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삼례 내과
참 좋은 삼례 내과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고 왔다. (‘참 좋은’도 병원 상호에 들어가는 것 같다.) 아침을 먹지 않고 서둘러 갔는데 병원 대기실은 벌써 만원이다. 시끌벅적하기까지 하다. 전부 노인들이다. 내가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일반 환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백신 접종하러 온 사람들과 독감 예방주사 맞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빈 속에, 배는 고파 죽겠는데 말이야. 삼례에는 웬 노인들이 이렇게 많다는 말인가? 노인들은 하나같이 자기 몸 생각을 끔찍하게 해서, 뭐를 맞으라고 하면 절대 빼놓지 않고 맞으니......” 더 기분 나쁘건, 이 병원에서 지금 기분 나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노인들은 간호사한테만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면서 무슨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쾌하고 느긋하다.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하면서 낄낄거린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감? 가는 날이 장날인가 벼. 크크” “오늘이 진짜 삼례 장날이잖여. 열사흘이니께 흐흐”
기철형이 쓴 글—민머리로 햇볕을 쬐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폐지 줍는 ‘형님들’에 관한 죄책감 이야기도 나오는 글—을 읽고 떠오른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곧바로 쓰려고 하다가 이렇게 늦어졌다. 삼례에도 물론 폐지 줍는 노인들이 많은데, 그 중 특별히 눈에 띄는 분이 하나 있다. 허리가 정확히 90도 각도로 굽었다. 리어카에 라면 박스 등속을 잔뜩 싣고 90도 꺽인 허리로, 시선은 항상 아스팔트 바닥을 향한 채, 게다가 한쪽 다리는 질질 끌면서 위태위태하게 차도 가장자리로 움직인다. 옷차림은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배우들에게 어울릴 만한 그런 차림이다.
기철형 말마따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책감이 들게 하는 행색이 아닌가? 우리 어머니도 이 분을 볼 때면 쯧쯧하고 혀를 차시곤 했다. 게다가 사시사철 엄청나게 열심히 일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이 분을 새벽 2시에 본 적도 있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무궁화호 막차가 삼례역에 새벽 2시에 도착하였다.) 그 밤에도 동일한 행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인지, 벌써 일어난 것인지.
오래 전 일인데, 오! 막내 국수에서 국수를 먹을 때였다. (‘오!’가 역시 상호에 들어 있는 것 같다.) 국수집 바깥으로 이 노인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국수집 주인 여자가 노인을 향해 동정의 말을 내뱉었고, 몇몇 손님들도 한, 두 마디 보탰다. 삼례 사람들 중 이 노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거든. 그 때 나이 많은 영감님 하나가 그들을 다소간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동정하다니...... 저 사람, 알고 보면, 대단한 사람이예요.” 나는 그 뒷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삼례 토박이들에게도 베일에 쌓여있는, 신비한 인물인가? 혹시 대단한 자산가? 돈 많은 사람 중에도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고 하니...... 혹시 폐지 수집으로 고행을 하는 수행자? 폐지 수집하는 노인 중에는 군(群)에서 지원해주는 전동 카트로 리어카를 끄는 분도 있는데 이 분은 그런 반칙은 절대 쓰지 않을 뿐 아니라, 힘겹게 언덕을 올라갈 때에는 마치 십자가라도 지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니...... 하다 못해, 크게 성공한 자식들을 여럿 둔 사람?
건강 검진 이야기를 먼저 마쳐야 하겠다. 내가 참좋은 삼례 내과에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데에는, 건강 검진이라는 것은 키나 몸무게, 시력 등 내가 빤히 알고 있는 것을 또 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는 것도 들어있다. 그런데, 이 날은 약간 달랐다. 내 나이가 그렇게 되었는지, 생전 처음 해 보는 종목이 몇 가지 있었다. 의자에 앉은 자세로 시작하는 것인데, 간호사가 초시계를 들고 신호를 하면 벌떡 일어나서 3미터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가—뛰면 안 됨—돌아와 다시 의자에 앉는 종목이 있었다. 한 다리를 들고 얼마나 오래 서 있는지를 재는 종목도 있었다. 그것은 쉬웠다. 만점을 받고 나서 내가 “10분도 서 있겠어.”하고 큰소리를 치자, 간호사가 “흠, 이건 쉽지 않을걸요.”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눈을 감고 다시 하라고 지시하였다. 1초도 견디지 못했다. “걱정마세요, 다들 그러니까, 호호호. 그것 보면 장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죠.” 청력 테스트도 아주 정밀하게 진행되었다. “아직 청력은 괜찮으시네요.” “괜찮기는 무슨. 텔레비전을 얼마나 크게 틀어놓는데.”
