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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보고 1
행 11:1-10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행 11:1-10 / [베드로의 보고]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곧 사도들과 유대의 모든 신도들에게 전해졌다. 2)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유대인 신도들은 기다렸다는 듯 베드로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3) `당신은 이방인과 사귀고 그들과 한자리에서 음식까지 먹었다지요?' 하고 그들이 공격하자 4) 베드로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5) `하루는 내가 욥바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신비로운 환상이 보였습니다. 네쪽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보니 6) 그 안에 우리 유대인들은 먹어서 안될 온갖 종류의 짐승, 곧 들짐승과 길짐승과 날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7) 그때 `어느 것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잡아 먹으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8) 그래서 나는 `주님, 안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유대의 율법에 금지된 것을 한 번도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9) 그러자 음성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10)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된 후에 그 보자기는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10장에서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고,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형제들이 돌아오는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큰 기쁨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크게 기뻐하며 자신을 환영해 줄 것을 기대하며 선교보고를 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그 이유는 3절에 베드로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깨뜨리고 무 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할례자인 유대인들이 무 할례자인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서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가 본문을 통해 제기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결국 땅 끝까지 전해야 할 복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유대인 자신들이었습니다.
베드로에 일어나 잡아먹으라(4-10)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제에 대한 할례자들의 비난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 베드로는 다혈질의 혈기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차분하게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풀어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욥바의 무두장이 집에서 기도하다가 본 환상부터 시작해서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보면 바로 10장에서 본 내용을 지루하게 다시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다시 말하는 베드로에게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법상 부정한 짐승들을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씀은 충격적이고 의미심장한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9) 이를 통해 베드로는 복음이 민족적인 장벽을 넘어서 땅 끝까지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전합니다.
적용: 편견을 깨뜨리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복음전파의 가장 큰 장애물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이었습니다. 당신이 깨뜨려야 할 신앙의 편견은 무엇입니까?
호크마 주석
=====11:1
사도들과 형제들이 - 이방인 선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서 사도들과 형제들이 언급되는 것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방인 선교에 관한 논쟁이 매우 심각하게 논의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사도들'은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형제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법 중 하나이다. 누가는 이 형제들을 `도를 좇는 사람'(9:2), `주의 성도'(9:13) `성도'(9:32,41)라고 다양하게 묘사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 `말씀을 받았다'란 말은 로넬료의 성령 체험 사건(10:44-46)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당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점에서(10:48)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고넬료에 관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절은 이방인 선교에 관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시작되는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11:2
할례자들이 -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서 `할례자'들이 언급되는데 이는 `할례받은 사람들'(* , 호이 에크 페리토메스)로서 유대인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들은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할례에 대하여 상당한 우월 의식을 갖고 있음은 무할례자에 대한 그들의 노골적 편견에서 잘 입증된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으로서 모두 할례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여기서는 막연하게 유대 기독교인을 지칭했다기 보다는 특별히 할례를 강조하거나 유대적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자들(15:5)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우월감이 잔존하여 공동체 안에서 갈등적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힐난하여 -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였던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할례자들은 단순히 문제점을 제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단죄(斷罪)하여 비난하는 차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힐난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크리노'(* )가 단순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11:3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할례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방인으로 언급되는 무할례자와의 식사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머무는 동안의 행적이 10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베드로가 실제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할례자들의 힐란에 대해 직접 베드로가 변명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의 집에 며칠 머물면서 함께 식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할례자들이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한 것만을 이유로 베드로를 힐난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본절 이후 계속된 베드로의 변론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사실에 대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11:4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비난하여 문제를 제기해 오는 할례자들을 대하는 베드로의 자세는 매우 장중(莊重)하고 권위있는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Haenchen). 특히 본 구절에서 사용된 `설명하여'라는 단어 `여세티데토'(* )는 `선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크티데미'(*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어떤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분명하게 밝혀 선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의지가 암시되어 있다(A.T.Robertson).
=====11:5
내 앞까지 드리우거늘 - 10:11에서는 `땅에 드리웠더라'로 묘사되어 있다. 두 표현 다 내용물을 베드로가 볼 수 있게 광주리가 드리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가지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1:6
들짐승 - `네 발 가진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묘사인 것 같다.
=====11:7
내게 이르되 - 10:13에서 이 구절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본 구절이 베드로의 직접적인 진술인 반면 10:13은 누가의 간접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11:8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 10:14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다'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11:9
하늘로부터 내게 대답하되 - 10:15에서 이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명해 주며 동시에 그 응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11:11
세 사람이 - 10:19에서 고넬료가 욥 바로 보낸 사람이 두명으로 진술되어 있으므로 본절과 숫자상의 모순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계수(計數)할 때 여자나 어린아이, 시종(노예 포함)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두 구절을 종합해 볼 때 두 사람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도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10:7).
< 설 교 >
제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사도행전 11:1-18 / 김상복 목사
사람은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자기중심적이라 누구에게나 편견과 차별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 사람은 편견을 갖고 차별합니다. 나와 인종이, 종교가, 수준이, 자질이 다르다고 다른 사람들과 벽을 쌓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사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검토해보고, 우리 속의 모든 편견과 차별의식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1절). 유대에 있는 열두 사도들은 기독교의 창시자입니다. “형제들”이란 예수를 믿는 유대교인들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욥바라는 곳에서 기도하던 중에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정기적으로 기도를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도 중에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메시지를 주시고 환상과 꿈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과 꿈을 보고 그 음성을 들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고 싶으면 자주 기도하십시오. 어쩌다가 한 번 듣고 싶으면 어쩌다가 한 번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이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 역시 그런 편견과 차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온갖 짐승과 벌레와 새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평소에 싫어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십니다. 짐승, 벌레, 새들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베드로는 그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하나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저런 것들은 싫어합니다. 먹지 않습니다. 왜 저런 것들을 먹으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저는 제가 싫어하는 것은 안 먹습니다.”
편견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좋다면 좋은 것이고 싫다면 싫은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대답에 무척 놀랐습니다. 편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면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도 끄떡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것들이 제법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거룩한 주일에 점잖은 옷을 입지 않고 왜 저렇게 화려하게 입은 거야?” 한다든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고 싫어합니다. 그리고 차별대우를 합니다. 집단적 편견과 차별의식도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 이 모든 짐승은 네가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전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네가 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나쁘다 하느냐?” 베드로가 그 환상을 세 번 본 후에 보자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곧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온 이방인 로마사람들 세 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깨끗하게 하실 때 유대인이 그것을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사귀거나 함께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집단적 편견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베드로를 질책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편견을 깨고 그 로마사람들을 따라 고넬료라는 로마 장교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돌아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2절). “힐난하다”란 ‘다투다, 싸우다, 비판하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수제자라 하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단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않소?”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은 상종할 것이 못 된다’는 집단적 편견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편견이요, 사도들과 바울의 편견이기도 했습니다. 이 편견이 깨져야 온 세계만방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이 기록될 당시는 유대교적 기독교였습니다. 유대교적 기독교의 편견과 차별의식이 깨어져야 비로소 세계적인 기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기독교문화가 발달된 나라일수록, 예를 들어 유럽연합(EU)이나 미국 같은 서양 국가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편견과 차별이 훨씬 적습니다. EU의 슬로건은 “유럽연합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별대우는 반대한다”(For Diversity, Against Discrimination)입니다. 사람은 인종과 문화와 언어가 서로 다르므로 유럽연합은 그 다른 것을 인정하며 개인적 편견과 차별대우를 적극 반대한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터키는 EU에 가입하기를 원합니다. 국토의 한쪽은 아시아에 다른 한쪽은 유럽에 속한 터키는 어떻게 해서든 유럽 쪽에 붙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벌써 10여 년 동안 EU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터키에는 이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차별정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이슬람, 불교, 기독교 등 모든 차이를 서로 인정하지만 터키는 이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므로 이 생각을 고칠 때까지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종차별은 인간의 뿌리 깊은 편견 중 하나입니다.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모두 자기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흑인의 우월성을 얼마나 자신 있게 말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흑백간의 차별이 있고, 특히 한국 사람들은 백인은 높이 보는 반면 흑인은 종종 무시합니다. LA에서 어느 한국사람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중간에 흑인이 타자 “깜둥이가 탔네” 했습니다. 그러자 그 흑인이 “깜둥이가 뭐야?”라며 소리를 쳤답니다. 그는 한국에서 군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간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 자식을 키우고 성공했는데 깜둥이가 뭡니까? 좋지 않은 편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즐기라고 까만 사람도 만들고 흰 사람도 만들고 우리처럼 황색인종도 만드셨습니다. 인종차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인종차별의식이 있었다면 오늘 이곳에 내려놓고 가십시오.
계급차별도 사람에 대한 심각한 편견입니다. 인도 힌두교 사회에는 2억5천만 명의 ‘달리트’라는 불가촉천민이 있습니다.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입니다. 그들은 교육의 기회도, 사회보장의 기회도 못 받습니다. 참 억울하지요. 똑같은 인간인데 천한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라에서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기독교, 천주교가 힘을 합하여 그들에게도 교육과 사회보장의 혜택을 주기 위해 오랫동안 애를 썼습니다. 두 달 전에 드디어 국회에서 달리트에게도 똑같은 교육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주도록 결정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편견과 차별과 인간경시를 모르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싸워서라도 계급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평화와 평등을 누리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과 언어와 종족을 다 똑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고 같은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이요, 복음의 특징입니다.
성차별도 문제입니다. 한국은 예전에 비해 남존여비사상이 많이 줄었고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활발합니다. 지금까지는 국가적, 가정적으로 남자들의 능력에 많이 의존했지만, 점차 노인세대가 늘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여자들의 능력과 참여가 필요해졌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을 보면 제일 출세한 사람들이 여자들이었습니다. 운전이나 사회생활 등 예전에 한국에서는 갖지 못했던 기회들을 갖게 되니까 잠재 능력이 마구 나타났던 것이지요. 남자들은 오히려 위축이 되었어요.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영어를 못 하니까 바보가 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바보 아닙니까? 저도 중국에 가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몇 번 바보가 된 적이 있었지요. 요즘 한국 여성들의 능력이 곳곳에서 발휘되는 것은 참 바람직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억눌렸던 것들을 다 풀어줘서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능력이 100% 발휘되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인도에서는 신분증에 제3의 성(Gender)을 표기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신분증에 성별을 표기하는 인도정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들, 즉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들을 어떻게 나타낼지 고민하다가 ‘제3의 성’(The Third Gender)으로 표기하기로 했습니다. 성 전환자들은 “우리도 드디어 인도 국민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좋아했답니다.
