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전성우(사진 왼쪽) 군과 함께 처음으로 윤영국(사진 가운데) 군의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2층 윤 군의 방에서 환담을 나누며 그가 틀어준 음악을 들었는데, 대형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오는 음악은 처음 듣는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확인해보니 차이코프스키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안단테 칸타빌레>였다. 가슴 그득 고이던 그때의 감흥을 잊을 수 없어 요즘도 장한나가 연주하는 <안단테 칸타빌레>를 종종 듣는다. 중학교 때도 석진환 선생님 덕분에 녹음기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억에 남는 건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운명)>뿐이었다. 이후 자주 윤 군의 방에 모여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음악‧문학‧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관심사를 논의하곤 했다. 윤 군은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어온 터라 내가 클래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셋이서 송죽극장 뒤편에 있는 음악감상실 <하이마트>에도 종종 갔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차 한 잔에 제한 없이 음악을 신청하여 듣는 곳이었다. 아는 곡이라곤 달랑 <운명>뿐이어서 갈 때마다 그 곡만 신청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차를 가져다주고 신청곡 용지를 거둬가는 누나가 미소를 지으며 ‘운명 왔나?’ 하고는 바로 그 곡을 틀어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운명>은 참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곡이다. <운명>은 KBS FM <클래식 채널>에서 조사한 청취자 애청곡 가운데 상당 기간 1위를 유지한 곡이기도 하다. 이후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황제)>과 <피아노 소나타 제14번(월광)>이 뒤를 이어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곡은 바뀌어도 악성 베토벤의 위상은 불변인 셈이다. 영국에서는 조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자국 태생의 본 윌리엄스(1872~1958)가 좋아하는 음악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니, 브렉시트에서도 보았듯이 영국인들의 국수주의는 알아줘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을 거쳐 간신히 임대아파트를 장만한 약 13년 동안은 음악과 담을 쌓고 지냈다. 아내는 라디오로 틈틈이 음악을 들었지만, 나는 아예 음악을 잊고 지냈다. 술 마시느라 음악 들을 시간이 없었다는 게 정확한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내 정서가 얼마나 삭막했을까 싶어 공연히 자신에게 미안해진다. 단 한 곡, 서귀포 옵서게바에서 술심부름을 할 때 저녁마다 홀에 음악을 틀어놓으면서 귀에 익숙해진 프랑스 경음악 <La Playa(번안 제목 ; 안개 낀 밤의 데이트>가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다. 1977년 화곡5동 주공아파트에 입주한 뒤 아내가 어디서 중고 전축을 한 대 얻어와 LP판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다시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바로 위 오빠 덕분에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었던 아내의 음악 갈증은 나보다 훨씬 심했으리라. 그 처남은 20대 초반에 <예그린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에 두루 정통했었다.
아내는 틈만 나면 전축을 틀어놓고 음악을 들었고, 월급의 상당 부분을 LP판 구입에 썼다. 구입하는 판은 주로 베토벤과 모차르트, 이따금 파바로티나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아리아 등이었다. 나중에는 뉴에이지 음악에 관심을 보여 사라 브라이트만, 케니 G, 야니 등의 판을 사서 듣기 시작했다. 덕분에 맨날 술에 절어 늦게 귀가하는 나도 귀동냥으로 제법 클래식 음악에 젖어들어 갔다. 1980년대 초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이끌고 내한하여 국내에서 마지막이 된 연주회를 개최했을 때는, 큰맘 먹고 4만원짜리 표를 한 장 사서 아내를 보냈다. 월급이 10만원 남짓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두 장을 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여 이따금 감사인사를 한다.
