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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의 증언
행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행 10:34-43 / [고넬료의 집에서 전도한 베드로]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35) 어느 나라에서든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36-37) 이스라엘 사람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들이 듣고 계신 줄로 압니다. 모든 인류의 주님이신 메시야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 그 사실 말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갈릴리에서 침례 요한이 전파하기 시작한 후에 온 유대에 퍼져 나갔습니다. 38)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늘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39) 우리 사도들은 예수께서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베푼 그 모든 이적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예수를 예루살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했지만 40-41)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는 일반 사람들보다는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해 두신 특정한 증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우리들에게 오셔서 함께 식사도 하셨습니다. 42) 예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으로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43) 이것은 모든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대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그들이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넬료의 믿음의 고백을 들은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증인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로 부름 받은 증인입니다. 증인인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 증언은 고넬료 뿐 아니라 증인인 베드로까지 성장시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34-35, 43)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의 임재를 선포하셨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받은 베드로였지만 유대인인 그에게는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 가운데 고넬료의 고백은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바로 눈 앞에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 베드로는 유대인 뿐 아니라 각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다’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알길 원하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가르치시고, 동시에 베드로에게도 놀라운 깨달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이 믿어지는 것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증인이 되어 증언하다(36-43)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이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땅에 두루 다니며 행하신 사역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으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여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부활시키셨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베드로이기에 그는 기꺼이 증인으로서의 자리에 서서 증언합니다. 이 일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증언된 것이고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주어지는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짧게 기록되었지만 강력하고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사도로 부름 받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기에 베드로는 단호히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적용: 증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순결합니다. 세상에는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수많은 불륜과 죄악이 범해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거룩함을 잃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죄악에 빠져서는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하며, 시험에 빠지지 않고 사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항상 깨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 빌립이 이방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할 때(8:35), 또는 산상 설교에서 예수가설교를 시작할 때(마 5:2) 처럼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곧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와 잔중함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는 중대한 선언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않는다. 이 구절은 신 10:17의 인용구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외모'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외형적 구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10:35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사용하던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하면서 이제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예수를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만우'(萬有)는 헬라어로 중성과 남성 모두에 해당되어 '세계 만물' 또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Haenchen, Bruce). 이는 롬 10:12의 '모든 사람의 주'란 표현과도 일치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만민'(萬民)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만유'를 '만민'으로 해석해야 할 정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만유'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이 '만유'란 표현은 모든 피조물을 지칭하므로 '만민'이란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 베드로는 평화를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이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뜻한다(Haenchen). 과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심판하는 자와 죄인의 관계였으므로 화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롬 5:10, 11). 또한 이 평화는사람간의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엡 2:14, 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으서, 그동안 그 둘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졌다. 이런 의미엥서 복음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10:37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 예수가 선포했던 평화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 부터 출반된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언급된 '그 세례'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예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을 언급했던 것이다.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 본 구절이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지역에 대한 설명인지 아니면 예수의 출생에 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36절에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란 표현이 사용된 점으로 비추어 보아 본 구절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두루 전파된 그것 - '전파된 그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게노메논 레마'(*)는 '되어진 말씀'으로 직역될 수 있다. 이는 이미 예수를 통해 온 지역에 전파된 말씀으로 앞에서 언급된 '화평의 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는 비록 '말씀'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 외에 행하신 표적도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해 나타난 계시는 말씀에 의한 것과 행위에 의한것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 누가는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함께 예수를 언급하여 그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실을 강조했다. 한편 누가는 역사적 예수가 수행하신 모든 언행에 대한 권위를 언급하려는 의도로 본문을 서술했다. 즉 앞절에서 언급한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언행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의 언행은 하나님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예수가 행했던 모든 언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받게 됨을 보여준다.그래서 누가는 본절 마지막에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셨음이라'고 덧붙여 놓았다. 착한 일을 행하시고 - 이에 대해 혹자는 헬라적인 의미에서 백성들에게 은인으로인정받는 군주에 대한 암시를 주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Haenchen). 즉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애정으로 도움을 베풀어 줄 때 헬라인들은 그 군주를 향해 선한 일을 행한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군주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통치자적인 모습을 연상하면서 착한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선하신 본질을 지니신예수가 행하신 일에 대해서 유대적인 윤리 개념으로 진술했을 뿐이다.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예수의 기적 행위를 치유의 행위로 연결시켜 모든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것 즉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 모든 능력을 하나님이함께하는 증거로 말하여 예수의 모든 언행을 하나님의 권위로 전당화하여 설명하려고한 것 같다(2:22).
=====10:39
우리는...모든 일에 증인이라 - '우리'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동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마도 열 두사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즉 역사적 목격자이며 동시에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선언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예수는 온 인류를 우해 죄에 대한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이 저주는 신 21:22에 따라 나무에 달린 것 곧 십자가 지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5:30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고 묘사하였다. 따라서본문은 초기 기독교의 상투적 증언 내용으로 예수의 죽음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면서 또한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이중적 효과를 나타낸다.
=====10: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 베드로는 예수의 죽으심에 이어 부활 사건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당시 사도들의 증거 내용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에서는 부활 사건의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가 이미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교한 점을 미루어 보아(2:32; 3:15; 4:10; 5:30)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표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 설 교 >
고넬료의 회심
행전 10:34-35 / 김남수 목사
오늘 성경의 말씀은 고넬료라는 사람이 회심할때에 베드로라는 사람이 찾아가서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깨달은 것을 설명해 주는 설교의 서론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깨달았다고 설명한 내용은 참으로 귀중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고넬료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렇게 구원에 각별한 은혜를 입혀주시는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고, 그는 군인이었고, 그는 점령군 사령부에 근무하는 고급 장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 사람을 부르시고 천사를 보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겠는가? 생각해 볼때에 이방인의 첫 회심자로 고넬료를 선택하시고 고넬료가 왜 선택되었는지 베드로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받으시고 받으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행해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 그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신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을 주님은 이방인중에 첫 번째 열매로 찾으시고 그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경외는 무엇이고, 경건함은 무엇이냐? 경외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이 경건하다는 삶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는 것이 경외함이요, 경건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세상을 멀리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이것이 경건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과 중심을 함께 보시기 때문에 그 분의 마음에 들게 살고 그분의 마음에 들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백악관이라는 whitehouse에 와서 기도해 달라고 목사님들 몇 분을 초청해서 간적이 있었습니다. 1주일전에 신원조회를 끝내기 위해서 information을 다 주어야되고, 연락이 오기를 하루 전에 워싱턴에 와서 자고, 아침 새벽 6시에 백악관 동쪽문에 와서 기다리면 자기들이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식사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은 8시인데 6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2시간 전에 그것도 하루 전에 워싱턴 비행기 타고 가서, 새벽 6시에 가서 줄 서고, 2시간 후에 기도회가 있고 아침을 먹는데 실망을 했습니다. 별로 신통치 않았습니다. 미국식이라서 그런지 continental breakfast 정도였습니다.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사람을 만나는데도 1시간 2시간, 1주일 전에 준비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되고, 예배해야 돼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 분을 옳게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설 때도 제일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파티에 가는데 하나님 앞에 갈 때에 화려한 옷은 삼가지만 그래도 깨끗하고 아주 좋은 최선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외모가 중요하지 않고 그 마음을 주께서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이 말라기입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형식화된 교회, 형식화된 신앙, 종교화된 이것을 경건을 떠난 외식적인 종교행위, 경건을 떠난 형식적인 헌신, 경건을 떠난 피동적인 희생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속마음을 터놓으신 말씀이 말라기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말 할 때는 속에 있던 것 다 터놓고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선지자와 예언자와 그 동안의 말씀을 주의 종들을 보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셔도 안 들으니까 이제 속을 터 놓고 얘기를 하십니다. "내가 아비일진대 너희가 나를 경외함이 어디에 있으며, 내가 주인일진대 종이 주인을 두려워 함이 어디에 있느냐?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사기해서 나에게 드리고 다 했다고 생각하는 이 형식적인 예배를 내가 받지 않겠다고 단언하시는 것입니다. 차라리 누가 와서 성전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의 답답함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안 받으시겠다고, 은혜도 안 베푸시겠다고, 예배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을 하신 이유는 마음이 떠난, 정성이 없는,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구제하는 마음으로, 동정하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나가고,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지, 구제의 대상이 아니고,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찬양을 받으실만한 분이시고,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지, 우리의 구제를 받거나, 동정이나 도움을 받으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서 존귀와 영광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떠나서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며 진정으로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만나고 찾아서 그들에게서 내가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골라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이방인이 고넬료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입니다. 받으시고 받으실만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하나님이 귀하게 고넬료를 생각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만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줄 알았는데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이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취하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받으시는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를 멀리하고 올무에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뜨겁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살면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붙잡아 주시고 축복하시겠습니까?
예수 사건의 목격자로서의 증언
김영규 목사 / 행 10:34-43
베드로의 깨달음
본문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본문의 설교는 베드로의 깨달음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으로서,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중요한 교리적 진리를 깨닫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은 두 가지로 표현되었지만 내용상 한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혈통과 민족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34) “외모를 취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proswpolhvpth"”(프로소폴렙테스)인데 “provswpon”(얼굴 앞면)을 “lambavnw”(취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은 얼굴 보고 사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영문 흠정역에는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차별대우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현대인의 성경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로 사람을 뽑지 않고, 사람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뽑을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을 때에, 외모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혈통적 구별을 의미합니다. 즉,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한 것은 곧 이방인을 외면하고 유대인 중에서 자녀를 뽑지는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항상 하나님 말씀을 유대인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유대인 안에서 사람을 뽑을 때에 빈부귀천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방인에게 적용한 적도 없고, 적용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를 뽑는 데는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민족보다 개인을 택하시고 뽑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 “ajll! ejn panti; e[qnei oJ fobouvmeno" aujto;n kai; ejrgazovmeno" dikaiosuvnhn dekto;" aujtw'/ ejstin.” (But in every nation whoever fears Him and works righteousness is accepted by Him.)(NKJV) 각 나라 중(ejn panti; e[qnei)이란 말은 모든 인종(ethnic), 혹은 민족(in every nation) 중에서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종, 종족, 민족, 혈통을 보고 하나님 자녀를 뽑으시지는 않으십니다. 즉, 민족 단위로 뽑지는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민족이 선민이 되었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4:34) 그러나 신약 시대 하나님 자녀들은 다릅니다. 민족을 뽑으신 게 아니라 개인을 뽑으십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 개인을 뽑으신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충격적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내가 깨달았노라고 새삼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최초를 이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에게는 너무나 큰 깨달음입니다.
구약 시대 선민은 아브라함 자손, 즉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선민은 종족이나 민족이 아닙니다. 혈통 민족과 상관없이 각 개인을 뽑으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베드로가 인식한 예수님의 신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혹은 3년 이상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을 그냥 비범한 랍비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막9:5)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11:21)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을 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는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러나 그 때 베드로는 스스로 안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바른 대답을 알려주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지 점차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초반부터 본문까지 여러 차례 설교를 했습니다. 앞선 부분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소개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새로운 칭호를 사용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만유의 주시다! “ou|tov" ejstin pavntwn kuvrio",”(who is Lord of all.) 만유라는 말은 모든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물론 모든 동물, 모든 생물, 모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축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옵니다. “dia; !Ihsou' Cristou', ”(through Jesus Christ,)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축복은 없습니다. 어떤 축복인가요?
