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이희순 | 날짜 : 09-10-28 11:10 조회 : 1383 |
| | | 벌초를 기다리며
우리 마을이 곧 사라진다. 동양최대의 석유화학기지와 맞닿아있어 여러모로 사람 살기에 마땅치 않으니 이십 리 밖에 나가살아라 한다. 아무튼 농사는 계속 지어야 할 터인데 대토를 하려니 부르는 땅값이 만만치 않았다. 근동 어디건 거품이 지나쳐 만져보기조차 겁이 날 지경이었다. 궁리 끝에 법원의 부동산 경매 사이트를 뒤져 그다지 멀지 않은 마을의 밭 자리를 하나 찾아냈다. 법원에서는 감정평가액을 최저가격으로 제시하므로 거품이 없다. 더구나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한두 번 유찰된 물건을 잘 만나면 더욱 싸게 살 수도 있다. 법원 홈페이지에서 감정평가서를 열람하여 위치라든지 교통여건 등 기본정보는 알아냈지만 현장을 찾아가서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 밭은 ㅅ마을에서 두 마장 남쪽 후미진 야산자락에 깊숙하였다. 개발전망이라곤 없는 호젓한 밭을 마음에 둔 건 가격도 가격이려니와 밭머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먼발치에서 휘휘 둘러보아도 차가 다닐만한 길은 고사하고 사람이 드나드는 초입조차 알 수 없었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보리라 하고 오뉴월 한낮의 땀방울을 훔쳐내며 낯선 골목을 헤매다가 막다른 고삿에 이르러 마늘밭을 매고 있는 안노인을 발견했다. 나는 노인에게 그 밭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가는 길을 여쭈었다. “왜 그 밭을 물어보오?” “그곳 밭 자리가 법원경매에 났기에 한번 보러 왔습니다.” “경매를 한다는 글이 나붙었더란 말이오?” “요즘엔 안방에 앉아서도 다 알아볼 수가 있지요.” 노인은 호미를 든 채 잠시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저는 ㄱ동네사람인데 내 전답을 나라에서 사버렸기에 대토를 하러 왔습니다.” 노인은 가만히 마을 뒤편 둥구나무를 가리키더니 말을 이었다. “저 나무 건너편에 그곳까지 차가 가는 길이 있소…그 밭이 우리 땅이라오.”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어차피 경매에 넘어간 땅은 남의 것이나 한가지랍니다. 땅이고 집이고 경매에 붙여지면 누가 살 때까지 몇 번이고 값을 내려서 내놓으니 팔릴 수밖에 없거든요. 애지중지하는 밭이 그리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우리 아들이 객지에서 회사를 크게 하는데 저 참에 돈이 안 돌아서 부도가 났다하오. 그래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우리 아들은 몸이 성하니 꼭 다시 일어날 것이오.” 노인의 목소리는 결의에 차있었지만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노인을 위로하였다. “그렇고말고요. 아드님은 어르신 소원대로 기어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집이서 꼭 그 땅을 사시오.” 나는 ‘인연’을 떠올리며 경매법정에 나가 웃돈을 얹어 노인의 부탁을 이루어드렸다. 막상 내 땅이 되고 보니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시 그 분을 찾아뵙고 이제부턴 그 땅을 제가 부쳐 먹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려야겠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석을 쇠고 슬그머니 그 밭에 가보았다. 주인이 바뀐 지 겨우 두어 달 지났을 뿐인데 육백 평 남짓한 감나무 밭이 그새 쑥대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감나무에서 저 감나무로 아무렇게나 이어진 길은, 서로 눈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경매법정에서 임자가 바뀌어버린 곡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지 새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감을 따가느라고 생겨난 궤적인 듯하였다. 밭 귀퉁이에 그 집안 어른의 묘소가 있었다. 아, 추석이 지났는데도 벌초를 하지 않은 묘지는 잡초에 묻혀 있었다. 온통 키를 재는 잡초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 집 아들은 아직 재기하지 못했는가. 노인은 몸져눕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나는 설에도 명년 추석에도 묘지를 지켜보며 말끔히 벌초된 날을 기다리리라 다짐하였다. 내가 벌초를 기다리는 까닭은 재기한 노인의 아들이 이 밭을 높은 값에 다시 사들일 거라는 못난 기대 때문이다. 무정한 세월만 흘러가고 어찌 땅주인이 바뀌지 않으랴. 명년에는 그 밭을 가꾸어 잘 익은 감 한 광주리 따들고 노친 댁을 찾아가리라. 그의 아들이 다시 일어섰다는 장한 소식이 바람결에라도 들려오기를 바라면서. |
| 임병식 | 09-10-28 11:59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조금 깊은 산을 가보면 버려진 무덤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석물까지 해놓은 무덤도 그런게 많지요.