음악이론을 공부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한양대 음대 교수 장일남 선생 덕분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즐겨 부르던 <기다리는 마음>과 <비목>의 작곡가가 장 선생이란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즉각 감사 편지를 보냈다. 척박한 인생에 두 노래 덕분에 큰 위안을 받고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오래지 않아 만년필로 오선지에 쓴 답장이 왔는데, 두 곡이 포함된 LP판 한 장과 「월간 음악동아」 한 권이 동봉되어 있었다. 더욱이 「월간 음악동아」는 6개월 치를 무료로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나보다도 아내가 더 좋아하여 「월간 음악동아」는 이후에도 몇 년을 정기구독 했었다. 작사‧작곡가와 그 곡을 지을 때의 내력까지 알고 들으니 뜻도 잘 모르고 음악을 들을 때보다는 귀가 열리는 듯했다. 부족하나마 서양음악의 흐름과 작곡가들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을 쌓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헨델의 작품번호 BWV, 모차르트의 작품번호 K, 슈베르트의 작품번호 D 등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음악적으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매개는 KBS FM의 <클래식 채널>이다. 1990년대 초 출판사 사장이 사전 언질도 없이 차를 사줬을 때, 내 평생 처음 차를 가지게 된 기쁨보다 매일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더 반가웠다. 화곡동에서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초동에 있는 출판사까지 출퇴근을 했는데, 음악 듣는 재미에 웬만큼 차가 막혀도 짜증스럽지 않았다. 그때는 성우 김세원 씨의 해설이 최고였다. 그녀가 어느 날 독일 유학을 떠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바턴을 넘기는 바람에 몹시 서운했던 기억이 상굿도 생생하다. 독일음악을 제대로 알고 해설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노라는 그녀의 고별인사를 들으면서, 그녀나 보내주는 가족들이나 참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주로 아나운서나 성우가 하던 해설을 유명 연주자나 성악가가 대신 진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차는 바뀌어도 고정채널 1번은 변함없이 93.1㎒에 맞춰놓고 시동을 켤 때부터 끌 때까지 줄창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우리 부부의 대화에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따금 함께 공연도 보러 다닌다. 예술의 전당이 가까이 있으면 자주 다니련만, 허리가 시원찮은 아내에게 서초동은 화성만큼이나 멀다. 카세트테이프를 거쳐 한동안 CD를 듣더니, 요즘은 큰애가 사준 iPod에 음악을 다운받아 들고 다니며 듣는다. 무능한 남편 만나 인생의 많은 부분을 접고 사는 처지에, 그나마 음악 덕분에 얼마큼 시름을 더는 듯하여 다행스럽다. TV에서 방영하는 「K-Pop 스타」「복면가왕」「네 목소리가 보여」 등도 아내가 재방, 3방까지 즐겨 보는 프로다. 그 가운데 나는 「K-Pop 스타」를 가장 감명 깊게 보았다. 심사위원 박진영의 날카로운 지적과 깊이 있는 음악이론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제4회 우승자 케이티김과 제5회 출연자 유제이 같은 순박한 재미교포 아이들이 주는 감동도 크다. 올해 제6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는 모양인데, 언제 또 그런 좋은 프로가 나올지 자못 서운하다.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고급 한정식집들이 서둘러 문을 닫고 있다는 보도다. 10만원을 넘는 고급 한정식집의 主고객이 대부분 공직자들이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전국의 고급 한정식집은 대부분 세무서를 비롯한 관공서 인근에 몰려 있다. 공직자들이 지 돈 내고 10만원이 넘는 식사를 할 까닭은 없을 터, 부정한 청탁을 위한 접대 아니면 국민 혈세로 즐기는 회식일 것이다. 9월 28일에 시행될 법의 영향으로 벌써부터 한우 가격이 하락하고 대형 꽃밭을 갈아엎고 있단다. 인삼 재배 농가, 송이 채취업자, 조기잡이 어부들의 엉거럭도 들린다. 그 동안 이 나라 공복들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말해주는 현상들이다. 실제 국제투명성기구 조사에서도 한국 공직자들의 투명성은 OECD 34개국 가운데 27위로 부패지수가 높다. 일시적으로 농어민들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청렴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공복들의 부패에 기대어 먹고살려는가. 그러나 불쾌지수 올라갈 일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영란법은 국가청렴도 상승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害의원들이 법을 만들면서 上도둑놈들인 스스로를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니 그 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첫댓글 그래도 자네는 그런 낭만의 시절이라도 있었네 그려.
나는 그 시절에 학창을 접고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가서 그냥 걸어서 들어가면 빠져 줄을 수도 있을까 하는 그런 허망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