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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시 박물관: 대륙에서 대양으로
출처:펑파이 뉴스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일본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는 일본에서 3대 도시권(도쿄·오사카·나고야)을 제외하면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는 일본에서 3대 도시권(도쿄·오사카·나고야)을 제외하면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파가 몰리는 번화가와는 별도로 후쿠오카 타워 남쪽에는 후쿠오카시 박물관이 자리 잡고 현지 역사를 전한다.
중국에서 온 '진관지보'
후쿠오카시 박물관의 여러 소장품 가운데 한위노 국왕인은 진관의 보물(일본이 국보로 여기는 것)로 통한다. 박물관 매표소 안내원이 엉터리 일본어로 묻자 영·한·중 3개 국어가 적힌 안내문을 꺼내 표지에 적힌 '한위노 국왕 도장'을 손으로 그었다.
그림 1 후쿠오카시 박물관 외관
아마도 '진국의 보물'이라는 무게감 때문인지 후쿠오카시 박물관 상설전시실 배치는 역사박물관이 흔히 볼 수 있는 시간대에 따라 고금을 가리지 않고 '금인(金印)의 세계'를 첫 전시관으로 만들어 천하에 유명한 '한위노 국왕인(漢委国王國王印)'을 집중 소개한다. 이 방의 금인은 순금으로 주성(铸成)되었으며, 인면(印面)은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 2.4㎝, 인대(印臺)의 높이 약 0.9㎝, 인대(印臺)에 뱀 모양의 단추가 부착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약 2.2㎝, 총 108g으로 '한위노왕(漢委奴王)'이라는 전서(篆書)가 새겨져 있다. 관람객의 인상을 깊게 하기 위해 전광판에 금으로 찍힌 3D 이미지만 전시한 게 아니다. 방문객들은 금인(복제품)의 무게를 직접 체험하고 모래판에 한위노 국왕인을 새기는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림 2 전광판 무덤 위의 금인
그림 3 금인 체험존
이 금인(金印)의 출토도 전설이다. 1784년(청나라 건륭 49년, 일본 천명 4년) 초봄인 2월 23일(음력) 후쿠오카 현해변 시가도(志贺島)에서 심병위(深兵衛)라는 농민이 땅을 파다가 큰 돌을 괭이질했다. 큰 바위를 옮겼을 때 아래쪽에는 작은 바위가 양쪽으로 받쳐져 있고, 그 사이에 진흙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흙을 파헤칠 때 중간에 있는 금속 덩어리를 발견했다. 한위노왕인(漢委奴王印)이다. 인문(印文)의 이해와 관련, 박물관 설명에서는 일본 학자 미야케 미요시가 『한위노 국왕 인고(漢委國王印考)』에서 한위(漢之委·왜를 통함)의 노(na) 국왕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채택했다.
한(漢)은 중국의 한나라를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에는 광무제 건무 중원 2년(57) 봄 정월에 "동이 왜노 왕이 보내 봉헌했다"며 "사자는 스스로 대부를 자칭하니 왜국의 극남계야. 광무제는 그에게 인수를 하사하였다. "위지·왜인전에 따르면 3세기 후반 노국(奴國) 주민이 2만여 가구로, 같은 규슈 북부의 말로국(4천여 가구), 이도국(伊都國·천여 가구), 불미국(不彌國·천여 가구)에 비해 대국(大國)이었다. 한위노 국왕 인(印)은 중원 정권의 정치적 영향이 일본 열도에까지 미쳤음을 의미하며, 일본 열도와 대륙의 교통 요충지에 있던 노국(奴國)이 대한 조정 주도의 동아시아 세계인 '내중화이외사이(內中華異外四夷)'의 동심원(同心圓)식 화이(華夷) 질서에 합류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 금인만이 동아시아 대륙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박물관 안내 문구대로라면 후쿠오카의 땅은 '대륙문화 획득의 창구'가 된다. 후쿠오카의 여명(2), 노국의 시대(3), 홍려관의 시대(4) 등 전시장은 동아시아 대륙이 일본 열도에 끼친 문화적 영향이 도처에 널려 있다. 한반도에서 만든 토기와 금동장대도 같은 도래계 유물(기마민족의 일본 정복 가설을 연상케 함), 북송당사 및 북송신라사를 위한 쓰쿠자칸(홍려관) 설치는 물론 일본 음식문화의 전통을 다지는 벼농사 문화도 있다. 쌀은 중국의 장강 유역이 원산지이며 이후 사방으로 퍼집니다. 박물관의 사진 표지를 보면 벼농사 문화는 중국의 산둥(山東)과 랴오둥(辽東)반도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 규슈(九州)섬으로 유입된 뒤 일본 열도 오지(內地)로 확산됐다. 장강 유역에서 곧바로 바다를 건너 규슈까지 왔다는 중로(中路)와 류큐군도를 거쳐 규슈까지 북상했다는 남로(南路) 가설은 언급하지 않은 채 학계의 벼 동전(東傳) 노선에 관한 북로(北路) 가설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쿠오카시 박물관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시대(1185~1333) 회화 및 최근 출토된 송원선(宋元船)의 실물을 바탕으로 견당사선(遣唐使船) 모형을 제작해 수밀 격실을 설치했다. 이 점은 검토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송원의 항해술은 당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1960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출토된 당나라 목선에는 세계에서 발견된 최초의 수밀 구획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견당사선(遣唐使船)이 '중국 기술을 도입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결국 중국 선박이 일반적으로 수밀 격실을 설치한 것도 송원 시대의 일이다.
