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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간어중(寬簡御衆)
너그럽고 간소함으로 무리를 이끌라는 뜻으로,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말이다.
寬 : 너그러울 관(宀/12)
簡 : 간략할 간(竹/12)
御 : 거느릴 어(彳/8)
衆 : 무리 중(血/6)
출전 : 상서(尙書)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1743년 2월 30일, 영조가 보름 남짓 남은 사도세자의 관례에 내릴 훈시(訓示)의 글을 발표했다. 임금은 직접 쓴 네 개의 첩(帖)을 꺼냈다.
첫 번째 첩은 표지에 '훈유(訓諭)'란 두 글자를 썼는데, 안을 열자 '홍의입지(弘毅立志), 관간어중(寬簡御衆), 공심일시(公心一視), 임현사능(任賢使能)'이란 16자가 적혀 있었다. 넓고 굳세게 뜻을 세워, 관대함과 간소함으로 무리를 이끌며, 공변된 마음으로 한결같이 살피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이에게 일을 맡기라는 뜻이었다.
16자 아래에는 또 "충성스러움과 질박함, 문아(文雅)함이 비록 아름다워도, 충성스러움과 질박함은 투박하고 거친 데로 흐르기 쉽고, 문아함이 승하면 겉꾸밈에 빠진다. 너그러움과 인자함은 자칫 물러터져 겁 많은 데로 흐르고, 조정하고 중재하는 것은 뒤죽박죽이 되기 쉽다"고 썼다.
忠質文雖美, 忠質流於樸野, 文勝流於表飾. 寬仁流於柔懦, 調劑流於混淪.
충성스럽고 질박한 것이야 훌륭하지만 맹목적이 되면 천해진다. 문아함이 세련돼 보여도 겉만 번드르르하면 쓸데가 없다.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가짐이 소중해도 알맹이가 없으면 자칫 우습게 보이기 쉽다. 의견에 귀를 기울여 듣고 조정한다는 것이 일을 더 꼬이게 만들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임금은 다시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날의 모습은 물이 맑아 고기가 없는 것과 같다. 법은 갈수록 가혹하고 세세해지니, 만약 너그러운 도리를 세자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백성이 장차 어찌 되겠는가?"라 하였다.
今日時象, 譬如水淸而無魚. 法愈苛細, 若不以寬道敎元良, 則百姓將何所措.
처음 영조가 내린 16자 중 '관간어중'은 상서(尙書)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중 "임금의 덕에는 잘못됨이 없다. 간소함으로 아랫사람을 대하시고, 관대함으로 사람들을 이끄신다(帝德罔愆, 臨下以簡, 御衆以寬)"고 한 데서 따왔다.
법을 집행하던 위치에 있었던 고요(皐陶)가 순(舜) 임금을 찬양해서 기린 말이다. 위에서 임금이 너그럽고 간소한 인정(仁政)을 베푸니,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의 고민이나 압박이 없어 상하가 화목하고 나라가 안정되어 편안하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떤가?
◼ 사도세자의 특별한 성인식
사도세자는 1743년(영조 19) 3월에 오늘날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를 거행했다. 이 때 세자의 나이는 9세였으므로 시기적으로 좀 이른 감이 있었다.
세자에게는 원래 16세 연상이 되는 형 효장세자가 있었다. 그러나 효장세자는 1728년 10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사도세자는 두 살이 되었을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는 유일한 혈육인 사도세자를 훌륭한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조기교육을 실시했고 성인식을 치르는 시기도 앞당겼다.
아홉살난 아들에게 내리는 당부의 글 관(寬), 달(達)
영조는 사도세자의 성인식을 좀 특별한 방식으로 치렀다. 자신의 소망이 담긴 훈계의 글을 직접 짓고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성인식을 보면 행사를 주관하는 빈(賓)이 성인이 되는 주인공에게 이름 대신에 사용하게 될 자(字)를 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고위 관리들에게 사도세자의 자를 의논해 올리게 했고, 추천된 세 가지의 이름 가운데 '윤관(允寬)'을 골랐다. '너그러울 관(寬)'자에 의미를 둔 이름이었다.
영조는 세자가 사용하게 될 압(押)의 글자를 '달(達)'자로 정했다. '압'은 오늘날 사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왕실에서는 글자 하나를 '압'으로 정하고 이를 도장에 새겨 공문서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보다 앞서 영조는 숙종으로부터 '통(通)'자를 받았으므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압을 합하면 '통달(通達)'이 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각별히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글자다. 참고로 숙종의 압은 '수(守)', 경종의 압은 '정(靜)'이었다.
관용의 정치를 펼치라했던 영조
세자의 자와 압을 정한 이후 영조는 네 가지 글을 지어 고위 관리들에게 내보였다. 관례를 치르는 날 교서를 대신하여 세자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첫 번째 글은 "넓고 굳세게 뜻을 세우고,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다스려라. 공정한 마음으로 사물을 똑같이 보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려라"는 의미의 16글자(弘毅立志 寬簡御衆 公心一視 任賢使能)였다.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구절에 '윤관(允寬)'의 뜻이 담겨있었다.
두 번째 글은 자신의 글을 돌에 새겨 인쇄하여 세 부의 책자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영조는 세 부 가운데 하나는 성인식 다음날 세자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의정부 대신에게 주어 힘쓰게 하며, 나머지 하나는 춘추관에 보내어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세 번째 글은 옛 제왕들의 두터운 사랑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삼대의 정치나 한 고조, 송 태조의 정치는 모두 너그럽고 두터웠으며, 조선의 국왕들도 정사가 관대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했다고 했다. 영조는 후대의 풍속이 법조문을 강하게 적용하여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지만, 세자는 '윤관(允寬)'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너그러운 정치를 펴라고 당부했다.
네 번째 글은 '달(達)'자에 대한 해설이었다. 영조는 무왕이나 주공이 선대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하여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의 지극한 효도인 달효(達孝)를 이루었음을 강조하고, 사도세자가 자신의 마음을 본받고 자신의 사업을 계승하여 지극한 효도를 실천하라고 당부했다.
영조가 지시한 내용은 그대로 이뤄졌다. 영조가 친필로 써 준 글은 석판에 새겨져 인쇄되었다. 성인식을 거행한 사도세자가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해 방문했고, 영조는 세자에게 훈유가 인쇄된 책자와 훈유함을 내주었다. 글을 잘 읽어보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의미였다.
영조가 성인식을 치른 후계자에게 강조한 것은 관용의 정치였다. 영조는 당시 현실이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는 것처럼, 법이 갈수록 가혹하고 까다로워져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윤관(允寬)'이란 자와 '달(達)'이란 압을 정해준 것은 자신의 뜻을 잘 계승하여 관용의 정치를 펼치라는 당부가 담겨있었다.
영조의 친필 훈유를 새긴 석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판의 매수는 총 12매이고, 글자가 새겨진 면수는 22면이다.
