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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 안에서 오늘도 승리하시고 주님이 허락하신 복된 인생의 길을 멋지게 걸어가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우리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산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났던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재산도 다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어 종의 신세로 열매를, 돼지의 쥐엽 열매를 먹어야 하는 그러한 상황 속에 이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었던 것이죠.
그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는 깨닫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 결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가운데는 여전히 불편했을 거예요. 염려와 걱정, 두려움이 가득했겠죠. 과
연 내가 돌아갔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받아주실까 나를 모른 척하진 않으실까?
왜요?
내가 아버지께 유산을 요청했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겼다는 것인데, 아버지도 나에게 동일하게 없는 자식 취급하면 어떻게 할까?
유산 받아서 나아갔으면 멋지게 살아 돌아와야 되는데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말끔하지도 않고 거의 거짓 신세로 돌아오는 그런 모습이었잖아요.
그러니 아버지가 나를 보면서 혀를 차면서 당장 내치지는 않을까?
여러분 그가 돌아오는 그 길, 그 여정 가운데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자신의 잘못, 자신이 행했던 일, 그리고 자신의 처지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면서 아마 그의 마음은 심히 괴롭다는 표현으로 말을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이 둘째 아들의 입장이 되었더라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 그리고 아버지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게 된다면 그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죄인 된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한데 우리의 생각 가운데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내가 죄인인데 내가 세상에서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라는 그러한 마음들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의 인간의 모습이라면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떠하셨을까요?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하죠.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버지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아버지의 사랑은 첫 번째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랑이었다는 거예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가까이 오고 있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 20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십니다.
이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십시오. 아직 거리가 멀리 있다는 거 어쩌면 저 멀리 전과 같은 모습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요. 그 아들의 돌아오는 모습을 단번에 취했다는 알아보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건은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들어봤는데 저 멀리서 아들이 걸어오는 것을 본 우연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 밖에 나가서 노심초사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는 거. 그러니 아직 거리가 멀리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모습을 측은히 여겼다는 것이죠.
아버지의 시력이 굉장히 뛰어나서였을까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의 시력은 점점 약해지는데 아버지가 날이 갈수록 시력이 확실히 좋아져서 그를 발견했을까요?
그렇지 않죠. 여러분 그의 마음의 시력, 사랑의 시력이 아들에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 둘째 아들은요.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가서 탕진한 아들이잖아요.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 그러한 모습들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았겠어요 그렇다면 집안의 명예도 실추시킨 그러한 큰 잘못을 저지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유산을 가지고 가서 열심히 살아 멋지게 살아 멋지게 성공해서 당당하게 돌아오는 모습이 아니라 부정한 동물이었던 돼지를 치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쥐염 열매를 먹고자 하는데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거지의 신세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 여기 우리 말로는 꼬라지라고 하죠. 꼴 꼴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태도를 보십시오. 아들을 보자마자 어떻게 합니까?
달려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서 사용된 달려갔다는 헬라어 드라몬이라는 단어는 경주하는 선수들이 전신 전력을 해서 달려가는 모습. 100m 선수가 에레브 사인 볼트가 굉장히 유명했잖아요. 그 선수가 자신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 1등을 하기 위해서 전신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라는 것이죠.
여러분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성인 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뛰는 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남자들이 간편하게 짧은 옷을 입고 있지만 당시 유대사회만 해도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긴 옷을 입잖아요. 여성들이 입는 원피스와 같은 그러한 긴 옷을 입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옷을 입고 뛴다는 것은 우선은 그 긴 옷을 걷어야 되고요. 그리고 전심 전력으로 해서 뛰는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원피스 같은 옷을 입고 뛴다. 체면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그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여겼기 때문에 많은 성인 남자들이 일상에서는 뛰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힘을 다해서 뛰어갔다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체면이나 자존심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직 아들을 바라보고 그를 향해서만 질주하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과 아들이 돌아옴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 온전히 담겨져 있는 것이죠.