첫째로, 화평의 복음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to; genovmenon rJh'ma) 너희도 알거니와,”(36-37) 화평의 복음! “eujaggelizovmeno" eijrhvnhn” (the good news of peace, NIV) 오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 가지 평화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모든 사람이 평화를 잃은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데 평화가 올 리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첫 번째 선물인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만 가지 평화의 근본입니다. 둘째는 이웃과의 평화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여기서 말하는 막힌 담이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됩니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참 화평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내 마음 속의 내면적인 평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착한 일을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37) 선을 행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착한 일이란 뭘까요? 예수님의 삼대 사역이 있지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복음 전파, 말씀을 가르치신 일, 모든 병을 고치신 일! 배고픈 자들에게 양식을 주셔서 먹게 하신 일!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착한 일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서 행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1-3)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통해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선행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착한 일이든지 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38)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pavnta" tou;" katadunasteuomevnou" uJpo; tou' diabovlou, ” 모든 사람이 마귀에게 눌려 있습니다. “눌리다”(katadunasteuomevnou")는 말은 지배당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마귀에게 지배당하면 병이 됩니다. 정신적으로 지배당하면 정신 질환이 됩니다. 헛소리 하는 것만 정신 질환이 아닙니다. 바른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정신 질환입니다. 정의가 뭔지, 진실이 뭔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요. 각종 중독증 환자들을 보세요. 도박 중독, 음란 중독, 전과 누적자들, 알면서도 행지 못해요. 귀신에게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제압해야 합니다.
오늘 만유의 주이신 주님을 통해서(dia; !Ihsou' Cristou', : through Jesus Christ,) 세 가지 선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화평의 선물입니다. 둘째는 모든 착한 일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셋째는 마귀에게 눌린 데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신 예수님
베드로 사도가 인식한 예수님 신분에 대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재판장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34-43) 예수님은 재판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신 구주가 되시지만 또한 재판장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보통 재판장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십니다.
세상 재판장은 산 사람만 재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사람도 심판하십니다. 산 자와 죽은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미 죽어 육신적으로 땅에 묻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지옥에 있거나, 천국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는 날은 세상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모든 인류를 다 심판하실 재판장이십니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재판장이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재판장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도 재판장이신 주님을 강조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2,27)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계 20:11-12)
예수님이 재판장이신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재판장은 죄에 대한 죄종 판결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악 된 인간에 대한 영원한 용서와 영원한 형벌을 결정하십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5-4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영벌과 영생, 생명 부활과 심판 부활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재판장은 무서운 지옥을 선고합니다. 주님의 판결에 따라 영원한 형벌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무죄를 선고하십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죄(사면)를 선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사면권이 주님 손에 있습니다. 보세요! 중풍병자가 들것에 들려 왔을 때에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2:5,10) 여기서 강조 된 것은 주님의 사면권입니다.
주님이 특별한 사면권을 가지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든지 용서할 만 한 근거를 스스로 마련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사도들은 주님을 통해서 사면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6-47)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감정적인 결과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같아!” “나는 하나님 자녀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 하나님 자녀입니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잘 나올 때는 뭔가 하나님 자녀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다가 주일을 빼먹고, 나쁜 짓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나 같은 게 무슨 하나님 자녀인가?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을거야!” 누구의 자녀가 되는 일이 기분상의 일입니까?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호적에 올립니다. 여러분은 어쩌다가 기분 나쁘다고 자식을 호적에서 지웁니까? 그것은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법률상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대속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주셨지만, 또한 주님이 우리를 자녀로, 의인으로 선포하신 법률적인 판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재판장이신 주님에 의해 사면이 결정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자녀로 인정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법률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면 자식답게 믿음으로 사세요. 만일 어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심심하면 한 번식 “당신이 정말 내 아버지며, 내 어머니입니까?” 묻는다면 불효막심한 놈입니다. 의심 말고 믿으세요.
아직도 하나님 자녀인지 의심되는 분들은 오늘 재판장 예수님께 사죄 선언을 받으세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행복한 인간은 당장 죽어도 천국 갈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믿고 특별 사면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고백만 하세요. 주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내가 네 모든 죄를 사하노라! 너는 지금부터 내 자녀라!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
우리는 증인이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증인으로서의 사도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39-41)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42-43)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채택 된 특별한 사람임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39) 그는 유대인에게 보내진 증인입니다. 유대인의 땅, 예루살렘이 그의 주요 활동 무대입니다. 그가 증언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증인은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약 시대 재판법에 보면 증인은 최소한 두 세 사람으로 하라고 합니다. 증인의 최고 자격은 현장 목격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사건의 현장 목격자를 미리 택하셨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41)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같이 식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본 것을 증언하라고 함께 하신 것입니다.
전도는 증언입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kai; parhvggeilen hJmi'n khruvxai tw'/ law'/ ) “증거하게 하셨고...증거하되”(diamartuvrasqai...marturou'sin (marturevw)) 오늘 우리는 증언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42--43) 사도를 증인으로 뽑으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증인으로 뽑으셨습니다.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이 보내셔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 앞에서 증언하시면 됩니다. 내가 만난 주님을 증언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
화평의 복음
성흥모 목사 / 행 10장 34~43절
오늘 오후 찬양예배는 글로리아 찬양대의 헌신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찬송이라는 것은 내가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들이 부르는 것을 잘 경청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찬양대의 찬양은 우리의 찬송과 신앙을 점검하는일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찬송생활을 보면 주로 예배드릴 때에만 부르고 일주일 내내 찬송가를 덮어두는 것을 봅니다. 찬송부르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모든 사람이 힘써 불러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찬송 부르실 때에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들으시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찬송이라고 하면 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부르는 성가들도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신다고 하시면서 성도들이 서로 화답하는 찬송을 기쁘시게 듣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찬송을 부르실 때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기쁘시게 들으라고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찬송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고 배워야 좋은 신앙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신앙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좋습니다만, 그러나 새로운 찬송을 배우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은 더욱 새로워지고 신선해지고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하늘나라에 가면 다 따라 부르고 쉽게 배울 수 있는 찬송을 부르겠지만, 언제나 새 노래일 것입니다. 영원히 똑 같은 노래만 몇 곡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찬송에 관한 많은 성경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대개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장이 아주 큰소리로 호령할 것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잠자고 있는 죽은 영혼을 깨우는데 큰 소리로 호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하늘이 떠나가라고 큰소리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송할 때에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다. 가정에서 찬송을 부른다고 하면 방음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어떻게 크게 부를 것입니까? 대부분의 성경은 큰 소리로 힘을 다하여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시끄러운 소음이나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음성을 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정말 장엄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계19:6에는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며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백부장의 회심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은 1-7장까지 예루살렘 중심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8-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 전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28장까지는 땅끝까지 이르는 해외선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행 1: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의 요절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까지는 잘 나가고 있는데, 사도들 중에서도 해외 선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아서 해외로 눈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국내에 있으면서 해외 선교에 대한 비전을 주시려고 고넬료라는 이방인, 유대에 파견된 로마의 군인 백부장이 믿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이 고넬료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과도기적인 사건으로 분명히 유대 사마리아 지역의 전도이면서도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믿은 곳은 가이사랴 유대의 총독부가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이방인이요, 로마 사람입니다.
우리는 해외 나가서 외국 현지인들에게 복음증거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 근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해외에 나가서 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안에 외국인 근로자 선교회라는 것이 있어 조선족, 몽골,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네팔 여러 나라 사람들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모슬램 교도들도 있어 그들이 돌아가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게 되니 얼마나 큰 수확인 것입니까? 우리가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따뜻하게 영접하고 보살피고 예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가서 일으킬 사건은 정말 기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진실한 사람이 예수 믿으므로 로마의 군인들이 가장 먼저 예수 믿게 되었으며,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는데 가장 수훈을 세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 고넬료가 이방인이며, 로마의 군인이요, 중견 장교이면서 피정복민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시민으로, 중견 장교요, 총독부에서 근무하는 백부장이 유대교를 신봉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봅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만이 가장 우월한 존재이며, 국가, 정치제도, 사회 제도, 종교에 있어서 가장 우월하다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종교에 있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로마인이면서 유대의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성인들 중에는 법률이나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제일 우위에 서 있고, 철학과 정신 문명에 있어서는 그리스가 우위라고 보았고, 종교적으로는 히브리 종교가 우위라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 사회는 유일신앙이 없고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였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물론 경건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로마의 군인으로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받들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온 집으로 더불어 믿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신앙이라고 할 것입니다.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던 사람입니다. 전투하는 군인은 그져 싸우고 죽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는 피 정복민 이스라엘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아니하는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 시간을 잘 지키면서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였을 것 같습니까? 출세를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입니까? 이방 땅에서 무사히 고국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입니까?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하였을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모르는 것이 많으니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요, 세속적인 욕망을 떠나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청하게 하셨으며, 하나님을 말씀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음의 핵심적인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복음의 진수라고도 하고,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도 하고, 베드로의 복음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베드로가 믿고 전파하던 복음을 요약하여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몇 차례 나오고 있습니다. 행전2장에서 이스라엘 군중 수천명 앞에서 설교하였는데 그 날에 3천명이 믿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에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설교는 좋은 분위기와 사전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가운데 설교해야만 능력도 나타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찬송도 중요합니다. 기도도 중요합니다. 찬양대의 찬양도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가정은 정말 준비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행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는 정말 귀한 준비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는 말만큼 좋은 말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여도 마귀의 말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번 일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했지만,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어찌 속된 것을 잡아먹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속단하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잘 믿을 사람이라,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민족이나 어디 사람은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36-3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행10:36-38)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회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평화를 말합니다. 평강, 화해를 말합니다. 두 사람과 두 민족과의 관계에서 소원해지고, 악화된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는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 화평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나사렛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성별 하시고 기름 부으신 유일한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메시아가 되시는 것을 증거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바로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그 분이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화평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39절입니다. (행10: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은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고 신명기21:2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은 저주받아 나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사 율법(律法)의 저주(詛 呪)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죽음이었습니다. 율법이란 죄를 죄 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은 곧 십자가의 복음이요, 하나님이 아들을 대신하여 죽이면서 이루신 화평의 복음인 것입니다.
3. 화평의 복음은 부활의 복음입니다.
40-41절의 말씀입니다. (행10:40-41)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한 빈무덤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상징은 십자가요, 빈 무덤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소망이요, 구원의 확증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룩하신 것입니다.
4. 화평의 복음은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행10:42-43)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죄사함을 받는 복음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름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씀하고 확정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시는 역사입니다.
(엡2:13-17)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언제 주님 앞에 서든지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는 신앙이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세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던 사람이었으나 우리 예수 그리스드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일생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의 황제를 주라고 고백하던 때에 아니라고 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확신에서 나오는 기쁨과 평화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구원의 감격과 화신을 가지고 찬송하시고 기도하시고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모델하우스
박정근 목사 / 행 10장 34~43절
요즘 우리나라에는 많은 외래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외래어란 외국말이지만 우리말이 되어서 우리가 늘 쓰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외래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에 가서 외래어의 원어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오라이, 오라이' '빠꾸, 빠꾸' 이런 말들의 뜻을 처음에 잘 몰랐어요. 뜻은 알죠. '오라이' 하면 오라는 말이고 '가라이' 그러면 가란 말이죠. 오라이는 'All right!' 괜찮다는 말이고, '빠꾸'는 'back'입니다. 뒤로 가라는 말이죠. 일본인들이 발음이 안 되니까 이렇게 사용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는 외래어의 홍수입니다. 그러나 이북은 그렇지 않은데 가능하면 한국말을 쓰려고 합니다. 통일이 되면 참 걱정되는 것이 많습니다. 축구시합 하나만 봐도 우리가 '코너킥'이라고 하는 것을 그 사람들은 '모서리차기'라고 합니다. '드로잉'하면 '머리 위로 던지기' 또 '골키퍼'는 '문지기'라고 합니다.
