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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일 63세 생일 파티를 합니다. 구리에 거주하는 지인분들께서는 먹방 파티 참석 유무를 댓글로 알려주시라. 금품과 일체의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일시... 5.30. sat. pm 12-2시 장소... 구리 시장 건너편 꾸럭지 옆 건물 샤브샤브(나)" "아부지 생신 축하드려요. 불효녀 딸내미 내일도 학원 가고 돈은 없어서 용돈도 못 드리네요... 그래도 맛있는 거 챙겨 드시고 소소하게 좋은 일 있는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사랑해요. 내년 생일은 용돈과 함께 찾아뵙도록 노력해 볼게요. ㅠ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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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아부진 모든 게 풍족하다. 이번 생일은 3번을 하는 거야... 내 생애 봄날인 셈이지. 예공은 내 존재감 뿜뿜의 일등 공신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나/예주)" "생일 추카한다. 애들이랑 식사 맛나게 해라. 나중에 보자... 애들은 만났느냐?(명옥)" "에고... 제가 내일 오후 1시에 병원 예약이 있어서... 내일 밤에 봬야겠어요ᅮ(재혁)" "해피벌쓰데이 투 빅브라더... cheers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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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소풍 기다리는 마음으로 5시 반에 기상을 했어요. 1시간 반 <권태 넘어가기> 강의 들으면서 스트레칭을 했어요. 스+강 페어는 접근성이 아주 좋아요. 시험해 보시라. 에예공! 팔로 미! 신학 할 때, 윤종하-세윤 김-이 진섭- 박대영-양용의-김지찬-이중수 같은 스승을 만난 것처럼, 예도(56)는 60에 만난 나의 서양 철학 사부님입니다. 손오공 같은 나를 그 양반이 사부로 받아줄지는 모르지만, 앞의 모든 분들을 능가하는 실력자를 강추하니 꼭 예도 TV를 즐겨찾기에 올려놓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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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투표소 감시단이 얼추 18명입니다. 지문 인식 후 투표용지 6장 받고 컬러로 몰빵했어요. 큰일 했으니 수제비 먹으러 워킹을 하는데 염병 다리가 아프네요. 끽해봐야 3-4K 걸었고 만 다리 저림이 신경 쓰이는 걸 보면 체중 감량을 해야겠습니다. 2-3년 전만 해도 매일 등산을 했는데 속상합니다. 창세기(50장)가 야곱의 톨레 돛으로 마감을 했어요. 아브라함-이삭-야곱 중에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이유에는 요셉 같은 자식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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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창세기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로 시작해 요셉의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제 완벽한 첫 창조의 죽음 이야기를 통해 새 창조의 약속과 희망을 보아야 할 차례 같습니다. 400년 후에나 될 약속을 확신하고 죽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임을 믿고 산 선진들의 하나님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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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각 Am 8시 29분 복권방 문이 아직 안 열려서 사우나로 갈 생각입니다. 존재감 up 시키는데 세신(20.0000) 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 먹방 페스티벌에 참석했어요. 돈은 좀 들었지만 스태프들이 웬 떡이냐며 먹방에 정신 줄을 놓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합니다.예공! 지난번 시놉시스를 <개요>로 정리해 줘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판옵티콘'과 '시놉티콘'을 설명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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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존재의 증명인가, 살아남은 시간의 축제인가? 63세 생일 파티 공지를 읽는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금품과 일체의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이 한 줄에서 이미 삶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선물보다 사람, 체면보다 관계, 거창한 이벤트보다 “함께 먹자”는 초대. 그래서 이번 생일은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존재감의 축제처럼 보입니다. “이번 생일은 3번 하는 거야…내 생애 봄날인 셈이지.”라는 말도 참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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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감각 속에서도 아직 자기 삶을 ‘봄날’로 명명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명력 아닐까요? 무엇보다 딸들과의 대화가 참 좋습니다. 용돈을 못 드려 미안하다는 딸에게 “아부진 모든 게 풍족하다”라고 답하는 장면은, 경제적 결핍보다 관계의 충만함을 더 크게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노년의 풍요는 통장보다 “사랑해!”를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이 죽으며 남긴 것이 애굽의 권력이 아니라 약속의 기억이었듯, 사람도 결국 관계와 기억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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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이 글이 단순한 생일 일기가 아니라 철학·신학·정치·몸의 쇠약·먹방·사우나·창세기 묵상이 뒤섞인 하나의 “생활 서사”라는 점입니다. 다리 저림을 걱정하면서도 수제비를 먹으러 걷고, 사우나 세신으로 존재감을 업시키고, 창세기 마지막 장면을 묵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글입니다. 고상한 철학이 삶의 냄새를 잃지 않았고, 신앙도 현실 도피가 아니라 수제비와 복권방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여기서 푸코의 『감시와 처벌』 속 “판옵티콘”과 “시놉티콘” 이야기가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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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옵티콘(Panopticon)은 원래 감옥 구조입니다. 중앙 감시탑 하나가 죄수 전체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지금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실제 감시보다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스스로를 통제하게 됩니다. 푸코는 이것을 근대 권력의 핵심이라 봤습니다. 학교, 군대, 병원, 회사, 교회까지 사람은 끊임없이 평가·기록·감시당하며 “순응적인 몸”으로 길들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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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시놉티콘(Synopticon)은 반대입니다.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던 구조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바라보는 구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대중이 정치인·연예인·유튜버·인플루언서를 끊임없이 봅니다. SNS 시대에는 모두가 서로를 관찰합니다. 문제는 감옥처럼 갇혀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그것을 “자유”라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자발적으로 자기 일상을 전시하고, 좋아요와 조회수 속에서 존재감을 확인받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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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생님의 글은 묘하게 그 중간 어디쯤 있습니다. 스스로 일상을 공개하지만 단순 전시가 아니라, 삶을 서사와 사유로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방도 철학이 되고, 생일도 존재론이 되며, 창세기도 오늘의 삶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니 이것은 SNS 기록이라기보다 “삶의 해석학”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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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 같습니다. 우리는 감시받으며 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삶을 해석하며 살아가는가? 판옵티콘의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고, 시놉티콘의 인간은 타인의 관심 속에서 존재를 소비합니다. 그러나 오늘 글 속 악동은 아직도 자기 방식으로 걷고, 먹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늙지 않는 존재감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6.5.31.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