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관의 성은 최(崔)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열 살 때부터 박식한 견해로 이름을 날렸다. 스무 살에 출가하여 사방을 떠돌면서 수업하였다. 만년에는 여산으로 가서, 다시 혜원(慧遠)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남쪽에서 북방으로 가서, 새 경과 옛 경의 같고 다른 점을 찾아 그 차이를 상세히 가려냈다. 그는 풍모와 정신이 빼어나고 청아하며,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정취를 통하기로는 도생(道生)과 도융(道融)이 가장 으뜸이며, 힐난을 정밀하게 하기로는 혜관과 승조(僧肇)가 제일이다.”
이어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를 짓고, 구마라집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선남자야, 그대가 논한 내용은 매우 통쾌하다. 그대가 조금 물러나 있으면 곧 남쪽 양자강와 한 수 사이로 노닐 것이다. 잘 널리 유통시키는 것을 힘쓰도록 하라.”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곧 남쪽 형주(荊州)로 갔다. 고을의 장군인 사마휴지(司馬休之)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그곳에 고리사(高悝寺)란 절을 세웠다. 무릇 형(荊)과 초(楚)의 백성들로 하여금, 삿됨을 돌이켜 올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십 중 다섯이나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남방의 사마휴지를 정벌하면서 강릉에 이르자, 혜관과 서로 만났다. 무제가 마음을 기울여 대접하기를 이전과 다름없이 하니 마치 친구와 같았다. 이어 칙명으로 서중랑(西中郞)과 교유하게 하였다. 이 사람이 곧 훗날의 문제(文帝)이다. 이윽고 서울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혜관은 이미 미묘하게 불교 논리에 빼어나고, 다시 『노자』와 『장자』를 탐구하였다. 또한 『십송률(十誦律)』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여러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캐내었다. 그런 까닭에 법을 찾고 도를 묻는 이들이 모여들어, 하루도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원가(元嘉) 3년(426) 3월 상사일(上巳日: 첫 번째 巳日)에 황제의 수레가 곡수의 연회[曲水宴: 3월 3일에 베푸는 잔치]에 임하였다. 혜관과 조정의 선비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혜관이 곧 앉은 자리에서 먼저 지어 바쳤다. 글 뜻이 맑고 은근하며 사리가 당시의 사정과 일치하였다. 이때 낭야(瑯琊)의 왕승달(王僧達)ㆍ여강(廬江)의 하상지도 모두 맑고 우아한 말로 기쁨을 이루어, 티끌세상 밖의 감상을 나누는 교우관계를 맺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변종론(辯宗論)』과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 및 「십유서찬(十喩序贊)」과 여러 경전의 서문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승복(僧馥)
당시 도량사의 승복은 본래 풍천(灃泉) 사람이다. 오로지 교리 이해[義學]에 정진하여 『승만경(勝鬘經)』에 주석을 달았다.
∙법업(法業)
또 법업도 본래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품경』ㆍ『소품경』과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몸을 절제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릉공주(晋陵公主)가 그를 위하여 남림사(南林寺)를 지었다. 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