요사이 우리가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모델하우스'입니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 혹은 아파트를 사지 않는다고 해도 구경삼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델하우스에 한두 번은 들어가 보았을 겁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모델하우스라는 것이 없었어요. 아파트를 사려고 가면 기껏해야 설계도와 조감도 정도를 그려놓았는데, 이는 당신이 살 집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라고 그림으로 그려놓은 거예요. 그 위에 조금 더 발전해서 아파트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형을 만들었어요. 견본으로 성냥갑만 하게, 또는 박스만 하게 만들어서 ‘당신이 살 집의 방이 이렇게 생겼습니다’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예 그럴 필요 없이 모델하우스를 다 지어 놓았습니다. 이곳에 가보면 자신이 살 미래의 집을 100% 현실로 볼 수 있어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방, 마루, 부엌, 화장실 등등... 자기가 살 집을 그대로 100% 지어 놓은 것이 모델하우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사기 전에 모델하우스에 가보면 환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어요.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예수 믿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는데 어떻게 해야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꽤 오래 다니고서도 신앙생활에 대한 그림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저는 그러한 분들을 위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신앙의 모델하우스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기 원합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분명한 그림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소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설명할 때 애매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모델하우스를 보여주듯이 너희들이 이렇게, 이런 태도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라고 두 사람의 간증을 통해 그것을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한단 말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내 신앙이 성숙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후, 이 땅에서 신앙생활의 최후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의무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오늘 본문은 망설이지 않고 그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모델하우스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천국의 신앙생활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본문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누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는 자입니다. 같은 질문으로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복음을 듣는다고 모두 구원받을까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자동적으로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구원을 갈망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을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의로 배부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너희가 먼저 의에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열망하는 자들만이 그 하나님의 의로 배부를 수 있느니라!' 아무리 귀한 복음을 전해도 갈망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마음속에 듣고 싶어하는 영혼의 갈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돼지와 진주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 왜? 당연하잖아요? 그 당시에 있었던 가장 귀한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닌 진주였어요. 돼지는 보석을 모릅니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그것을 던져 줘봐야 허비합니다. 허비할 뿐만 아니라 해를 받는데, 음식인가보다 하고 우지직 씹는 순간 돼지의 이빨이 다 나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영혼의 갈망이 없는 자에게 복음을 주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겁니다. 돼지에게 진주가 소용없듯이, 아니 오히려 해롭듯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전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이 설교와 예배와 말씀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을 통해서 이것이 오히려 해가 됨을 종종 발견합니다. 차라리 안 들었으면... 어느 날 갈망이 생길 때 그 말씀을 들으면 받아들일 터인데 이미 교회에 나온 지 2년, 5년, 10년이 되어 복음을 머리로 다 압니다. 지식으로 다 압니다. 그러나 영혼의 갈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음에 들으면 다 아는 얘기라고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그 영혼에 있는 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영위할 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가 너무나 귀했기 때문에 또 다른 진주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느 진주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주를 수집하기 원했어요. 오직 그의 인생의 목표는 아름다운 진주를 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팔도를 다 헤맵니다. 아니, 팔도로 되지 않아 중국과 러시아 등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어디에 가면 내 마음에 합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진주를 만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며 돌아다닙니다. 수년이 지났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어느 날 그는 한 촌구석에 갔다가 자기가 평생 그토록 원하던 진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그 진주 상인이 어떻게 하였겠느냐? 저가 곧바로 가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반드시 구입하지 않겠느냐? 왜 그가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진주를 구입할까요? 이유는 그가 진주에 대한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진주를 평생동안 갈망해 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누가 참으로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저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과 매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그저 먼 거리에서 믿는 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해 보셨습니까? 저는 지난 주간에 침례신학대학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수요일에 하루종일 가르치고 설교하였기에 목요일은 피곤했어요. 설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랜만에 처갓집에 갔습니다. 장인 장모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새벽 1시가 되어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데 누워있으나 잠이 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피곤했지만 일어나 무릎을 꿇었어요. 제가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며 "주여,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제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원하십니까?" 무릎을 꿇고 10분, 20분 기다리는 동안 그날 하나님이 제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요. 어느새 눈을 뜨니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그릇에 축복을 가득 담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가 그 축복을 받습니까? 은혜를 갈망하는 자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물이 귀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 번 예를 들어보세요.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먹기 싫은 물을 한 3분간 꿀떡꿀떡 마셔 가지고 배가 똥똥하게 나왔어요. 물을 실컷 먹은 사람에게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물드시죠!"라고 하면 당장에 뺨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너무나 목이 말라 정말 물이 없어 고민하는 자에게 반잔의 물이라도 갖다 줄 때 그 물이 얼마나 달고 귀하겠습니까? 여기에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대하십니다. 차별 없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말씀 속에서 자라나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5년, 10년, 15년을 교회에 나오는데 신앙의 성장이 없을까요? 하나님이 차별했습니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달라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갈망에 따라 우리 신앙이 달라짐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고넬료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어요. 어떤 면에서입니까?
그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주셨어요. 흰옷을 입은 사자를 보내서 고넬료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하나님의 사자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자만 보내서 부족하니까 베드로를 보내주셨어요. 그 당시 하나님이 들어 쓰셨던 성령 충만했던 유일한 사도 베드로, 그를 직접 보내주셨어요.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와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특별하게 보내주셨나요? 그 이유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1절 /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기억하셨으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영혼 속에 있는 갈망을 보셨다는 겁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어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였어요. 처음에 그저 로마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서 그 나라에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하나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하나님, 그것을 듣는 순간 고넬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노심초사합니다. 내 재산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가능할까? 그래서 그는 구제사업을 해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무릎을 꿇고 기도도 해보았는데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고넬료는 시간을 정해놓고 했습니다. 그 날도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고넬료야!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갈망해야 합니다. 4절을 보세요. 똑같은 말씀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4절 /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달하여!' 그가 애쓰고 힘쓸 때에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하늘에서 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고넬료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베드로와 천사까지 보내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나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목마름이 고넬료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아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던 모든 자들에게 이와 똑같은 영혼의 갈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를 아시나요?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모든 사람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자 그도 너무나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먼발치에서도 얼마나 예수님을 갈망했던지 그는 어른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 위에서 그저 예수님을 한 번 보기 원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예수님!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서 그들에게만 관심을 줄 것 같았던 예수님! 그런데 이분이 위를 쳐다보지 않고도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와 함께 너의 집에 유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성을 지나갑니다. 앞 못 보는 소경이 예수님의 오심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너무나 갈망해서 예수님이 지나갈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소경인 주제에 웬 소리를 내느냐! 조용히 하라!" 이에 본문은 뭐라고 합니까? 그가 더욱 높이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멈춰 서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멈춰 서시는 하나님! 우리의 갈망을 보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 안에 왜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까? 왜 교회를 그토록 오래 다니고도 참 구원받은 확신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영혼의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십니까?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이 말씀에 따라 주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을 열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갈망이 불일듯 일어날 때 오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준에까지 성장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을 날마다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을 날마다 배워가야 합니다. 본문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34절부터 봅시다.
34절 .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누가 깨달았어요? 베드로입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누가 깨달았습니까? 베드로가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깨달았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3년 간 동고동락했습니다. 비록 실수는 많이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조용히 베드로를 따로 만나시고 어린양을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수제자가 되었어요. 또 오순절 날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어요. 성령 충만을 자신이 받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안수할 때도 성령을 주었던 능력의 사람 베드로! 그는 이제 하나님을 알만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넬료에게 전도하는 그 순간 고넬료의 대답을 몇 마디 듣고서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해 깨달았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아 가는 거예요. 누가 참으로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날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깨달아 지는 사람입니다.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5년을 믿고 10년을 믿었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5년 전에 알았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저 그런 하나님, 멀리 계시는 하나님, 한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하나님, 내 삶에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 그때 그 시절에만 잠깐 있었던 하나님... 하나님을 배워감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그 숱한 하나님을 경험하고서도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웠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34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편파적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또 35절에서 베드로는 누구든 출신과 민족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받으심을 그제야 깨달았어요.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알지만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너무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아니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왜요? 베드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배웠어요. 교회의 주일학교에 갔더니 교사들이 우리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회당에서 자랍니다. 온갖 사람들이 온갖 사회에서 그 민족 가운데, 가족 가운데 열이면 열이 베드로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나님은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진리였고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믿지 않는 고넬료의 얘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간단한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는 자기의 모든 고집과 철학과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입으로만 예수를 믿지 내 생각은 그대로예요. 제가 장례를 집도해 봅니다. 무덤을 파면서 작대기를 들고 와서 동쪽이 맞느냐, 서쪽이 맞느냐, 이쪽으로 조금 옮겨라, 기울어졌다, 들어라... 여러분, 성경 어디에 관을 무슨 방향으로 세우라고 얘기합니까? 베옷을 꼭 입으라고 얘기합니까?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는 베옷을 입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 낭비 아닙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것 사주고 다른 좋은 곳에 쓰고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떠났으면 좋겠어요. 이 관습 하나 바꾸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5년 전에 속 좁았던 사람이 10년을 믿고도 속이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5년 전에 화를 펄펄 내던 사람이 10년 예수 믿고도 그 성격 그대로입니다. 말이 그대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자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계속 날마다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떻게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날마다 하나님에 대해 배워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지식이 있으나 모두가 다 죽이는 지식이에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리는 한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인 줄 믿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 알기를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음식과 기호와 취미, 모든 것을 다 알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알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알아 가는 놀라운 신앙이 우리 교회에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3. 하나님의 명령을 행해야 한다
42절 /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우리를 명하사' 누가 명했어요? 예수님이 명하셨어요. 예수님이 명하셨다고 얘기하면 될텐데 베드로는 어떤 예수가 명했는가를 38절부터 41절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시고 바로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 그러나 사망에 잠기지 않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친히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명령했나요?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어떻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한마디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이것만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증거해야 합니까? 여기에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거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에 의해 역사가 이루어져 감을 깨닫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자 B.C.가 지나가고 A.D.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A.D.가 언제 끝납니까? A.D. 후에는 무엇이 오는지 제가 예언해 볼까요? M.D.가 옵니다. M.D.는 '밀레니얼 피어리어드', 즉 천년왕국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 A.D.가 언제 끝나고 M.D.가 언제 시작되는가? 성경은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약한 모습,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림 때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다시 언젠가 주님이 오실 터인데 그때 이 지구의 역사는 끝날 것임을. 그때 오시는 주님은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종의 모습이 더 이상 아닙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를 심판할 주로 오십니다. 그날 오셔서 예수님이 하실 일은 무엇인가? 다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심판하십니다. 백보좌 위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지옥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믿는 자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고 행한 삶에 따라 당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왜? 자신들도 믿지 않으니까요. "목사님, 21세기가 눈앞에 와 있는데 아직도 지옥 얘기합니까?" 많은 신학자들도 지옥을 믿지 않는 이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경험을 통해서 그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부자가 이 땅에서는 호의호식했습니다. 그는 전도했는데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어서 간 곳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어느 정도입니까? 나사로가 저기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 물 한 방울만 손가락에 찍어서 내 혀를 적시게 해 주세요." 우리는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한마디로 설명해 주셨어요.
