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로 나가서 전도사가 된 이현필도 고향으로 돌아와 이세종을 만났다. 이세종은 이현필에게 독신으로 살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현필은 결혼을 하고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승은 결혼한 제자를 보고 적지 않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깨끗이 사시오’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런데 자궁외 임신으로 부인이 사경을 헤매다 응급수술로 겨우 목숨을 살렸다. 사산된 태아를 보며 이현필은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를 계기로 이현필은 마음의 전기를 일으켜 그동안 자기의 믿음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부실했던 것인가를 깨닫고 스승 이세종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다. 부인에게는 몸이 약해서 홀로 지내야겠다며 별거했다. 그리고 홀로 화학산에 들어가 회개하고 반성하며 성경을 묵상하는 기도생활을 시작하였다.
1942년 이세종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그 제자들은 이현필을 중심으로 모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이현필이 30세 무렵 남원을 방문하여 삼일목공소를 운영하던 오북환집사 등 남원에 있는 기독교 신도들을 만나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이세종과 이현필의 고향인 화순군 도암면과 더불어 남원의 지리산 자락이 공동체 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