◼ 영조실록(英祖實錄) 57권
영조 19년 2월 30일 갑인 1번째기사 1743년 청 건륭(乾隆) 8년
넷 첩의 인본을 다섯 곳의 사각, 석판을 춘추관 사각에 간직케 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提學), 그리고 예조 당상을 부르도록 명하고 묻기를, "열성(列聖)의 어압(御押)에 '달(達)'자가 있는가 없는가? 경묘(景廟)의 어압은 '정(靜)'자 였고, 선조(先祖)의 어압은 '수(守)'자 였으나, 현묘(顯廟) 이상은 어떤 글자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압의 글자는 비록 선조(先祖)나 같이 쓰더라도 의리에 해로움이 없는 것인가?" 하니,
命招領議政金在魯及弘藝文提學, 禮曹堂上問曰: 列聖御押有達字否乎. 景廟御押爲靜字, 先朝御押爲守字, 顯廟以上不知爲何字. 御押之字, 雖與祖先同用, 無害於義否.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므로,
諸臣曰: 然矣.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압(押)을 '달(達)'자로 정한 것은 그 '통달(通達)'이란 뜻을 취한 것인데, 비록 행용(行用)하는 문자이기는 하지만 휘(諱)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였다.
上曰: 東宮之押以達字爲定者, 取其通達之意, 而雖行用文字, 押則不必諱矣.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장차 문자로 교서(敎書)를 대신하여 세자(世子)가 관례(冠禮)를 치르는 날 훈시(訓示)하고자 하는데, 먼저 경(卿) 등에게 보여 주고 싶어 부른 것이다." 하고, 이어서 첩(帖) 넷을 꺼내어 보였다.
上曰: 今將以文字代敎書, 訓示世子冠加之日, 欲先示卿等而召之也. 仍出示四帖.
그 첫번째 첩은 겉에 훈유(訓諭) 두 자를 썼고, 안에 홍의입지(弘毅立志), 관간어중(寬簡御衆), 공심일시(公心一視), 임현사능(任賢使能) 열 여섯 글자를 썼으며, 그 아래에는 바야흐로 쓰기를, '충질(忠質)과 문(文)이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충질은 박야(樸野)한 데로 흐르고, 문(文)이 승하면 겉만 꾸미는 데로 흐른다. 내가 이 열 여섯 글자를 훈유의 머리에 앞세워 두었으니, 학자들에게 물어본들 어찌 이 도리를 넘겠는가?'고 하였다.
其第一帖則外書訓諭二字, 內面親書弘毅立志, 寬簡御衆, 公心一視, 任賢使能十六字, 下方書曰; 忠質文雖美, 忠質流於樸野, 文勝流於表飾, 寬仁流於柔懦, 調劑流於混淪. 予以十六字, 冠於訓首, 質諸學者, 豈踰此道.
그 둘째 첩에는 수훈원량(垂訓元郞) 네 글자를 썼는데, 그 아래에 쓰기를, '손수 그 가르침을 썼노니, 3건을 간행토록 명하노라. 1건은 원량이 관례를 치룬 다음날 조알(朝謁)할 때 직접 내릴 것이고, 1건은 정부(政府)에 부쳐 고굉지신(股肱之臣)에게 스스로 힘쓰도록 권하게 할 것이며, 1건은 판에 새겨 사국(史局)에 간직하게 할 것이다'라 하였고, 또 한 줄을 낮추어 그 왼쪽에 쓰기를, '관례를 치르는 날 훈시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이것뿐이랴? 예문(禮文)과 교서(敎書)에 그 훈시가 상세할 것이다. 약기운에 눈이 어지럽고 손이 떨리나 간절한 마음으로 쓰노니, 이것이 나의 깊은 뜻이다'고 하였다.
其第二帖則書垂訓元良四字, 書于下曰; 手寫其訓, 命刊三件. 一件元良冠翌日朝謁時面賜, 而一件付政府勸股肱而自勉, 一件曁板藏史局. 又低書其左曰, ‘欲訓于冠加之日者, 豈特此也. 而禮文, 敎書其訓詳矣. 眩升手麻眷眷書, 此是予深意, 是予深意.
그 셋째 번 첩에는 '저 옛날 제왕(帝王)들 중에서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운 경우는 하(夏), 은(殷), 주(周)이래 오로지 한(漢)과 송(宋) 뿐이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약법 삼장(約法三章)은 그 뜻이 관인(寬仁)한데서 비롯되었고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관후(寬厚)함은 역사에 환히 실려 있다. 하물며 정사(政事)외 백성에게 관후함은 곧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임에야? 말속(末俗)에서는 부문(浮文)과 까다롭게 살피는 것을 우선하지만, 이번에 내가 너의 자(字)를 정하면서 부망(副望)의 '관(寬)'자로 용공(用工)하고, 장래에는 '관(寬)'자로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니, 어찌 한갓 정령(政令)에만 이익이 있으랴? 실로 능히 몸과 마음에 도움이 있을 것이니, 장구하게 나라를 누림이 이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其第三帖則曰; 粤昔帝王仁厚立國者, 夏殷周以後其惟漢宋. 漢 高三章, 意由寬仁, 藝祖寬厚, 昭載史乘. 而況寬于政寬于民, 卽我朝家法. 末俗以浮文苛察爲先, 今予之定爾字, 用副取寬字, 意蓋深也. 咨爾元良, 欽體此意, 以寬字用工於今日; 以寬字力行於將來, 豈徒有益於政令. 寔能有助於心身, 而其享國久長, 由是賴焉.
그 넷째번 첩은 '달(達)'자로 그 위에 화압(畫押)하고, 그 아래에 쓰기를, '나의 압(押)은 통(通)자니, 곧 옛날에 내리신 것을 받은 것이다. 면칙(勉飭)하게 하고자 손수 써서 너에게 주노니, 장래에 쓰도록 하라. 어찌 신하들이 지어 바치는 데 비길까 보냐?' 하고, 또 왼쪽에다 쓰기를 '공성(孔聖)께서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달효(達孝)라 칭송하시며, 남의 뜻과 일을 잘 계술(繼述)하였다'고 하셨으니, 계술을 잘하는 것이 효(孝) 중에서 큰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의 얕은 정성으로 너에게 계술에 힘쓰도록 한다만 어찌 몸소 가르칠 수 있으랴?
第四帖, 以達字畫押於上, 其下曰; 予押卽通字, 乃受賜昔年者也. 其欲勉飭, 手寫付爾, 用于將來. 奚比臣工之製獻. 又書左方曰; 孔聖稱武王, 周公以達孝, 曰;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 善繼善述, 孝之大者. 雖然以予淺誠, 勉爾繼述, 其豈身敎.
요(堯), 순(舜),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일이 방책(方冊)에 실려 있으니, 곧 너의 선사(先師)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가법은 오로지 효제(孝弟)였으니 감히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느냐? 내가 비록 덕이 박하기는 하지만, 시상(時象)을 조화시키고 동인 협공(同人協恭)케 하는 것이 나의 고심(苦心)이니, 대훈(大訓)이 밝게 있어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졌다. 남의 아들이 된 사람의 효(孝)란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달효(達孝)인 것이다. 하지만 어찌 한갓 나의 마음만 깊이 유념할까 보냐? 우러러 열조(列祖)의 가법(家法)을 계술한다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다행이겠느냐? 곧 교목 세신(喬木世臣)의 다행인 것이다.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어 공경히 체념(體念)하고 공경히 준행하라'고 하였다.
堯舜文武方冊載焉, 卽爾先師, 我朝家法, 惟孝惟弟, 其敢忽乎. 予雖涼德, 調劑時象, 同寅協恭, 是予苦心, 大訓昭在, 國是大定. 人子之孝, 以親心爲己心, 是達孝也. 豈徒體予心. 仰述列祖家法, 則是豈予一人之幸. 卽喬木世臣之幸也. 銘此于心, 欽體欽遵.