내가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는 비교되지 않을 고통이 계속 되어지는 곳, 그곳이 지옥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그곳에 보내기 위해서 이제 예수님이 오십니다. 눈앞에 와 계십니다. 심판의 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이 부자가 자기의 청이 거절당하자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 내 형제들을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부자의 이 두 가지 요청이 다 거절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은 두 번의 기회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전파하십시오. 이것을 우리는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까 또 한 가지 증거해야 할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42, 43절을 보세요.
42-43절 /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목사님, 기독교는 너무 폐쇄적이지 않습니까? 절에 가면 교회에 가도 된다는데 왜 교회에 가면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 얻고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합니까?" 우리가 폐쇄적인 겁니까? 아니요. 우리는 정답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석가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공자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얘기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고요.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어요. 왜? 우리의 의로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십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한 사람 만났습니다. 전도를 하는데 "목사님, 제가 이때까지 살면서 남의 돈 떼어먹은 것 없고 고아원에 얼마를 희사했고..." 부자였던 그는 자기의 한 행적을 쭉 얘기했어요. "내가 이만하면 하나님도 저를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저는 분명히 천국 갈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교회 안 나가고 예수 안 믿어도요." 제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 예를 들어서 얘기해 주었어요. "선생님, 예전에 촛불 써 보셨습니까?" "써 봤지요. 할아버지가 호롱불을 켜다가 잔치 때 가끔 촛불을 켜면 얼마나 밝은지요." "예, 밝지요. 호롱불에 비해서 촛불은 그렇게 밝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촛불을 가지고 환한 대낮에 밖에 나가보신 적 있나요? 그 촛불이 얼마나 밝습디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평생을 착하게 살아도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니까 의롭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어요. 여기서 더러운 옷이 무엇인가 하면 옛날에 여자가 경수를 할 때 쓰던 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러한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거룩하게 올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 의는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으신다면 어떻게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심판의 주가 곧 오시는데요.
우리 인간은 모두, 특히 부모는 자기 인생이 저주스러우면 자식이 그 뒤를 물려받기를 정말 원치 않습니다. 저 강원도 황주에 가면 막장 인생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광부촌이지요. 하다가 하다가 안 된 사람들이 막판으로 거기 가서 사는데 시설이 너무 열악합니다. 그들은 간을 꺼내고 규폐증에 걸려서 죽어갑니다. 그 황주에 있는 한 광부의 아들, 초등학생이 쓴 시가 신문에 났는데 제가 읽어보고 너무 눈시울이 뜨거웠어요.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고 하신다
막장 인생을 사는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가 그 아들의 시를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보니까 아들만은 자신의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심판의 주가 다시 오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지옥이 정말 끔찍한 곳임을 믿으십니까?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죄 사함을 얻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게 함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사실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지난 수년간의 당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성숙하셨습니까? 당신은 정말 구원받았습니까? 주님이 오늘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평화의 복음을 전하자
김 조 목사 / 행 10장 34~48절
한 평생을 사는 인생길이 때로는 태산을 넘는 듯한 고통이 오기도 하고 사막과 같은 황량한 벌판에 외로운 인생길일 때도 있고 앞길이 꽉 막혀버린 깜깜한 밤 같은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속에서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심령과 가정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 가정에 초청받아 온 베드로 사도의 설교와(34-43)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찬양하므로 이방인들에게 성령강림으로 전 세계 복음화에 불이 붙게 되었고 기독교 선교에 핵을 걷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복음의 핵심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36)고 했으니 복음의 핵심이 화평이란 것인데 여기에 화평이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 화평도 우리가 얼마나 갈구합니까? 전쟁을 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이 평화는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되어 단절되어 버렸기에 죽음이 왕노릇하고 고통과 괴로움이 극심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평화의 길이 복음에 핵심입니다. 이 평화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성도되기 원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전도하러 오셨다고(막1:38) 했습니다. 그러기에 평화의 복음에 대해 깨닫고 새로워지기 위해 몇 가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누구에게든지 주어지는 복음입니다(34-36절).
“입을 열어 가로되”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 설교란 뜻이지만 성경에 중대선언 때에 쓰여졌습니다.(마5:2,행8:25) 따라서 오늘도 이방인 구원에 선포이기에 베드로 사도의 설교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권위를 이어 받은 사도이기에 이 선언의 권위와 그 장중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하신 외모는 외부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고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사도가 깨닫고 세례까지 베풀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화평의 복음은 흑인, 백인의 인종차별도 없고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이나 학벌의 차이도 없고 부자냐 가난하냐는 권세자냐 피압박자냐하는 빈부귀천에 구별도 없습니다. 더욱이 호남이다 영남이다라는 동서의 차이도 없고 좌파우파도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많이 알고 있기에 이데오로기 싸움으로 남북의 극한대립을 보이겠습니까? 평화의 복음은 누구에게든지라 했습니다. 나하고 다르다고 다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극열한 반대자가 있으면 한번쯤 내 자신 돌아보고 대화와 양보로 살아가면 당장에 큰 열매 없는 것 같아도 결과는 좋게 이루어집니다. 부부사이에도 친구지간에도 그러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언제까지 조그만한 일에 담을 쌓고 비열한 모습으로 실패자 되렵니까? 베트남 전쟁 때 우리나라가 행하였던 것 생각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와 철천지원수 대하듯 하지만 그렇지 않고 맞이하는 모습 보면서 일제치하와 6.25때 일을 용서용납 못하고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대립적 관계를 갖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평화의 복음을 그들에 심어지도록 해야 하며 천국사회의 심각한 양극화의 문제 해결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되어”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되시기를 원합니다.
2. 주체는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36-43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만유란 세계의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한 말로 “모든 사람의 주”(롬10:12)라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촉구한 세례요한 때부터 메시야이신 예수 맞이할 준비를 시킨 것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사 많은 권능과 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셨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는 구약 성경에 예언 성취였으며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동안 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셨기에 평화의 복음의 주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 주셨고(요1:12)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이름은 예수 외에는 없다(행4:12) 하셨고 또한 예수께서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 우리 중심에 모시고 막혔던 담도 허시고 사람의 해결할 수 없는 질고와 슬픔의 장벽도 무너뜨리고(사53:4) 영육간의 문제 해결하고 자신도 가정도 이 나라와 민족이 오직 예수로 새롭게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약2:7) 산믿음 갖고 산을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그렇게 되는 역사 있기를 원합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44-48절).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이에게 내려오시니” 했으니 안수나 세례 통한 것이 아니라 말씀 듣다가 성령 임하였으니 오순절 성령 충만 했던 것과 같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자 방언도 하고 하나님 높이는 찬양이 있었으니 베드로 사도도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선교를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았기에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이렇게 화평의 복음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니 사단, 세상, 나를 이기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겠다 약속하셨고(요16:7)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19) 하셨으니 주님은 지금도 주의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모든 사람들이 말씀 듣다가 성령 받은 것 같이 말씀을 마음으로 아멘하고 받고 성령 충만하여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평화의 복음은 주체가 예수그리스도이시기에 사람의 어떤 조건을 보시지 아니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인종, 학벌, 지역주의, 사상의 구별이 없이 평화의 복음을 주어지기에 이 복음 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된 자신, 가정, 이 나라와 민족을 이루는 자요 한국사회 양극화 문제 우리가 해결하도록 평화의 복음을 전합시다. 주체가 오직 예수입니다. 사람의 수단, 방법으로 불가능하나 “오직 예수” 깃발 높이 들고 나아갈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보여줄 수 있게 되어 진정한 평화를 이 땅에서 누리도록 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행 10장 34~48절 / 민경설목사
얼마 전에 현대 아산 회장인 정몽헌씨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대표 회사의 후계자인 그 분이 자살한 사건은 광복절 주간을 맞이하면서, 또 지금 경제, 사회, 정치 어느 한 분야도 어렵지 않은 이 시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 그러했겠지만 그의 죽음을 영적으로 분석한다면 그 분은 죽음의 영을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을 살리는 영도 있지만 죽이는 영도 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어둠의 영을 이길만한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션스쿨인 연세대학교 재학시절에 라도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했다면 이렇게는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은 정치, 경제가 어렵다해서 노숙자가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죽음의 영에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어둠의 영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영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살리는 영인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해야 합니다. (요10:9-10)"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어둠의 영이 올 때 막아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삶의 의욕을 주고, 소망을 주고, 능력을 주십니다. 헬렌켈러는 삼중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믿음 좋은 설리반 선생님을 만난 후 예일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말문이 열려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죽는다는 사람도 성령이 임하면 살아납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이 신이 임하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임하는 까닭을 알아보겠습니다.
1. 예수 믿으면 죄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행10:43)"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표적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뒤틀린 삶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약점과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을 받는 다는 것은 내 약점과 허물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사함 받은 자는 천국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하여 죄사함 받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2. 예수만이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행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만이 진리이며, 빛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살아날 자가 없습니다. 사탄에 눌린 자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내게도, 세상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둠의 영, 사탄의 영에 눌린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오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10:39-40)"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예수가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을 모든 사람은 알 수 있지만 보여지는 것은 한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을 이기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을 이기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 붙들리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오늘을 이겨야 신앙에 승리자가 됩니다.
4. 예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행10:42)"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심판이 있기에 어려울 수록, 억울할수록 예수를 더욱 잘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이기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가 처해있는 지금의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모두 성령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 받아라
행 10장 36~43절 / 백장흠목사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에게 물었습니다. “사역을 하시면서 제일 어려운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설문지의 대답인즉 “설교”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왜 설교가 어려운지 아십니까? 성도들이 설교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어주어야 설교를 잘하지요. 어느 잡지에 실린 글에 설교를 크게 하면 시끄럽다 하고 소리를 작게 하면 박력이 없고 확신이 없다고 한답니다. 짧게 하면 밑천이 떨어졌다 고 길게 하면 지루하다고 한답니다. 성경을 깊이 들어가서 말하면 어렵다고 하고 쉽게 예화를 들어 말하면 세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답니다. 근엄하게 하면 딱딱하다고 하고 유머를 쓰면서 하면 농담 같다고 한답니다. 웃으면서 하면 무게가 없다고 하고 웃지 않고 무게 있게 하면 부드럽지 못하다고 합니다. 젊은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강단 제일 앞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십니다. 목사님은 설교의 강조부분에 가서는 탁자를 ‘탕’ 하고 칩니다. 강단 위에 놓인 물 컵이 조금씩 움직입니다. 몇 차례 강조하며 강대상을 탕 치는데 물 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어집니다. 할머니 내 그럴 줄 알았어. 할머니는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물컵을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주어야 설교를 잘합니다. 왜 안 들어 줍니까? 신뢰성의 문제입니다. 설교자에 대한 신뢰성이 없습니다. 설교자의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들에게 어떤 설교에 은혜 받습니까? 설문을 해봤답니다. 첫째, 졸리지 않는 설교라고 하였답니다. 이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누가 묻기를 당신이 나가고 있는 목사님의 눈이 어떻게 생겼던가? 질문했더니 그분이 말할 때는 내가 눈을 감고 있었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그분이 눈을 감아서 아직도 목사님의 눈을 본 일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잘하는 설교 둘째, 마음에 느낌이 오는 설교라고 하였답니다. 이는 감동과 결단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리고 셋째, 다음 주일에 또 오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고 했더랍니다. 이것이 부담 없는 설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참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한 설교입니다. 설교의 내용인즉 (1) 예수는 만유의 주가 되신다고 하였습니다. (2) 예수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평하게 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죄인과 즉 피고와 원고 사이에 화목한 관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을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이 있어야 세상을 이깁니다. 승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해관계 없이 교회를 찾아온 이들이 머물고 싶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오면 만족할만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입니다. 그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교회는 만족을 느끼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무엇을 기대하면서 교회생활을 하느냐?