앞으로 성희롱이나 성차별을 하면 고소당할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1일에는 딜라트라는 회사가 성희롱과 성차별에 관한 손해배상청구에 졌습니다. 그래서 차별대우를 받았던 여성에게 50만 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지난 3월 28일에는 센트럼이라는 대학도 성차별을 하여 한 학생에게 20만 불의 손해배상을 했다고 합니다.
연령차별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젊은이를 대접하고, 노인을 경시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이 들어 힘없는 노인들을 우습게보지만 연령차별을 하면 고소를 당할 수 있습니다. 렌힐스테핑이라는 회사는 나이 많은 직원을 해고했다가 소송을 당해서 5억 8천만 원을 배상해야 했다고 합니다. 록히드마틴이라는 회사도 같은 경우로 77만3천불을 배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나이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젊은 사람만 사랑하십니까? 아니지요. 어린 아이도, 청소년도, 장년도, 노년도 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나이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종교의 차별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종교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모슬렘 국가는 기독교를 절대 인정하지 않지요. 사우디아라비아에는 교회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모슬렘을 인정하고 모슬렘 사원을 세우는 것도 허용합니다. 종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최근에 스리랑카의 불교와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이 교회를 심하게 핍박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주 인도나 스리랑카의 기독교 인사들의 이메일을 받는데 기독교인이 맞았다거나, 죽었다거나, 불이 났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너무 심하게 핍박합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다가 잡히면 감옥에 갑니다. 이런 종교적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성전을 지으면서 장애인들을 배려하기 위해 많이 고심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더 들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절대다수 장애 없는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장애인들이 우리와 비슷한 삶의 질을 갖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입니다.
경제적 차별도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종족 사람들에게만 직장의 특혜를 줍니다. 은행 대출도 말레이족 사람들에게만 주고, 다른 종족들을 무시합니다. 중국과 인도 등 다른 종족들도 같은 경제적 권리를 얻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는데 힘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요즘은 새로 들어온 중국 사람들 외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의 미시간에 있는 어느 중국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중국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지요. 정말 옛 맛 그대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주인에게 어떻게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3대를 인천에서 살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정책적으로 중국인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편견이요, 차별대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로 경제적 차별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방색도 편견의 하나입니다. 저는 미국에 가기 전에 대한민국이 큰 나라인 줄 알았습니다. 막상 미국에 가보니 한국은 너무 작은 나라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작은 나라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무슨 지방색입니까? 때로는 교회 내에도 지방색을 띤 그룹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고향사람들만 사랑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하십시오. 몇 사람들끼리 편애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노예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햇볕과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가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닮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이방인에게도 천사를 보내주셔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가족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생명을 주셨고, 이방인이 회개하고 영생을 얻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편견이 없으십니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음을 넓게 열어 예수님을 닮고 하나님을 닮고 성령님을 닮도록 기도하십시다. 차별이 있는 곳에서 차별을 제거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왜 기독교가 훌륭합니까? 기독교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늘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라. 아무나 들어오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했다. 다 오라. 값없이 오라. 돈 없는 자들도 오라. 목마른 자도, 배고픈 자도 오라.”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음의 문을 열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이 되어 우리가 가는 곳에서 편견이 사라지고 차별대우가 사라지고 벽이 허물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다수의 사람들이 지지하는 생각과 오랜 관습과 전통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많은 사람의 생각이나 전통을 중요시하거나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비진리인 것은 버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정해놓은 전통과 생각이 진리인 말씀과 부딪혀 분열과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소망
양인순 목사
이해인 수녀가 쓴 <행복한 기다림> 이란 시가 있습니다.
뿌연 안개가 / 하늘로 올라가는 새벽
초록빛으로 덮인 들길에 서서 / 행여 찾아올지도 모르는 / 그대를 기다립니다
혹시 / 내가 보고 싶어 / 이곳을 찾아올지도 모르는
그대를 / 기다린 다는 것은 / 설레임과 /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난 오늘도 / 그 자리에 서서 / 먼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움으로 / 밀려오는 아픔을 안고 /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그대를 기다리렵니다
시인은 뿌연 안개가 핀 새벽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기다림을 설렘과 행복의 기다림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행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항상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립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10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출생과 함께 엄마 아빠를 부르고, 아장아장 걷기까지는 일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유치원에 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진학하기 까지 무려 20여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까지 또 기다려야 합니다. 결혼 후에는 자녀를 기다리고, 나이가 들면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생은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인생의 뜨락에서 우리는 계속되는 기다림의 운명 속에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때로는 슬픈 이별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이 기쁨을 주기도 하고, 아픔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인생의 그림자입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일 수도 있고, 가장 고통스런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기다림 속에서 울고 웃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기다림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기다림을 만나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기다림과 여행을 합니다.
대학 시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대는 해질 무렵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한 그루의 나무만이 서 있는 언덕 밑입니다. 거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리공이라는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Godot)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도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기다리는 동안 포조와 럭키라는 두 사나이가 나타나 시간을 떼우기 위해 황당한 대사와 광대놀이를 합니다. 해가 다 질 무렵 한 소년이 등장하여 고도는 내일 온다는 말과 함께 1막이 끝납니다. 그런데 2막의 내용도 1막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고도가 신(神)인지, 죽음인지, 구원인지, 희망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고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물론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작가 자신도 그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직면하고 있는 고독과 불안, 삶의 허무, 그리고 구원과 영원의 문제를 끊임없는 기다림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연극을 시집은 안 간 골드 미스가 보면 고도는 누구일까요? 바로 백마를 타고 오는 멋진 애인입니다. 이 연극을 교도소에서 보면 고도를 뭐라고 말할까요? 자유, 석방입니다. 병원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면 고도는 무엇일까요? 바로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실직을 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도는 좋은 직장입니다. 사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있어서 고도는 사업의 형통입니다. 수능 시험을 치루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고도는 무엇일까요? 바로 합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성지가족들이 이 연극을 보았다면 고도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현대인들에게 기다림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광속의 시대, 빨리 빨리의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기다리지 못해서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말하다가 화를 부르기도 합니다. 기초를 튼튼히 세우지 않고, 실적을 올리려고 성급하게 일하다가 모든 것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3초간의 기다림 속의 사랑>이란 글이 있습니다. 조급증에 빠진 우리에게 일침을 놓는 글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를 누르기 전 3초만 기다리세요.
정말 누군가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출발 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경적을 울리지 말고 3초만 기다려 주세요.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내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3초만 서서 기다리세요.
그 사람 아내가 정말 아플지도 모르니까요.
친구와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3초만 보고 있어 주세요.
혹시 그 친구가 가다가 뒤돌아 봤을 때 웃어줄 수 있도록.
길을 가다가 아니면 뉴스에서 불행을 맞은 사람을 보면
잠시 눈을 감고 3초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니까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때라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내가 화낼 일이 보잘 것 없지는 않은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 쳤을 때 3초만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세요. 그 아이가 크면 분명 내 아이에게도 그리 할 것이니까요.
죄 짓고 감옥 가는 사람을 볼 때 욕하기 전, 3초만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 사람의 환경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안에는 3초간의 여유, 기다림조차 힘겨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하는 것보다는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는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정한 때가 있고, 기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이 아닌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룰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보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마십시오. 미래를 보고 기도하고 격려해 주십시오. 그리고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 날 맹구가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안녕하세요! 하나님에게 1억년의 시간은 얼만큼이지요?’ ‘나에게 1억년은 1분과 같지.’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에게 1억원은 얼마나 되나요?’ ‘그건 1원과 같은 것이지’ 그러자 맹구가 자신있게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그러면 나에게 1원만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오냐. 알았다. 1분만 기다려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는 분명 다릅니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거장은 한결같이 기다림의 사람입니다. 노아는 산 꼭대기에 방주를 만들며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기 까지 무려 100년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까지 80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을 위해 3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정한 시간에 응답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불안하고, 때로는 원망이 쏟아집니다. “하나님 이만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30장 18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요 복 있는 자입니다.
기다림 속에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한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시편 40편 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주십니다. 오히려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새 노래로 찬송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을 비방하고 죽이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떨게 했습니다.
다윗이 인생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의 출발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11장은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분은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부터 한 싹이 남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아닌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메시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존경받는 최고의 왕 다윗이 아닌 자신을 비천한 농부로 표현했던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가 이사야 53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오심은 다윗과 같은 권세있고, 위엄있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약한 뿌리와 같은 모습입니다.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누가 봐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왔지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겉모습은 초라하고 비천해 보였지만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은 지혜와 총명이 있습니다. 모략과 재능이 있습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강림하십니다. 세상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가 아닌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십니다. 모든 악한 자를 멸하십니다.
그 결과가 6절에서 9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때 임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삽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삽니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어울립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습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곳에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하면 평화의 나라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삶은 타락입니다. 저주입니다. 가난과 질병 속에 시달립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싸움, 전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나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인류의 미래가 있습니다. 진화론에 기초한 인간세상은 오직 투쟁과 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약육강식의 지배논리 아래 약자는 항상 강자의 지배아래서 신음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진화론적 사상 속에서 강자와 약자의 대결 속에 싸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갈등과 투쟁과 싸움뿐입니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진정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기다리는 고도가 욕망이나 탐욕이라면 주님은 내 마음 속에 임하실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근본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를 가지셨지만 종의 형상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셨던 것처럼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을 비우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울 때 비로소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좌정하셔서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임하실 때 평화가 넘치는 가정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 가운데 임하실 때 모든 벽이 허물어지고, 평화가 넘치는 교회가 됩니다.
