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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10-15 / 하늘의 상을 받으려면
(고린도전서 3장)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묵상/고전 3:10-15)
◆ 다른 터는 없다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졌다.
여기에 아볼로가 와서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었다.
즉 바울이 터를 닦고, 아볼로가 그 터 위에 집을 세워나간 셈이다.
바울은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했다(6절).
그런데 아볼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터를 바꾸거나 변질시키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하면 안 된다.
그것은 바울의 이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의 터를 ‘사도와 선지자’(엡 2:20)라고 했다.
한마디로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아무나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무리 영성이 뛰어나고, 천재 신학자라 할지라도
새로운 예수를 소개한다면 그는 미혹하는 자요, 사단의 종자다.
오늘날 소위 명성 있다는 일부 신학자들이 사도들이 전한 예수가 아닌, 멋대로 해석한 변개된 예수를 소개한다.
거기에 미혹된 자가 목회자가 되어서 교인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이끄는 것을 보면 속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교회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가끔 바울이 전한 복음과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다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사이비요, 이단이다. 새로운 복음은 없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터는 확고하며 반석처럼 서 있다.
이 터를 건드리지 말고, 그 터 위에서 집을 세워나가야 한다.
◆ 집을 짓는 사람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여기서 집을 짓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누구를 의미할까?
이 구절은 모든 성도를 가리키기보다는 사역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문맥에 맞는다.
앞에서 바울이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고 했다(9절)
사역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집을 짓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집을 세울 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우는 자가 있지만, 나무나 짚으로 세우는 자들이 있다.
수고야 모두 하지만, 그 재료에 따라서 결과물은 천지 차이다.
하나님은 불로써 그 공적을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금과 은과 보석은 불에도 남아있겠지만, 나무나 풀, 짚으로 만든 집은 모두 태워질 것이다.
오, 평생 수고한 것이 모두 재로 변해버리면 그 마음이 어떠할까?
금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금, 은, 보석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집을 짓는 재료는 성도들이다.
금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성도들 한 명 한 명을 금이나 보석처럼 만드는 수고다.
성도들이 금그릇이 되려면, 인용한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불의에서 떠나고,
진리의 말씀에 바로 서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목회나 선교 사역은 집을 짓는 사역인데, 단지 사람들 수만 늘리는 것이 목표가 되면 안 된다.
이렇게 성도들을 금이나 보석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사역이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도록 해산하는 수고이며(갈 4:19),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자인 것처럼 지키는 헌신이다(히 13:17).
그래서 사역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성도를 위한 기도와 간구를 멈추면 안 된다.
목사나 선교사만이 사역자가 아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모두 사역자들이다.
스스로뿐 아니라, 자신이 맡은 성도들이 금과 보석이 되도록 마음을 다해 수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법 그럴싸하게 봉사한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두 불타 없어지는 지푸라기 집이 될 것이다.
어느 교회는, 단지 장관이며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믿음도 없는 자를 안수 집사로 세우고,
기업 회장이라는 이유로 거듭나지도 않은 자를 장로로 세운다. 그들은 지금 짚으로 집을 짓는 중이다.
그런 교회에 속해서 죽도록 수고해 보았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어설프게 집을 지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도 내려놓으라.
나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불로써 공적을 시험하실 때, 과연 남아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인 삶에는 관심 없이, 성도들 숫자 늘어나는 것만으로 행복해한 사역자들은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았는지 실감할 것이다.
◆ 하늘의 상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하늘의 상이란 무엇일까?
어떤 자들은 하늘에 자기를 위한 집이 있다고 말한다.
수고를 많이 한 자는 큰 집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초가집처럼 초라한 집이 있다고 설명한다.
제법 그럴싸하지만, 틀린 말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말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후 5:1)을 오해한 듯하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영원한 집은 그런 집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했는데,
땅에 있는 장막 집이 우리가 거하는 아파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니만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도 우리가 받을 새로운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이비 천국 체험론자들은 하나같이 천국에 자기 집을 말한다.
어떤 자는 하늘에 갔더니 자기 이름으로 된 99층 빌딩이 있다고 자랑하고,
어떤 자는 거대한 성을 자랑한다. 예외 없이 사이비다.
그런 큰 집과 성에서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상상해 보았는가?
하늘의 상이 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일부는 세상의 상상력으로 하늘의 상을 금 면류관에서 시작하여 개털 모자까지 열거한다.
일부는 그런 사상에 반발하여 하늘의 상이란 단지 ‘영생’일 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상은 각자 차이가 있다.
당장 오늘 본문에서도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큰 상’(히 10:35)이라고 말함으로써 상이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하늘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별들이 있지만, 완전히 똑같은 별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이 하늘의 상도 모두 다르다. 크기도 다르고, 종류도 다르다.
다만 하늘의 상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칭찬이며,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된 말할 수 없는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적절한 영광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영광은 각자가 다를 것이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수많은 별이 작든 크든 모두가 반짝이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이론이 있다.
구원은 믿음으로, 하늘의 상은 행위로 받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아주 유치한 율법주의로 우리를 이끈다.
하늘의 상도 믿음으로 받는다(히 10:35, 11:6).
다만 그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 행위로 드러난 믿음일 뿐이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위선일 뿐이며, 율법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살펴본다면, 하늘의 상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밥 잘 먹었다고 칭찬하며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깨를 주무른 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지만,
그 마음이 기특하여 칭찬하여 용돈을 주는 할아버지의 마음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늘의 상을 사모해야 하고, 하늘의 상을 제대로 받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늘의 상에 관심 없는 자는 믿음도 없는 자들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공적은 짚이나 풀로 지은 집과 같다.
금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을 짓도록 하자.
이를 위해 하늘의 상을 사모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자.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짚이나 풀로 집을 짓는 것처럼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인정만이 저의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이런 마음을 놓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출처] 고전 3:10-15 / 하늘의 상을 받으려면...|작성자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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