그분의 자제분이 다시 땅을 사겠다고 하면 돌려드린다는 마음씨가 참 곱습니다. | |
| | 이희순 | 09-10-30 09:50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그 집안의 내력도 잘 모르지만 반드시 재기하리라 믿고 있으니 저는 '횡재'를 예약한 셈입니다. 신종 플루가 극성을 부리는 요즘 회장님, 부디 건강 챙기시기 바랍니다. | |
| | 임재문 | 09-10-28 15:54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옛말 처럼 사람의 흥망성쇄는 아무도 한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사람도 그렇게 몰락할 줄은 몰랐을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는 것도 쓰러지는 것도 다 운명이니 어쩔 수는 없는가 봅니다. 아무튼 재기하여 그 밭을 다시 살 수 있기만을 바라겠습니다. | |
| | 이희순 | 09-10-30 09:59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왕 회장님, 왕송호수의 가을이 궁금합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이기에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창작하고 명상하고...빛을 찾는 구도의 길을 걷기도 하는 것이 곧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항상 후학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 |
| | 정동호 | 09-10-30 12:38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글 잘 읽고 갑니다. 세상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너무 많네요. 마음씨 착한 분이 그 땅을 사서 주인 노인도 그런 중에 마음이 편했나 봅니다. | |
| | 이희순 | 09-10-30 15:36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이제 그 땅은 해마다 제게 숙제를 낼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최복희 | 09-10-31 12:00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이희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공감이 갑니다. 저 또한 그린벨트지역에서 공권력에 재산권 침해를 받으며 40여 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제는 국가의 수용당하게 되어 노후대책으로 마련한 생계수단을 잃게 되었답니다. 어디로 옮겨앉아야할지 또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가야할 지 막막합니다. 이 글에서 이희순 선생님의 고운 심성을 느낍니다. | |
| | 이희순 | 09-10-31 20:04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대선배님, 제가 사는 마을도 최근까지 그린벨트였습니다. 불과 몇 해 전에 자연녹지로 바뀌더니 철거당할 운명을 맞고 말았습니다. 경매로 장만한 그 땅은 사실 아내명의로 등기하였으니 저로서는 입술로나마 마음껏 인심을 쓸 수가 있지요^^ 정작 선생님께서 큰 곤경에 처하셨군요. 호사다마라지만 전화위복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
| | 박원명화 | 09-11-04 01:13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글을 읽다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듯도 합니다. 이희순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감성에 젖은 맑은 소년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내 앞가림도 힘든 세상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씀을 보니 심성이 고운분이란 게 보입니다. | |
| | 이희순 | 09-11-04 10:32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우리 작가회를 위하여 늘 노심초사, 동분서주하시는 사무국장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고소공포증으로 말미암아 아내와 함께 해적선을 탔다가 하마터면 이혼 당할 뻔한 적도 있답니다. 그런즉 비행기는 태우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국장님 성함을 대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제 형편없는 기억력을 나무랍니다. | |
| | 정진철 | 09-11-04 22:47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저도 그 아들이 꼭 재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선생님의 깊은 뜻을 받기를 바랍니다 | |
| | 이희순 | 09-11-06 09:14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선생님 말씀을 듣고보니,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음에도 세월이 어수선하여 좌절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이웃들이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 |
| | 김창식 | 09-11-05 20:07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내용과 정조는 사뭇 다르지만 전 선생님 글을 읽으며 언뜻 윤오영님의 '방망이를 깍는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 |
| | 이희순 | 09-11-06 09:17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ssay.or.kr%2Fgnu4%2Fskin%2Fboard%2Fbasic_writefree%2Fimg%2Fco_point.gif) | 선생님의 깔끔한 글월 대할 때마다 '나는 아직 논두렁 길을 걷고있구나.'하는 자극을 받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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