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갯가로 나가
구월 첫째 수요일이다. 새벽녘 잠을 깨 음용하는 약차를 달여 놓고 전날 펼친 ‘나도 노인이 된다’를 마저 읽었다. 퇴계에 이어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네 분 학자가 보낸 노년기를 서책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다니는 동네 내과에서 두 달에 한 번 혈당 측정을 위해 채혈하는 날이다. 공복인 채 찾아가야 해 아침밥은 거르고 현관을 나서 아파트단지 이웃 동 뜰 꽃밭에 먼저 들렀다.
친구 꽃대감과 밀양댁 안 씨 할머니는 꽃밭에 내려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꽃 가꾸기가 취미인 밀양댁은 꽃밭을 조성하던 초기에 금관화가 무척 예뻐 꽃집에서 값을 비싸게 치르고 사다 날라 심어 가꾸었단다. 지나고 보니 이웃 꽃대감은 꽃씨 파종으로나 어린 순 꺾꽂이로 꽃모종을 수월하게 길러내 신기하더란다. 친구와 할머니는 같은 라인 엘리베이터를 타는 위아래 사이다.
두 사람과 헤어져 반송 시장 내과와 약국을 들른 뒤 한 가지 일이 더 기다렸다. 우체국을 찾아 우편 취급 코너에서 택배를 한 건 발송했다. 올여름 산행을 다니면서 숲에서 찾아내 베란다에서 말린 영지버섯을 울산 친구에게 보내는 작업이다. 아흔 살을 바라보는 모친과 친구가 차로 달여 먹을 건재였다. 말린 영지 봉지를 종이상자에 포장해 택배 발송을 마치고 산행 걸음을 나섰다.
마산역 광장으로 나가 번개시장 들머리 간이식당에서 선짓국밥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했다. 그 집에서 점심으로 삼을 김밥을 준비해 배낭에 채워 원전 갯가로 가는 62번 농어촌버스를 탔다. 어시장과 댓거리에서 밤밭고개를 넘어 현동 신도시 아파트단지를 지났다. 구산면 소재지 수정에서 백령고개를 넘어 5호선 국도가 연장 개통된 로봇랜드 근처로 가자 욱곡마을 앞바다가 드러났다.
국도 5호선은 예전 마산시청에서 창녕과 대구를 거쳐 중부 내륙을 관통해 미수복지구 압록강 중강진에 이르는 국내 최장 국도 노선이라고 들었다. 이후 거제 연초까지 연장되어 해상은 미개통으로 남겨두고 최근 로봇랜드가 개장되면서 구산 심리까지는 새로운 길이 시원스레 뚫렸다. 내가 원전 갯가로 나가 오르려는 산은 천등산으로 벌바위 둘레길 구간 도중 야트막한 산등선이다.
낚시꾼들에게 낚시터로 널리 알려진 원전 종점에 닿아 내 나이 비슷한 한 사내와 같이 내렸다. 마을 골목 안길에서 비탈을 따라 올라가니 예전에 보이지 않던 펜션이 몇 채 들어서 있었다. 산기슭에 칡넝쿨이 덮친 언덕은 오래전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장 터였다. 구산면 소재지로부터 30리도 더 떨어진 갯가에도 예전에는 주민이 상당수 살았고 취학 학령기 아이들도 있었을 법했다.
천등산 벌바위 둘레길로 오르는 들머리 숲에서 풋머루와 짚신나물이 피운 노란 꽃을 봤다. 등산로는 여름 산행객이 적게 다녀선지 길이 묵혀지다시피 했다. 인적이 없는 숲길 바닥은 멧돼지가 주둥이로 파헤쳐, 경운기가 로터리를 쳐 놓은 듯했다. 지렁이나 굼벵이를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멧돼지가 조금 전까지 놀다 간 흔적이었다. 산마루로 올라 진해만을 바라보고 전망대로 갔다.
북동쪽은 마산과 진해가 드러나고 남쪽 바다 건너편은 거제섬의 산들이 에워쌌다. 연전까지 내가 교직 말년을 거기서 보내면서 빠짐없이 발자국을 남겼던 산봉우리였다. 쉼터에서 김밥과 얼음 생수를 비우면서 담은 풍광 사진을 몇몇 지기들에게 날려 보냈다. 배낭을 추슬러 천등산 산마루를 따라가니 멧돼지 한 마리가 내 바로 앞을 가로질러 재빠르게 사라져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산마루에서 하산길 이정표를 따라 얼마간 비탈을 내려가니 원전항 낚싯배가 묶여 있는 포구가 나왔다. 부둣가는 수년에 걸쳐 많은 예산이 들어갈 원전항 개발 공사 현장 사무소가 보였다. 아까 내렸던 종점에 이르니 내가 타고 갈 버스는 시내에서 들어오는 중이었다. 마을 어귀 텃밭에 자란 배초향에 핀 보라색 꽃에는 한낮 더위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꿀을 빨고 있었다. 2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