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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들의 꿈을 응원한다!
2,3년 전부터 장학금을 받은 우리 공부방 졸업생들이 진학하지 않고 빈들거리며 논다는 말이 풍설에 들려와 가슴이 무지 아팠다. 우리가 코로나로 부재한 사이에 아이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애통한 마음을 여미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지난 10월 하순, 난댤 희망공동체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어르신들과 목회자들로부터 우리 공부방 학생들에 대한 칭찬을 들었다. 코로나팬데믹 기간에 우리 학생들이 거동이 불편한 어른들과 극빈가정에 식자재와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코로나 공포로 말미암아 집안에 갇혀서 숨죽이며 지낼 때 그들이 자원해서 굶주림에 직면한 극빈가정과 장애우, 독거노인 댁을 찾아다니며 봉사했다는 말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건달처럼 논다는 말과 다르게 약자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반듯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 동안 실망하여 상심했던 마음이 가시고 위로를 많이 받았다.
2013년 여름 공부방 문을 열었을 때 우리 공부방은 골 때리는 꼴찌들의 집합소였다.
데칸고원 난댤타운 변두리 왕 빈민가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사는 것도 힘 들었으므로 자녀 교육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호기심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도무지 질서가 없었다. 남자 아이들은 무엇에나 차례와 순서를 지키지 않았고 무조건 앞을 다투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쓰레기를 어디에나 함부로 버리고 말이 거칠고 수업 중에 해찰이 심해서 공부방의 지속 가능성이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학생들이 지각도, 결석도 다반사였고 조퇴를 하는 것도 마음대로였다. 아이들이 교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교사 또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가난한 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터에 데리고 가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설혹 학교에 보내어도 아이들은 부모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학교보다 시장이나 뒷골목에서 놀았다.
짧은 사이에 지역 학생들의 수준과 마을의 형편과 상황을 파악한 우리는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골머리를 짜냈다.
첫째는 교실과 캠퍼스 환경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환경보호와 오염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쓰레기를 주워오면 쓰레기 한 개당 무조건 사탕 한 개를 주기로 하였다. 오후에 날마다 쓰레기를 수집하였고 수개월이 경과하자 교실과 캠퍼스 내에서 쓰레기가 사라졌다. 그러자 아이들은 다른 동네에 원정을 가서 쓰레기를 주워왔다. 초기 이 일을 책임지고 맡은 분이 이선교사님이었다.
둘째는 학생들의 성실성과 친구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로 하는 것은 다 잔소리였다. 우리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1년에 두 차례 성실한 학생 10명을 선발하여 첸나이에서 4박 5일 수련회 및 도시 투어를 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학생 선발을 위하여 결석과 지각 그리고 조퇴와 남을 괴롭히는 불량한 행동에 벌점을 주었다. 그리고 수업에 참여하는 자세와 태도, 인사성과 친구를 도와주는 것, 쓰레기 줍기와 기타 선행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될 때 관계자들이 모여서 기록에 근거하여 엄정하게 학생을 선발하였다.
수련회가 몇 차례 진행되면서 지각, 결석, 조퇴하는 학생들이 저절로 사라졌고 공부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로 변화되어 갔다.
셋째는 학생들을 배우고 이해하고자 하였다.
자주 설문지를 돌려서 학생들의 심신 상태를 체크하였고 무엇보다 학생들의 희망과 꿈에 관심을 가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꿈과 희망을 경찰관과 군인으로 적어냈고 간혹 교사라고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이 없거나 무엇인지 몰라서 쓰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아이들에게 반복적으로 꿈과 희망을 묻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살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꿈과 희망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넷째는 조금 늦게 시작한 일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응원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초등학교 3학년인 어린 사티쉬가 이선교사님을 찾아와서 자기에게 꿈이 생겼는데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선교사님이 그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였다. 우리는 그의 꿈의 문제로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를 영어학교로 전학시키기 위해 장학금 후원자를 찾았고, 그와 어머니에게 설명을 하고 다짐을 받아 그를 영어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인도의 문교부 인가 정규신학대학들은 영어로 강의가 진행되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신학공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존, 에스겔, 바라뜨, 샤이니, 아누샤 등을 영어 학교로 전학시켰고 이미 영어학교 재학 중인 모제쉬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수 년 사이에 십여 명의 학생들이 우리 장학생이 되었다.
