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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간의 지독했던 장마가 끝을 맺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태양은 만물을 태워버리기라도 하려는지 뜨거운 빛줄기를 끊임없이 토해낸다.
아, 존나 더워.
1시간. 아까도 지나갔던 커플 한 쌍이 또 한 번 서이준의 앞을 지나간다. 남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함박웃음인데, 여자는 사정없이 인상을 구기고 있다. 깨져버려라.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목구멍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아, 실수. 우뚝, 걸음을 멈춘 남자가 사정없이 서이준을 흘겼다. 자기야, 뭐해. 빨리 가자니까? 짜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를 재촉했다. 와, 한 대 칠 기센데? 뭘 야려. 근데 존나 눈부시네. 그래, 단지 눈이 부셔서야. 서이준이 고개를 숙였다. 꽉 쥐어진 남자의 주먹 때문에 시선회피 한다는 건 철없는 고딩으로썬 많이 쪽팔리니까.
아스팔트 깔린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일고 있었다. 꼭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것 같다. 내 살도 지글지글 익어버리지 않을까? 영양가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화가 치솟았다. 확 가버릴까. 머리끝까지 들끓어 오르는 짜증에, 서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타임 오바였다. 그 것도 한 시간이나. 언제 와, 한도희.
2시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게 쭈욱 뺨에 미끄러졌다. 이미 축축하게 땀에 전 티셔츠가 등에 진득하니 달라붙는다. 불쾌한 냄새가 스멀스멀 코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아. 땀 냄새. 새까만 정수리에서 불이라도 날 것만 같은, 그런 무더운 날이다. 모자라도 쓰고 오는 건데. 잔뜩 열에 달아오른 머리카락을 헤집던 서이준이 순간 제 손을 멈추었다. 아까도 보았던 여자가 또, 또 자신을 지나쳐간다. 다음부턴 내 눈 앞에 띄지 마, 더러운 새끼야. 악에 받힌 여자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 목소리에 서이준의 입 꼬리가 호를 이루었다. 아니, 목소리보다는 그 여자의 말에. 와, 벌써 깨진 거야? 대박.
3시간. 어느새 시계의 시침은 '4'를 가리키고 있었다.
4시간.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답장이 도착했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한도희에게서. 윤재희가 갑자기 불러서, 못 갔다. 미안. 설마 지금까지 기다린 거 아니지? 한도희가 꼭 제게 엿 먹이려 작정한 것 같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이준은 내일 학교에서 녀석의 모가지를 잡고 짤짤 흔들어버려야지, 다짐했다. 아오. 종잇장 구기듯이 잔뜩 인상을 째푸린 서이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녀석을 4시간동안 기다렸을까.
아, 몰라. 내가 알게 뭐야.
그댄 천국보다 아름답다
한도희! 너 이 새끼, 당장 나와. 반 아이들의 시선 전부가, 머리에 핏대가 서 바락바락 악을 질러대는 서이준에게로 향했다. 아, 저것들은 뭘 쳐다보는 거야. “오, 서이준 왔어?” 한도희의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던 윤재희가 아는 체를 해왔다. 윤재희, 윤재희는 참 예뻤다. 학기 초에만 고백을 5번 받았더래나, 뭐래나. 윤재희가 다리를 꼬자,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가 뽀얀 허벅지가 다 드러났다. 팬티가 보일랑 말랑. 언제였나. 매끈하게 잘 빠진 다리와 적당히 풍만한 가슴을, 남자애들은 꼴린다고 표현했었다. 근데 나는 왜 이래. 서이준이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앞 자크를 보는데, 변화가 없다. 조금의 두근거림도 없었다. 나 벌써 비뇨기과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아, 망할. 어느새 서이준의 앞에 서있는 한도희가 낄낄대며 물어왔다. 야, 어제 너 나 기다린 거 아니지? 그제야 서이준의 시선이 한도희에게 향했다. 그런데 한도희의 시선 끝에는 윤재희가 걸려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밖에서 몇 시간동안 기다렸는데. 매정한 한도희. 눈길 한 번 더럽게 안 주네.
“안 기다렸다. 안 기다렸어! 내가 너를 왜 기다려! 얼른 네 반으로 꺼져 버려.”
“아, 근데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지랄이야. 나, 간다.”