1) 공동체적인 느낌 즉, 한 가족같이 느껴지는 교회랍니다.
현대인들은 외롭습니다. 주변 사람과 마음을 열고 관계를 맺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관심을 받으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2) 소속감을 갖게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소속감을 잃고 살아왔는데 교회에 오니까 한 형제같은 가족의 일원 같은 소속감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3) 안정감입니다.
누구라도 불안한 환경에서 자유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갔더니 시집살이 고달프게 하던 딸이 친정에 온 것 같이 안전함을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4) 영적인 성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처음보다 지난해보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을 느끼기를 기대합니다.
5) 영적인 도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때 만족하고 더욱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6) 영적인 체험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 보았습니다. 성령을 체험합니다. 은사가 임했습니다. 즉,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보았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으면 반대가 있고 핍박이 와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1)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이란 무슨 말입니까? 이는 성령의 충만함과 하늘의 모든 권세 주심을 의미합니다.(눅 10:22)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에 베드로는 이 같은 사실을 기름 부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직능상 모든 자격을 부여하심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실시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면 왕 같은 권세로 살게 됩니다. 제사장 같은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선지자 같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즉, 기름부음의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성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2) 성령으로 기름 부음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움직이는 이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늘 불만이고 문제의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4: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크레토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옆에서 부른다’는 말입니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데 아주 불리하게 재판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름 있는 변호사가 변호합니다. 상황이 뒤집힙니다. 이건 변호사의 덕입니다. 이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파라크레토스입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위로자가 있으면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가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혜사가 계시니 위로와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예전에 아들이 잘못하면 아버지는 매를 듭니다. 회초리로 혼을 내줍니다. 아들은 아프기 보다는 서럽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와 하는 말이 얘야, 아버지가 너에게 매를 든 것은 너를 미워서 그런 게 아니다.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너는 몰라. 이렇게 말하고 자신의 치마폭으로 싸고 안아줍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게 보혜사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에 안정과 평안함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도 성령 충만한 교회는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교회입니다.
신자 분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무엇을 봅니까? 분위기를 봅니다. 영적인 분위기가 좋은지 아닌지 판단이 되어야 정착합니다. 그 하나가 안정감입니다. 교회가 어수선합니다. 여기 저기에 파당이 있고 자기들끼리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그러면 왔던 신자도 빠져나가게 됩니다.
내가 우리 교회를 보면서 처음에 예수 믿기로 하였다면 이 교회에 등록하겠는가? 바꾸어 생각해 보면 됩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교회에 왔는데 서먹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성도들은 서로가 기쁨도 슬픔도 같이 나눕니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느낍니다.
3)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면 능력이 임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병 고치는 능력도 능력입니다. 누가 보아도 죽을 병 같은데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기도하였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에서 치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보다 귀한 능력은 시험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마음에 시험 환경을 통한 사람을 통한 시험이 와도 잘 극복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기름 부음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데 넉넉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능력 중에 강력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보세요.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어머니를 섭섭하게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속으로 다짐을 합니다. 그까짓 자식 없는 것으로 생각하자. 모든 것을 잊고 살자. 그런데 말뿐이지 잊혀집니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또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구원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능력은 믿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주여! 믿습니다. 그런 말로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역사가 말합니다. 일하는 것을 보면 믿음인가? 아닌가? 나타납니다. 길을 걸어 가도 믿음 없는 사람이 가는 방향은 네 곳 밖에 없습니다. 바로 동서남북입니다. 동쪽이 막히면 서쪽으로 가게 됩니다. 북쪽이 막히면 남쪽으로 향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 막혔을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이 전후좌우에서 막히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사방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5방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답니다. 그것이 어디입니까? 하늘입니다. 다 막혀도 우리에게는 하늘이 열려 있답니다. 능력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진정 능력의 사람입니다. 이런 힘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무디(Moody, Dwight Lyman) 1837. 2. 5)에 대하여, 19세기말 유명한 세계적인 부흥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1837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노스필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보스턴 어느 작은 구두 방에서 일하였으며 시카고에 가서는 뛰어난 세일즈맨으로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유명한 능력의 사역자로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된 것은 무엇입니까? 박사학위 아닙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때문이었습니다. 무디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시카고에 사라 쿡(Sarah Cooke)이라는 여전도자였습니다. 모든 자질과 능력이 있는 무디는 설교에 불타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 사라 쿡은 무디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성령의 세례를 받도록 나는 기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무디는 그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고 자신이 성령 세례를 사모하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무디는 밤을 세워가며 마루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성령을 사모하여 성령세례를 간구하였습니다. 어느 날 무디는 뉴욕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월 스트리트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간구하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너무 강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무디는 “이제 그만 그만 오 주여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무디는 설교도 삶도 달라졌습니다. 그가 사역의 성공 비결은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공개된 비밀입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학식도 지식도 약한 터에 기교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타고난 달변가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가슴에 불타는 열정을 가졌다 해도 능력이 없으면 큰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능력 있게 살아갑시다.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1.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붓듯 하셨으며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선을 행한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손을 씻는 것을 신과 접촉하는 신성한 행위로 여기기 때문에 평소 식탁에 앉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깨끗하게 씻습니다. 어느 날 유대인 랍비가 빨리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로 그렇게 서두르고 계십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서두른다고 말합니다. 학생은 스승이 하려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공중목욕탕에 들어가서 자기 몸을 씻기 시작합니다. 학생이 이를 보고 스승에게 물었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선이란 이것입니까?
스승은 말하기를 자신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선한 일이라고 말하더랍니다. 세상이 더럽다고 추악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만 깨끗해도 세상은 깨끗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착한 것 같이 하는데 정작 이기적인 것이 개입되면 선하던가요? 탈렌트 강부자씨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며느리 감을 고르려면 목욕탕에 가보라고 하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대중탕에 가보세요. 천태만상입니다. 탕에 앉아서 떼를 슬슬미는 사람 냉탕에 들어가 다이빙하는 사람 데리고 온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마구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가 들어와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물이 남에게 튀길 가봐 무척 조심합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그 여자 쓸만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여대생이 목욕탕에 들어왔다가 힘들어 때를 미는 할머니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때도 밀어 드리고 나중에 밖에 나와서 시원한 음료도 대접해 드렸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여대생이 할머니의 손자며느리가 되었는데 이게 무슨 행운인지 그 집안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단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성품이 착해서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착한 일을 행하시고”라는 말은 헬라적인 의미로 백성들에게 은인으로 인정받는 군주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애정으로 보살펴주었기에 은인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적대시하고 미워해도 사랑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사랑하고 도와주며 은인이 되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착한 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 착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전도하시는 분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지금 주께서 원하시는 가장 착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2.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마귀의 정체를 아시나요?
1) 마귀는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부하들은 귀신들입니다.
2) 교만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쫓겨난 천사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이 원인입니다. 겸손하면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3) 시험하는 자입니다.
주의 종들을 시험합니다. 철저한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합니다. 감정을 충동시켜서 마음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나게 합니다.
고난이 계속될 때 일이 잘되지 아니합니다. 그때 마귀가 찾아옵니다. 봐라 너 예수 믿어도 고난을 당하지 않니 너는 믿어도 안돼 이런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5) 불순종하게 합니다.
감정 위주로 치우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의지가 강하다는 착각을 하면서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계속하게 합니다.
6) 마귀는 사람들에게 불치의 병을 줍니다.
병명을 모르고 이상하게 계속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이 마귀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 중에 대부분은 치유였습니다. 마귀가 물러가면 건강하게 됩니다. 진정한 치유는 회복입니다. 건강이 회복되는 것이 치유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할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가 기도하면 치유됩니다.
이런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가 유능한 지성인을 무서워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가 오면 마귀는 도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온다고 사전에 연락하지 않습니다. 몰래 왔다가 공격하고 도주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진맥진하여 힘이 다 빠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때 서서히 공격해 들어옵니다. 처음부터 마귀역사를 차단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하였습니다. 마귀에게 속아라. 그것도 아닙니다.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1) 은혜를 사모하고 사모하세요.
2) 뜨겁게 기도하세요. 기도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기다리고 기도하세요. 오늘 당장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행 10장 34~43절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여러분? 요즘은 축구 선수라고 해서 축구만 잘한다고 스타가 되질 않습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스타가 되려면 다른 면까지도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 29일 중국에서 18세 이하 판다컵 국제 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젊은 선수들이 우승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승 후 벌어진 세리머니로 인해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승 트로피에 발을 올려 놓고 찍은 사진이 빌미가 된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트로피에다가 소변을 보는 시늉까지 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성이 극도로 의심되는 장면이 펼쳐진 겁니다.
급기야 중국 측에서는 그 트로피를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한 당사자들을 징계하지 않으면 FIFA에 정식으로 제소하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손흥민 선수를 비롯한 선배들이 축구 이전에 인성이 먼저라는 쓴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저를 주례해 주셨던 고 임택진 목사님께서 후배 신학생도들을 향해서 주신 말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라!”
오늘날 왜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신앙생활한다고 하는데 신앙인 이전에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다시금 온전히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재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목마름이 있는 자입니다.
같은 질문으로 누가 진정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받을까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복된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구원을 갈망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에서 팔복을 가르치시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그런데 이는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의로 배부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너희가 먼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의로 배부를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귀한 복음을 전해도 갈망이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마음속에 듣고 싶어하는 영혼의 갈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돼지와 진주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는 겁니다. 왜입니까? 그 당시에 있었던 가장 귀한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닌 진주였습니다.
그런데 돼지는 보석의 진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그것을 던져줘 봤자 낭비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당합니다. 음식인가 보다 하고 우지직 씹는 순간 돼지의 이빨이 다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영혼의 갈망이 없는 자에게 있어 복음은 이와 같다는 겁니다. 돼지에게 진주가 소용없듯이, 아니 오히려 해롭듯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전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여러분 마음과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이 설교와 예배와 말씀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가 진정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저 복된 말씀을 듣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복된 말씀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 사모하는 자! 하나님 그 분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누가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매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그저 먼 거리에서 믿는 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 갈망하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물이 귀한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를 들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먹기 싫은 물을 꿀꺽 꿀꺽 마셔서 배가 똥똥하게 튀어 나왔다고 합시다.
살겠다고 발버둥 치느라 물을 원 없이 마신 사람에게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시원한 물 한 잔 드실래요?"라고 말한다면 이 놈이 누구 놀리냐고 당장에 귀 싸대기를 한 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너무나 목이 말라 고민하는 자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갖다 주면 그 물이 얼마나 달고 귀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똑같은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더더욱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반면에, 왜 어떤 사람은 5년, 10년, 15년을 교회에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의 성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겁니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달라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갈망에 따라 달라짐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고넬료는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그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 주십니다. 흰옷을 입은 사자를 보내서 고넬료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자만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자만 보내서 부족하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내 주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이 들어 쓰셨던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 그를 직접 보내 주신 겁니다.
이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와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특별하게 보내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기억하셨으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영혼 속에 있는 갈망을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로마의 군인이었기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서 그 나라에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고넬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노심초사합니다. ‘내 재산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가능할까?’