또한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수해를 돼지 치면서 보냈어요. 얼마나 열심히 씻었는지는 알 수 없겠죠. 씻을 물이 있었겠어요? 중동에 무슨 물이 많다고요? 돼지 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의 몸에 돼지 냄새가 배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 향기가 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요. 저 멀리서부터 오는 그 아들의 향기를 느꼈을 거예요. 이게 무슨 냄새인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악취는 아버지의 코를 찌르는 듯 굉장히 쾌한 악취 같은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을 사랑하는데 방해거리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전력을 다해서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목을 끌어안았다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는요. 전적인 용서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떠한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습니다. 듣기도 전에 더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 아들을 끌어안았다는 것이죠. 내 모습 이대로를 받아주시. 아버지 우리 찬송 가운데 그런 찬양 있잖아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 나를 받아주소서.
여러분 이것은 과거의 잘못 상처를 모두 덮는 완전한 용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한번 같이 해보실까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버지의 사랑은 그의 죄 잘못을 완전히 용서하는 사랑의 아는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의 지위가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 사회에서 주인이 종을 맞이할 때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아요. 그렇겠죠 주인이 종이 온다고 해서 끌어안고 목을 끌어안고 반가이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을 안았다는 것은 너는 여전히 내 아들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메시지가 되는 것이죠. 세상 죄로 인해서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 그때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아와 목을 안아주시며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는 내 아들이라
할렐루야.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 주님은 지치고 상한 우리에게 찾아와 목을 안으시며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는 내 아들이라
할렐루야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끌어안음은 기쁨으로 환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잃었던 자녀를 다시 찾았던 그 기쁨, 최상의 기쁨을 표현해 주고 있는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아버지를 향해서 전력 질주합니다. 그리고 목을 끌어안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일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죠.
그는 그를 입맞춰주었다.
여러분 입맞추었다는 것도 의미가 있겠죠. 여기에서도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입맞춘다는 것은 사랑과 친밀함의 표현이죠. 왜냐하면 당시에 입 맞출 수 있었던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친구 사이에 주고받았던 애정 어린 인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여전히 친밀함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 두 번째는 화해입니다. 당시의 등에 있었던 관계를 회복시킬 때 화해의 표시로 했던 것이 입을 맞추는 그러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갈등이 봉합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과 에서의 만남이죠. 야곱은 에서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굉장히 두려운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앞서 먼저 보내기도 했어요. 종들을 먼저 보내고 그리고 그 형님을 만날 때 그전에 열심히 기도했죠.
그런데 그 만남의 모습은요. 에서가 야곱을 보자 달려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줍니다. 그동안의 갈등, 그동안의 섭섭함, 그동안의 관계의 문제를 완전히 봉합하는 사건 행동이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아버지의 입맞춤은 아들이 저지른 죄와 상처를 완전히 용서해 주는 그러한 은혜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세 번째는요. 보호의 약속입니다. 당시에 이제 공동체 생활이잖아요. 공동체 안에 입맞춤은 이 환영과 더불어서 이 사람을 내가 보호하겠다는 그러한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아버지의 입맞춤은 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왔든지 너는 여전히 내 아들이며 내가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너를 지키겠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렇게 아버지께서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준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단 한 가지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아들을 향해서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해주게 된 것이죠.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돌아와야 할 자를 언제나 변함없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 영혼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지 그것은 상관하지 않아요.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아버지는 그 영혼을 향해서 달려가십니다. 목을 끌어안으십니다. 입 맞춰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내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혹 내가 지금 나의 심령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심령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오늘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더불어서 하나님은 여전히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죠. 그 영혼이 혹 내가 사랑하는 남편, 내가 사랑하는 아내,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 내가 사랑하는 자녀는 아닌가 또한 내가 품은 한 영혼이 아닌가 생각해 보시고 그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귀한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바로 기다림의 사랑 그리고 왔을 때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주신 사랑입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사랑은요. 조건 없이 용서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도착하자마자 이 아들이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을 것 아니에요 내가 돌아가서 이 종의 모습으로라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그가 만들어낸 대사가 있었어요. 아버지한테 가서 내가 이렇게 고백해야겠다라는 한 문장이 있었어요. 그것이 오늘 21절인데 이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왔을 거예요. 아버지한테 이렇게 이야기해서 내 자리를 확보해야겠다. 이 11절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사실 여러분 이 고백 속에는 진심된 회개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죠. 스스로를 생각할 때 야 내가 아들의 자격은 안 되겠다.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만 내가 이렇게 허랑방탕하게 살고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가는 나의 모습 꼴이 별로 좋지도 않은데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하기가 너무나 부끄럽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버지의 자격은 상실한 자 그러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그가 요청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품꾼의 자리라도 내가 그 자리라도 좀 있고 싶습니다. 나 좀 받아주십시오라는 요청의 마음을 가지고 간 거죠.