주님께서 전쟁의 기운이 높아가는 어둠의 이 땅에 임하실 때 평화의 나라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 생각, 내 경험으로 성급하게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내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보려고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실족하고 낙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품을 떠났지만,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고 살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탕자를 잊지 않았습니다. 매일 사랑하는 아들을 기다립니다.
집을 나간 탕자는 고생 끝에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연상했습니다. 용서해 줄 것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도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보고 달려갔습니다.
기다림은 먼저 보게 합니다. 기다림은 절대 걷지 않게 만듭니다. 달려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기다림이 탕자를 회복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으로 능으로 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탕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길이 참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다가오셔서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절이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어둠의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구원의 주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셔서 성령님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 나라의 완성자로 다실 오실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우리 모두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기다림의 순례자로 희망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노래하는 은총의 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용히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시간에>라는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기 기다려
하루 하루 살동안 주님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기다려 그때를 주의 뜻 이뤄지기 기다려
주의 뜻 이뤄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
아름답게 변하리 기다려 ♬
유대인 신자들을 설득함
김영규 목사 / 행 11:1-18
유대인 신자들의 비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 즉 유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사도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1) 아마 이들은 베드로 사도가 행한 기적이나 전도 활동을 전해 들었을 겁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친 사건, 욥바에서 다비다를 소생시킨 사건, 가이사랴에서 고넬료 가족을 전도한 사건 등등. 이들은 대체적으로 이방인이 복음을 받은 것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일부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2-3) 비난한 사람들은 할례 받은 보수파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비난한 내용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도 바로 이 식사 문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2)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왜 식사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되는가? 이점을 알려면 유대인의 식생활 계율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식사 계율을 히브리어로 카쉬루트(Kashrut)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카쉐르(rveK;)에서 온 말로, 알맞다, 적절하다, 바르다(fit, proper or correct)는 뜻입니다.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코셔(Kosher)입니다. 코셔 음식물은 조리 방법이나, 제사장 혹은 랍비의 축복과는 무관합니다. 건강이나 영양상의 문제와도 무관합니다. 그냥 본래부터 정한 것과 부정한 음식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코셔를 구별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토라(율법)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유 불문하고 성경이 명했기 때문에 지키는 계율을 유대인들은 “chukkim”법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집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식탁은 제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식탁에는 정한 음식만 차려놓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코셔의 일반적인 규칙은 대략 이렇습니다. “금지된(부정한) 동물의 고기, 내장, 알(egg), 젖은 먹을 수 없다. 유대인의 계율에 따라 도살되어야 한다. 피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허용된 동물이라도 어떤 부분은 먹을 수 없다. 채소는 허용되지만 벌레가 있으면 안 된다. 포유류와 새의 고기는 乳類와 함께 먹을 수 없다. 물고기, 새알, 야채, 곡물은 乳類와 함께 먹을 수 있다. 식기나 조리 기구도 고기에 접촉된 것은 乳類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코셔 음식이 아닌 음식을 담았던 식기나 조리 기구를 코셔 음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단 이 규칙은 음식이 뜨거울 때 접촉할 경우에 적용된다. 비유대인인 제조한 포도 제품은 먹을 수 없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규칙들이 있습니다. 먼저 코셔 도살(Kosher slaughtering)입니다. 코셔 도살은 쇼헤트(shochet : kill)라는 도살 전문가에 의해 도살되어야 합니다. 쇼헤트는 단순한 도살자가 아닙니다. 경건하고, 유대 율법에 의해 잘 훈련 받고, kashrut 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쇼헤트가 없는 작은 마을에는 랍비가 대신합니다. 코셔 도살이 되지 않은 동물의 고기는 먹을 수 없습니다. 자연사 한 것, 동물에 의해 죽임당한 것, 병 든 것, 결함 있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단, 물고기에는 이 규정이 해당되지 않습니다.(신14:21, 민11:22) 도살할 때는 빠르게 목을 단번에 깊이 쳐서 2초 이내에 고통 없이 무의식 중에 죽도록 해야 합니다. 날이 빠지거나 무딘 칼로 여러 차례 쳐서 죽이면 부정한 도살이 됩니다. 피는 빠르고 완벽하게 빼내야 합니다. 피는 일단계로 도살 시에 대부분을 재빨리 빼냅니다. 남은 피도 “by broiling or soaking and salting”의 방법으로 도살 후 72시간 내에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런 계율 때문에 유대인이라면 낮선 곳에서 육류를 살 수 없습니다.
고기와 乳類를 동시에 먹을 수 없는 규칙(Separation of Meat and Dairy)은 식기나 조리 기구에도 적용됩니다. 요리하는 팬, 담는 그릇은 물론, 식기 세척기, 그릇을 닦는 행주에까지 적용됩니다. 예를 들면 치킨을 조리한 프라이팬에 우유를 데우면 안 됩니다. 난로나 싱크대는 통상 코셔가 아닌 기구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주방에 보면 수도 꼭지가 세 개가 있습니다. 세척용, 손을 씻기 위한 의전용, 조리용 등.
포도 제품에 관한 규칙도 까다롭습니다. 일단 유대인이 만들지 않은 와인이나 포도 제품은 금지됩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제조 과정에서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혹은 우상 숭배를 위해서 제조하는 목적 가능성 때문입니다. 포도주만이 아닙니다. 포도 음료, 과일 음료, 과일 향의 음료에도 해당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내용은 현재 뉴욕이나 LA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계율입니다. 물론 이런 계율은 2000년 전에 베드로가 만났던 유대인들이 지키던 것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유대인들은 이렇게 까다로운 식사법을 지킬까요? 그들은 그런 식사법이 하나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성별의 표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자녀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토입니다. 음식만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복도 구별합니다. 유대인이면 누구나 복장의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의 경우 옷단에 술을 달아야 합니다. 혼방을 입으면 안 됩니다. 한 가지 종류의 실로 짠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경에 두 가지 실을 섞어서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복장을 하면 안 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예배, 토라 읽기, 기도, 결혼, 가정생활, 자녀 교육 등등. 어떻게 보면 이들의 취지는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씁니까? 세상에 뒤섞여서 속된 사람인지 하나님 자녀인지 구별 안 되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선택하신 선민이니 세상과 구별되자! 이것이 근본 취지입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를 함께 한 것은 정통파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문을 던졌습니다. 고넬료가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은 좋은 일이며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인 베드로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과 식사를 함께 한 것은 유대인의 성별 법을 어긴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비난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식사법이든지, 할례든지 마찬가집니다.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을 때, 이들이 유대인의 식사법을 지켜야 할 것인가? 또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초대 교회 최대의 이슈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수를 믿을 때,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이것은 교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숙제였습니다. 이 숙제는 사도행전 15장에 가서 비로소 정리되고 해결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를 유대인들 앞에서 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득
먼저 베드로 사도는 비난하는 유대인들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근차근 일어난 일들을 설명 합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4) “But Peter began [speaking] and to explain to them in orderly sequence, saying,” (NASB) 이 부분을 보면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교황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베드로 사도를 주저 없이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난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경험한 세 가지 일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보이신 환상을 통한 설명입니다. “이르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5-10) 이 부분은 이미 앞서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강조한 것은 부정한 음식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은 두 가지 상징성이 있습니다.
환상의 첫 번째 상징은 이방인의 음식입니다. 유대인들은 베드로 사도가 부정한 음식을 먹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정한 음식을 베드로 사도에게 먹으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부정하게 만드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부정한 음식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코셔 음식으로 정함과 부정함을 구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음식은 더 이상 정하게 하거나 부정하게 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단지 음식물일 뿐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3-5) 프랑스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푸아그라(foie gras)란 거위의 간을 먹습니다. 영어로 fat liver, 살찐 간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거위의 간을 키우기 위해서 잔인하게 학대합니다. 거위를 좁은 상자에 가두고 목을 돌리지 못하도록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위 목에 호스를 집어넣고 깔대기로 음식을 강제로 집어넣습니다. 거위는 온갖 고통으로 죽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달 정도 지나면 거위의 간은 정상치보다 다섯 배에서 열 배까지 커집니다. 거위의 간은 세계 3대 요리 중의 하나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문으로 매년 수 백만 마리의 거위가 죽고, 25만 톤의 곡물이 강제로 투입됩니다. 우리가 개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편안하게 먹여주다가 잡아먹지요? 프랑스 사람처럼 잔인하게 길러서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괜히 먹는 것 가지고 비난할 것이 못 됩니다. 인도 사람은 쇠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식은 어디까지나 음식일 뿐입니다. 본래부터 정하고 부정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환상의 두 번째 상징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고넬료를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비록 고넬료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해도,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할 수 있는가? 즉, 하나님이 깨끗케 하시면 어떤 이방인(죄인)도 깨끗해집니다. 할레루야! 이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그 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해집니다. 의인 취급을 받습니다. 사람이 의로워 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지, 음식을 가려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을 보세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편 강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 세례, 막달라 마리아, 나병 환자, 혈루증 환자, 수로보니게 여인,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등등. 이런 사람들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깨끗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는데 누가 감히 더럽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예수 믿는 사람은 과거가 어떠했든지 깨끗합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둘째로, 성령의 지시에 따른 변론입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11-14)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간 것은 성령님의 지시였습니다. 성령께서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하셔서 갔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셔서 전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녀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분이 성령님이신데, 어떻게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를 부정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셋째로, 성령 강림을 통한 변론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15-17) 성령이 이방인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구약 시대 가장 거룩하고 거룩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셨는데 누가 부정한 이방인이라고 정죄할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 “ejgw; tiv" h[mhn dunato;" kwlu'sai to;n qeovn”(Who was I, that I could withstand God?)