장학생 선발기준의 첫 번째는 우수한 성적보다 공부방 모임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이었다. 공부를 잘해도 결석과 지각, 조퇴가 잦은 학생은 장학생에서 제외시켰다. 꼴찌라 할지라도 지각, 결석, 조퇴가 없는 성실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였다. 두 번째 기준은 이웃과 친구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세 번째 기준은 학교에서의 성실성이었고 네 번째 기준은 본인이 작성해서 제출한 학생카드였다. 학생카드에 나타나는 꿈과 희망에 대한 열망을 참고하였다.
이런 노력과 담임교사인 나겐드라 티쳐의 헌신으로 공부방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3기생부터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대학교 진학을 위한 ‘수능고사’에 전원이 좋은 점수로 합격하는 쾌거가 나타났다. 3기생 전원이 ‘수능고사’에 합격하자 일대 빈민가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소란해졌다. 축하하는 배너가 걸리고 소문이 널리 퍼져서 68명 정원인 우리 공부방에 100여 명이 등록하고 대기하는 이변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본관 건물을 공부방으로 사용하도록 개방하고 자원봉사자를 임시 교사로 채용하였다.
4기생에는 수능 평점이 100점인 학생이 나타나서 우리 센터를 또 한 번 벌컥 뒤집어 놓았다.
5기생도 전원이 좋은 점수로 합격을 하였고 코로나 와중에 6기생들도 다 ‘수능고사’를 통과하였다. 연속된 경사로 말미암아 우리 공부방이 지역사회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넌 크리스천들도 앞을 다투어서 자녀들을 공부방으로 보냈고 우리는 그 아이들을 신앙으로 지도하였다.
그러는 중에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한 학생들이 진학하지 않고 빈들거리며 논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특별히 장학생 1호인 사티쉬가 진학하지 않고 페인트공이 되어 돈 벌기위해 주일예배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참으로 뼈가 아팠다. 그를 위해서 장학금을 지원한 분께 면목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까르띡도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여학생은 부모의 강요로 공부를 그만두고 시집을 갔다고 하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후원자 분들에게는 면목이 없어서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상한 마음에 장학금을 바로 중단시키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소문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먼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로 하였다.
졸업생들을 대면할 생각으로 마음 졸이며 어린이교회학교 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실 문을 여는 순간 놀라 자빠질 번 하였다.
10학년 졸업 후에 진학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그만두고 페인트 공으로 일한다는 사티쉬가 맨 앞에서 열정적으로 찬송을 인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티쉬는 홀로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었다. 3번째 결혼생활에 실패한 모친이 다시 빈민가로 돌아와서 실의에 잠기자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페인트공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어머니를 따라 계부 밑에 살면서 공부방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혼자 몰래 센터에 와서 울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의 상황이 이해가 되자 그 동안 복닥거렸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머니와 동생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그에게 차마 ‘왜 공부를 포기했느냐?’고 물을 수 없어서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가 신앙생활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특해서 눈물이 났다.
그와 케지아가 노래와 율동 지도를 마치고 예배까지 인도하였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들이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미더운 교사가 되어 있었다.
저녁시간에 졸업생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의 꿈 또는 희망이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모두에게 물었다.
사티쉬가 또렷한 목소리로 “목사”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언제 공부해서 목사가 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가 현재 자기가 “방송통신대학교 2학년”이며 3학년 때 “학사 자격증시험을 본 뒤에 바로 신학대학교에 진학할거”라고 대답하였다. 순간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감동을 먹은 나는 눈물이 핑 돌아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꿈을 포기할 수가 없어 방송통신대학교에 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가 어머니가 일을 가고 안계시면 빈집에서 울고 있는 배다른 여동생을 업고 센터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꼴찌인 그의 꿈을 다시 응원하기로 하였다. 가난한 청년의 꿈을!
에스겔은 희망공동체 도착하던 저녁에 만났는데 상황 판단이 빠르고 명랑하였다.