이 작은 의원에서 위내시경도 한단다. 그렇다면 X레이는? X레이는 전문 자격증을 가진 기사만이 취급할 수 있을텐데, 이 작은 병원에서 그런 사람을 고용할 수 있나? 알고 보았더니, 그것은 의사가 하더라. 물론 X레이실도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감탄하였다. “이 좁은 곳에 별개 다 있네.”하고 내가 말하자, 간호사가 “예 어르신, 저희도 있을건 다 있시유. 흐흐”하고 대답하였다. “어르신은 무슨......” “아, 참, 아버님.” “아버님 좋아하네.”
검진을 다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따뜻하고 밝은 햇볕이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철형에게 행복감을 준 바로 그 햇볕이었다. 맞다, 오늘은 열사흘, 삼례 장날이다. 햇볕을 맞으며 택시 승강장을 지나고 우체국사거리를 지나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채소와 곡물을 파는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생강이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에는 생강차 만한 게 없다. 다만 생강은 손질하기가 귀찮아 선뜻 달려들기가 어려운데, 삼례장에 나오면 깨끗하게 껍질을 벗긴 생강을 구할 수 있다. 한 바가지에 5천원. 대추도 샀다. 그것은 작은 됫박으로 한 되에 7천원.
이것은 최근의 일인데, 아까 그 폐지 수집하는 노인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숍 휴앤안--休 and 安--근처에 있는 고물상에 헌책을 팔러갔을 때이다. 그 노인이 거기에 있었다. 방금, 한 리어카분의 폐지를 부려놓은 듯, 폐지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사실 이 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 혹은 그 얼굴을 정면에서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런데, 상당히 낯설었다. 무엇보다도, 머리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는 것이, 대단히 건강하게 보였다. 아니, 거의 우리 또래로 보였다. 기껏해야 4, 5년 형뻘? 잠시 뒤에는 흥정을 하는지, 고물상 주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때 받은 인상으로 치면, 이 분은 조금도 신비로운 사람이 아닐 뿐 아니라, 비극적인 사람도 아니고, 남의 동정을 살 만한,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그렇듯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폐지 수집으로 얻는 수입이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은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그 댓가를 세상에 당당히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성씨(姓氏)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김형, 일 끝났으면 건너편 향우식당에 가서 막걸리나 한 잔 할까요?” 하면서 다가가 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너무 건방졌나? ‘형님’하고 부르는 것이 좋겠지? (끝)
첫댓글 영태교수님은 아직도 건강 검진 때 노년이 아닌 듯 여기나 보다. 뭐 나도 그렇지만....좀 더 세월 가면 검진 받은 참 좋은 내과 의원 같은 곳이 장터처림 여겨지고 어르신 아버님 등의 호칭에 익숙해지겠지.. 우리 동네는 폐지 수거하는 사람이 형님보다 외려 누님들이 많은 듯하다 90도로 꼬부러진 허리로 리어커를 끄는 모습이 애처럽지만 가끔 당당해 보일 때도 있더라 폐지나 고물 수거도 각자의 영역이 있어 뒷배를 봐주는 넘들이 고분고분한 누님들을 선호해서 더 많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여튼 이제 겨울이 다가 온다 더욱 기철형처럼 따듯한 마음으로 그쪽 형님과 누님들을 보듬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 감사!!
나이든 사람 건강 검진 항목이 새로 생긴거 같구나. 영태는 건강하고 맑은 삶을 살고 있는 거 같아. 그러니 건강 걱정 크게 안해도 될 거 야. 건강 검진만 주기적으로 하면 될거 같아. 나는 10년째 건강 검진을 안받고 있는데 올해 처음 피검사를 받아 봤어 . 피검사가 건강 검진과 거의 같은거 같아. 나도 건강에 신경 덜 쓰면서 살려고 몇년에 한번씩 피검사나 받아 볼가 해.
나는 전철로 출퇴근 하는데 30~ 40대 여자가 나만 보면 "아버님 천원만,,, 배가 고파요" 하는 여자를 가끔 만나곤 한다. 지금껏 4번쯤 만나 천원 또는 2천원 준 적이 있는데 몇일전 에는 혼잡한 전철 안인데도 나를 발견하고는 저쪽에서 반갑게 나를 찾아와 "아버님"을 외친다. 혼잡한 전철이라 그냥 만원을 주었는데 잔돈을 거슬러 주겟다며 자기 주머니를 마구 찾길래 그냥 가라고 했더니 고맙다며 다음칸으로 갔다 .내 모습이 대머리인지라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