새침하게 삐죽 내민 입술이 유난히도 색스러웠다. 아니. 미친. 내가 지금 남자보고 색스럽다 한 건가? 머리가 지끈 거렸다.
x좌표 속도가 20m/s, 비행시간은 4초. S=T×V니까, 아, 뭔 소리야. 공식을 쓰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한도희 이름으로 교과서 한 페이지가 가득 찼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차가운 얼음을 몇 개 연달아 씹어 먹기라도 한 듯, 머리가 지끈 거렸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제발, 정신 차리자. 어느새 까매진 교과서에서 눈을 뗀 서이준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운동장에 서서 손을 흔들던 한도희가 사라졌다 싶더니. 이번엔 복도 쪽에 놓여있는 창문이 한도희를 담아내고 있었다. 진짜 한도희네. 운동장에서 교실까지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잔뜩 붉어진 볼을 하고서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뱉는 데,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묘하게 색스러워.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뚝.
한도희의 이름을 수십 번도 더 쓴 샤프심이 부러져버리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아랫도리가 찡해지는 것 같았다. 침도 꼴깍꼴깍, 절로 넘어간다. 금방 100미터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뭐지. 왜지. 설마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그것도 한도희를?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단지 친구에 불과한 한도희를 보며, 남자가 여자에게 반했을 때의 기분을 느껴지는 거야. 비뇨기과 대신 정신과에 가야 하나?
수십 개의 생각이 머리에서 엉켜드는데도 한도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 나 진짜 왜 이래. 자신을 뻔히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한도희가 자신에게 향해 있는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이내 서이준과 한도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이준이 반가웠는지 반달로 휘어지는 한도희의 눈을 바라보다, 서이준이 ‘홱’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한도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큼큼. 헛기침 두어 방이 허공에 맴돌았다. 탁. 이내 꽤나 큰 소리를 내며 5교시 과목 선생님이 교과서를 덮었다. 그러고는 반 전체를 쓰윽 훑어보았다. 배부름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5교시. 절반 이상이 쏟아져오는 잠을 이기지 못한 채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쯧쯧. 조용한 반에 혀를 차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오, 물리. 오늘은 뭐 때문에 이렇게 빨리 끝내준대. 서이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선생님께선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학생들을 한 번, 그리고 밖에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한도희를 한 번 훑었다. 그러고선 또 한 번 조용히 혀를 차더니 이내 교과서를 챙겨들고 나가 버리셨다. 야, 윤재희! 그와 동시에 윤재희를 애타게 부르며 한도희가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뭐야, 왜 날 먼저 안 찾는 거야.
"윤재희, 아이스크림 먹을래?"
"야, 한도희. 내 것은 어디 갔어?"
"네가 사 먹어, 새끼야"
예쁜 윤재희와 한 번 사귀어 볼까, 한도희가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섭섭했다. 어느새 부턴가 자신보다는 윤재희를 먼저 챙겨주는 한도희에게 섭섭했다. 윤재희가 너무 미웠다. 예쁘면 다야, 씨발. 원래 한도희에게 내가 먼저였는데. 쀼루퉁하게 입을 쭉 내민 서이준이 책상에 엎드렸다. 내가 왜 섭섭한 거지. 나, 진짜 한도희를 좋아하나? 혼란스러운 생각을 접기 위해 눈을 감았는데, 오히려 한도희와 윤재희의 대화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심장이 찌릿찌릿했다. 나는 한도희가 아닌 윤재희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금 느껴지는 섭섭한 감정의 원인은 윤재희고, 질투의 대상은 한도희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윤재희가 나가려나보다. 아아. 아마, 한도희도 같이 나가겠지. 윤재희, 나랑 땡땡이 칠거니까 선생님한테 양호실 갔다고 구라 좀 잘 까줘. 진짜 가네, 한도희. 엎드려있는 서이준에게 한도희가 속삭였다. 미웠다. 자신은 이렇게 무거운 생각에 짓눌려있는데. 윤재희, 이 싼년. 한도희랑 사귀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살짝 들어 한도희와 윤재희를 흘끗 훔쳐보았다. 서로의 손을 잡고 환히 웃고 있는 둘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타악. 큰 소리를 내며 닫힌 교실 문은 이내 윤재희와 한도희의 흐릿했던 모습마저 지워버렸다. 한도희를 감추어버린 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서이준이 책상에 엎드렸다. 잠이나 자자.