그래서 그는 구제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무릎을 꿇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고넬료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 했습니다.
그 날도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고넬료야!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같이 4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기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방인으로는 최초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로마 복음화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무엇 때문에 고넬료를 기억하셨을까요? 고넬료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을까요? 성경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기도와 구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우리의 구제를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와 구제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기도와 구제!
이것은 고넬료의 경건한 신앙을 드러내는 두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그의 삶 속에 늘 두 개의 창이 열려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창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다른 삶의 창은 이웃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과 이웃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아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던 모든 자들에게 이와 똑같은 갈망이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목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 성을 지나갑니다. 앞 못 보는 한 맹인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을 너무나 갈망해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맹인인 주제에 웬 소리를 내느냐고... 제발 조용히 하라고...’ 이에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더욱 높이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때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멈춰 서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멈춰 서시는 예수님! 우리의 갈망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안에 왜 신앙의 성장이 없을까요? 왜 교회를 그토록 오래 다녔음에도 구원받은 확신이 우리 안에 없을까요?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십니까?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여온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제가 당신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불일듯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34절과 3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러분! 지금 누가 누구에게 전도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지금 고넬료에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누가 깨닫고 있습니까? 전도하는 베드로가 깨닫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 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중에 수제자였습니다.
비록 실수는 많이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조용히 베드로를 따로 만나시고 어린양을 부탁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을 베풀었던 능력의 사람 베드로! 그는 정말이지 하나님을 알 만큼 알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에게 전도하는 순간 고넬료의 대답을 몇 마디 듣고서 그제서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그 분을 계속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날마다 깨달아 알아가야 합니다. 누가 진정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하나님 그 분에 대해서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 사람이 진정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로구나!’ 5년을 믿고 10년을 믿었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5년 전, 10년 전에 알았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저 그런 하나님, 멀리 계시는 하나님, 한 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하나님, 내 삶에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 나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 그때 그 시절에만 잠깐 있었던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이 단절될 때 우리의 신앙 또한 더 이상 자라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퇴보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다시금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웠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34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편파적이 아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또한 35절에서 그는 어느 누구든지 출신과 민족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받아주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알지만 그 당시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거의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왜입니까? 베드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진리였고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믿지 않는 고넬료의 얘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간단한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는 자기의 모든 고집과 철학과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금 알게 되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진정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날마다 주님 전에 나오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더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지식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죽이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리는 한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인 줄로 믿습니다.
호세아 6장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 관련 음식과 기호와 취미, 모든 것을 다 알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날 구원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 알기를 갈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후로는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아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42절 말씀 제가 먼저 읽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명하사' 여러분? 누가 명했습니까? 예수님이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셨다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될 터인데 베드로는 어떤 분이 명했는가를 38절부터 41절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시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바로 그 예수님!
그러나 결코 사망에 매이지 않으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친히 부활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다같이 42절과 4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쓰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증언해야 합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전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왜입니까? 솔직히 자기 자신도 믿지 않으니까 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목사님, 지금이 21세기인데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지옥 얘기를 하십니까?"
급기야 일부 신학자들까지도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천당과 지옥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우리들에게 분명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한 부자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다 죽었습니다. 그는 전도를 받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어서 간 그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생전에 자기 집 문 앞에서 구걸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에 그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만 손가락에 찍어 내 혀를 적셔 주옵소서."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그 지옥을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지옥은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끔찍한 고통이 계속 되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이 부자가 자기 목을 적셔 달라는 청이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제발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내 형제들만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부자의 이 두 가지 요청이 다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는 절대로 다시 선택할 기회가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 믿으면 그 누구든지 구원받아 천국에 가지만, 예수 믿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또 한 가지 증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43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을 수 있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들 하면서 기독교는 너무나 폐쇄적이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다른 신을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진정 폐쇄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누가 뭐라 해도 진리인 것입니다.
석가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호메트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신이 아닙니다. 성인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이 기억한 고넬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았던 것처럼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이대성목사 / 행 10:34-43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여러분! 이번 한 주간은 제 자신이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 다니엘 기도회에 유튜브를 통해 참여하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현실, 하드캐리 해볼게!’라는 최영환 대표의 간증이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 중에 연예인들이 스캔들이 났을 때 연예인 중에 제일 먼저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는 분이 있는데 바로 그 분은 영화배우 안성기씨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안성기씨의 말 만큼은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랍니다.
그 분의 커피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그 커피를 꼭 사서 마셔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연예인도 스타가 되기 이 전에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인성이 좋지 못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우선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저를 주례해 주셨던 고 임택진 목사님께서 후배 신학생도들을 향해서 주신 말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목사들 중에 사람이 되지 못한 목사들이 참 많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
오늘날 왜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이전에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기억하셨던 고넬료의 신앙생활을 온전히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한 번 재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꼬옥 필요한 것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목마름이 있는 자입니다.
같은 질문으로 누가 진정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받을까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복된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구원을 갈망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에서 팔복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의로 배부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너희가 먼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의로 배부를 수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귀한 복음을 전해도 갈망이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마음속에 듣고 싶어하는 영혼의 갈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돼지와 진주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는 겁니다. 왜입니까? 그 당시에 있었던 가장 귀한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닌 진주였습니다.
그런데 돼지는 보석의 진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그것을 던져줘 봤자 낭비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당합니다.
음식인가 보다 하고 우지직 씹는 순간 돼지의 이빨이 다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영혼의 갈망이 없는 자에게 있어 복음은 이와 같다는 겁니다. 돼지에게 진주가 소용없듯이, 아니 오히려 해롭듯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전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여러분 마음과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이 설교와 예배와 말씀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가 진정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저 복된 말씀을 듣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복된 말씀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 사모하는 자! 하나님 그 분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누가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매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그저 먼 거리에서 믿는 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 갈망하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물이 귀한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를 들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먹기 싫은 물을 꿀꺽 꿀꺽 마셔서 배가 똥똥하게 튀어 나왔다고 합시다.
살겠다고 발버둥 치느라 물을 원 없이 마신 사람에게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시원한 물 한 잔 드실래요?"라고 말한다면 이 놈이 누구 놀리냐고 당장에 귀 싸대기를 한 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너무나 목이 말라 고민하는 자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갖다 주면 그 물이 얼마나 달고 귀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똑같은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더더욱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반면에, 왜 어떤 사람은 5년, 10년, 15년을 교회에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의 성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겁니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달라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갈망에 따라 달라짐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고넬료는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그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 주십니다. 흰옷을 입은 사자를 보내서 고넬료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자만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자만 보내서 부족하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내 주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이 들어 쓰셨던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 그를 직접 보내 주신 겁니다.
이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와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특별하게 보내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기억하셨으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영혼 속에 있는 갈망을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로마의 군인이었기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그 나라에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고넬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노심초사합니다. ‘내 재산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가능할까?’
그래서 그는 구제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무릎을 꿇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고넬료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 했습니다.
그 날도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고넬료야!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같이 4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기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알아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방인으로는 최초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로마 복음화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무엇 때문에 고넬료를 기억하셨을까요? 고넬료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을까요? 성경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기도와 구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우리의 구제를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와 구제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기도와 구제!’ 이것은 고넬료의 경건한 신앙을 드러내는 두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그의 삶 속에 늘 두 개의 창이 열려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창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다른 삶의 창은 이웃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과 이웃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아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던 모든 자들에게 이와 똑같은 갈망이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목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 성을 지나갑니다. 앞 못 보는 한 맹인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을 너무나 갈망해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맹인인 주제에 웬 소리를 내느냐고... 제발 조용히 하라고...’ 이에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더욱 높이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때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멈춰 서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멈춰 서시는 예수님! 우리의 갈망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안에 왜 신앙의 성장이 없을까요? 왜 교회를 그토록 오래 다녔음에도 구원받은 확신이 우리 안에 없을까요?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십니까?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제가 당신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불일듯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34절과 3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러분! 지금 누가 누구에게 전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누가 깨닫고 있습니까? 전도하는 베드로가 깨닫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 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중에 수제자였습니다.
비록 실수는 많이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조용히 베드로를 따로 만나시고 어린양을 부탁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을 베풀었던 능력의 사람 베드로! 그는 정말이지 하나님을 알 만큼 알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에게 전도하는 순간 고넬료의 대답을 몇 마디 듣고서 그제서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그 분을 계속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날마다 깨달아 알아가야 합니다. 누가 진정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하나님 그 분에 대해서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 사람이 진정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로구나!’ 5년을 믿고 10년을 믿었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5년 전, 10년 전에 알았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저 그런 하나님, 멀리 계시는 하나님, 한 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하나님, 내 삶에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 나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 그때 그 시절에만 잠깐 있었던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이 단절될 때 우리의 신앙 또한 더 이상 자라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퇴보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다시금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웠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34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편파적이 아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또한 35절에서 그는 어느 누구든지 출신과 민족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받아주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알지만 그 당시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거의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왜입니까? 베드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진리였고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믿지 않는 고넬료의 얘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간단한 계시를 통해서 베드로는 자기의 모든 고집과 철학과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금 알게 되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진정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날마다 주님 전에 나오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더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지식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죽이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리는 한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인 줄로 믿습니다. 호세아 6장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 관련 음식과 기호와 취미, 모든 것을 다 알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날 구원하신 하나님 그 분 알기를 갈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후로는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아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42절 말씀 제가 먼저 읽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명하사' 여러분! 누가 명령했습니까? 예수님이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했다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될 터인데 베드로는 어떤 분이 명령했는지 38절부터 41절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시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바로 그 예수님!
그러나 결코 사망에 매이지 않으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친히 부활하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다같이 42절과 4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쓰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증언해야 합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전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왜입니까? 솔직히 자기 자신도 믿지 않으니까 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목사님, 지금이 21세기인데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지옥 얘기를 하십니까?"