그림 4 견당사선 복원 모형
원구와 당물
원나라 때 일본이 사상 처음으로 외적의 침입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13세기 원나라의 두 번의 동정이다. 후쿠오카(福岡)의 하카타(博多)만은 이른바 '몽골의 습격 무대'다.
1274년 10월 3일 신도 통수권자인 원정군은 고려 합포(지금의 한국 동남부 경상도 진해만 마산포 부근)를 출발해 일본 원정(일본에서는 문영 전투)에 나섰다. 10월 20일 새벽, 원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카타에 상륙하여 일본 수비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본토에서 외국군과 맞붙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후쿠오카시 박물관은 사료 문헌인 '몽골습래화권'을 전시해 당시 몽골군과 일본군의 장비 차이를 비교했다. 당시 원군은 전투에 신식 무기인 철포까지 동원했다. 한 번에 2~3개의 구형 철포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폭발할 때 '불이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울려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눈이 멀고 귀가 멍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한다. 후쿠오카시 박물관에는 출토된 돌폭탄과 폭렬탄 실물이 전시돼 있어 원군의 기술적 우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5 "몽골의 습격"
그림 6 원세조 쿠빌라이가 일본에 보낸 신임장
그러나 해상의 원군은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운 좋게 일본군이 승리하자, 일본을 지배하던 가마쿠라 막부는 보데만 연안에 높이 6척, 두께 1척 정도의 돌댐을 만들어 원군의 상륙을 막도록 했다. 이른바 '원구방루(元寇防垒)'다. 지금도 후쿠오카 시내에는 유적지가 몇 군데 더 있고, 후쿠오카시 박물관에도 관련 사진이 전시돼 있다. 1281년, 원군은 두 번째 출정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찾아온 태풍에 패하였다. 후세의 일본인들은 이 두 번의 뜻밖의 승리에 수백 년 동안 우쭐해 있었다. 19세기 말에 작곡된 일본 군가 한 곡조차 '원구'라는 제목으로 '몽골 십만여 기', '내가 가마쿠라 사나이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다', '몽골 십여만 대군', '나머지 세 사람' 운운하는 대목이다. 주전장이었던 후쿠오카 시내에 또 다른 '모토쿠 사료관'이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전화로 예약을 해야 해서 탐방할 수 없었다.
그림 7 "원구방루"
이번 전쟁은 고대역사의 한 토막일 뿐 후쿠오카와 중국 본토의 왕래는 여전히 경제문화의 교류로 남아 있다. 중세 후쿠오카는 박물관 제목 하나로 동아시아 세계의 하카타, 당나라 물류방송의 땅으로 불린다. 특히 유명한 '신안침선(新安沈船)'이 전시돼 있다. 1976년 10월부터 1984년 9월까지 인양된 이 배는 원지치 3년(1323) 경원시 박사항(지금의 닝보)을 출발해 목적지인 하카타(博多)로 가려던 상선이 항해 중 전남 신안 해저에 침몰한 것으로 고증됐다. 발굴된 유물은 도자기·금속·옻칠공예품 등 2만2000여 점, 역대 동전 수백만 개 등 28t(약 800만 개)에 이른다. 후쿠오카시 박물관도 유물 중 일부를 전시했다. 그러나 신안함 침몰은 우리 수역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후쿠오카시 박물관은 복제품만 전시하고 있다.