종합적으로 베드로가 말씀하려고 하는 결론이 뭡니까?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방인과 한 가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 막기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제 교회는 유대인의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의 나라가 아니다. 교회도 하나님 나라도 지구상의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다!” 바로 이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얼마나 큰 편견을 가졌는지 아십니까?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동물 수준의 존재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방인이 사람의 모양을 한 것은 유대인들을 불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런 이방인을 하나님은 차별 없이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 자녀 된 감사와 감격과 자부심, 확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영광을 돌리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유대인 신자들의 반응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 우선 그들이 잠잠했던 것은 베드로가 전한 내용이 놀랍고 두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 천 년의 전승을 뒤집어엎는 삶의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진리를 인정했습니다. 이제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졌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 음식으로 하나님 백성이 성별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질 뿐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도 혈통도 무의미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녀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잘못된 습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하면
행11;1-18 / 조재진 목사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을 물질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공산주의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보는 기독교가 일치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만은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칼 막스는 책상에 앉아 생각하기만 하는 철학자들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게으른 철학자들은 단지 세상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해석의 차원으로 보지 않고 "변화"의 차원으로 본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의 차원에서 보는 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말씀하셨고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을 변화의 대상, 치유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세상변화를 주도해온 교회
기독교 신앙은 변화를 추구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구원이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구원이란 아예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3:5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라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5:24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마귀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에서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변화를 추구합니다. 구원이란 그냥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한 개인만이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간 한 가정, 한 나라, 한 시대가 변화했습니다. 성경과 세계사는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바로 이 변화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여있는 120명의 주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이라는 한 도시가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 라는 한 도시가 떠들썩해졌습니다. 에베소라는 도시에 말씀운동이 일어나자 그 도시의 마술하는 자들이 주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며 마술 책을 불에 태웠습니다. 에베소라는 한 도시가 거룩해 졌습니다.
1903년 웨일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각성운동이 일어나자 술집과 극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훔친 물건을 다시 가져오는데, 그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부흥운동을 당나귀들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채찍으로 학대하던 주인들이 은혜를 받고 보니까 인자한 모습으로 바뀌어졌고 심지어 당나귀를 껴안고 우는 주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으로 변화된 성도들이 주일에 가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자 평양의 경제가 마비되었습니다. 10%의 성도들이 문을 닫았는데 평양 전체가 주일에는 철시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부흥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변화되지 않으면
그런데 문제는 요즘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답을 가지고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복음을 가지고도 세상을 살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 복음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화석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전통과 교리, 도그마에 묶여서 생명 살리는 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무디어졌습니다. 변화의 주체자가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변화하는 세상의 변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교회가 세상을 살리기 위해 갱신하는 것입니다. 갱신이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통의 틀, 교리의 틀에 묶여있는 복음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갱신입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왜곡될 수 있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 때문에 복음이 그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무섭게, 그리고 빠르게 변화되어 갑니다. 가치관도 세계관도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졌습니다. 물론 빠르게 변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너무 많은 변화들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에 세대간의 갈등, 가치관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치관, 세계관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요구사항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의 복음을 접하게 되는 통로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옛날의 방법, 교리, 전통만을 내 세운다면 변화하는 세상을 살리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리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에베소 교회가 분명한 교리와 전통위에 서서 이단을 용납지 아니하고 진리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통과 교리를 지키는 것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책망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교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으로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있지 말고 변화하는 세상에 복음으로 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변해 가는 세상을 보고 정죄만 하지 말고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가고 복음으로 삶에 답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머리에 물들이는 젊은이들을 보면 막 화가 났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아빠 나도 머리에 물들일까?" 그러면 저는 "그래 물들이기만 해 봐라 가위로 다 짤라 버릴꺼야!!" 도무지 이상한 옷입고(똥싼바지) 발에도 맞지 않는 길다란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러니 정죄만 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어떻게 보실까? 라고 마음이 들면서 저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만나고 보니까 그런 젊은이들 중에 갈급한 영혼이 너무 많고 변화하는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오늘 성경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이런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화된 세상이란 바로 이방인의 구원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방인에게로 증거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이방인 가정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다. 여기에 보면 변화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여기에 보면 할례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 중에 여전히 유대교 전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전통과 교리, 도그마에 매여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이방인 의 집에 들어간 것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관심은 한 영혼이 구원받았다 라든지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방인을 향한 문을 여셨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베드로가 율법의 계명을 어기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생각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증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을 만나는 것을 정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 자신들이 세운 교리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방인과 사귀는 것을 금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사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방인의 풍속과 우상숭배, 이방인의 음란한 죄를 배우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으로 선민사상을 만들고 하나님은 마치 자기들만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아집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이 이방인 중에도 증거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 성도들은 과거의 이방인과 사귀지 말라는 그 규칙에만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 규칙 때문에 베드로를 정죄하고 힐난했습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도 이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보여주고 베드로를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이 임하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힐난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차근차근 이 사건의 경위를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 10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18절에 보면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도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각이 바뀌어지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이방인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 선교에 주저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또 똑같은 문제로 회의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의 주제가 바로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모여서 회의합니다. 모여서 논쟁을 합니다. 이방인들이 계속해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데 그들은 이방인을 맞이할 준비가 하지 않고 교리 논쟁만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여기에서 아마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를 가지고는 세계복음화 할 수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의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교회는 로마 복음화, 세계복음화 하는데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복음의 주도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복음의 주도권은 안디옥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약해졌는가하면 그렇게 성령이 임하고 예루살렘 전 지역을 뒤흔들어 놓았던 예루살렘교회가 나중에는 미자립교회가 되어서 저 소아시아나 마케도냐 지역의 교회들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몰랐습니다. 자기생각에만 묶여있었습니다. 교리나 전통에만 묶여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증거를 위해 문을 여는 교회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 대신 다른 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방인 선교, 이방인 구원에 쓰실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19절 이하에 나오는 안디옥교회가 바로 그 교회입니다. 20절을 보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예수를 전파하니"라고 말합니다. 본격적인 이방선교의 문이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예배한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전통과 교리, 도그마의 틀을 깨고 이방인들과 함께 예배드린 교회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 안디옥 교회가 이방선교의 주역이 됩니다. 이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 바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고, 바울은 이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선교의 문을 열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안디옥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은 그 교회가 무슨 대단한 사람들이 시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20절에 나오는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나중에 합류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시작할 때는 예루살렘교회와 비교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이 구브로, 구레네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제가 볼 때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 고 말합니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체험했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교리와 전통, 도그마에 묶여 있을 때 이들은 이방인에게 그냥 주 예수를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보다 교리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복음보다 전통을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품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감리교 목사가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감리교회는 열린 교회입니다. 감리교 신앙은 교리보다 복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감리교 신앙에는 네 가지 "모든 사람"의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확증(내적증거)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감리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면서 교리논쟁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서 설교를 못하게 하니까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야외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공회와 교리논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감리교회를 통해 놀라운 부흥을 영국과 세계에 일으키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복음의 문을 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새로워 질 수 있습니까?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힘들겠습니까? 못배운 사람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교회의 규모가 작다고 하나님이 쓰시기 힘들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가장 힘든 사람이 바로 고집 센 사람입니다. 즉 변화되기 싫어하는 자입니다. 자기 고집과 자기 방법과 자기 경험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변화시키시기 원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으로 그 다음에는 사랑의 채찍으로 안되면 아예 부러뜨리십니다. 누가 축복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꿇고 돌이키기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믿음이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성도들이 새로워지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해집니다. 히4:1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살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바르게 증거되고 바르게 듣게 될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드러납니다. 성경을 안 읽으면 자기 생각이 제일 옳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꼭 물어보십시오 백발백중 틀림없이 성경을 읽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말 많고 따지지 잘하고 교리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사람들은 대게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변화되기 힘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설교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말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그 죄로부터 오는 저주와 고통을 말해도 다 남의 이야기이지 내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설교를 하고 나면 성도들이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은혜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는 박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나오지 못했어요" 보십시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박집사가 듣고 회개해야 돼" 라면서 남에게 적용시킵니다. 목사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면 안되는 집안은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상대방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아내는 "아니 성경에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야"라면서 덤빕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는데 당신태도가 틀렸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부부싸움의 불씨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부 싸움하라고 주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요즘 말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보면서 말세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골리앗을 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통일왕국을 이루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은 윤리적인 완전함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꿇는데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자기의 죄를 지적했을 때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그는 통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사울 왕의 실패는 전쟁에 실패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울왕의 실패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꿇지 않는데 있습니다. 축복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게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고 새로워지는 두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생각 앞에 내 생각, 내 방법을 버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순종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의 모형입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아버지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발 교만한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고상한 기도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멋진 대화를 나눌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선다면 우리가 할 기도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성전도 바라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일지 몰라도 저의 내면은 병들었습니다. 저는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아집, 내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새로워지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 굻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부산제일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양향모목사 / 행 11:1-10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그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결정장해 증후군’라는 정신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를 사야 하는데 어떤 차를 사야 할까, 이사를 가야 하는데 어떤 집으로 이사 갈까,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고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정도는 중요한 문제이니까 고민을 할만도 하지만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차를 몰고 나갈 것인가 전철을 타고 갈 것인가 이런 소소한 문제까지도 바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남에게 자문을 구하고 결정을 합니다. 쉽게 결정을 해서 일을 망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어떤 일을 할 때 특별히 신앙에 관한 일을 할 때 우리 스스로 깨닫고 결정을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다 내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답을 쉽게 보여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야 하나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하나, 교만해야 하나 겸손해야 하나, 도적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도덕적인 문제는 성경이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어느 학교를 가고 어떤 직업을 가야하는지 이런 문제들은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져야한다는 원칙은 있지만 같은 조건을 가진 것 중에서는 내 스스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어떤 선택이 신앙생활을 하기 좋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까 결정을 하고 그 결정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한 일에 대해서는 인간의 생각이나 결정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 평가를 하고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아니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만 합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하시고 그 선택받은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도 정하시고 그 방법을 따르게 합니다. 이런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따르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로서의 구원을 고집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유대교의 원칙들을 지켜야 하고 유대인들만의 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교회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한 신약교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고집 때문에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고집을 가진 유대인들의 생각을 고쳐서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세례를 베풀어서 기독교인이 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 있던 사도들과 형제들 그리고 할례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했을 때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들을 설명하는 것이 11장 1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0장에서 그 과정들을 자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배경과 과정들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전반부인 10절까지의 말씀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성도들의 반응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들었더니
