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답사를 다녀오고 나서 일제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처의 도시 군산이란 고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해고, 산재 등 노동 상담을 하는 광주비정규직센터는 한 달에 한번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역사기행을 떠난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8월 기행지로 군산을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채만식문학관을 둘러보며 작가가 살았던 암울했던 시기, 일제식민지시대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풍자화한 작품세계를 둘러보았다.
참가자 중 탁류를 읽어본 사람도 있었고 탁류와 태평천하를 구입한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탁류를 읽었고 절망에 찬 시대적 암흑을 경험할 수 있었다.
구암교회, 만세운동의 근원지를 찾았다.
일본인과 선교사가 들어왔던 시기가 1894년 같은 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었고 그 당시 군산의 인구는 만 삼천 명이었다.
그중 일본인이 6,800명이었고 조선인이 6,500명이었다니 일제가 황금 쌀의 고장이자 물류의 중심지로서 군산을 일본인의 도시로 만들고자했던 계획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일본은 조선인이 논을 담보로 돈을 빌릴 경우 조선인 지주보다 더 싸게 고리대금 이자를 받고 3-6개월 동안 돈을 빌려줬다.
조선인이 상환을 하러 찾아가면 외출을 해서 상환 날짜를 넘기는 식으로 논을 빼앗았다.
논을 판 조선인에게는 싼 소작료를 받고 대를 이어 소작을 지을 수 있다는 소문을 내서 쉽게 땅을 손아귀에 넣었다.
일본은 만족할만한 정도로 논을 확보하자 조선인 지주보다 더 높게 소작료를 인상했고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은 소작을 짓지 못했고 만주로 유랑 농민으로 고향을 떠나야했다.
군산항에서 일본의 꼬임에 빠져 사탕수수밭으로 150만 명 이상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한일합방 전부터 이미 군산은 의병활동의 중심지였고 일본의 정규군과 경찰력이 배치되었다.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의 분노와 반발은 총, 칼로 위협할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구암교회 선교사들과 영명학교 학생들 천여 명은 3월 5일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벌인다.
28회 동안 3만 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조선인 중 4회 이상씩은 참가했을 정도의 규모였다.
일제식민지시대 일본이 직접 세웠다는 군산세관을 둘러봤다.
지역명이 장미동이라고 했다.
쌀이 곳간(쌀 미/ 곳간 장)에 가득했다하여 지어진 장미동.
굶주림과 가난 속에 목숨을 가까스로 지키며 살았을 당시의 처절했던 생활을 느낄 수 있었다.
세관은 일본인이 파티를 열었던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밀무역을 눈감아줬던 곳이었다.
1908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자본금 8만6천원을 들여 지었고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월명공원 안에 있는 춘고 이인식선생의 동상을 둘러봤다.
신경애 문화해설사 선생님 소개로 이진원 선생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 이인식 선생의 동상은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이었다.
일본천황을 기리기 위해 신사참배를 했던 터를 없애고 바로 그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고 했다.
선생은 일제강점 하 당시 논 20만평을 팔아 8천원을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했다.
감옥에서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면서 선생 또한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길에 일생을 바쳤다.
이진원 선생님의 부인은 학교 갈 형편이 못 되어 1년 동안 농사를 지었는데 이인식 선생은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농사일을 하던 학생들을 모아서 배움의 길로 안내했다고 했다.
조국이 해방되고 선생은 탱자를 심어 한방약재를 만들어 학생들 학비를 후원하는데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다.
동국사를 둘러봤다.
사업하는 일본인들의 안녕을 빌어주는 절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직접 목재를 들여와 지은 절로 영원히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의 장소였다.
종각에는 천황의 은덕과 영원한 번영을 기리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종소리는 고음의 소프라노 소리로 일본인에게는 자긍심과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을지라도 조선인에게는 고된 노동의 시작과 죽지 못해 살아야하는 고통스런 현실을 깨닫게 하는 흉물스러운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백년에 한번 핀다는 연노란 빛 토란꽃을 보는 행운을 얻었다.
토란꽃의 꽃말은 행운이었다.
구암교회에서 부터 동행해주셨던 신경애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오후 들어 잠겨들고 있었다.
선생님의 명쾌한 문화해설은 참가자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안겨주었다.
건강상 귀가를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후지코시로 ‘근로정신대’라는 미명하에 강제 연행되어 강제노동을 했던 전옥남할머니(81)를 찾아뵙는 일정까지 함께 해주셨다.
뚜렷한 역사관을 갖은 문화해설 경력 10년차 선생님은 미처 몰랐다며 미안해하셨다.
할머니는 10여분동안 역사적 증언을 참가자들에게 쏟아놓으셨다.
너무도 짧은 시간이라 아쉬웠고 할머니와 소통하고 할머니의 응어리진 삶을 치유할 수 있는 만남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에서 시간을 다투는 할머니의 삶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새롭게 인식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었다.
경술국치 100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자문해보는 순간이었다.
첫댓글 폰 앨범 게시판에 사진 올려 놓았습니다. 박수희민 고생하셨고 덕분에 공부가 많이된 역사기행 이였습니다. 우리 회원님들도 많이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효섭님이시군요.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