이어서 김재로 등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가 태자(太子)에게 경계하기를, '선(善)이 작다 하여 하지 않도록 하지 말며, 악(惡)이 작다 하여 하도록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자의 기품(氣稟)을 경 등이 또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관후함으로 인도한 연후에야 비로소 서로 이루는 도리가 있을 것이다. 나의 뇌쇠함이 이와 같은데, 이번에 이렇게 하교 하였으니, 또한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仍諭在魯等曰: 漢 昭烈戒太子曰;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世子氣稟, 卿等亦可想得, 必以寬導之, 然後始有相濟之道矣. 予衰如此, 今爲此敎, 亦出苦心也.
이어서 처연하게 말하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 여러 해 동안 시탕(侍湯)한 적이 있었는데, 온천(溫泉) 거둥 길에 과천(果川)에 닿아 수라를 많이 잡수시는 것을 우러러보고, 한끼 밥에 기뻐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경자년079) 6월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유교(遺敎)를 다시 받들고자 한들 가능했겠는가?" 하고, 한참 동안 오열하였다.
仍愴然曰: 昔在先朝, 屢年侍湯, 及行幸溫泉, 到果川, 仰覩水剌之多進, 一飯之喜, 至今不忘. 至於庚子六月, 雖欲復承遺敎得乎. 嗚咽久之.
또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시상(時象)은 비유컨대 물이 맑아 고기가 없는 것과 같다. 법은 갈수록 가혹하고 까다로와지니, 만약 관대한 도리를 원량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백성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내가 세신(世臣) 때문에 고심하여 매번 원량에게 말한 적이 있으나, 원량은 내가 겪은 바와 같지 아니하니, 어찌 나의 마음씀을 알겠는가? 사람을 쓰는 것의 공평 여부에 대해 또한 원량에게 그 뜻을 물어보고자 한다. 경 등은 또한 사부(師傅)이니, 모름지기 그 나머지 일에 힘쓰고 그 모자라는 것을 보태어 나의 원량을 보도(輔導)하라. 내가 믿을 사람은 경 등이다. 무왕(武王)은 단서(丹書)를 3일 동안 재계하고 곤복과 면류관을 갖추고는 상부(尙父)에게서 받았으니,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겼던 것이다. 지금 나의 이 훈시를 어찌 감히 단서에 비길 수 있겠는가마는, 또한 동궁이 조알할 때 직접 주고 대면해서 명하고 싶다. 세자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니, 지금은 비록 이해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뒤에는 마땅히 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윗 조항은 백성을 위한 것이고 아랫 조항은 여러 신하들을 위한 것으로, 한 편의 가르침이 고심이 아님이 없다. 그 글을 보면 그 아버지를 생각하는 법이니, 어찌 감동하는 것이 없겠는가?" 하고, 관례 때까지 돌에 새겨 인쇄해 들이도록 하여 원본을 직접 줄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且敎曰: 今日時象, 譬如水淸而無魚。 法愈苛細, 若不以寬道敎元良, 則百姓將何所措. 且予爲世臣之苦心, 每言之於元良, 元良不如予之所經歷, 豈知予用心乎. 至於用人之均平與否, 亦欲一問於元良, 以試其意. 卿等亦師傅也, 須勉其所有餘, 補其所不足, 以輔我元良. 予之所恃者, 卿等也. 武王丹書, 齋三日袞冕而受之於尙父, 所以重其事也. 今予此訓, 何敢擬議於丹書, 而亦欲於東宮朝謁時, 親授而面命之. 世子方在沖年, 今雖未曉, 後當自知. 此書上款爲百姓也, 下款爲諸臣也, 一篇所訓, 莫非苦心. 見其書而思其父, 豈無感動於心者乎. 命趁冠禮, 石刻印入, 以原本親授.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보(趙普)가 금궤(金匱)에 서명(署名)한 것을 그 스스로 배신하였으니, 이것은 간신(奸臣)입니다." 하니,
在魯曰: "趙普金匱之署, 渠自背之, 此則奸臣也.
임금이 말하기를, "선인 태후(宣仁太后)가 사반(社飯)을 주며 범순인(犯純仁) 등 먼저 물러난 사람에게 하유한 것을 나는 옳게 여기지 않는다. 영상(領相)은 비록 늙었지만 근력이 나보다 나으니, 이로써 훗날 보도(輔導)하는 것이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이다. 황명(皇明)의 고황제(高皇帝)가 동비(銅碑)를 주조(鑄造)하여 후세 자손을 위한 법으로 삼았는데, 그 말엽을 공정한 눈으로 살펴보건대, 동비의 뜻과 같지 않았으니, 내가 염려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上曰: 宣仁后給社飯, 諭范純仁等先退者, 予不以爲是焉. 領相雖老, 筋力則勝於予, 以此輔導於他日, 予之所望於卿者也. 皇明 高皇帝鑄銅碑, 以爲後世子孫之則, 而夷考末葉, 與銅碑之意不同, 予之所慮者此也.
김재로가 말하기를, "훈유(訓諭)의 원본을 단지 신에게만 하사하신다고 명하시니, 신에게는 비록 영광이 된다 할지라도 어필(御筆)은 사사로이 간직할 것이 아니니, 이것이 심히 불안합니다." 하니,
在魯曰: 訓諭元本, 特命賜臣, 在臣雖榮, 而御筆非私藏者, 此甚不安矣.
인본(印本)을 다섯 곳의 사각(史閣)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고, 사사로이 인쇄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배포하는 한편, 간행을 마친 뒤에는 석판(石版)을 춘추관(春秋館)과 사각에 간직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命印本分藏於五處史閣, 毋禁私印, 俾廣布中外, 畢刊後, 石版藏于春秋館及史閣.
◼ 조선 후기 정치행정가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당쟁 격랑에 휩쓸려 편 가르기보단 소통하려 노력했다네
남양주시 호평동을 감싼 듯 자리잡은 천마산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이뤄 준다는 산벚나무와 서어나무 연리목을 비롯해 수많은 야생화가 연무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여기에 조선후기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부자가 잠들어 있다.
그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崔鳴吉)의 손자이며 최후량(崔後亮)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후원(崔後遠)에게 입양됐다. 10번 이상 정승으로 임명됐던 최석정(崔錫鼎)의 동생이며, 두 형제가 모두 정승을 지낸 경우는 조선에서 흔치 않았다.
그는 강화도 참성단을 중수해 오늘에 이르게 했고, 경종이 동생 영조에게 섭정하라는 명을 내리자 한밤중에 대궐로 들어가 철회시키는 등 18세기 초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소통의 대가인 최석항을 만나 본다.
약골의 책벌레
최석항은 어린 시절 허약해 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래서 10살이 돼서도 글공부를 시작하지 못했다. 10대 후반 늦은 학업에 각고의 노력으로 밤낮 없이 공부했지만 친어머니의 상을 만나 삼년상을 치르고 26세가 돼서야 진사가 됐고, 27세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병약했던 그는 체구가 왜소했지만 공무 수행에는 대담했고, 자신의 안위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3세 때 평안도 어사로 임명된 최석항은 평탄한 대로로 다녔던 보통의 어사들과 달리 백성들의 실정을 제대로 살피는 본분을 지키기 위해 산간벽촌을 골라 찾아다녔다. 하루 종일 산중을 헤매기도 하고, 길을 잃고 밤새 걷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만큼 올곧게 공직을 수행했다.