본문 1절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에 사는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한 사건의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형제들이 베드로가 돌아오자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자초지종을 듣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예언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 예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의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하는 것이 매우 싫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이 백성이 된다고 해도 그냥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 귀화를 하고 유대교로 개종을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을 했지 이방인이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특권들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의 제사를 포기하지 않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성전의 제사를 통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유대교에서 가졌던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구약시대 때 행하였던 것들을 행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유대교를 통한 신앙과 신약시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를 통한 신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이 기독교의 뿌리가 되고 구약성경이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유대교 자체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우리들에게도 유대인들과 같은 고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따르지 않고 옛날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유교나 불교나 샤머니즘과 혼합된 것들을 신앙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를 그저 종교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교회에 다니면 마음도 편하고 복도 받고 잘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대강 적당히 교회나 왔다갔다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를 때로는 바르게살기 운동본부쯤으로 생각하거나 좋은 일하는 복지단체쯤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냥 구원을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그만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기저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유일한 길이고 엄청난 축복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이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이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에서 오직이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배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배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의로움이나 선행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 선행이나 의로움도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나 또 일반적인 다른 종교에서 다 같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편의 의로움이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라고 하면 모든 종교가 다 공통적으로 이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도 어떻게 하든지 이런 것들을 포함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이나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믿음이라고 할 때에 이런 인간의 의로움이나 선행은 철저히 배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좋은 일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로움이나 선행은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은 그런 것을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오직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성공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어서 좋은 일도 좀 하고 싶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좀 더 잘 섬기고 좀 더 충성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비웃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다 되냐? 똑바로 살아야지 이런 말로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럴 때 주눅들지 마시고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믿는다. 내가 좋은 일 선한 일만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믿는다. 당당하게 외치시면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알량한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가소로운 사람들입니다. 교만하여 진리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렇게 비웃을 때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소중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믿음으로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았음에 대해서 감격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본문 2,3절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만나 사람들을 세 분류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형제들이라고 했고 또 할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교를 믿다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제자들이나 또 주안에 있는 형제들은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할례자들을 따로 지칭하고 있는 것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할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의 상징이고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할례파들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거룩한 백성인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 가정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에 대해서 비난을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만든 규칙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파들은 함께 식사를 한 것까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자신이 고넬료라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보여주시고 지시를 하셔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할례자들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 중에서 왜 교회가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로 바뀐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알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모르는 척하고 속이려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개신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런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도 행하고 선한 일도 많이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위대함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을 강조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할례는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이었습니다. 신약시대는 할례 대신 세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식입니다. 그러나 할례나 신약의 세례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나 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언약의 표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한 지체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신해서 새로운 언약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일임을 잊지 마시고 이 귀한 특권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루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들이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라고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고 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울한 소식
행11장 1~10절 / 정 우목사(미암교회)
우울한 소식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가 성령도 받고, 세례도 받았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그가 그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인 우리 한국 사람들도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런데 오늘은‘우울한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즈음 어떤 소식들이 우울한 소식입니까? 무엇보다도 코로나로 인한 소식들입니다. 이태원에서는 장사가 안되어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가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장면이 뉴스에 나오더군요. 가게 주인들은‘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나아지겠지’하고 적자가 나는 데도 참고 또 참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왜요? 빚이 점점 더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가게문을 닫는데 어떻게 닫았을까요? 가게 안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밖으로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칩니다. 그리고 엉엉 웁니다. 그 모습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런 소식도 있습니다.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의 하소연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영화 1회 상영할 때마다 관객이 3명, 4명입니다. 많아야 8명입니다. 설 연휴 때까지 일단 버텨보고 극장 문을 닫을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밖에 나가지 못하니 갑갑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어떨까요? 역시 밖에 나가지 못하니 하루 종일 집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스트레스요, 그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도 스트레스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울증은 어느 연령층이 놓을까요? 노년층일까요? 나가지 못하시니까요. 아닙니다. 20대 청년들이라고 합니다. 20대 청년들의 경우, 우울증 환자가 1년 사이에 약 두 배 정도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학업 문제, 취업 문제, 결혼 문제, 등 여러 문제들로 인해 힘들었는데, 거기에 코로나까지 겹쳐 이중삼중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우울한 소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가 성령도 받고, 세례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울한 소식, 충격적인 소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베드로를 비난했다>
1-3절까지를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며칠 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할례자들이란‘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베드로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교회는 베드로를 대대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왜요? 주님의 뜻을 이루고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땅끝까지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마땅히 베드로 사도에게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환영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비난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디아크리노’라고 합니다. ‘디아’는 ‘빗나가다’는 뜻이요, ‘크리노’는‘판단(정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디아크리노’는 ‘빗나간 판단(정죄)’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에 대해서 이의의 제기한 정도가 아닙니다. 빗나간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빗나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입니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얼마나 능력 있는 설교를 했던지 하루에 3,0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가는 길목에 환자를 두기만 해도 환자가 낫는 기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왜 이방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느냐?’이유도 묻지 아니했습니다. 왜 그런 개돼지 같은 것들과 함께 먹었느냐? 비난부터 했습니다. 정죄부터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으면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기에 오히려 문제가 더 꼬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야고보 감독을 통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는 차례대로 설명했다>
베드로는 이런 비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는 얼마든지 자기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종, 베드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요? 나는 할 말이 없겠소?”그렇게 큰 소리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무슨 뜻입니까? 그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응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나올 때 내가 감정적으로 상대하면 안 됩니다. 감정에는 이성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옛날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 이기풍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믿기 전에는 유명한 깡패 왕초였습니다.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이런 기원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기풍을 안 만나게 해주옵소서’이기풍은 예수님 믿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동네 깡패 하나가 길에서 이기풍을 만났습니다. 이기풍이 정말 달라졌는지 시험하기 위해 주먹으로 한 대 쳤습니다. 이기풍이 씽긋 웃습니다. 이 깡패는 이기풍을 한 대 더 쳤습니다. 그러자 이기풍이 그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내리치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깡패가“형님,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이기풍이 말합니다. “옛날 같으면 너 오늘 초상날 이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오늘 저녁 부흥회에 오면 돼지!”그랬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베드로는 역시 큰 그릇입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들을 차례대로 설명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설명이 5절에서 17절까지에 나옵니다.
(1) 나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보자기 환상을 보았다(5-10절)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정결한 음식(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었지만 부정한 음식(먹을 수 없는 음식)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잡아먹으라”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느냐?”이런 환상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2) 가이사랴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가라는 성령의 명령이 있었다(11-12절)
나는 세 번씩이나 보여주신 보자기 환상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가이사랴에서 너를 데리러 세 사람이 온다. 지금 문 앞에 왔다. 의심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
(3) 천사는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었다(13-14절)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어느 날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데 천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말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데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청하라. 그가 네 집에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4) 성령께서 고넬료 가정에 임재하셨다(15-17절)
내가 고넬료 집에 가서 왜 나를 불렀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다. 그 성령은 지난 번에 우리 가운데 임재하셨던 바로 그 성령님이셨다.
베드로의 결론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차례대로 설명한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자기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신 이야기만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인정했다>
베드로가 차례대로 설명하자 그들이 반응합니다.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첫째, 잠잠했습니다.
‘잠잠했다’는 것은 비난을 멈추었다, 입을 다물었다는 뜻입니다. 할례자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간 것, 그들에게 세례를 준 것, 음식을 함께 먹게 된 것’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난을 멈추었고,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노회나 총회 때 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어느 안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합니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합니다. 계속 의견들이 개진됩니다.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들 입을 다뭅니다. 잠잠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말씀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누가“법이요”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법 앞에서는 딴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잠잠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읽고, 묵상하십시오. 순간순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들으십시오. 그때 우리의 입이 다물어지고, 우리의 혼란이 잠재워지게 됩니다. 그때 평안이 찾아옵니다.
주님께서“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염려할까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염려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메림나오’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원래 뜻은‘나뉘다’입니다. 생각이 나뉘고, 마음이 나뉘고, 그래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마음이 하나로 정리되면 더 이상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회는 이제 비난하는 말을 멈추고 그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입니다. 감사와 찬송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행전 10장, 11장의 고넬료 사건은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방인이 성령도 받았고, 세례도 받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누구를 통해서 하셨습니까?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이 두 사람은 극과 극의 사람이지만 둘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 경외하고, 또 기도의 사람들 되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생명 얻는 회개
이상웅목사(마중물교회) / 행 11:1-18
교회사를 돌아보면 지금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영적인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립되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과 진통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셨다’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교리적으로 공식화한 것은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지 400년이 훨씬 지나 정리가 된 것입니다. 그만큼 한번 굳어진 사람의 생각이 바뀌기 어렵고, 자신의 경험밖의 사건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신앙의 기본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도 그렇게 정립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18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방인도 생명 얻는 회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한 것입니다. 이방인도 할례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가 드러난 것입니다. 사도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이해한 ‘땅끝’은 이방 땅에 사는 유대인들이지 이방인 자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16년 정도가 지나서야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할 수 없고,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해야 하고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빛이 이스라엘에만 집중되어 비추었기에 주변은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 빛을 넓혀가셨습니다. 우리는 빛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시대에는 정신 질환을 모두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은총으로써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이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귀신들린 것이라며 병원에 가지 않고, 악귀야 물러가라고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위장병이 있었던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딤전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아무리 바울이 한 말이라고 해도 아직도 위장병 때문에 포도주를 쓰는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열어 보여주시는 것을 과거의 관습으로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은 과거의 관습을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비난받는 베드로
이방인 고넬료 일가가 회심했다는 소식은 유대 전역에 신속히 퍼졌습니다. 가이사랴에 머물던 베드로가 예루살렘까지 가는 것보다 더 빨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2절입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할례받은 유대인으로 회심한 자와 이방인이었으나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을 했다가 회심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실 모두 할례자입니다. 이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비난하다’는 원어의 의미는 ‘갈라놓다’, ‘정죄하다’는 매우 강력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베드로에게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이들이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면 복음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이 베드로를 정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비난하는 결정적인 것은 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왜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함께 먹음으로 할례자들의 전통과 관습을 깨뜨렸느냐는 것입니다. 할례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무할례자들은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너무도 불결하고 추잡해서 하나님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런 부정한 자의 집에서 먹고 마셨다면 베드로도 부정한 자가 된 것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비난받은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고 정죄당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과거의 베드로였다면 욱하고 ‘너희들 많이 컸다’며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노고를 신뢰하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비난부터 한 그들이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서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이 그들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이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3번이나 들었음에도 ‘그럴 수 없다’고 말했던 베드로였기에 도리어 자신을 비난하는 그들이 겪고 있을 어려움과 혼란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성장기에 너무 모범생이라 사고 한번 안치고 자란 사람보다 사고치다 정신 차린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자녀들에게 더 너그럽지 않습니까? 물론 자신은 별짓 다하고 부모 속 많이 썩였으면서 자녀에게는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부모도 있기는 합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던 자신을 성령님께서 바꾸어주셨듯이 자신을 비난하는 그들을 설득시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혹시 주변에서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해 도리어 누군가를 원망하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무시하거나 핀잔을 주지 마시고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의 변화를 위해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2. 설명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깨닫게 하신 것을 자신을 비난하는 공동체의 지체들과 공유해야 했습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으니 그런 줄 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초지경을 차근차근 차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그들에게 환상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환상 대신 차례로 설명하는 친절한 베드로를 주셨습니다.