급기야 일부 신학자들까지도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천당과 지옥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우리들에게 분명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한 부자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다 죽었습니다. 그는 전도를 받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어서 간 그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생전에 자기 집 문 앞에서 구걸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에 그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만 손가락에 찍어 내 혀를 적셔 주옵소서."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그 지옥을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지옥은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끔찍한 고통이 계속 되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이 부자가 자기의 목을 적셔 달라는 청이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제발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내 형제들만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부자의 이 두 가지 요청이 다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는 절대로 다시 선택할 기회가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 믿으면 그 누구든지 구원받아 천국에 가지만, 예수 믿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또 한 가지 증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43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을 수 있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들 하면서 기독교는 너무나 폐쇄적이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다른 신을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진정 폐쇄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누가 뭐라 해도 진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석가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호메트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신이 아닙니다. 성인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불일듯 일어나서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힘차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던 성숙한 신앙인 고넬료처럼 늘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씀으로 주께 반드시 기억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광스러운 부활 영광스러운 승리
한문석목사 / 행 10:34-43
오늘 부활절 아침에 부활의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마다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절망의 심연(深淵)에 빠져들어 마치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가족의 죽음을 겪으며 피울음을 삼키고 계시는 이웃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죽음과의 전쟁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육신을 통해 시작되었고, 우리를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서 건져내려는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마침내 그 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완결시킨 쾌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죽음을 대표해 나선 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돌로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워 죽음이 무덤을 열고 부활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죽음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성육신 하실 때, 남자를 모르는 어머니의 동정을 손상시키지 않으셨던 것처럼, 전혀 무덤의 봉인을 손상하지 않은 채, 마치 신방을 열고 나오는 신랑처럼 화려하고 찬란하게 부활하셨습니다. 지난한 사순시기와 고난주간을 걸어오며 어떤 마음으로 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셨습니까? 만약 우리가 간절하게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 부활절이 그리 설렐 것도 없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농부가 봄을 기다리며 땅에 씨앗을 심듯이, 우리는 부활을 기다리며 내면 가득 말씀과 기도의 씨앗을 심는 것이고, 농부가 씨앗이 심겨진 곳에 부지런히 두엄을 주고 물을 주듯이, 우리 역시 내면의 성소에서 말씀이 잘 자라도록 성령님을 초대해 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행위 전체가 기다림이었고, 설렘이었고, 이 기다림이 있었기에 부활절은 우리에게 축제일 수 있겠습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시 118:23, 24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우리 눈에 기이한 바를 보며 부활절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를 찬찬히 묵상하노라면 하나의 독특한 전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인들과 관련한 것인데, 본문에서 여인들은 열두 제자와는 다르게 별도의 주장이나 행동을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질적으로 사뭇 다른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질적으로 다른 흐름은 특히 주님의 고난과 부활 사건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이 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달아나버렸을 때 '여인들'은 밤새워 무덤을 지켰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쁜 소식도 예수님을 측근에서 따랐던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에게 먼저 전해졌고, 여인들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으며, 제자들은 여인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좀 더 찬찬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 마 28:1
무덤으로 두 여인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없는 새벽에 시체를 보려 무덤을 향해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다가갔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보게 됩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 마 28:2-4
성 아타나시오스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무덤에 오랜 기간 안치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입증되는 그 만큼만 무덤에 머무셨습니다. 이후로 마태가 전해주는 예수님 부재(不在)의 무덤 속 상황은 이렇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있습니다. 그 모습은 번개처럼 빛났고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그 광경 앞에서 겁에 질려 떨다가 그만 다 기절하고 맙니다. 여인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마 28:5, 6
비잔틴 성화 작가가 1546년에 그린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라는 제목의 성화가 있습니다. 현재는 크레테의 테오파니스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아주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돌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활짝 펴든 커다란 두 날개는 뒤에 있는 산 정상 위로 치솟아 있습니다. 두 날개의 이런 모습은 천사가 방금 하늘에서 도착했음을 보여주고, 날개의 붉은 색은 천사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그의 한 손에는 하늘의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두운 동굴의 석관을 가리키며, 여인들을 향해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라고 말합니다. 석관 안에는 몸을 싸맸던 수의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화를 보면서 지금 여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즉 빈 무덤과 부활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빈 무덤이 무덤 앞에 선 여인들의 충격과 좌절감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는 천사의 증언은 충격과 좌절에 희망을 일깨워주는 생명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전에 말씀하신 '갈릴리 재회의 약속'을 여인들에게 환기시켜 줍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 마 28:7
그리고 마태는 이 순간 여인들의 내면에 실재했던 두 마음을 살며시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 마 28:8
'무서움과 큰 기쁨' 그렇습니다. 지금 여인들의 마음에는 마치 빈 무덤의 쓸쓸함과 부활의 경이로움이 한 자리에서 교차하고 있었듯이 '무서움과 큰 기쁨'이 한 가슴속에서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빈 무덤의 역설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 무덤에 부재(不在)하심으로써 역설로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내셨습니다. 텅 빈 무덤, 그 '현장 부재의 알리바이'를 통해 예수님은 무덤이 당신의 최후 종착지가 아니라, 부활이 당신과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임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부활의 첫 목격자인 여인들의 마음은 아직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마 28:9
마침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여인들의 그늘 없는 기쁨을 봅니다. 반면 이후에 전개되는 부활에 관한 기사를 보면 예루살렘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집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인들을 매수해서 많은 돈을 건네주며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라고 증언하라며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기에 급급합니다(마 28:1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부활의 소식은 유대인 사회에 두루 퍼져나갔습니다(마 28:15).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부활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갈릴리의 산에 이릅니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 17)라고 마태는 전해줍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부활이 몸으로 체득된 진리이기보다는 아직은 관념의 상태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동안 의심했던 그들이 훗날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확인해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엠마오 길의 두 제자가 했던 고백도 그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6). 그런가하면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 행 10:39-41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는 제자였음에도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아닌 여인들에게 '전해들은' 안타까운 제자였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한 마태의 증언에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는 얼마나 당당한 부활의 증인입니까? 우리도 베드로처럼 변화되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골 3:1-4 공동번역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 생명을 얻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것을 추구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영광의 왕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탄생에서부터 영광스러운 승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섭리를 훌륭하게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태어난 이들을 재탄생시키기 위해 여자를 통해 태어나셨다. 자신들의 의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자들을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무지한 죽음은 그리스도를 삼켰다. 그러나 삼킨 후에 그는 누구를 삼켰는지를 깨달았다. 생명을 삼켰고 생명에 의해 패망했다. 만인과 함께 하는 한 분을 삼켰고, 그 한 분으로 모든 이가 풀려났다. 사자처럼 그분을 물었는데 이빨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렇게 죽음은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우리의 무시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사자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가죽처럼 그를 짓밟는다. 니콜라스바실리디아스/박용범 옮김 「죽음의 신비」(정교회출판사 2010) 166쪽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그 사람들을 불멸(不滅)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기념되고 찬미를 받는 날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 찬양대의 칸타타를 통해, 그리고 세례를 받음으로 부활 영광에 참여한 형제자매를 통해 예수님께서 살리신 생명이 기념되고 찬미를 받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그 생명의 대열 안에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죄 용서
정용섭목사 / 행 10:34-43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생전에 직접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즉시 교회가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모임이 언제 정확하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특성이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그 시점은 예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하고 유대교의 한 아류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예수의 복음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행 1:8절에 따르면 승천 전승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세계 선교, 즉 이방인 선교에 대한 당위성을 담보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당시 처한 상황을 추정해보십시오. 그들은 모태 유대교인들입니다. 유대교가 저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유대교를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머물면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로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유대교 당국에서도 그들을 묵인했습니다.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안에 여러 종류의 수도회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추종자들은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 선교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어떤 일들이 주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안디옥, 에베소, 빌립보, 로마 등등, 이방인 지역에 복음 공동체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졌습니다. 소위 이방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인의 숫자에서도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이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율법과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방 기독교의 대표자는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보도입니다. 이방인 선교의 신학적 정당성을 피력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이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기 전에 이미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활동에서 이방인 전도의 신학적 단초를 찾았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역사적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오늘 설교 본문인 행 10:34-43절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로마 백부장의 집에 들어간다는 게 지금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큰 모험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아주 길고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사건이 당시로서는 뜨거운 감자처럼 예민한 이슈였다는 뜻입니다. 그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수비대의 장교였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그는 어느 날 오후에 환상 중에 천사를 봅니다. 천사는 그에게 말합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라 하는 사람을 집으로 모셔 오라는 겁니다. 고넬료는 믿을만한 심부름꾼을 50km 떨어진 욥바에 보냅니다. 다른 한편 욥바에 잠시 머물고 있던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환상을 봅니다. 각종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새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왔습니다.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라서 베드로는 거절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별로 기분 좋은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환상이 끝나는 순간에 멀리 가이사야에서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들이 들이닥칩니다. 그 심부름꾼들과 함께 베드로는 길을 떠나 다음날 고넬료 집에 도착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그간 자기에게 일어난 이상한 현상을 설명한 뒤에 행 10:33절에서 이렇게 말을 마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34-43절까지 긴 설교를 합니다. 당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라 할 이 설교로 인해서 기독교는 앞으로 당당하게 이방인 선교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겁니다. 만약 이런 신학적 해석이 없었다면 이방인 선교는 동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예수의 복음은 유대교 안에서 소수의 목소리로 머물러 있었겠지요. 베드로는 무슨 설교를 한 것일까요?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일단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율법을 지켰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편협한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주의는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합니다. 베드로 설교는 이런 율법적이고 분리적인 사고방식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극복되었다고 말합니다. 36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의 복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율법을 지킨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백인만이 아니라 유색인까지, 지식인만이 아니라 지식이 없는 사람까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독선적인 선민의식과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주장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낮추어보던 유대인들에게는 꺼림칙한 주장입니다. 베드로 설교는 그 다음 구절부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설명합니다. 그가 누군지를 알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행 10:38).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 땅을 다니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런 능력이 나타난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유대 종교권력과 로마 정치권력, 그리고 그런 권력을 추종하던 이들의 야합에 의해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의 역사가 끝장났다면 정의가 굴복당하고 불의가 승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을 겁니다. 인류 역사에는 이런 논리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40절에서 반전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악을 하나님이 굴복시키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악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행됩니다. 교묘한 자기 합리화에 떨어집니다. 겉으로 보이는 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특별한 사람들에게 생생한 생명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 경험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부활의 예수를 경험함으로써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새로운 영적 시각이 열렸습니다. 예수가 궁극적인 심판자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42절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예수님이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모든 이들의 심판자라는 말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삶과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 더 심층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진술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은 생물학적인 삶과 죽음 현상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요 11:25,26). 여기서 심판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부도덕하게 행동한 사람들을 징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은 생명 심판입니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립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 세상살이에서도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저를 생명으로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죄 용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들이 관념적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 43절이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심판은 생명 심판을 가리킵니다. 생명 심판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명 심판을 받아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가 곧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바로 생명을 파괴하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말이구나.’ 하고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 지성인들은 죄라는 말 앞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심리적 질병 현상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죄라고 하는 겁니다. 니체와 프로이트 같은 학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 비판을 받을만한 현상들이 교회에서 종종 일어나긴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그런데 자주 노출되면 신자들의 영혼은 병듭니다.
이런 일은 성서가 말하는 죄를 오해하는 데서 벌어지는 겁니다. 죄는 생명과의 단절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그런 단절과 분리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이야기가 선악과 설화입니다. 선악과 설화는 인간이 왜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을 가리키는 겁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자기를 완성시켜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실존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온갖 좋은 것을 다 소유해도 영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혼이 피폐하다는 뜻입니다. 최순실과 박근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리가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영혼이 피폐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혼의 피폐를 안고 살아갑니다.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3: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명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고 생명 얻는다는 사실을, 즉 영혼의 피폐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증거를 손에 들고 싶으신가요? 이 문제는 콘서트 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손에 넣는 거와는 차원이 달라서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어떻게 말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다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가르침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의 종교의식이 세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을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런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여전히 이런 설명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취업해야 하고, 집을 구입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부부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병도 고쳐야 합니다. 일상을 해결하는 것만도 힘에 벅찰 지경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킨다는 말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일 겁니다. 일상의 과잉 현상은 현대인들의 삶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삶의 행태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계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은사를 구해야겠지만 우리 스스로 삶을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상과의 단절이 필요합니다. 그게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함께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성경공부와 신학공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절실하게는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혹 인간의 삶이 고장 난 우주선 안에서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구 크기의 우주선을 우리가 지금 함께 타고 여행 중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산소 공급기가 고장 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각자 숨을 적게 쉬자고 주장합니다. 산소가 밑바닥을 드러내는 시간만 조금 늦출 뿐입니다. 산소 공급기를 고치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소 공급기는 완전히 망가져서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일정 숫자의 사람들을 죽여서 산소 소모량을 줄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일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빨리 우주선 밖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와 주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밖에서 온 구원자, 즉 메시아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이대성목사 / 행 10:34-43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여러분! 이번 한 주간은 제 자신이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 다니엘 기도회에 유튜브를 통해 참여하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현실, 하드캐리 해볼게!’라는 최영환 대표의 간증이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 중에 연예인들이 스캔들이 났을 때 연예인 중에 제일 먼저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는 분이 있는데 바로 그 분은 영화배우 안성기씨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안성기씨의 말 만큼은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랍니다.