따뜻한 인간미와 융통성을 지닌 최석항
최석항은 높은 지위에도 약자에게 너그럽고 생명을 중시했다.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직원과의 첫 인사 자리에서 한 기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비장들이 엄하게 문책하려 했지만, 그는 웃으며 "내 모양이 원래 볼품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탓할 것 없다"며 중단시켰다.
또 한 번은 밥상을 받고 공기밥 뚜껑을 열었는데 지네가 나왔다. 감영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 모두 놀랐고 두려워 떨고 있었지만, 그는 태연히 젓가락으로 지네를 치우고 편히 밥을 먹고는 아무 일 없던 듯 일어났다.
금위영의 말을 사적으로 빌려줬다가 갑작스러운 훈련으로 말을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전에겐 아무 말 없이 말을 내주기도 했다. 군율이 엄해 아전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처지를 이해한 인자한 그였지만, 아첨을 하거나 부정한 사람은 즉시 내치는 엄정한 관리였다.
팔도의 지방관 중 최고로 평가받다
최석항은 1703년(숙종 29) 평안감사로 부임했다.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중국 북경으로 가는 길목이라 장사꾼들의 왕래가 많고 무역도 활발해 당시 지방관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임한 관리들은 감영의 재산을 장사꾼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개인 수입으로 챙겼다. 변방의 무관들 역시 군사 훈련과 무기 수리보단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 군량미를 착복하는 데 힘썼다. 그만큼 모든 재물은 장부상에만 존재했고 실제 창고는 텅 빈 상태였다.
최석항은 토지대장을 정리하고 세금을 공평하게 거뒀다. 산과 강, 도로와 지세(地勢)를 조사해 지도를 만들고 군사와 조선 등 국가 업무에 관계되는 비용 장부를 정리하는 등 국방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정치, 행정의 원칙은 청렴함과 간결함이었다. 국가 사무를 처리하고 개인적인 처신에 있어서 검약(儉約)하고 겸손했다. 잘못에 대한 문책에 앞서 관리자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도민(道民)이 잘 사는 것이 중심이었다.
그는 절대 권력자에게 역할도 주문했다. 세종대왕처럼 성군을 본받아 큰 뜻을 세우고(立大志), 성현의 학문을 성심을 다해 배우고(誠典學), 사사롭고 개인적인 감정을 극복하고(克私己), 독단적인 판단을 자제하고 도량을 갖추고(恢聖量), 당쟁에 관계되는 신하들의 말을 따져서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和朝論) 등이다.
이런 최석항에게 숙종 임금은 "문학은 형(최석정)보다 못하지만 행정과 정치하는 재주는 형보다 훨씬 낫다"며 팔도 최고의 지방관으로 평가했다.
당쟁의 파고에 따라 사면과 복권을 반복하다
최석항은 평생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고, 높은 지위에도 아랫사람이 시중 들게 하지도 않았다. 90이 넘은 노모에게 직접 음식을 드렸으며, 노모의 대소변 묻은 옷을 직접 세탁하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냈다.
최석항은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유언으로 문집을 간행하지 말고 신도비도 세우지 말며, 묘표도 쓰지 말고 시호를 요청하지도 말라고 했다. 소론의 영수이자 오랜 시절 정승을 지낸 사람답지 않게 그의 묘역은 간소하다. 근사한 신도비는 커녕 묘표석도 없다.
그가 국가 중요 지위에 있던 조선후기는 당쟁의 격랑 속에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다. 최석항은 정파가 달라도 함부로 옥사를 일으키거나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숙종대 이후 고종대까지 삭탈과 복권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했던 그다.
조선후기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鄭齊斗)는 "선생(최석항)은 국량이 깊고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기품이 조부인 지천(遲川; 최명길)선생을 닮았다"고 평가했다.
최석항은 "평생 남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無不可對人言)"며 늘 자신은 남에 비해 특별히 잘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와도 대화하려 했고 어떤 말이라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장과 처지가 다를 수 있지만 편을 갈라놓고 감정적 대치를 보이는 현대의 사회 양상을 보면서 최석항의 '소통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 유행(儒行; 선비의 행실)
이 선비의 행실(儒行)이란 글은 예기(禮記)에도 나오고 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나온다.
이 글을 두고 공자(孔子)를 등용하지 않는 애공(哀公) 같은 사람이 공자의 말씀에 감동하여 "내가 세상 끝날때까지 감히 선비를 희롱하는 따위의 일은 않겠다"고 했을리가 없다고 하여 선유(先儒)들 중엔 이 글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랜 고대의 글일수록 좋은 내용엔 더욱 좋은 내용이 들어붙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리라 싶다.
더구나 좌전(左傳)에 공자가 애공 11년에 위(魏)나라로 부터 노(魯)나라의 자기 집으로 돌아온 기록이 있지 않는가.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나오는 성인의 언행들 중에서 이만한 대문장도 드물거니와 공자의 입을 통한 '선비론'이란 점에서 아주 특이한 글이 아닌가 한다.
종교마다 가르침마다 지향하는 인간상이 있지만 유가는 선비를 지향하고 있다. 그 선비의 모습이 약여(躍如;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는 모양)하게 드러난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이다.
禮記 儒行 第四十一
예기(禮記)
예기(禮記)는 동방(東方)의 문물(文物)과 제도(制度)와 예의(禮義)의 모든 일을 실천과 경험에 의하여 제정된 방대한 기록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모두 이 글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유명하다.
예기(禮記)는 원래 소대(小戴)가 대대(大戴)의 것을 산삭(刪削)하였다는 견해도 있고, 마융(馬融)이전에 이미 49편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說)도 있으나 이것을 구태여 천착(穿鑿)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기(禮記)는 고례경(古禮經)과 그에 대한 기(記) 등을 후세의 학자들이 편찬 서술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잘못된 점도 많다고 한다. 고례(古禮)라고 하는 것은 오제삼왕(五帝三王) 시대의 예(禮)를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후세의 예(禮)와 혼동하여 기술한 것도 있고 우(虞), 하(夏), 은(殷), 주(周)의 예(禮)를 서로 뒤섞어 놓은 것도 있다. 공자(孔子)의 말씀이라고 일컫고는 있으나 실은 여기에는 착간(錯簡)도 있고 오기(誤記), 누락(漏落), 연문(衍文)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禮記)는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경서(經書)의 왕좌(王座)를 지켜왔다. 이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 예기(禮記)는 예(禮)를 말한 책으로서 예(禮)의 이론과 실제를 기술한 책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금전 만능 시대가 되면서 도덕성의 상실에 큰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는데, 조금이나마 예(禮)를 깨달아 인간다운 도덕성 회복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유행편(儒行篇)
공자가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을 위하여 유자(儒者)의 행실을 열거한 것이다. 여씨대림(呂氏大臨)에서 말하기를, "선비의 행실은 한결같이 의리에서 출발하며, 모두 자신의 성격상 마땅한 바를 행하는 것이요, 이것을 스스로 많이 알아 천하에서 뛰어남을 강구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이편에서 말한 것은 크게는 사람의 떳떳한 기개를 나타낼 것과, 작게는 심후한 풍오를 마음에 표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의의를 후세의 선비들이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그 교(敎)만 높이려 하기 때문에, 공자가 이를 일러 말하였다.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 행위가 적고, 학자로서 그 말을 실천하려고 애썼다면, 크게 부끄러울 것은 없을 것이다."