7-8절입니다.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베드로는 ‘환상 중에 ‘잡아 먹으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너희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을 비난하던 자들과 공감을 표시한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베드로는 성령의 명하심이 있어서 가이사랴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섯 형제도 같이 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수사대가 없었던 당시에는 같은 일에 대하여 두세 사람이 같은 증언을 하면 법정에서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여섯 형제와 베드로를 포함하면 완전 수 7명이니 이는 더욱 분명한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한 것입니다.
15-16절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말을 시작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와 같은 현상이 그들에게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영웅담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끔 간증하면서 이야기를 부풀리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간증의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였고, 그것을 보면서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체험을 하는 것은 그 알고 있던 말씀을 더욱 온전하게 믿게 하는 것입니다. 체험만을 절대화해서는 안되겠지만 체험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도 안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밟았습니까?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차례로 설명했습니다. 공감을 표시했고,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영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 주도적으로 노력한 것은 없습니다. 환상으로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와서 따라갔고,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도적으로 한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에게 설명하여 설득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에 앞으로 자신이 주도적으로 하시려는 일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비전을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자신만의 비전이 되지 않고 모두의 비전이 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비전을 주셨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전이 공동체의 비전이 되도록 공유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잠잠해진 비난자
베드로는 열심히 설명하여 설득한 후 결론을 내렸습니다. 17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할례자들이 받았던 선물, 즉 성령을 무할례자들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니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를 비난하던 할례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8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비춰주신 빛을 따라 자기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린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저런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구제 불능의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이런 생각을 깨뜨리시길 원합니다. ‘내가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잠잠히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내부에서 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한번의 경험을 통해 한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후로 예루살렘교회의 몇몇 이들은 이 문제로 이방인교회를 괴롭혔습니다. 사도행전 15:1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여전히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이들이 땅끝을 향한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중에는 베드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2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게바 베드로마저도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이 나타나니까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는 위선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이 문제로 베드로를 괴롭힌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베드로마저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중물 교우님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변함없는 진리에 대하여는 타협해서는 안되지만 어떤 변화는 불가피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변화를 주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존에 습득한 것에 머무르거나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만 깨닫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땅히 변화할 것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변해야 할 것을 아직도 부여잡고 있다면 깨닫게 하시고, 깨뜨려주옵소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바꾸어가며 주님을 섬기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정방원목사 / 행 11:1~18
요한복음 9장에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한 사람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그가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그러면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는 문제로 논쟁을 한 듯합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답을 구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9:3>“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논쟁하지만, 그러한 논쟁은 그 맹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종에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그 맹인을 정죄할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 맹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끔 제자들처럼 소모적인 논쟁이 발생합니다. 본질을 벗어나서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갈등을 빗기도 합니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가지고 다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 회심 사건의 후속 작업입니다.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선교 역사상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기념비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 논쟁이 되고, 갈등의 불씨가 됩니다. 베드로는 천국 열쇠로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확짝 열고, 고넬료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회심한 고넬료에게 물세례를 베풉니다. 그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질 때,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이방인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눈 일을 문제삼습니다. 유대인의 정결법을 어겼다는 이유입니다.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한 것처럼 유대인의 율법적인 시각으로 보면, 베드로는 유대인의 정결법을 범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 10:28>“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그러나 할례자들의 비난은 일리가 있지만 본질을 벗어난 일입니다. 복음 전도의 본질은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할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본문 4절에 ‘설명한다’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의 수석 제자이고 선임 사도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누가 감히 베드로를 함부로 비난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권위를 부리지 않고, 오히려 납득할 수 있도록 차분하게 할례자들을 이해시킵니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하고, 본문 4~17절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며, 본문 18절은 할례자들은 비난을 멈추고 잠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을 어떻게 설득할까요? 본문 17절에 그는 겸손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만약에 베드로가 할례자들 앞에 권위를 부린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감히 나에게.” 베드로는 지금 할례자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로 그를 비난하는 할례자들을 설득합니다. 본문 4~17절에 그의 설명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는 세 가지에 강조점을 두고 할례자들을 설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본문 12~15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를 찾을 때,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을 받습니다. <본문 12절>“아무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갑니다. 고넬료에게 가서 화평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본문 15절에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임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할례자들에게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말씀을 전한 것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 앞에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할례자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베드로를 비난하지만,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우리가 베드로에게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은 큰 결단을 합니다. 나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엘리사를 방문합니다. 엘리사는 직접 나아만을 만나지 않고,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지시합니다. 그때 나아만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즉각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생각을 고집합니다. <왕하 4:11>“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이 앞서면 절대 안 됩니다. CCC 표어에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바울은 2차 선교 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이 막으십니다. 정반대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는데, 역시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드로아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곳에서 밤에 환상을 봅니다. 일명 ‘마게도냐 환상’입니다. 마게도냐의 한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환상을 성령의 음성으로 믿고 마게도냐로 나아갑니다. <행 16: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바울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결국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할례자들의 비난이 옳은지 아니면 성령의 명령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순종이 중요합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면 불순종하게 됩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합니다.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임하십니다. 마치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과 흡사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명 ‘고넬료 가정의 오순절’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행 1: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본 순간,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고넬료 가정에도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확신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심을 통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을 알고, 그는 3천 명의 청중 앞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행 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마찬가지로 고넬료 가정에 성령을 부어주심도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할례자들에게 확신을 갖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전파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하며, 의로운 일을 행하여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주장하듯 행함으로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바울이 전파하듯 믿음으로 구원받느냐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이 말씀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이신칭의의 진리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롬 4: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여러분,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할례자들의 비난이 옳은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베드로는 하나님의 주권를 인정합니다.
본문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내가 어찌 감히 막을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그래서 고넬료가 회심한 일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할례자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잠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 18절>“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피조물인 인간이 이러쿵 저러쿵 비난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9장에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말씀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사람을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롬 9: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여러분, 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가 구원을 받고, 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가 은혜를 받으며, 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가 직분을 받은 것,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왜 아무개에게 구원을 주시고, 왜 아무개에게 은혜를 주시며, 왜 아무개에게 직분을 주시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 33:19>“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아침에 말씀하시고, 저녁에 그의 아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겔 24:16>“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하나님은 말라기에게 말씀하십니다. <말 1:2~3>“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분이시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시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그 일을 베드로가 막을 수 없는 일이고,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듯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할례자들의 비난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갖고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그 첫 열매가 바로 고넬료의 회심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그 소식을 듣고, 그 중에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설명합니다. 첫째, 성령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고,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해야 하며, 셋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갈등을 해결하라
행 11장 1~18절 / 김 조목사
주의 평강이 넘치며 하는 일마다 승리하여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을 모두가 원하고 있지만 그렇게 쉽지 아니하여 슬퍼하고 분노하며 고통과 괴로움 속에 살아가는 날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 경제적인 조건, 환경 탓도 있겠으나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만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할 가족까지도 어느 날 조그마한 갈등이 불씨가 되어 큰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즉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여러 가지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만큼 모범적인 교회가 없습니다. 친교와 예배 상부상조하며 사는 정신은 오늘날 교회가 본받아야 할 교회 본질에 충실한 교회입니다. 그러한 교회에 고넬료의 가정 때문에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무할례자요, 이방인의 집에서 식사하고 설교한 베드로 사도는 당시에 법을 위반했다고(10:28) 문제를 제기할 정도가 아니라 단죄하여 비난하는 말로 “힐란”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중에 수장인 베드로 사도가 그들에게 10장에서 고넬료의 가정에 가게 된 모든 일을 낱낱하고 고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기에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했을 때 그들이 이해하고 “하나님이 생명 얻는 회개를 이방인에게도 주셨도다”하고 심한 갈등을 해결했습니다. 갈등 해결의 비결을 살펴보며 은혜 받고자 “갈등을 해결하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대화가 있어야 해결됩니다. (1-16절)
고넬료의 집에서 돌아온 베드로 사도에게 할례자들이 힐란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표시로 알고 있기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은 하였으나 유대적 전통을 버리지 못하고 할례자라는 우월감이 잔존하여 수장인 베드로 사도를 “힐란”했습니다. 이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란 말로 단순히 의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하고 비난하면서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항의에 베드로 사도가 자기의 권위로나 화내지 아니하고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였고 그들은 잘 듣고 이해하게 되어 갈등을 해결하였으니 서로의 대화가 단절될 그들의 사이에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의견이나 방법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내 입장 생각으로 저것은 아니다라고 단죄해 버리고 오해함으로 인간관계를 흩어버리고 좋았던 사이가 멀어지고 마음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대화가 없고 내 생각으로 정죄하였기에 사정도 알지 못하고 갈등이 깊어진 것입니다. 할례파 기독교인들이 전통법을 깨어버린 것 용납할 수 없었으나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오해를 풀게 된 것입니다. 10여년전 우리나라 여자 명문대학 출신 500명에게 남편과 하루에 일상적 용어 외에 10분 이상 대화하는 가정을 조사했더니 15%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부라는 이름뿐이지 서로 다른 삶이라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이었기에 다양한 삶이 있습니다. 또 문화권의 차이로 이해가 곤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하면 서로 이해되고 자신의 잘못도 알게 되어 갈등해소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서로 대화함으로 갈등 해소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해결됩니다. (17절)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임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해하고 우리와 똑같은 성령을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그러기에 10:47에 세례로 주웠으니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5:29) 생각하였다 말함으로 유대인의 법으로 위법이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하시니 모든 것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 여건보다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모든 것도 포기할 수 있을 때에 깊은 갈등도 해결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라고 기도하시던 주님 바라보고 따라서 살아갈 때에 자신의 부족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관계가 화답하고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가 양보 못할 것이 무엇이며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함으로 자신도 이기고 칭찬과 축복 받고 갈등을 해결하는 성도되시기를 원합니다.