아버지를 일찍이 잃고 어머니와 동생 존과 함께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지역 빈민가로 이사 온 그는 우리의 도움으로 영어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그러나 2번이나 유급을 당하여 아직도 10학년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영어 공부가 너무 힘 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영어공부 때문에 창피해서 학교를 그만 두고 도망칠 생각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였다. 몇 마디 말 속에 담긴 그의 뜨거운 신앙고백은 그가 목사가 되려는 이유를 설명해주고도 남았다. 그는 자기에게 생명의 기쁨과 희망을 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꼴찌 중의 꼴찌인 그의 꿈을 응원하기로 하였다. 일찍부터 많은 좌절을 겪은 청년의 꿈을!
공부도 하지 않고 취업도 하지 않고 빈들거린다고 알려진 청년들이 다 방송통신대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자간, 까르띡, 죠엘 등. 그들은 가난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였으나 믿음으로 잘 살기로, 의미 있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들을 옭아매는 카스트제도와 가난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분노와 방황 대신에 한 손에 책을 한 손에 망치를 든 것이다.
나는 가난한 그들의 초라한 꿈을 응원하기로 하였다.
존과 바라뜨는 간호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바라뜨는 금년 봄에 신우염으로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왔을 때 나겐드라 티쳐가 나에게 연락을 해주어서 병원에 입원시켰고 단백질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양식을 계속 공급하였다. 작년에는 그 아버지가 센터에 와서 돈을 달라고 요구하여 장학금을 미리 선지불하기도 하였다.
19년에는 쓰러진 그를 우리 공부방 아이들이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입원을 시킨 일도 있다.
그를 직접 보니 대꼬챙이처럼 말랐고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우리 공부방에 와서 3번이나 크게 돌봄을 받은 일로 인하여 공부방에 대한 애정이 컸고 간호사가 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별 볼일이 없는 존과 바라뜨의 꿈 또한 응원하기로 하였다.
13살, 푸지따는 초등학교 4학년 재학 중인데 키가 또래 아이들의 절반 정도였다. 게다가 양 발이 좌우 90도 각도로 틀어져 있어서 보통사람들보다 걸음이 다섯배 정도 느렸다. 한 마디로 말하면 손발이 기형이고 키가 작은 난쟁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낳자마자 버리고 떠나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장애인의 몸으로 8살까지 거리에서 구걸하여 장애인 할아버지와 중풍인 할머니를 봉양하였다. 그의 나이 8살, 성탄절에 우리 공부방 아이들이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그를 발견하여 성탄 구호자 명단에 그를 넣었다. 그 성탄 이브에 그의 집을 방문한 학생들이 불쌍한 그를 도와달라고 선교사님께 보고하였고 선교사님이 한국에 있는 나에게 그의 사정을 보고하였다. 우리는 그를 공부방 학생으로 등록시키고 졸업생들을 통하여 정기적으로 그를 보살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올봄에 중풍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는 지금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푸지따네 가족은 다 우리 도시락을 배달받았다.
그는 날마다 도시락을 배달받으며 우리의 특별한 보호와 배려 하에 있었다.
그 날 여러 목사님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학교 수업, 학교 친구, 하루 생활과 식사 등에 대하여 묻고 난 끝에 “너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가 거침없이 “닥터”라고 대답을 하였다. 나는 그가 닥터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닥터가 무엇 하는 사람인가를 물었다. 그는 즉시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하하거리고 웃었지만 나는 그의 꿈, 희망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었다.
“닥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어요.”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어떻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
“공부방에 가서 하면 되지요.”
“너는 잘 걷지 못하는데 어떻게 날마다 공부방에 올 수 있겠니?”
“오토릭샤를 타고 다니면 되어요.”
나는 그의 총명한 대답에 감동하여 옆에 앉아 있는 자간에게 날마다 오토바이로 픽업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가 날마다 픽업을 하겠다고 힘주어 대답을 하였다.
가장 좋은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사글세 집에서 나와 우리 센터 쪽에 집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 지도교사를 한 명 붙여주는 것이지만 그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자간에게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며 픽업을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센터 쪽에 셋집이 나오는 것을 살피라고 하였다.
꼴찌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 푸지따의 꿈을 응원하다.
운명적으로 가난하고, 결손가정에서 태어난 우리 공부방 출신 꼴찌 청년들의 희망과 꿈을 응원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아무 것이 아닌 꼴찌 청년들의 꿈을 사고 싶다.
꼴찌를 사랑하며 축복한다.
2022.12.24.토요일 아침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