(1) 저 구(丘)는 선비의 옷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其儒服與.
노(魯)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의 옷은 선비의 옷입니까?"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鄕. 丘不知儒服.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 구(丘)는 어려서부터 노나라에 살면서 큰 소매의 홑옷을 입었고, 자라서는 송(宋)나라에 살면서 장보(章甫)의 관을 썼습니다. 저 구(丘)가 듣건대, '군자의 배움이 넓다고 하여도 그 옷은 고향에서 입는 것을 따른다'고 합니다. 저 구(丘)는 선비의 옷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2) 감히 선비의 행실을 묻습니다.
哀公曰: 敢問儒行.
애공이 말하였다. "감히 선비의 행실을 묻습니다"
孔子對曰: 遽數之不能終其物, 悉數之乃留, 更僕未可終也.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급히 이를 헤아리자면 그 일을 마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이를 다 헤아리자면 오래 걸려서, 사람을 바꾼다고 해도 모두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3) 선비는 힘써 노력하며 거용되기를 기다립니다
哀公命席, 孔子侍曰: 儒有席上之珍以待聘. 夙夜强學以待問.
애공이 자리에 앉을 것을 명하자, 공자는 애공을 모시면서 말하였다. "선비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가지고 초빙을 기다립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힘써 배우며 스스로 물음을 기다립니다.
懷忠信以待擧, 力行以待取. 其自立有如此者.
충심과 신의를 품고서 거용되기를 기다리며, 힘써 행함으로써 임금이 취하기를 기다립니다. 그 스스로 입신하는 방법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4) 선비는 의관이 바르고 행동을 신중히 합니다
儒有衣冠中, 動作愼, 其大讓如慢, 小讓如僞.
선비는 의관(衣冠)이 바르고, 행동을 신중히 하며, 그 크게 양보할 때에는 거만한 것 같이 하고, 적게 양보할 때에는 거짓같은 것이 있습니다.
大則如威, 小則如愧, 其難進而易退也.
클 때에는 곧 위엄이 있는듯 하고, 작을 때에는 곧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으니, 그 나아감에는 어렵고 물러가기는 쉬운 것입니다.
粥粥若無能也, 其容貌有如此者.
묽디 묽은 것처럼 유약한 모양은 무능해 보이는 것 같으며, 그 용모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5) 선비의 행실은 정도에 맞습니다
儒有居處齊難, 其坐起恭敬, 言必先信, 行必中正.
선비의 거처가 가지런하고도 어려워 보이고, 그 앉거나 일어날 때에는 공경스럽고, 말에는 반드시 신의가 앞서며, 행실은 반드시 올바른 정도에 맞습니다.
道塗不爭險易之利, 冬夏不爭陰陽之和, 愛其死以有待也.
길을 갈 때에는 험하고 쉬운 것의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겨울과 여름에 춥고 더운 곳을 따라 거처함을 다투지 않으며, 그 죽음을 꺼리지 않음으로써 기다림이 있습니다.
養其身以有爲也, 其備豫有如此者.
그 몸을 배양함으로써 일삼을 것이 있으니, 그 예비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6) 녹(祿)은 얻기 쉬우나 쌓기는 어렵습니다
儒有不寶金玉, 而忠信以爲寶, 不祈土地, 立義以爲土地.
선비는 금옥(金玉)을 보배로 여기지 않지만, 그렇지만 충신(忠信)을 보배로 여기며, 토지를 얻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의(義)를 세우는 것으로 토지를 삼습니다.
不祈多積, 多文以爲富.
많은 것을 쌓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덕행이 많은 것을 꾸밈으로써 부(富)로 삼습니다.
雖得而易祿也, 易祿而難畜也.
얻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녹은 얻기 쉬우며, 녹은 얻기 쉽지만 그러나 저축하기는 어렵습니다.
非時不見, 不亦難得乎.
때가 아니면 볼 수가 없으니, 또한 얻기도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非義不合, 不亦難畜乎.
의(義)가 아니면 화합하지 않으니, 또한 저축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先勞而後祿, 不亦易祿乎. 其近人有如此者.
먼저 수고를 한 뒤에야 녹(祿)이 있는 것이니, 또한 녹도 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가까운 사람으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7) 선비는 재물로 그 의(義)를 훼손하지 못한다
儒有委之以貨財, 淹之以樂好, 見利不虧其義, 劫之以衆, 沮之以兵, 見死不更其守.
선비에게는 재물을 가지고 맡겨서, 그 즐기는 것에 젖어 들게 할지라도, 이익을 보더라도 그 의(義)를 이지러지게 하지 않으며, 무리로써 협박을 하거나, 군대로써 이를 막으려 할지라도, 죽음을 보고서 그 지킴을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鷙蟲攫搏不程勇者, 引重鼎不程其力, 往者不悔, 來者不豫, 過言不再, 流言不極.
사나운 새와 억센 짐승이 덤들어도 용감한 것을 저울질하지 못하며, 무거운 부담으로 이끌더라도 그 힘을 저울질하지 못하며, 지나간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이 없으며, 장래에 다가올 일에는 기회를 따라 제어하므로 예비하지 않으며, 이미 말했으면 가히 두번 하지 않으며, 떠도는 말이라도 이를 추궁하지 않습니다.
不斷其威, 不習其謀, 其特立有如此者.
그 위엄 있는 것은 끊이지 않으며, 그 도모하는 일을 연습하지 않으니, 그 특별히 확립된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8) 선비는 가히 죽일 것이지 욕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儒有可親而不可劫也, 可近而不可迫也, 可殺而不可辱也.
선비에게는 친할 것이지 겁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며, 가까이 할 것이지 핍박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가히 죽일 것이지 욕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其居處不淫, 其飮食不溽, 其過失可微辨.
그 거처는 사치하여 분수에 넘치는 일이 없으며, 그 음식은 맛좋은 것으로 하지 않으며, 그 과실은 가볍게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而不可面數也. 其剛毅有如此者.
그리고 대면하여 책망하거나 따질 것이 아닙니다. 그 굳고 곧음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9) 선비는 충신으로 갑옷을 삼고 예의로 방패를 삼는다
儒有忠信以爲甲胄, 禮義以爲干櫓, 載仁而行, 抱義而處, 雖有暴政, 不更其所. 其自立有如此者.
선비는 충신(忠信)으로 갑주(甲胄)로 삼고, 예의(禮義)로 간로(干櫓)를 삼으며, 인(仁)을 머리에 쓰고 다니며, 의(義)를 품고서 대하니, 비록 폭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대하는 바를 고칠 수 없습니다. 그 스스로 확립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0) 선비는 울타리 문을 달고 들창을 낸다
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 易衣而出, 幷日而食, 上答之不敢以疑, 上不答不敢以諂, 其仕有如此者.