3. 올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해결됩니다. (18절)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잠잠하였다”는 것은 의의 존재라 할 수 없었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것은 새롭게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요, 전적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고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하고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자신의 잘못도 깨닫고 하나님의 뜻도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형편도 이해해줄 수 있기에 갈등 해결됩니다. 그러나 시대가 너무나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에 남의 사정 아랑곳하지 아니하여 사회가 점점 더 병들어 가고 삭막해집니다. 당시 당략에 빠진 정치권이 타협도 없고 서로 비난하다가 보니 서로 죽는 꼴이 되었습니다. 자신위주의 판단보다 냉철한 올바른 판단으로 자신의 잘못도 회개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함으로 살맛이 나는 사회를 만드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 사람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인간관계를 맺고 삽니다. 서로 돕고 이해하며 격려하며 살아가야 함에도 갈등의 골이 깊어져 자신도 가정도 병들었고 나라와 민족도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갑니다. 서로의 입장을 듣고 말해주어 대화함으로 갈등을 해결하시기 바라고 사람의 생각이나 방법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요, 자신의 유익위해 판단이 흐려지면 안됩니다. 냉철하게 올바로 판단하여 갈등을 해결하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가정과 사회, 나라와 민족을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행 11장 1~6절 / 백장흠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본질을 떠나 비본질을 중요하게 여길 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복음의 본질은 영혼구원에 있는 것이지 선민의식과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편견으로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일보다는 형식에 치중할 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육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영적인 것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 보다 사람들이 세운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전통과 문화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변화라는 시대의 화두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결코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미래의 적이 됩니다. 하지만 변화와 변질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교회는 기도하고 성령충만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1.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연령도 많고 힘 있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칭찬과 격려가 아닌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할 것이 감정을 잠재우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은 1) 자기 공로의 주장 2) 시기와 질투 3) 리더자를 반대 4) 성격적인 반대기질 5) 일을 잘못하기 때문에의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가장 옳다고 주장하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베드로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습니다. 침착한 태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2.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통하여 지시 받은 내용을 간증하였습니다. 문제가 생겼나요?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오해하였다면 이해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변호를 합니다. 이러다 보면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결국 추한 사람이 됩니다. 진실이 사람의 동정과 동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는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자기가 받은 계시의 내용을 그대로 간증하였습니다.
1) 기도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2)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간증했습니다.
3) 내가 한 일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말하였습니다.
3. 수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정당한 말이라도 옳은 사안이라고 받아 드리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간증을 듣고 나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하였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것이니 우리도 순종합시다. 이렇게 수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보여준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시는 것을 인간이 부정하다고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남이 한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설명과 간증을 듣고 전체가 이의 없이 수용하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더라면 초대교회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고 간증을 했을 때 모든 이는 수용하여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오해가 풀려 이방선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모든 관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자로 나서는 성도가 됩시다. 유익하고 복된 역사를 만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복음과 종교
행 11장 1~8절 / 박지온목사
교회의 기도제목이 특별히 릴레이 기도하면서 건축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조금 그 교회 기도와 또 여러분 구역 기도와 여러분 가정에 개인 기도가 연결되어야 응답이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연초에 송구 영신예배 때에 기도제목을 쭉 보면서 옛날하고 많이 달라졌어요. 많이 달라졌는데 달라진 내용들이 금년도에는 특별히 주 기도내용이 성령의 인도 받게 해 달라고 그 한마디면 다 되었는데 좀 구체적으로 기록을 한 분도 있어요. 그런데 그 구체적으로 기록을 한 내용 속에 한가지 특성이 더 연결된다 그러면 우리 가족들 믿음 회복! 그 다음에 그 예배회복! 그 다음에 그 안 믿는 가족들이 상당히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회복! 전부...
그래서 제가 그걸 보면서 뭘 깨닫느냐 하면, 여러분 릴레이 기도 속에서 여러분 가족이 교회에 건축이 되어야 되겠다. 가족교회 건축! 그러면 따라 오는 것은 뭡니까? 보이는 이 교회건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 가족과 여러분 개개인의 삶에 구체적인 응답이 이번 릴레이 기도 통해서 응답 받으면 하나님이 그 다음문제는 해결하시고 남고도 남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 그냥 지속이 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뜻을 잡고 기도하시고, 기도할 때는 보니까, 꼭 거기 기록한 사람만 기도하고 다음 사람은 기도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언제든지 오시면 거기 기록한 사람들과 함께 합류해서 기도하면 돼요. 그렇게 하시면 되겠습니다.
홍기칠 집사님이 1월 31일에 E-Mail주소를 겨우 부여를 받았다 그러면서 E-Mail로 제게 편지가 왔어요. 왔는데 너무 교회 사랑을 새삼 감사하고 눈물이 난다 그래요. 그리고 거기 가서 보니까 지금까지 내가 교회에서 살았던 것 보다 이 외국에서 최 교수를 비롯해서 또 거기 이제 윤 성 태 목사님 통해서 가신다 그러더라 구요. 그러면서 너무 복음에, 전도에, 세계복음화에 뜨거운 도전을 받는다고 그렇게... 내가 이 교회 본국에 있어서 생각하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너무 뜨거운 도전을 받는다 그렇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고 교회 건축을 위해서 자주 모여서 또 계속 기도하겠다고 그렇게 연락이 왔습니다. 여러분 생각나는 데로 그곳에서도 세계복음화에 구체적인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한가지 말씀은 우리 변 상 태 군과 진선미 양의 결혼 예식인데 상당히 오랜 동안 가정에 결혼 때문에 기도하면서 기독교 예식으로, 그 다음에 박 목사가 주례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어요. 불신가정에서 우리 변 상 태 군은 총신 연구원에 학부제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뭐 기도도 하지 마라! 찬송도 부르지 마라! 주례사처럼 말씀만 해라! 그러니까 그게 예배는 아니거든요. 그러다가 기도를 계속하면서 얼마 전에 허락을 받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처녀, 총각으로 모두 우리 교회에 왔기 때문에 그 구역이 어느 구역인지 모르지만 그 날 조금 우리 교인들이 신경을 쓰고 이 목회자가 될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진선미는 동산 병원에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고 변 상 태 군은 지금 총신연구원 다니고 그러니까, 그 날 아마 어른들이 참석이 저조할 것 같아서 제가 조금 말씀드리는 것은 너무 안 믿는 가정에서 배경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많이 참석해서 찬송도 부르고, 찬송! 그렇게 하지 말라는 찬송이지만은 함께 와서 찬송 부르고 본인에게 정말 축복에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가정에도 이 기회 통해서 뭔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인도를 받는 기회가 되도록 좀 도와주시면 감사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말씀 전에 좀 부탁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복음과 종교"라 그랬습니다. 사실은 지난 주일에 그 말씀으로 연결해서 같은 제목을 내려고 그러다가 제목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종말에는 결국 뭐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뭐가 없습니까? 경건이 빠져버렸어요. 경건의 능력이 빠져버렸습니다. 결국은 종교 생활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말세에 기독교인들이 종교 생활하는 것으로 빠져 가는 것을 이미 벌써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것도 결국 그렇게 빠져 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사단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단이 발악을 하는데 기도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을 끌고 가기 제일 쉬운 첩경이 뭐냐하면, 종교생활로 끌고 가는 겁니다. 이게 사단의 발악이에요. 사단의 역사는 우선 흑 암 권세로 뭔가 끌고 가지만 이런 배경에서 엄청나게 예수를 잘 믿고 싶고 바르게 믿고 싶어도 그리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그 잠깐 아침에 신문을 보는 중에 김우중씨가 뭐 프랑스에 숨어있다! 그래가지고 이제 프랑스와 연결해서, 전부 연락을 해서 인도를 신변 인도를 하겠다고 그런 말을 하고 그러더라 구요. 그러면서 뭐, 40몇 조원이라던가 뭐 빼돌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결국은 뭐냐하면, 왜 그분이 그렇게 애국하고 뭐 애족하고 그런 것이 있는데도 왜 그렇게 되느냐? 망하게 되느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 배경이 사단의 경제 속에, 사단의 역사 속에서 이 빠져 나오지를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은 있고 원함은 있지만 결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망하게 되고 다른 것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또 뭐 조금 신문을 읽다 보니까! 참, 그 컴퓨터에 채팅으로 이제 지금 빠져 가는 우리 음란 문제들이나 이건 뭐 초등학생들도 이건 뭐! 그래서 어저께 목사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뭐 아우성은 어른들이 아우성이지, 이 어린아이들은 아우성이 아니래요. 벌써 그 수준을 넘어 버렸습니다. 어른들이 염려하고 아는 그것보다도 더 많이 아는데 그러니 어른들을 앞에 놓고 가르칠 정도가 되어 버렸으니까! 이런 수준인데 그러니 이제 채팅문제 이야기를 조금 끄집어내면서 참 염려를 하는 글을 썼더라 구요. 그게 뭐냐 하면요. 다른 게 아닙니다. 말세에 사단의 발악입니다. 무엇으로 끄집어내느냐? 가정파괴하고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들까지 초등학교 때부터 무엇으로? 음란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단의 역사 도저히 못 말리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뭐 지금 초등학교 때부터 이 아이들이 빠져가면서 뭐냐? 마약으로 빠져 가고 그냥 본드 흡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제가 그 대안학교 이야기를 잠깐 드렸습니다 만은 그 아이들이 뭐 본드 같은 것을 한 박스씩 사 가지고 그래 와 가지고, 더군다나 부탄가스도 한 박스 사 가지고 와 가지고 그건 필수품이라고 하더라 구요. 그 아이들한테는... 왜, 그걸 흡입한다하더라 구요. 그대로 흡입하고 그냥 그것을 종일 그러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제가 잠깐 그 비디오에 나온 것을, 찍어서 보냈더라 구요. 그런 아이들이 바꾸어지는 것을 보면서 참 복음 아니면 그러니까 사단이 장악해 있는 사단이 발악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복음이 들어가니까 이 바꾸어지는 겁니다. 바꾸어져서 지금 그 아이들이 뭐냐하면 가족도 못 말리고 가족도 포기하고 다 했는데 대한 학교에 와 가지고 복음 들어가니까 바꾸어 져서 어디까지 갔느냐? 결국은 그 전에 못했던 중학교, 고등학교과정, 검정고시 해 가지고 지금은 대학까지 합격을 했어요. 이 복음이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정말 이 복음의 축복과 역사를 받았는데도 너무 너무 희미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축복과 은혜를 받았고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감격이 없어요. 이 행복이라는 이것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결국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죄 관이 문제더라 구요. 지난주에 원죄라는 문제를 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원죄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 구원의 감격이 이해가 안 돼요. 그러니까 구원의 감격이 원죄가 이해 안되면 그리스도를 모른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창세기 3장에 사단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이 안 되니까! 오직 그리스도가 안 되니까! 종교로 빠지는 겁니다. 착한 행실로 빠지고...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도요. 뭔가 이 착한 행실을 조금만 하면요. TV에도 나오고 그래요. 그래서 지금 뭔가 이 그런다고 이 사단의 역사가 깨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지금 이 땅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1부 예배 때도 조금 말씀했습니다 만은 참 안타까운데 그분이 믿는지 안 믿는지 그건 제가 모르겠어요. 뭐 보니까 안 믿는 것 같아요. 일반 종교인 같은데, 뭐 외대 4학년이 일본이 구출했다고 일본에서도 막 야단하고 우리나라 와서 우리나라에서도 야단하고 행렬이 막 이어지고 그 장례행렬에 그러더라 구요.
