소리로 ‘하지 말아라’ 라고 하면 안 하고, 웃으면서 ‘하지 말아라’ 라고 하면 하던 것을 계속 한다. 그리고 테레비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것이 나오면 어린아이가 따라서 춤을 춘다. 또한 엄마가 슬퍼서 엉엉 울면 아기도 울어버린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르르 쾅쾅’ 하면 어린아이가 엄마 품속으로 파고 든다. 이건 어릴지라도 눈치적으로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거다. 따라서 어린아이 때부터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과 평화냐, 안 믿는 사람들과 평화냐? 하나님과의 평화는 안 하고 안 믿는 사람들과 평화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쳐 없애버리면 어떻게 할 거냐? 하나님의 뜻은 모른 채 악한 자들에게 가서 붙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서 어떻게 편한 수 있겠느냐?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성도다윗은 누구와 평화하기 위해서 어디로 나가고 싶다고 하느냐? 하나님과 평화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고 싶다고 한다. 광야로 나가면 하나님이 있느냐? 기도원에 가면 하나님이 있느냐? 여기서 ‘광야’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마음을 말한다. 다윗이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이런 말을 했겠느냐?
‘광야에 거하리로다’ 라고 하는 것은 광야에 가서 살고 싶다는 건데, ‘내 눈으로 악한 자들의 악한 행동을 보고 싶지 않다’ 이 말이다. 자식이 워낙 속을 썩이면 그 부모는 ‘차라리 혼자 살고 싶다’ 라고 한다. 이 말은 실지로 멀리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자식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이다.
내 몸이 악한 자들과 같이 있어도 정신 사상적으로는 악한 자들과 멀리 떨어질 수 있다. 그들의 소원 목적을 붙들지 않으면 된다. 이러면 정신 사상은 그들과 멀리 떨어지게 된다. 이러면 악한 자들과 같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께로 가는 거다. 정신과 마음이 멀어지면 필연적으로 육신도 멀어지게 된다.
광야는 인간들이 살 곳이 못 된다. 그래서 광야에는 인간들이 없다. 인간들이 없으니 인간들의 노래, 인간들의 싸움, 인간들의 한숨, 인간들의 걱정 근심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윗이 광야로 나가고 싶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으로만 살고 싶다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통 사울과 같은 세상정신과 사상으로 돌아가니 다윗이 광야로 나가고 싶다고 했듯이 참 진리의 성도들은 교회가 온통 세상적으로 나갈 때는 질적 차원적으로 하나님 쪽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광야로 나가는 거다. 질적 차원적으로 올라가는 것이 광야로 나가는 거다.
세상 마지막 때의 교회들에서 이런 흐름이 보일 때 인간만 보면 안 된다. 조직만 보면 안 된다. 물질만 보면 안 된다. 즉 움직이는 것을 보지 말라 그 말이다. 자꾸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면 자꾸 두려워진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로만 가야 한다. 오직 진리만 붙잡고 내가 할 일만 바로 해 나가라. 진리로만 걸어 나가라. 자기가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환경 처소에서 착실하게 열심히 신앙적으로 똑바로 나가라.
9절-11절: ‘내가 성 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다윗이 성 내에서 폭도들의 강포와 분쟁을 봤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걸 일반적인 개념으로만 보지 말고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 면의 폭도를 봐라. 영적인 면의 폭도들은 영의 눈으로라야 볼 수 있는 거지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영이 죽은 사람들이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다. 이 말은 신앙의 차원이 높은 자가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진리본질을 가르치는 교훈을 분별할 수 있느냐?
잘못된 교회로 들어가면 진리지식으로 자라지 못하고, 지혜 면에서 자라지 못하고, 사람이 인격 면에서 폐인이 돼버린다. 사람이 인격 면에서 폐인이 되면 그 머리통에서 뭐가 나올까? 교육이 바로 나올까? 가정을 이끄는 게 바로 나올까?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대학교 공부를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지라도 사람노릇이 되겠느냐? 이런 상태의 사람이 세상에서 크게 되고 이름을 날릴지라도 교회에 다니는 것은 하나의 명분일 뿐이다. 이를테면 정치인들이 표를 얻으려고 교회에 다니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은 하나의 명분일 뿐이다. 이러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는 참으로 어렵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자기의 머리로 삼고 있다면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들의 정신을 보면 머리가 없이 믿고 있다.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 대신 세상이라고 하는 괴물을 자기의 머리로 삼고 있다.
‘저희 혀를 나누소서.’ 혀를 쪼개면 말이 제대로 되겠느냐? 말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다는 거다. 니므롯이 두라평지에 성을 높이 쌓으면서 ‘우리 이름을 날리세’ 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성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달라지게 해서 성을 쌓는 일을 중단시키고 흩어지게 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의사가 안 맞는 것을 말한다. 의사가 통하지 않게 하려고 언어가 달라지게 하니 같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다.
성경에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남조 유다의 왕과, 우상을 섬기는 북조 이스라엘의 왕이 큰 배를 만들어서 무역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이 배가 파선이 돼버렸다.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본문으로 보면 조직화된 폭도들의 주장성들이 나눠지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성사가 되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내가 성 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라고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일이 성사가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판을 치면 성화구원도 안 되고, 교인들에게 큰 환난이 되는 거다. 반대로 악한 자들의 모의가 없어지면 진리성도들의 이룰구원이 의사단일로 잘 될 것으로 보여진다.
월요일에 의왕에서 하는 공부나, 화요일에 신탄진에서 하는 공부나, 토요일에 우리교회에서 하는 공부시간(주-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공부 모임)에 별의 별 사람이 다 모이는데, 여기 나와서 공부하는 목사님 중에 이 귀한 진리를 가지고 무슨 클럽을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전히 신앙사상은 비진리로, 신비주의로, 사역주의로 나가면서 이 진리를 내세워서 자기의 신앙에 덮어씌워서 뭘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정신을 빼내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가는 정신을 넣어주려고 하는 건데 자기들의 이질적인 사상에 이걸 둘러씌우려고 하니 이 교훈을 아무리 받은들 사람이 바로 되겠느냐?
신앙의 질을 볼 줄 모르면 이런 것들이 안 보인다. 이러면 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질적으로 바로 서는 게 급선무이고, 이러면 그 다음은 바로 돼 나가는 거다.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반듯해도 그게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 금방 넘어진다. 헛일이라 그 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