선비는 1무(一畝)의 담장에 흙으로 두른 조그만 집일지라도, 대를 쪼개어 엮은 울타리 문(篳門)을 달고 그 옆에 작은 문을 내며, 쑥대로 엮은 출입문에 옹기(甕器)의 들창을 달고, 옷을 번갈아 입고 나오며, 이틀에 하루치의 음식을 먹고서도, 임금이 그의 말에 응하여 쓰게 되면 감히 의심치 않으며, 임금이 대답하지 않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으니, 그의 벼슬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1) 선비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백성들을 잊지 않는다
儒有今人與居, 古人與稽, 今世行之, 後世以爲楷.
선비는 지금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옛 사람들과 더불어 도를 상고(相考)하여, 지금 세상에 이를 행하고, 후세의 본보기로 삼습니다.
適弗逢世上弗授下弗推, 讒諂之民, 有比黨而危之者, 身可危也, 而志不可奪也.
단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위에서 불러 이끌어 쓰이지 않고 아래로는 밀어주는 이가 없으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백성들이 서로 어울려 작당을 하여 위태롭게 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몸은 가히 위험하지만, 그러나 그 뜻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雖危, 起居竟信其志, 猶將不忘百姓之病也. 其憂思有如此者.
비록 살아가는 것이 위태롭다고 할지라도 필경에는 그 뜻을 믿게 되고, 오히려 장차 백성들의 근심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근심하고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2) 선비는 한가롭게 살지만 음행하지 않는다
儒有博學而不窮, 篤行而不倦, 幽居而不淫, 上通而不困, 禮之以和爲貴.
선비는 널리 배우지만 다함이 없고, 독실히 행하지만 싫증내지 않으며, 한가롭게 살지만 음행하지 않으며, 위에 통달하면서도 곤란하지 않으며, 예의 몸으로써 엄하기는 하지만 그 용(用)은 화(和)를 귀하게 여깁니다.
忠信之美, 優游之法, 擧賢而容衆, 毁方而瓦合, 其寬裕有如此者.
충신(忠信)을 아름다움으로 삼고, 우유(優游)를 법으로 삼으며, 어진이를 사모하지만 백성들을 용납하며, 모가 난 것을 헐어서 다시 둥글게 화합시키니, 그 너그럽고 여유있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3) 선비는 남을 천거할 때 원수라도 피하지 않는다
儒有內稱不辟親, 外擧不辟怨.
선비는 집안 사람을 천거할 때 친족이라고 하여 피하지 않으며, 밖에서 사람을 천거할 때 원수라고 하여 피하지 않습니다.
程功積事, 推賢而進達之.
공(功)을 헤아려 보고 그 사업의 실적을 쌓아서, 어진 이를 밀어 주어 나아가 이를 통달하게 합니다.
不望其報, 君得其志, 苟利國家不求富貴. 其擧賢援能有如此者.
그러나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임금이 그 뜻을 얻어서 진실로 나라를 이롭게 한다면 부귀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어짐을 천거하고 능한 이를 돕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4) 선비는 어려운 일에는 서로 먼저 죽으려 듭니다
儒有聞善以相告也, 見善以相示也, 爵位相先也, 患難相死也.
선비는 착한 일을 들으면 서로에게 알리며, 착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서로 보게 하며, 작위(爵位)는 서로 상대를 먼저하며, 어려운 일에는 서로 먼저 죽으려 합니다.
久相待也, 遠相致也, 其任擧有如此者.
벼슬함에 있어서 서로 오래 기다려 주고, 멀어지게 되면 서로 불러 이르게 하며, 일을 맡기고 직분에 천거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5) 선비는 덕(德)으로써 몸을 씻습니다
儒有澡身而浴德, 陳言而伏.
선비는 몸을 씻는 것이 덕으로써 목욕하며 임금에게 진언하지만 그러나 엎드려서 명을 듣습니다.
靜而正之, 上弗知也.
고요하고 바르게 나아가지만 위에서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麤而翹之, 又不急爲也, 不臨深而爲高, 不加少而爲多, 世治不輕, 世亂不沮.
임금의 허물을 들어 밝게 간언하며, 또 급히 하지도 아니하며, 깊은 것에 임하지 않지만 그러나 높게 만들고, 적은 것을 더하지 않지만 그러나 많아지게 하며,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더라도 가볍게 나아가지 않으며,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물러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同弗與, 異弗非也, 其特立獨行有如此者.
뜻이 같다고 하더라도 더불어 좇지 않으며, 뜻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비난하지 않으니, 그 특히 서서 홀로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6) 비록 선비에게 나라를 줄지라도 하찮게 여깁니다
儒有上不臣天子, 下不事諸侯.
선비는 위로는 도를 굽히면서까지 천자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제후에게 봉사하지 않습니다.
愼靜而尙寬, 强毅以與人, 博學以知服, 近文章, 砥厲廉隅.
신중하고 고요하여 너그러운 것을 숭상하며, 강하고도 굳센 것으로써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하며, 널리 배움으로써 행할 줄 알며, 문장(文章)을 가까이 하며, 구석구석까지 갈고 닦습니다.
雖分國, 如錙銖, 不臣, 不仕, 其親爲有如此者.
비록 그 나라를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이를 하찮은 치수(錙銖)와 같이 여기며, 천자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제후를 섬기지 않으니, 그것을 친히 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7) 선비는 뜻이 같으면 함께 나아간다
儒有合志同方, 營道同術, 並立則樂, 相下不厭.
선비는 뜻을 합하여 학업을 같이하며, 도(道)를 운영하는 데 지혜를 함께 하며, 나란히 입신하게 되면 곧 이를 즐겁게 여기고, 작위를 서로 사양하여 상대의 아래에 있어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久不相見聞流言不信, 其行本方立義, 同而進, 不同而退, 其交友有如此者.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해도 떠도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으며, 그 행실은 방정함을 근본으로 세워 반드시 그 의를 얻어서, 의로움이 같으면 함께 나아가지만, 그러나 뜻이 같지 않으면 물러나니, 그 벗을 사귀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8) 선비는 인(仁)을 갖추고 있으나 인(仁)을 말하지 않는다
溫良者, 仁之本也; 敬愼者, 仁之地也; 寬裕者, 仁之作也; 孫接者, 仁之能也; 禮節者, 仁之貌也; 言談者, 仁之文也; 歌樂者, 仁之和也; 分散者, 仁之施也; 儒皆兼此而有之, 猶且不敢言仁也. 其尊讓有如此者.
성품이 온화하고 무던한 것은 인(仁)의 근본이며, 공경하고 삼가는 것은 인(仁)의 땅이며, 마음이 어그럽고 넉넉한 것은 인(仁)을 일으키며, 겸손히 접대하는 것은, 인(仁)이 능한 것이며, 예의에 절도가 있는 것은 인(仁)의 모습이며, 생각을 말로 나타내는 것은 인(仁)의 문식(文飾)이며, 음악을 노래하는 것은 인(仁)의 조화이며, 나뉘고 흩어주는 것은 인(仁)을 베푸는 것이니, 선비는 이런 것을 모두 겸하여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감히 인(仁)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존경하고 겸양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19) 아무에게나 유자라고 부르는 것은 망령된 것입니다
儒有不隕穫於貧賤, 不充詘於富貴.
선비는 가난하고 천한 것 때문에 궁핍하여 지조를 잃는 일이 없고, 부귀함 때문에 너무 기뻐서 법도를 잃지 않습니다.