명나라 건국 이후 일본은 수·당 시대에 이어 중원 왕조와의 공식 관계를 수립했다. 후쿠오카시 박물관에는 에이라쿠(永樂) 5년(1407) 명성조(明成祖)가 '일본 왕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라는 무로마치(室町)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满·총명한 휴의 쇼군)에게 하사한 칙서가 전시돼 있다. 명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일본은 '10년에 한 번 공물을 바치고, 공물은 저장성 닝보부에서 하며, 정부사 1인당 200명 이하'를 바친다. 그래서 박물관에 전시된 '견명선'(실제 빈도는 '십년일공'을 훨씬 웃돈다)이 있다. 일본 역사책에 따르면, 매번 박을 공출할 때마다 얻는 이익은 10만 관 이상이다. 일본은 부등가교환의 조공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조정에서 숙식비를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상품을 부대라는 명목으로 중국 관공서에서 매입할 수 있었고, 그 가격도 시가보다 높아서 자체 거래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명나라, 실로 전무후무한 대선정국가"라고 외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림 8 명 성조가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내린 칙서
미묘한 방향 전환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는 안정되지 않았고, 15세기 중엽 이후 '전국시대'의 난세에 접어들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자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고 조선의 군사개입(1592~1599)을 이끌어낸 것이 박물관 전시물에 나오는 '분로쿠 전투·게이요시 전투'다. 히데요시가 북침을 위해 세운 기지인 나고야(名護屋)성이 하카타 서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이 한반도 지도는 후쿠오카 박물관의 동아시아 대륙 전시품 중 거의 '절창'이 되었다. 박물관의 전시물을 보면 후쿠오카는 내성적이었으나 서양으로 넘어가는 미묘한 변화를 겪었다.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구로다 나가마사는 52만 석의 다이묘(제후)로 기타큐슈에 입성해 하카타의 서쪽에 후쿠오카 성을 쌓았다. 후쿠오카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후쿠오카는 후쿠오카(서) 하카타(동)의 이원도시로 변모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입었던 갑주(黑系威具足)도 박물관의 중요한 소장품이자 일본의 '중요한 문화재'다.
후쿠오카 번조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에도 시대(1603~1868) 내내 후예의 통치하에 있었다. 일본의 쇄국 체제가 확립되면서 대외 통상 항구가 나가사키(長崎)로 넘어가고 대상도 중국과 네덜란드만 남게 됐다. 이로써 후쿠오카는 대외교류 창구로서의 지위를 잃게 됐다. 박물관에 따르면 후쿠오카의 난학자는 19세기 중반 당시 일류 세계지도였던 동판만국여지도(동판만국여지방도)를 만들어냈지만 그 지식의 원천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대륙이 아니라 네덜란드(난학이라는 이름에서 유래)였다. 막부 통치가 흔들리는 배경에는 후쿠오카 번 훈련보·기마·포병까지 서양식 병기를 동원하는 등 태평양에서 건너온 구미 문화가 더 강했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새 정권은 '탈아입구(脫亞入欧)'를 지향한다. 그래서 박물관에 서양식 카페 모형까지 만들어 놓고…. …
그림 9 에도 말기에 그려진 세계 지도
그림 10 서양식 카페 내부 모습
이런 '태평양 지향'은 '현대의 후쿠오카' 전시장(9)까지 이어졌다.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시대'(1970년대 초 전후)에 구미에서 유래한 야구는 이제 일본의 국민운동이 됐다. 1950년대 일본 프로야구에서 3연패를 달성한 후쿠오카의 '도시의 빛'이라는 이유로 '니시테쓰 라이온스 야구단' 유니폼까지 전시했다. 다만 호사가들도 나중에 후쿠오카로 팀을 옮겼고, 오늘날 이름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림 11 박물관 전시품인 야구 유니폼.
특히 박물관에는 '목표 국제교류의 중심도시'라는 소제목이 있지만 후쿠오카는 1989년 '아시아·태평양 엑스포'를 개최한 바 있다. 당대에 관한 박물관의 전시품은 사람들에게 강한 '지방성'의 특징을 남긴다. 박물관의 마지막 상설전시실인 후쿠(福, 岡) 히로(博, 多)인생(10)과 야마카사의 세계(11)를 각각 지역의 전통민속과 지방문화적 특색(博多祇園山笠)을 소개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전근대 일본 대외(동아시아 대륙) 교류의 중심지였던 후쿠오카(博多)가 사라진 셈이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유명한 '하카타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때쯤이면 옛날 중국과의 인연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2 하카타기엔야마카사
(이 글의 사진은 모두 저자가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