그런데 여러분 아버지는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한번 보십시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아요. 그리고 그 말을 받아주지도 않아요. 대신 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종을 향해서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우리 22절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야 그래도 그래도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 가지고 돌아왔으니 내가 받아주겠다 뭐 이런 표현을 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진짜 막 감정을 다 실어 가지고 온갖 핀잔을 퍼부으면서 당장 나가라고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고 곧바로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손가락에 가락질을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여러분 물건을 준다는 것은 무엇이 됐든지 의미가 있죠. 그래서 우리가 새해 설빔을 잇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해 우리가 새롭게 시작 잘 차려야 될 의무를 분명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약혼을 하면 약혼 반지를 껴주는 의미가 있죠. 결혼하면 결혼 반지를 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이 세 가지도 당시 문화에 비춰 볼 때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을 회복시키신 아버지의 은혜라는 거예요. 당시의 옷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일 좋은 옷이라는 것은 집안에서 가장 귀한 옷, 가문을 대표하는 자라든지 아니면 정말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내어주는 옷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옷에 대해서 요셉의 채색 옷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제일 사랑했던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주어서 그의 신분이 어떤지를 그 다른 아들도 알 정도로 그렇게 옷을 입혀주었던 것이죠. 아버지는요. 아들의 허름한 그리고 초라한 옷을 대신해서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힘으로 인해서 가족을 외면하고 떠났던 그에게 여전히 가족임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또 우리 가문의 일원이다. 그렇게 신분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아버지 나 그냥 품꾼으로 살고 싶습니다고 해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요. 아니다. 너는 품꾼이 될 수가 없다. 너는 내 아들이라 존귀한 아들이라는 마음으로 새 옷을 가장 귀한 옷을 입혀주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요 저와 여러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일 좋은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이사야서 61장 10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십니다. 이사야서 61장 10절 시작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시니 신랑이 사모를 쓰고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옷 공예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지금 제 옷 보지 마시고 여러분 예수로 말미암아 이 구원의 옷 공예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이 이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한 대로 그 구원의 옷으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시고 내 영혼이 즐거워하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기뻐야 하는 거예요. 이 예배가 즐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드려지는 예배가 기쁨의 예배, 즐거움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가장 귀한 옷을 입혀주셨던 이 아버지는요. 이제 손에 가락질을 끼워주셨습니다. 이것은요. 고난의 회복, 권위의 회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당시에 가락지에는 도장 반지라고 해서 가문의 인장이 거기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문서를 승인할 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할 때 이 반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죠.
사실 둘째 아들 같은 경우는 유산을 받아서 갔잖아요. 그리고 다 탕진했기 때문에 그 아들에게 더 줄 것이 없어요. 안 줘도 상관이 없어요. 왜 다 받아갔으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가락질을 끼워줬다는 것은 너는 여전히 상속자이라는 것을 선언해 주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값없이 베풀어주신 큰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디도서 3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은혜만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사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의복을 입혀주시고 보상이 있는 이 가락지를 끼워주셨어요.
