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가슴 환한 날이었습니다.
10일 오전 김재림 할머니(84. 광주시 북구)와 모교인 화순 능주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할머니는 1944년 5월 '일본에 가면 공부 가르쳐 주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는 말에 속에 미쓰비시로 끌려가 강제노역 피해를 입은 근로정신대 피해자입니다.
당시 일제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미끼로 학교를 이용해 할당된 인원을 주로 모집했는데, 그 대상 지역은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고향은 화순 능주여서 처음에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가난하던 시절 아픈 사연이 있었더군요.
그 무렵 먼 친적 관계에 있는 광주에서 공부도 가르쳐주며 그 친적집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같은 나이 또래의 언니가 "일본에 같이 가자"며 부추기더랍니다. 결국, 부모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같이 따라 나섰는데, 광주역에 도착하고 보니 정작 그 언니는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화순 능주를 지나면서야 '내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여수까지 가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이 "졸업을 한 것도 같고, 졸업도 못하고 간 것도 같고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죠. 그래서 확인차 학교를 방문하기로 한 것입니다.
박종기 교장선생님께서는 현관까지 미리 마중나와 우리를 귀한 손님처럼 맞아 주셨습니다. 취지를 말씀 드리고 나서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곧 문서고에 보관 중인 졸업생 명부를 뒤지게 되었는데, 몇 장을 넘기니 곧 할머니의 이름이 보이더군요.
기록에 의하면 31회 졸업생으로 1944년 3월25일 졸업한 것으로 돼 있더군요. 한자와 생년월일까지 똑 같은 걸 보면 더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70여년 전 흩어진 할머니의 기억들이 새롭게 맞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반가워 할머니에게 박수를 보내고, 할머니 역시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교장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박종기 교장선생님에 의하면 화순 능주초등학교는 올해 개교 106년째를 맞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올해 '100회' 졸업생을 배출하는 뜻깊은 해라고 합니다. 역사의 격랑의 과정을 거쳐 오느라 조각난 기억만을 가진하고 있는 할머니의 사연을 전해들은 교장 선생님은 할머니를 위해 이 자리에서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오는 2월 19일이 100회 졸업식인데, 졸업식때 할머니에게 졸업장을 다시 한번 정식으로 수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이 어디 있답니까?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감히 제가 오늘같이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이라는 사실에 새색시마냥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오늘은 저를 위한 날"이라며 돌아오는 길에 점심까지 사셨습니다. 봉투까지 건네길래 극구 마다했더니 "사무실 보니 난로 기름도 떨어졌던데, 기름이라도 사서 때시라고 하는 것"이라며 억지로 손에 쥐어 주시더군요.
그런데 사무실에 돌아온 지 얼마 안돼 할머니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설때 20만원을 담았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점심 값이 부족할까 싶어 제가 그만 그 봉투에서 한 장을 뺐던가 봅니다. 미안해서 어째야할지 모르겠습니다"
15만 5천원이 봉투에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못내 편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모처럼 오늘 흐뭇한 날이었습니다. 오는 2.19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표정의 할머니의 웃음을 또 한번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첫댓글 전남 화순에 있는 능주초등학교 100회 졸업식에 8순의 할머니가 참석하여 다시 졸업장을 받는 것은 뜬금없이 생긴 일이 아닙니다. 졸업장을 미쳐 간직해두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버린 어린 소녀의 꿈을 다시 찾아 희망을 펼치고자하는 할머니의 소망입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했던 소망을 다시 펼치시기 바랍니다. 인생공부 역사공부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졸업식에 꽃다발 들고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