不慁君王, 不累長上, 不閔有司.
천자나 제후와 경대부를 욕보이지 않으며, 어른과 윗사람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으며, 유사를 근심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故曰; 儒. 今衆人之命儒也妄, 常以儒相詬病.
그러므로 말하기를 '선비(儒)'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을 유자(儒者)라고 부르는 것은 망령된 것이니, 항상 선비를 가지고 서로 욕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20) 나는 죽을 때까지 선비를 희롱하지 않겠다
孔子至舍, 哀公館之.
공자가 말을 마치고 집에 이르자, 애공은 공자의 집을 관례(館禮)로써 예우하였다.
聞此言也, 言加信, 行加義, 終沒吾世, 不敢以儒爲戲.
이상의 말을 듣고서 말에는 믿음을 더하였고, 행실에는 의(義)를 더하였으며, 애공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감히 선비를 희롱하는 일이 없도록 하리라"고 하였다.
▶️ 寬(너그러울 관)은 ❶형성문자로 寛(관)의 본자(本字), 宽(관)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넓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萈(환, 관)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寬자는 '너그럽다'나 '관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寬자는 宀(집 면)자와 萈(산양 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萈자는 숫 산양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환, 관'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寬자는 본래 넓은 크기로 지어졌던 방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였다. 그러나 후에 사람의 심성이나 배포를 넓은 방에 비유하게 되면서 '너그럽다'나 '관대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寬(관)은 집이 넓다의 뜻이 전(轉)하여 넓다, 마음이 크다의 등의 뜻으로 ①너그럽다, 도량(度量)이 크다 ②관대(寬大)하다 ③관대(寬大)히 용서하다 ④느슨하다, 늦추다 ⑤넓다, 광활(廣闊)하다 ⑥크다 ⑦물러나다, 멀어지다 ⑧떠나다, 멀어지다 ⑨사랑하다 ⑩위로(慰勞)하다 ⑪(옷을)벗다 ⑫줄이다 ⑬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나울 맹(猛)이다. 용례로는 마음이 너그럽고 큼을 관대(寬大), 마음이 넓어 남의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을 관용(寬容), 너그럽고 도량이 큼을 관홍(寬弘), 너그럽게 대접함을 관대(寬待), 너그럽게 다스리는 정치를 관정(寬政), 너그럽고 어짊을 관인(寬仁), 너그럽고 후함을 관후(寬厚), 마음이 아주 넒음을 관광(寬廣), 죄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함을 관면(寬免), 너그럽게 용서함을 관서(寬恕), 앞이 탁 트여 넓음을 관창(寬敞), 너그러움을 관유(寬裕), 법을 너그럽게 적용하는 일을 관법(寬法), 마음을 너그럽게 가짐을 관심(寬心), 너그럽고 자애로움을 관자(寬慈), 죄를 너그럽게 용서함을 관죄(寬罪), 관대하고도 엄격함을 관엄(寬嚴),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음을 관인(寬忍), 기한을 넉넉히 물림을 관한(寬限), 관대한 형벌을 관형(寬刑), 너그럽게 용서함을 관대(寬貸), 너그러움과 엄함을 관맹(寬猛), 너그럽게 억제함을 관억(寬抑), 도량이 넓고 성질이 활달함을 관활(寬闊), 마음이 크고 넓음을 유관(裕寬), 사람에게 관대하면 인심을 얻는다는 말을 관즉득중(寬則得衆), 너그럽고 덕망이 있어 여러 사람의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관대장자(寬大長者), 마음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도량이 넓다는 말을 관인대도(寬仁大度), 깊고 넓은 물에는 큰 고기가 깃든다는 말을 수관어대(水寬魚大) 등에 쓰인다.
▶️ 簡(대쪽 간/간략할 간)은 ❶형성문자로 柬(간), 間(간)과 통자(通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閒(간)은 '틈', '사이' 이고, 竹(죽)은 '대나무'로 앞의 두자를 합(合)한 글자 (日대신 月을 쓴 자)은 사이를 두고 늘어 놓은 대나무의 패목(牌木)을 말한다. 옛날엔 나무나 대나무의 패목에 글자를 썼다. 약속은 그 패목들에 써서 둘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후에 맞추어 증거로 하였다. 증거를 대조하는 데서 '비교해 보다', '알다', '알기 쉽다', '간단', '대충' 따위의 뜻으로도 쓰인다. 더욱이 흩어진 簡(간)을 가죽 끈으로 엮은 것을 冊(책)이라 하였다. 簡(간)은 閒(門+月)을 間(간)으로 쓴 것을 본뜬 모양이다. ❷형성문자로 簡자는 '편지'나 '간략하다' 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簡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間(틈 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間(간)자는 문틈 사이로 달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簡(간)자는 간략하게 쓴 편지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죽간(竹簡)에 글을 썼다. 죽간을 엮어 이어붙이면 篇(책 편)이 되지만 묶지 않는다면 簡(간)이 된다. 簡(간)자는 한 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적지 못했다. 그래서 簡(간)자는 간략한 내용을 적어 보내던 '편지'를 뜻하다가 후에 '간략하다' 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簡(간)은 ①대쪽(댓조각), 댓조각(대를 쪼갠 조각) ②편지(便紙) ③문서(文書) ④정성(精誠), 성의(誠意) ⑤홀 ⑥전동(箭筒: 화살을 담아 두는 통) ⑦무기(武器)의 이름 ⑧간략하다(簡略--) ⑨질박하다(質樸--: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⑩단출하다(일이나 차림차림이 간편하다) ⑪적다, 드물다 ⑫분별하다(分別--), 구분하다(區分--) ⑬대범하다(大汎--) ⑭가리다, 분간하다(分揀--) ⑮간하다(諫--: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다) ⑯검열하다(檢閱--) ⑰깔보다, 오만(傲慢)하게 만들다 ⑱방탕하다(放蕩--) ⑲소홀(疏忽)히 하다 ⑳버리다 ㉑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편지 찰(札)이다. 용례로는 간략하고 또렷함 또는 어수선하거나 복잡함이 없이 짤막함을 간단(簡單), 간단하고 깨끗함이나 간략하고 요점이 있음 또는 간단하고도 실속이 있음을 간결(簡潔), 간단하고 쉬움을 간이(簡易), 손쉽고 간단함 또는 단출하고 복잡하지 아니함을 간략(簡略), 간단하고 편리함을 간편(簡便), 여럿 중에서 골라냄을 간택(簡擇), 간단 명료함을 간명(簡明), 간단하고 수수함을 간소(簡素), 간소하고 소박함을 간박(簡朴), 자기의 소식이나 의사나 용무 따위를 어떤 사람에게 알리고자 써서 보내는 글을 간서(簡書), 간단하고 빠름을 간첩(簡捷), 간단함을 일컫는 말을 간약(簡約), 간결하고 예스러움을 간고(簡古), 가리어 정함 또는 간단하고 깨끗함을 간정(簡淨), 소홀히 하고 업신여김을 간만(簡慢), 뜻이 크고 오만함을 간오(簡傲), 인재를 골라서 추림을 간탁(簡擢), 제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를 살펴봄을 간기(簡器), 거절하기가 어려운 매우 긴요한 부탁을 한 편지를 긴간(緊簡), 편지의 높임말을 화간(華簡) 또는 온간(溫簡), 남편들끼리 주고받는 편지를 아내가 일컫는 말을 외간(外簡), 가정들 사이에서 아낙네가 받거나 보내는 편지를 내간(內簡), 짧게 쓴 편지 또는 내용이 간단한 편지를 단간(短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우리 한글로 쓴 편지를 낮잡아 이르던 말을 언간(諺簡), 간단하고 분명함을 일컫는 말을 간단명료(簡單明瞭), 간단명료하고 직선적이어서 에두르거나 모호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간명직절(簡明直截), 머리를 한 가닥씩 골라서 빗는다는 뜻으로 몹시 좀스러운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간발이즐(簡髮而櫛), 당장 만을 생각하는 얕은 생각 또는 그 자리에서 떠오른 생각을 일컫는 말을 비원요간(鼻元料簡),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종이 대신 썼던 대쪽과 먹 한 방울이라는 뜻으로 종이 조각에 적힌 완전하지 못한 조각난 글월을 이르는 말을 단간영묵(斷簡零墨), 떨어져 나가고 빠지고 하여 조각이 난 문서나 글월을 일컫는 말을 단간잔편(斷簡殘篇) 등에 쓰인다.