그 분의 커피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그 커피를 꼭 사서 마셔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연예인도 스타가 되기 이 전에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인성이 좋지 못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우선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저를 주례해 주셨던 고 임택진 목사님께서 후배 신학생도들을 향해서 주신 말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목사들 중에 사람이 되지 못한 목사들이 참 많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
오늘날 왜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이전에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기억하셨던 고넬료의 신앙생활을 온전히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한 번 재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꼬옥 필요한 것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목마름이 있는 자입니다.
같은 질문으로 누가 진정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받을까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복된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구원을 갈망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에서 팔복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의로 배부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너희가 먼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의로 배부를 수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귀한 복음을 전해도 갈망이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마음속에 듣고 싶어하는 영혼의 갈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돼지와 진주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는 겁니다. 왜입니까? 그 당시에 있었던 가장 귀한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닌 진주였습니다.
그런데 돼지는 보석의 진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그것을 던져줘 봤자 낭비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당합니다.
음식인가 보다 하고 우지직 씹는 순간 돼지의 이빨이 다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영혼의 갈망이 없는 자에게 있어 복음은 이와 같다는 겁니다. 돼지에게 진주가 소용없듯이, 아니 오히려 해롭듯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전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여러분 마음과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이 설교와 예배와 말씀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가 진정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저 복된 말씀을 듣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복된 말씀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 사모하는 자! 하나님 그 분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누가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매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그저 먼 거리에서 믿는 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 갈망하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물이 귀한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를 들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먹기 싫은 물을 꿀꺽 꿀꺽 마셔서 배가 똥똥하게 튀어 나왔다고 합시다.
살겠다고 발버둥 치느라 물을 원 없이 마신 사람에게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시원한 물 한 잔 드실래요?"라고 말한다면 이 놈이 누구 놀리냐고 당장에 귀 싸대기를 한 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너무나 목이 말라 고민하는 자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갖다 주면 그 물이 얼마나 달고 귀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똑같은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더더욱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반면에, 왜 어떤 사람은 5년, 10년, 15년을 교회에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의 성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겁니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달라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갈망에 따라 달라짐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고넬료는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그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 주십니다. 흰옷을 입은 사자를 보내서 고넬료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자만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자만 보내서 부족하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내 주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이 들어 쓰셨던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 그를 직접 보내 주신 겁니다.
이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와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특별하게 보내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기억하셨으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영혼 속에 있는 갈망을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로마의 군인이었기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그 나라에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고넬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노심초사합니다. ‘내 재산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가능할까?’
그래서 그는 구제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무릎을 꿇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고넬료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 했습니다.
그 날도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고넬료야!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같이 4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기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알아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방인으로는 최초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로마 복음화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무엇 때문에 고넬료를 기억하셨을까요? 고넬료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을까요? 성경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기도와 구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우리의 구제를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와 구제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기도와 구제!’ 이것은 고넬료의 경건한 신앙을 드러내는 두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그의 삶 속에 늘 두 개의 창이 열려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창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다른 삶의 창은 이웃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과 이웃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아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던 모든 자들에게 이와 똑같은 갈망이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목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 성을 지나갑니다. 앞 못 보는 한 맹인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을 너무나 갈망해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맹인인 주제에 웬 소리를 내느냐고... 제발 조용히 하라고...’ 이에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더욱 높이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때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멈춰 서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멈춰 서시는 예수님! 우리의 갈망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안에 왜 신앙의 성장이 없을까요? 왜 교회를 그토록 오래 다녔음에도 구원받은 확신이 우리 안에 없을까요?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십니까?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제가 당신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불일듯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34절과 3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러분! 지금 누가 누구에게 전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누가 깨닫고 있습니까? 전도하는 베드로가 깨닫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 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중에 수제자였습니다.
비록 실수는 많이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조용히 베드로를 따로 만나시고 어린양을 부탁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을 베풀었던 능력의 사람 베드로! 그는 정말이지 하나님을 알 만큼 알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에게 전도하는 순간 고넬료의 대답을 몇 마디 듣고서 그제서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그 분을 계속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날마다 깨달아 알아가야 합니다. 누가 진정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하나님 그 분에 대해서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 사람이 진정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로구나!’ 5년을 믿고 10년을 믿었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5년 전, 10년 전에 알았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저 그런 하나님, 멀리 계시는 하나님, 한 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하나님, 내 삶에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 나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 그때 그 시절에만 잠깐 있었던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이 단절될 때 우리의 신앙 또한 더 이상 자라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퇴보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다시금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웠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34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편파적이 아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또한 35절에서 그는 어느 누구든지 출신과 민족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받아주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알지만 그 당시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거의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왜 입니까? 베드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진리였고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믿지 않는 고넬료의 얘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간단한 계시를 통해서 베드로는 자기의 모든 고집과 철학과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금 알게 되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진정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날마다 주님 전에 나오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더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지식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죽이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리는 한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인 줄로 믿습니다. 호세아 6장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 관련 음식과 기호와 취미, 모든 것을 다 알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날 구원하신 하나님 그 분 알기를 갈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후로는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아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42절 말씀 제가 먼저 읽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명하사' 여러분! 누가 명령했습니까? 예수님이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했다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될 터인데 베드로는 어떤 분이 명령했는지 38절부터 41절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시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바로 그 예수님!
그러나 결코 사망에 매이지 않으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친히 부활하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다같이 42절과 4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고자 애쓰고 힘쓰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증언해야 합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전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왜입니까? 솔직히 자기 자신도 믿지 않으니까 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목사님, 지금이 21세기인데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지옥 얘기를 하십니까?"
급기야 일부 신학자들까지도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천당과 지옥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우리들에게 분명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한 부자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다 죽었습니다. 그는 전도를 받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어서 간 그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생전에 자기 집 문 앞에서 구걸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에 그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만 손가락에 찍어 내 혀를 적셔 주옵소서."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그 지옥을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지옥은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끔찍한 고통이 계속 되어지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이 부자가 자기의 목을 적셔 달라는 청이 거절당하자 제발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내 형제들 만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부자의 이 두 가지 요청이 다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는 절대로 다시 선택할 기회가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 믿으면 그 누구든지 구원받아 천국에 가지만, 예수 믿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또 한 가지 증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43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을 수 있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들 하면서 기독교는 너무나 폐쇄적이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다른 신을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진정 폐쇄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누가 뭐라 해도 진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석가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호메트가 누구입니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신이 아닙니다. 성인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불일듯 일어나서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깨달아 알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힘차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던 성숙한 신앙인 고넬료처럼 늘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씀으로 주께 반드시 기억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의 치유
행 10장 38절 / 최성규목사
우리 교단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입니다. 우리 교단 헌법 제2편 신조 제17조에는 신유가 있습니다. “신적 치유는 복음의 필수적인 내용이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속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받은 특권이다.” 신유는 신자의 특권인 동시에 복음의 필수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중의 복음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침, 복음전파, 병 고침입니다(마 4:23). 예수님은 가벼운 병부터 중한 병까지 다 치유하셨습니다. 병의 마지막인 죽음까지 치유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능력이 성령충만에 있다고 밝혀줍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치유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성령의 치유가 절실합니다. 2008년 기준 대한민국은 하루 평균 45명, 40분마다 1명꼴로 자살합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남자가 인구 10만 명 당 32명으로 OECD국가 중 2위이며, 여자가 인구 10만 명 당 13.2명으로 OECD국가 중 1위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살률이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10년간 암을 제외하면 자살은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사망원인입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영·혼·육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살률이 증가한다는 것은 사회가 중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합니다. 치료받읍시다. 완치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 명의가 있습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보혜사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치유에 대해 알아봄으로 천국 건강을 누리며 삽시다.
첫째, 육체의 치유
치유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라파(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치유의 역사는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 사도들이 성령충만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6). 우리는 성경을 한 자 한 자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가벼운 병만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다 나음을 얻었다’고 증거합니다. 감기로부터 시작해서 암까지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부터 시작해서 발바닥까지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병에 걸려 있습니까? 우리 육체 중 어디가 약하고 문제가 있습니까? “이 정도쯤은 별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언젠가는 낫겠지”라고 내버려두지도 맙시다. “이 병은 불치병이야”라고 절망하지도 맙시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자, 치료의 영이십니다. 우리 몸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있게 하십니다. 우리 육체가 약하고 병들어 있다면 치료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치유를 간구합시다. 성경은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고전 12:9)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신유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치유를 통해 우리는 온전케 됩니다(출 23:25-26).
둘째, 마음을 치유
육체의 병보다 무서운 것이 마음의 병입니다. 현대인은 마음이 병들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울증입니다. 마음이 독감에 걸려 있습니다. 그 결과, 의욕상실, 무기력감, 피로감, 수면 장애, 불안, 공포에 시달립니다. 급기야는 자살까지 합니다. 육체가 병들면 아픈 티라도 납니다. 마음이 병들었을 때는 부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모르기에, 위해주기보다는 짜증과 불만만 늘어갑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 내 마음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행 15:8)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고민과 슬픔과 아픔을 다 아십니다. 아시기에, 새 영을 부어주십니다(겔 36:26). 성령의 능력으로 새 소망이 넘쳐나게 하십니다(롬 15:13). 외로움에 마음이 아픕니까? 인생의 무의미함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십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습니까? 마음의 방에 갇혀서 혼자 울지 맙시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라고 증거합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의 마음은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살후 3:5).
셋째, 영혼을 치유
우리는 순례의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황폐한 사막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 영혼이 곤고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일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주님의 법을 기뻐합니다. 삶은 세상의 법을 좇습니다. 기도할 때는 십자가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눈을 뜨면 육체의 소욕이 꿈틀거립니다. 그 결과, 하루하루가 괴롭습니다. 남 보기가 부끄럽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척하는 신앙이 됩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합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훈련 받아도 며칠 가지 못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영혼의 병을 숨기지 맙시다. 신앙이 정체되어 있습니까?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시험 들어서 낙심하여 있습니까? 의심과 비난이 내 영혼을 좀 먹고 있습니까? 그냥 두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님께 내 영혼의 아픔을 고백합시다(시 51:10).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푸른 초장에 누이십니다. 쉴만한 물가에서 먹이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넷째, 관계를 치유
한자 ‘人(사람 인)’은 밑에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의지하는 모양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스승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관계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성장합니다.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됩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의 관계는 불협화음이 많습니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자신을 불신합니다. 효의 가치를 잊어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이익에 눈멀어 이웃을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잠깐의 편안함을 위해 자연을 훼손합니다. 기독교인조차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건, 기도할 때건 나만 생각합니다. 내 편안함, 내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의 풍요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요 13:35). 성령충만하면 우리의 관계가 치유됩니다. 복음서의 12제자들은 항상 싸웠습니다. 성령충만하자 그들의 관계가 하모니를 이루었습니다. 성령은 사귐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성령이 운행하시면 천국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모든 것을 유무상통하는 관계로 회복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깨어져 있습니까? 친척, 친구,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먼저 성령과 바른 관계인지 점검하여 성령님의 치유로 관계를 회복합시다. 성령과의 관계가 바르면 우리의 관계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