세 번째는 뭐예요?
신발을 신겨 주셨습니다. 신발 여러분 이 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의미가 있겠죠 참 자유를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었을까요? 안 신었을까요?
대부분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신은 누가 신은 것이냐 자유인 조인 가족의 일원들이 신었던 것이죠. 따라서 종이 아닌 너는 참 자유인이라는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 둘째 아들은 어떤 삶을 살다가 왔어요?
저기 돼지를 치면서 쥐염 열매를 먹는 그 모습은 뭡니까?
세상에 종으로 살았던 것이죠. 종으로 살고 돌아와 야 내가 이 종보다는 아버지의 종이 낫겠다 싶어서 그렇잖아요. 세상의 종보다는 아버지의 종이 훨씬 더 좋아 보였거든요.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종이 되겠다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신을 신겨주시면서
너는 종이 아니다. 자유인이다. 너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 펼쳐질 것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네 신을 벗어라. 신을 벗어라
그렇게 말씀하셨죠?
이 신을 벗으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어디 회사에 취직을 할 때 내는 것이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해요? 이력서 이력서를 내죠 여기에서 이 한자를 여러분 아시죠? 이 자는 밟을리 신리 역자는 지알려 지금까지 내가 밟아왔던 삶의 이력 이것을 표현하는 것 삶의 발자취가 내가 이렇게 살았습니다고 보여주는 게 이력서잖아요. 그런 이력서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서 너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발자치를 벗어나라 그리고 지금 나를 만나 새로운 신을 신고 새로운 새 출발을 해야 된다는 것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을 벗어낼 때 비로소 새 신, 새로운 길, 새로운 출발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림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신이 있습니다. 이 신을 벗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신을 신어야 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하죠. 에베소서 6장 15절에 보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새로운 길을 가게 하는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씻는 그러한 삶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심을 받아서 복음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 또한 복음의 그 핵심을 잘 전하는 참 제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아들이 돌아오자 여러 가지를 회복시켜주신 거죠.
여러분 이 회복을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둘째 아들의 공로가 있나요?
둘째 아들의 공로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로 회복되어진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 자녀 됨의 은혜,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리하여서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의의 옷을 입게 되었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자녀의 권세의 상속자로 인정을 받아 가락질을 받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기에 복음의 신을 신고 나아가는 사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크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 품에 거하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조건 없는 용서, 과거를 묻지 않는 용서, 완전히 회복시켜주시는 용서가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회개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회개는 부족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한 것이죠.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가 완벽한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기쁨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보시면 여러분 그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아버지가 어떻게 압니까?
그 이후에 잔치를 개설해 주셨다는 아버지는요. 용서와 회복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잔치를 배설해서 기쁨의 아들 귀한을 아주 축하해 주고 축복해 주셨다. 24절 말씀 우리 함께 읽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있어요. 여러분 아들의 귀환을 이야기할 때 지금 무엇하고 연결시키는지 보이십니까?
이 구절을 잘 보십시오. 아들이 돌아왔는데 뭐라고 이야기해요?
생명과 연결시켰다는 거예요. 생명 죽었다 자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죠. 아들은 돌아왔습니다. 이 돌아온 사건은 아버지가 바라볼 때는 생명의 기적이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은 그냥 잘못해서 돌아와 사과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놀라운 은혜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닌 거죠.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사건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 말하잖아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할렐루야 우리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셨다. 즉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며 육체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아갔다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을 때에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부활하신 사랑이다.
그러니 여러분 이 잔치 둘째 아들의 공로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죠.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긍휼 은혜, 생명의 단체 여러분 우리가 받을 자격은 없지만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랑을 충분히 받으시고 누리며 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 주에는 첫째 아들을 좀 집중해 보려고 하는데요. 첫째 아들을 집중해 보면 어쩌면 우리의 모습하고도 매우 유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 주에 우리 첫째 아들 한번 좀 집중해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사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원하고 첫째 아들이 이 안에서 참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