▶️ 御(거느릴 어/막을 어, 맞을 아)는 ❶회의문자로 禦(어)의 간자(簡字)이다. 彳(척; 가다)와 卸(사; 멍에를 풀다)의 합자(合字)로, 마차에서 말을 풀어 놓는다는 뜻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御자는 '거느리다'나 '통솔하다', '길들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御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卸(풀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卸자는 사람이 마차에 앉아 채찍질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풀다'나 '부리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부리다'라는 뜻을 가진 卸자에 彳자가 결합한 御자는 '마차를 몰아 길을 가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御자는 '마차를 몰다'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후에 '거느리다'나 '통솔하다', '길들이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1)임금에게 관계된 말의 머리에 붙이어서 공경(恭敬)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거느리다, 통솔(統率)하다 ②다스리다, 통치(統治)하다 ③어거(馭車)하다(수레를 메운 소나 말을 부리어 몰다) ④거둥(擧動)하다(임금이 나들이하다) ⑤짐승을 길들이다 ⑥교합(交合)하다(성교性交하다) ⑦시중들다 ⑧드리다 ⑨권(勸)하다, 종용(慫慂)하다 ⑩막다, 저지(沮止)하다 ⑪제압하다 ⑫마부(馬夫: 말을 부려 마차나 수레를 모는 사람) ⑬벼슬아치 ⑭시비(侍婢: 좌우에 두고 부리는 부녀자) ⑮경칭(敬稱) 그리고 ⓐ맞다(아) ⓑ영접(迎接)하다(아) ⓒ영합하다(아) ⓓ아첨(阿諂)하다(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왕명으로 특별한 임무를 맡아 지방에 파견되는 임시직 관리를 어사(御史), 임금이 거처하는 집을 어궁(御宮), 옥새를 높여 이르는 말을 어새(御璽), 임금이 타는 수레를 어가(御駕), 임금의 화상이나 사진을 어진(御眞), 임금의 글씨를 어필(御筆), 임금의 앞을 어전(御前), 임금이 있는 곳을 어전(御殿), 임금의 이름을 어휘(御諱), 임금의 명령을 어명(御命), 임금의 취지를 어지(御旨), 통제하여 복종시킴 또는 기계나 설비 등을 목적에 알맞도록 조절함을 제어(制御), 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붕어(崩御), 말이나 사람을 생각대로 부림을 가어(駕御), 거느리어 제어함을 통어(通御), 바로잡아 다스림을 독어(督御), 사람을 부리는 것이 말을 부리듯 노련함을 일컫는 말을 어인여마(御人如馬),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안에서 길쌈을 함을 이르는 말을 첩어적방(妾御績紡) 등에 쓰인다.
▶️ 衆(무리 중)은 ❶회의문자로 眾(중)이 본자(本字), 众(중)은 간자(簡字)이다. 人+人+人은 사람을 셋 그려 많은 사람을 나타낸다. 目(목)은 日(일; 태양)이 변한 모양으로, 종의 집단이 태양 밑에서 땀을 흘리며 일 시켜지고 있는 모습이다. 나중에 많은 사람이 한군데를 바라보는 모양, 마음을 합(合)하여 일을 하다, 많은 사람, 많음이라 생각하였다. 더욱 나중에 자형(字形)을 目(목)을 血(혈)로 잘못 써 衆(중)이란 속체(俗體)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衆자는 '무리'나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衆자는 血(피 혈)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衆자는 갑골문에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변화를 거친 글자다. 갑골문에서는 많은 사람이 뙤약볕에서 일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태양 아래에 3명의 사람을 그렸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日(날 일)자가 罒(그물 망)자로 잘못 바뀌게 되었고 해서에서는 다시 血로 잘못 표기되면서 지금 衆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衆자는 본래 사람이 많은 것을 뜻하기 때문에 지금은 '많은 사람'이나 '대중', '백성'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衆자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변화했기 때문에 眾자나 㐺자 众자와 같은 여러 글자가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衆(중)은 ①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②군신(群臣: 많은 신하), 백관(百官) ③백성(百姓), 서민(庶民) ④많은 물건 ⑤많은 일 ⑥차조(찰기가 있는 조) ⑦땅, 토지(土地) ⑧장마(여름철에 여러 날을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날씨) ⑨성(姓)의 하나 ⑩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속(屬), 무리 휘(彙), 무리 도(徒), 떼 부(部), 붙을 부(附), 무리 대(隊), 무리 훈(暈), 무리 조(曹), 무리 등(等), 무리 군(群), 무리 배(輩), 무리 유/류(類), 무리 당(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적을 과(寡)이다. 용례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나 의논을 중론(衆論), 여러 사람의 지혜를 중지(衆智), 뭇사람의 뜻이나 생각을 중지(衆志), 많은 사람들을 중생(衆生), 수효의 많음과 적음을 중과(衆寡), 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을 중자(衆子), 여러 사람을 중인(衆人), 많은 백성을 중민(衆民), 많은 사람의 말을 중언(衆言), 많은 사람들의 뜻을 중의(衆意),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중우(衆愚), 수 많은 교인을 중교(衆敎), 사회를 이루는 일반 사람을 공중(公衆), 수가 많은 여러 사람을 대중(大衆), 다수의 백성을 민중(民衆), 한 곳에 무리지어 모여 있는 사람들을 군중(群衆),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언중(言衆), 강연이나 설교 등을 듣는 군중을 청중(聽衆), 구경하는 무리를 관중(觀衆), 많은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다중(多衆), 뭇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경중(警衆), 어디에 많이 모인 뭇사람을 회중(會衆), 여러 소경이 매질하듯 한다는 뜻으로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린다는 말을 중고지장(衆瞽之杖), 장님 코끼리 말하듯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말한다는 말을 중맹모상(衆盲摸象),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말을 중과부적(衆寡不敵), 여러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렵다는 뜻으로 막기 어려울 정도로 여럿이 마구 지껄임을 이르는 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 뭇사람의 분노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중노난범(衆怒難犯), 여러 사람의 마음이 성을 이룬다는 뜻으로 뭇사람의 뜻이 일치하면 성과 같이 굳어진다는 말을 중심성성(衆心成城)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