“이 녀석, 여기가 느이 반이냐? 수업 시작했는데 얼른 반으로 안 가?”
“아, 쌤. 죄송해요!”
한도희의 목소리에 서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6교시 과목 선생님께 걸린 건지 꽤나 큰 목소리가 닫힌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서이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윤재희, 걸려라. 그래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걸려라, 윤재희. 그런데, 곧이어 들어온 6교시 담당선생님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빈자리의 주인을 물었다. 저기 빈자리 누구야. 노기를 띠고 있는 목소리에, 나랑 땡땡이 칠거니까 선생님한테 양호실 갔다고 구라 좀 잘 까줘, 한도희의 목소리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섞여 들려왔다. 아, 망할, 윤재희. 엿이나 먹어라.
"저 자리, 윤재희인데 어디 간지 몰라요. 아까 쉬는 시간에 나갔는데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럼 무단 결과네. 윤재희 오면 교무실로 오라고 그래. 자, 66페이지 펴라. 선생님의 말씀에 교과서를 보는데, 수업내용은 온데간데없이 한도희와 윤재희의 얼굴이 그려졌다. 아, 제발. 윤재희의 얼굴이 점점 옅어져간다. 그리고 어느새 한도희의 얼굴만 남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저 친구라 생각했던 한도희가, 이제는 친구와 연인의 금에 놓여있다. 친구였고, 친구이고, 친구이길 바란다. 한도희의 이름으로 빽빽이 채워진 교과서를 보고서야, 자신이 여태껏 한도희의 이름만 적고 있단 걸 자각했는지 잔뜩 놀랜다. 투둑. 샤프가 그대로 떨어졌다.
나는,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한도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도희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 모습을 지우려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이번에는 한도희의 웃는 모습이 그려진다. 교탁에도, 복도 쪽 창문에도. 그 어느 곳에도 한도희가 서있다. 결국, 서이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완전 병이네, 이거.
그대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민복, <가을>
머리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렉 때문에 미동도 않는 컴퓨터 화면이랄까. 한도희의 이름만 써진 채로 렉에 걸렸는지, 작동을 멈추어버렸다. 컴퓨터는 강제종료하면 되던데. 머리도 강제종료 할 수 없나. 강제종료 한 김에 포맷까지. 깨끗하게. 아, 내 머리, 존나 후져. 어떻게 되는 게 없냐. 드르륵.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핸드폰이 부질없는 생각을 깨어버렸다. 윤재희다. 지가 뭐라고 나한테 문자질이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메뉴-삭제. 선택된 항목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삭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왠지 윤재희의 입에서 '나, 한도희랑 사귀기로 했어'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아, 망할 윤재희.
드르륵. 메시지 도착.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0403. 07/13[금] 03:20P. 한도희.
[야, 나 지금 고백할 건데. 잘되라고 빌어라]
진짜, 망할 윤재희. 둘은 어떤 모습으로 들어올까. 일번, 손을 잡고 온다. 이번, 팔짱을 끼고 온다. 삼번, 반 문 앞에서는 굿바이뽀뽀를 한다. 사번, 한도희가 윤재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들어온다. 에이, 씨발. 보기들이 왜 이래.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화에 서이준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엎드렸다. 오기만 해봐라, 한도희.
그댄 천국보다 아름답다
눈을 떴더니, 한도희가 앞에 서있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이 대빨 나온 채로. 뭐냐, 한도희.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자마자 야리는 건데. 서이준의 짜증 섞인 어투에 분홍빛 도는 한도희의 입술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나, 차였어. 풀이 죽은 한도희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댔다. 차였어, 차였어. 서이준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그러게, 내가 그 년 별로라고 했잖아. 윤재희, 이 남자, 저 남자, 엉덩이나 살랑대는 여우같은 계집애라고. 물기 머금은 눈동자가 서이준에게 향했다. 꼭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때려줘? 웅얼웅얼.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옹알대는 것 같아 귀여웠다. 품에 안고 싶을 만큼.
윤재희, 좋아하는 애 있대.
그게 누군데? 누구래, 한도희?
모르겠어. 걔, 잡히면 가만 안 둬.
서이준, 너도 그 새끼 때려줘.
알았어, 알았어. 존나 패줄게.
