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변씨 13충훈 유허비”에 지포(芷浦)해전과 명량해전 전선 가운데 10척을 초계변씨와 문영개, 마하수, 정명열, 김성원 등 300명이
수리했다는 귀중한 자료를 집중 연구가 필요하여 2회 걸쳐 소개한다.
변홍주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덕황이었다. 용맹한 아버지를 따라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싸워 연전연승 했으며 남해 운대에서 싸우다
아버지가 전사하자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길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홀로 살아 무엇하리요?” 곽산에 이르러서 격전을 치르고 마침내 해를
만났다. 수사에 증직되었다. 월계 변홍원의 종부는 변국간이다. 17세 무과에 합격하여 일곱 고을 병사와 수사를 역임하였다. 중종조에 변방의
오랑캐 침입이 예측할 수 없이 잦았으나 공이 제압하고 막아 공훈을 세웠다. 만년에 전라우수사로 부임하여 영중에서 졸하니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예장을 명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건이다. 관직은 첨사였다. 정유년에 두 동생(변홍달, 변홍적)과 백진남 등과 함께
회령포 충무공진을 협조했으며 포위되어 두 아우와 함께 당포해전에서 순절했다. 둘째 동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변홍달이며 호는
규암이다. 아버지 변국간을 따라 변방의 오랑캐를 토벌할 때 아버지가 포위되자 돌격하여 포위된 아버지를 구했다. 오랑캐는 패하여
도망갔는데 이 이후로 변방에 근심이 생기지 않았다. 중종 임금이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길 “생령을 보호하고 사직을 평안히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 간성의 인물이다”하고 해바라기 꽃을 내리시고 종성부사에 특배했다. 임진왜란 때 대가가 서쪽으로 피란가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길 “임금이
몽진을 가셨으니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으리오!”하며 의병을 일으켜 체찰사 이원익 막하에 갔다. 이원익은 그의 담략의 씩씩함을 보고
전봉장으로 삼았다. 권율장군과 명성과 위세가 서로 같았으며 대첩의 공을 세웠다. 정유년에 왜적이 재침하니 공이 관군의 전봉장으로서
충무공 막하에 가서 난을 평정할 것을 맹서했다. 회령포진 지포해전에서 침입한 적을 막으며 남포까지 추격하였다. 적장이 서로 놀라
탄식하길 “흑면비장이다! ”당포전으로 나아가서 여러 형 동생 10여명과 동시 순절했다. 선무원종2등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북병사에
추증되었다. 셋째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적이었다. 정유재란 때 형 변홍건과 의병을 모집하고 적을 공격했는데 형이 포위된 것을
보고 동생 변홍선에게 말하길 “형이 사지에 들어갔으니 동생인들 어찌 홀로 살겠는가!” 동생 변홍선과 함께 바로 뛰어들어가 형을 도와 죽도록
싸웠다. 왜적이 의롭게 여겨 풀어주려고 하였으나 후환을 생각하며 말하길 “용력이 절등하니 어찌 흑면비장의 형제가 아니겠는가?”하고 아울러 형제
3인을 해했다. 막내 동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변홍선으로 사복시정(司僕侍正)이었다. 정유년에 여러 형과 의사들과 함께 전선을 정비했으며
말을 달려 회령포에 있는 충무공을 만났으며 충무공이 그 충의를 칭찬했으며 근해에 포진시켜 군세를 진작시켰다. 당포해전에 이르러 화살이
떨어지고 응원군이 끊어지매 형들과 함께 순절했다. 사촌 아우가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량이고 호는 동계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장수로 나아가 금산, 무주에서 왜적을 방어했다. 영남으로 향하여 성주, 개령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정유년에는 문영개, 정명열 등과 함께
명량해전에서 왜적을 추격하였으며 한산도를 지키는 것을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을 이끌고 충무공에게 갔다. 충무공 이순신은 간성의 재목이라고
공을 격려하였으며 지포해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단에 맞았다. 그러나 꺾이지 않고 상처를 묶고 싸서 독전하다가 군인들 속에서
마침내 전사했다.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금산사에 배향되었다. 첨사 변홍건은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변덕장이다. 무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때 작은 아버지 규암공(변홍달)을 따라 회령진 지포해전에서 왜적을 방어했으며 남포에서는 육박정를 벌여 왜적 수십급을 베었다.
선무원종공신훈에 기록되었다. 규암 변홍달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덕일이다. 무과에 합격하고 무오년 심하에서 김응하를 따라 근무할
때 며칠을 힘껏 싸우다가 오랑캐에게 포위된 바가 되어 김공과 함께 순절했다. 족질로는 변공의가 있었는데 훈련판관으로 임진왜란 때 의장
최경장을 따라 많은 공훈을 세우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이는 변씨 13 충훈을 일컫는 바라. 아! 목능 용사지란에 우리나라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충성된 마음을 품고 의리로 적을 힘껏 토벌하고 베었던 바가 있으니 초계변씨 일문의 충렬지사가 이와 같음이 있었다. 때를
응해 아울러 나아가 종묘사직의 생령에 공이 있었음이여 이는 하늘이 큰 어지러움을 내림에는 반드시 이를 소탕할 인물도 내림이라 초계변씨는
충으로서 공훈으로써 모든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명성이 천추에 빛날 것이다. 진실로 유허지에 일편석이 없음이 후인이 효를 생각함에 황폐화됨을 참지
못함이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에에 후손 변상호와 그 일족 변익수가 옥돌을 다듬었다. 변익수는 그의 아버지 죽암공 변관용의 뜻을 이어
거금을 전담하고 비를 세우고자 …(하략)… 밀양 손재형이 씀 1968년 3월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