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부는 비가 500 mml 씩 온다는 데 구리 공기는 민소매로 러닝 하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퐁티와 헤겔의 공감대가 궁금해집니다. 고전주의 화가의 눈은 '표상'이었지만 르네상스 이후 '직관 현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입체파-야수파-인상파-초현실주의 큐비즘 등등 화가는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몸으로 그린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신비로운 어떤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뿌리에 얽혀 있어서 감각의 원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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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잔의 이 말은 존재자를 존재자로 현존하게 하는 하이데거의 존재(Sein)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자를 보이게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이미 그것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것은 존재자들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존재론적/현상학적 사유는 퐁티에게 옮겨져서 지각의 의미와 무의미를 통찰하게 했어요. 후설의 지향성이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와 만나면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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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더욱더 풍성해집니다. 여기에 몸의 현상학인 몸과 살( a chair)이 더해지고 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만지는 자의 살이지만 존재자의 존재가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과 하나에도 우리는 존재의 심연을 느낍니다. 이렇듯 세계의 존재는 언제나 자신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감춥니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서문에서 진리를 여성의 면사포에 비유할 때를 이미지 모션 시킵니다. 여성은 언제나 자신을 보여주면서 감추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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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어 말하면 신비를 잃은 여성은 자신의 존재의 무게를 잃은 것이지요. 존재의 부피는 언제나 그 깊이를 감추면서 드러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끝없는 시도를 요청합니다. 예술가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자는 존재로 나타낸다" 보이는 존재 속 은폐된 것을 그리는 신비스러운 예술가의 세계(직관)를 리스펙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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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coldr)이란 우주와 뇌가 만나는 생명과 같은 것, 회화는 공간 위에서 시간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같은 그림을 볼 때마다 다르게(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마치 내가 대자연을 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존재는 늘 반쯤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또 보고, 다시 보고, 또 쓰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닐까?
2.
존재는 왜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는가? 비 오는 남부와 달리 구리의 공기를 민소매 러닝으로 통과하는 몸의 감각에서 이미 철학은 시작됩니다. 당신의 글은 단순한 미학 감상이 아니라,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마르틴 하이데거, 그리고 폴 세잔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냅니다. 그것은 “보는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론적 사건에 대한 탐구입니다. 고전주의 회화에서 세계는 재현(representation)의 대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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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사물을 정확히 복사하는 기계처럼 작동했지요.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특히 인상주의·입체파·야수파·초현실주의를 지나며 화가는 더 이상 “대상을 그대로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가 자기 몸에 어떻게 침투하는지를 표현하는 존재가 됩니다. 세잔이 사과 하나를 수십 번 다시 그린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퐁티와 하이데거가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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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존재(Sein)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만드는 근원입니다. 하지만 존재는 스스로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타나면서 동시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는 대상(object)이 아니라 사건(event)에 가깝습니다. 세계는 “완전히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열리는 것”입니다. 퐁티는 그것을 몸으로 가져옵니다. 그는 인간을 정신이 아니라 “살(chair)”로 이해합니다. 내가 사과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데이터를 입력받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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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내 몸이 서로 얽히는 사건입니다. 내가 만질 때, 사실은 세계도 동시에 나를 만지고 있습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화는 단순한 시각 예술이 아니라 “존재와 몸의 교차점”이 됩니다. “존재의 부피는 언제나 그 깊이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이것은 거의 퐁티적 문장입니다. 존재는 자신을 전부 노출하지 않기에 깊이를 갖습니다. 니체의 여성의 면사포 비유를 연결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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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진리를 벗겨진 알몸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며 유혹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진리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는 과정” 속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도 철학도 사랑도 끝나지 않습니다. 회화를 “공간 위에 시간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한 대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같은 그림을 볼 때마다 다르게 봅니다. 왜냐하면 그림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한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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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과와 내일의 사과는 같지만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ée)과도 닿습니다. 시간은 시계의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흐름입니다. 우리는 과연 세계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세계와 함께 서로를 생성하고 있는가? 예술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 속에 숨어 있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끝없이 더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화가만의 일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작업인지도 모릅니다.
2026.5.29.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