그댄 천국보다 아름답다
덥다. 정말 덥다. 이번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100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라는 예쁜 기상캐스터 누나들의 말처럼. 출석체크를 하려 들어온 담임선생님께 학생들이 입 맞춰 "선생님, 더워요. 에어컨 좀 틀어요." 말했더니. 선생님은 자연을 위해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자며, 얄밉기 짝이 없게 웃어보이고는 반을 나가 버린다. 와, 대박. 교무실은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진짜, 너무 더워, 몸에서 불이 날 것만 같은데.
반 곳곳에서 하염없이 부채질 하는 손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도 시선은 문제집에 박혀있다. 아, 쩔어. 꼴에 고3 이라고. 나도 고3인데. 난 뭐지. 애들 따라, 공부나 해볼까 싶어 문제집을 폈더니, 무슨 과목부터 해야 되나, 고민에 빠졌다. 수리를 할까? 외국어? 아님, 과탐부터 해볼까? 물리1? 물리2? 아니면, 일단 노트 정리부터 할까? 아니지. 교과서 정리를 할까? 곧 검사 한다던데. 일생일대의 겁나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쿡쿡, 등을 찔렸다. 윤재희의 손가락에. 여전히 싫지만. 너무나 고맙게도 한도희를 차준 윤재희가. 서이준. 하고 불렀다.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목 언저리에 입김을 훅훅 내뱉는다. 좀 축축하고 더운, 그런 불쾌한 느낌에 가재미눈을 하고 째렸더니, 윤재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킬킬 웃어댔다.
"잠시만 나와 봐." 눈을 게슴츠레 깔고는 속삭이길래. 야, 너 아라-아이라인- 번졌다. 고쳐. 하고 말했더니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버린다. 그런 윤재희를 신랄하게 비웃다가, 문득, 정말로 갑자기 한도희의 말이 생각났다. ‘윤재희, 좋아하는 애 있대.’ 누구지. 윤재희가 한도희를 차게 해준 그 고마운 인간이 누굴까, 궁금해졌다. 만나면 밥 한 끼 정돈 쏴야지. 너무나도 고마운 분이신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암.
"야,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아, 으응. 어떻게 알았어?"
왜 갑자기 말꼬리를 늘리고 지랄이야, 툭 쏘려다, 묘하게 붉어진 윤재희의 얼굴이 거슬려,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삼켰다. "우리 학교야?" 물었더니, 윤재희가 수줍게, 정말로 수줍은 소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성인은 아니니 소녀가 맞기는 하지만. 아, 왜 저러는 거야, 싶을 정도로 윤재희의 모습이 낯설었다. 치명적인 척 하던 윤재희가 웬 일이래. 부끄럽기라도 하나. "우리 반이야?" 내 질문에 윤재희는 긍정을 표해보였다. 대박. 우리 반이었어? 우리 반에 인물이 어디 있다고? 취향이 뭐, 공부 잘하는 모범생, 그런 건가.
그게 이상형이라면, 한도희를 찬 윤재희를 백번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한도희가 공부는 좀, 아니니까. 그래도 얼굴은 대박인데. 남잔데도 예쁘고, 또 묘하게 색기도 있으니까. 내 눈엔 그렇게 보이던데. 아, 나만 그러나. 머릿속으로 한도희의 얼굴을 조목조목 그려보는데, 어느새 야자 1교시가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럼에도 우리 반은 누구 하나 일어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문제집만 보고 있었다. 와, 우리 반은 네 이상형 천진데? 물론, 나는 빼고.
이 중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가 누구더라. 반 애들을 쭈욱 훑던 서이준의 시선이 멈추었다. 반 창문을 기웃거리며, 윤재희를 훔쳐보는 한도희에게로. 쪽팔리는 짓은 죽어도 싫다더니, 몰래 훔쳐보기냐. 한도희의 시선이 서이준과 맞닿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한도희가 손을 흔들었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들켜 부끄러운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웃어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서이준!” 윤재희보다 자신을 먼저 불러주는 데도 웬일인지, 한도희가 반갑지 않았다. 도리어 무척이나 미웠다. 아, 윤재희가 뭐 그리 좋다고. 지 좋아하지도 않다는데. 게다가 좋아하는 애도 따로 있다는데. 한도희, 이 찌질한 새끼. 어떻게 눈을 못 떼냐. “걔한테 고백해봐. 꼭 사겨버려라” 이를 부드득 갈며 윤재희에게 말했다. 꼭 그 새끼랑 잘 해보라고. 한도희 말고.
서이준을 부르던 한도희의 입술이 결국에는 “윤재희”를 불렀다.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만 같다. 비참함인가? 아니면, 자괴감? 모르겠다. 내가 정말로 남자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한도희를, 내가 한도희를 좋아하는 건가. 설마. 아, 내가 아는 게 뭐야. 한숨이 터졌다. 나는 언제나, 내가 한도희를 좋아 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세상을 등지고서, 한도희만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용기가 어디 있어. 손가락질 받으며 사랑하느니, 사랑, 아예 안 하고 말지.
“이준아, 나중에 얘기하자.”
“야, 나랑은 이제 아는 체도 안하기로 한 거냐?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니까. 사귀자. 내가 너 많이 좋아해.”
그런데 윤재희에게 향해있는 한도희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아릿한 게. 내가 아무래도 한도희를 좋아하긴 하나 보다. 망할. 진짜 망할이다, 서이준. 나랑 같은 게 달린,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미친 놈. 정신이 나간 놈. 돌은 놈. 공부만 하다 보니 미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뭐, 일탈을 꿈꿔 보는 고3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성애는 심하다, 서이준. 분명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성당에 데려가겠지. 오, 하나님을 연거푸 외칠 거다. 아, 그 전에 쓰러진다는 가정이 빠졌네. 엄만, 내 손을 잡고 펑펑 울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라, 눈물이 말라버리기 전까지 울겠지. 내가 아팠을 때마다 그랬으니까.
그럼 아버지는? 아버진 뺨이라도 갈기려나. 아니면, 제일 아끼시는 골프채로 후려 패거나. 눈앞이 까매졌다. 누군가가 실수로 검은 페인트를 엎어버린 듯, 너무 까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윤재희가 꽤나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는 서이준에게 시선을 놓는다. “한도희, 내가 좋아한다는 사람.” 이라며 운을 띄운 윤재희는 서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한도희가 윤재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 안 그래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왜 쳐다보는 거야, 젠장. 볼멘소리가 입 안 가득을 메웠다. 한도희의 눈가에 노기가 서리는 것 같아 불안했다. 왜 그런 눈빛을 하고서 쳐다보는 거지. 불안해졌다. 윤재희의 입에서 튀어나올 뒷말에. 아, 역시나.
“서이준이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윤재희?”
“내가 좋아하는 애, 서이준이라고. 서이준이 자기한테 고백해주래. 잘해보자고.”
윤재희, 좋아하는 애 있대.
그게 누군데? 누구래, 한도희?
모르겠어. 걔, 잡히면 가만 안 둬.
서이준, 너도 그 새끼 때려줘.
알았어, 알았어. 존나 패줄게.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지. 서이준. 날이 선 한도희의 목소리가 화살마냥 가슴에 푹푹 꽂히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 피가 줄줄 흐를지도 몰라. 그 한마디가 너무 아파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아. 너무 억울했다. 나는 아무 잘못 없는데. "서이준, 우리 사귀자." 연타로 터지는 윤재희의 말에 서이준은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제발.
둘이 노는 공간, 보고싶어?
<http://cafe.daum.net/ouijemanquertoi>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제가 다 애정하고 있어여♥
그리고 천국과 찌지리 이준이를 많이 아껴주는 염이에게 감사하단 말☞☜
1편 쓴지 한달만에 개봉하네여. 성실연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겟슴다!
업쪽 천국
첫댓글 천국♥
아 내사랑 이주니♥ 너무너무 좋다.ㅠㅠ 도희말고 날 좋아해주련...? 담편도 기대할겜!!!
☞♥☜
너가 이주니를 좋아할 수록 찌지리로 만들겟어.. 성실연재를 꿈꾸ㅓ보겟슴다..
천국/헉그냥달달하네요잉저까지후끈더워지는기분!
☞♥☜
달달하단 말 처음 들었지만 느무 고마워요ㅠ.ㅠ 사실 달달한 소설이 아니고 좀 축축 처지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았슴다. 이준이랑 도희 많이 조아해주세여^.^
천국♥ 재밌는데요? 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