여러분 내가 생명을 내어 던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거기서 사단이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꺾이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 지금 만약에 우리가 교회가 착한 행실하고 이런다고 해서 사단이 꺾이면 해 야죠.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착한 행실을 한다고 해서 사단이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쉽게 말해서 사단이 착한 일을 한다고 말하자면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뭐 정말 예수 잘 믿고 착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도적놈이 안 들어온다? 그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착한 일 하고 그러면 어리석으니까 도적질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하고 다른 차원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가 좀 말씀하고 싶은 것은 정말 원죄를 모르면 구원받아 놓고도 구원 확신이 없어요. 그리고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오느냐 하면, 그 다음부터 나오는 문제가 삶과 생활이 흔들려요.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우리 신앙이 뿌리 채 흔들거립니다. 이것이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까! 범사에 실패하는 겁니다. 나가서 사회 생활에도 실패하고 그리고 조금만 문제가 오면 내가 예수 잘못 믿어서 그런가싶고 여러분 잘 아셔야 되는 것은 한번 받아합시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창세기 3장에 원죄는 완전히 해결됐다" 완전히 해결 된 겁니다.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뭐냐? 자범죄 문제입니다. 여러분 원죄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 뭡니까? 자범죄는 따라서 해결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뭐라 그랬습니까? 해방했습니다. 완전히 해방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따라서 다 거기서 해결이 되는 겁니다. 뭐 예를 들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근본문제입니다. 학생이면 뭘 해야 됩니까? 뭘 해야 됩니까! 공부를 하게 되고 합니다. 아무리 학생들이 지 마음대로 논다고 그래도 학교에 다니면서 그래도 학교에 있는 한은 뭘 합니까? 공부하게 되어 있어요. 듣고 공부하고...
그러면 반대로 도적놈은 뭐 하게 되어 있습니까? 도적질하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도적질해야 돼요. 제가 뭘 말하고 싶으냐? 근본 하나님의 자녀다 의인이다. 뭐가 됩니까? 근본 내가 뭐냐? 신분 따라서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그 다음에 나오는 자범죄! 이것은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실수로 약간 자범죄 지을 수 있어요. 거짓말도 할 수 있고 오늘 아침에 솔직히 말해서 나오기 전에 부부하고 한바탕 싸움 한 사람도 있고 눈 흘기다가 여기 와서 주 앞에 나와서 '주여 내가 이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늘 있는 모습인데 어쩝니까? 뭐 늘 그런 것! 그리고 또 뭐 부모자식간에 있을 수도 있어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죄 관이 뭐냐 하면요. 원죄라는 문제! 이 문제 해결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 다음에 이것에 대한 확신과 담력보다도 뭐냐? 항상 이것보다도 어디에 눌려 버리느냐? 내가 오늘 싸웠는데 내가 오늘 막 이랬는데 이래가지고 거기에 눌려 가지고 죄 관이 잘못 되었어요. 그래가지고 마치 자기는 복음을 못 받고 자기는 축복을 못 받고, 이런 식으로 흘러 가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원죄가 바로 이해 안 되고 구원관이 바로 안 서게 되면 뭐가 되느냐? 종교로 빠지게 됩니다. 이게 이해되면 오직 그리스도구나! 오직 이것밖에 없구나 거기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해되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게 저절로 나옵니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참된 평안이 있게 되고 감사가 있게 되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가 요즘은 싸울 일이 없어서 별로 싸우지도 않아요. 옛날에는 많이 싸웠습니다 만은 부부하고 싸워서 강단에 올라 올 때에 내가 싸웠다는 그 문제에 빠져 가지고 강단에 올라오게 되면요.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면 참 눌립니다. 그러니 뭐 당장 뭐가 나오느냐? '네가 그래가지고 뭔 설교를 하다고, 벼룩 이도 낯짝이 있지!' 이런 식으로 들어와 버리면 말이 안 나와요. 눌려버립니다. 그런데 그 후에 뭐냐 하면요.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요.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게 확신이 왔을 때에 그런 소리나면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놈이다. 이러면서 강단에 올라서면요. 설교가 더 잘된다 그랬어요. 더 안 된다 그랬어요. 열받쳐서 더 잘해요.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했느냐 하면요. 바로 죄 관에 대한 잘못 이해가 되었을 때에 범사에 내가 눌려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든지 확신과 담력이 없으니까 뭡니까? 항상 저버립니다. 실패해버립니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극복이 안 돼요. 아! 이것 때문에 그랬구나! 아, 그것 때문에 안 되는 구나! 여러분 그것 때문에 안 되려고 그러면 옛날에 안 되었습니다. 옛날에 벌써 안 되었어요.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 종교생활이라 안 그랬습니까? 종교생활! 이걸! 그런데 거의 여기에 빠져 있는 것이 말세에 사단의 유혹이요. 사단의 작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거의 여기에 빠져 있어요.
이미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에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내 안에 영접되는 동시에 너는 하나님의 뭐가 되었습니까?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을 받았습니다. 사망에서 어디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랬습니다. 이때부터 늘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현실적으로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삶은 뭐로? 늘 승리로 우리의 연약함과 상관없이 내 부족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게 될 때에 바울처럼 늘 무엇이냐? 바울이 부족한 것이 많아요.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랬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금 하나님이 내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사도로 세웠다. 이것이 바울 서신에 쫙 깔린 내용입니다. 주안에서, 주안에서!
그러니 기도할 때에 제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였사옵나이다.' 그런 소리 제가 하지 마라는 것이 바로 그 배경이에요. 지금 기도는 계속 진행하는 것이지 지난해 했다. 옛날에 했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이 아이들이 그 말을 하니까 어른들도 같이 닮아 가지고 제가 가만히 보면요. 여러분들이 서서 더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였사옵나이다' 그러더라 구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떻게? 기도합니다. 계속 기도는 현재 기도는 계속 해 나가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계속 함께 하시는데, '하였사옵나이다' 기도는 계속하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지난번에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잘 안 되는가 봐! 왜 그러냐? 그 사람들의 삶이 그러니까 옛날에 기도한번 했고 지금은 안 하니까! 지난번에는 성령이 인도했고 지금은 안 하니까! 그러니까 '기도하였사옵나이다' 그러고 지금은 안 하니까 지금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행형 이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또 곤란하잖아요.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이 역사 어디에서 원죄라는 그 사실이 창세기 3장 문제 해결이에요. 사단이 여러분 붙잡는 동시에 뭡니까?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원죄가 이해가 안 되면 지옥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되고 천국이라는 것이 이해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얕게 믿으면 예수 믿고 난 후에 구원에 확신이 없고 이것이 희미해지면서 뭐가 안 되느냐? 지옥과 천국도 희미해져 버려요. 그래서 심지어 어떤 지경까지 가느냐? 한참 잘 나가다 보면 이렇게 해서 나가다 보면 정말 지옥이 있나? 천국이 있나? 이렇게 돌아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나중에 한참 더 나가다 보면 '뭐, 지옥이 있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결국 뭡니까? 불 신앙으로, 완전히 불 신앙! 전혀 복음이 안 들어간 것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회복하려고 말하자면 이것을 회복하려고 마음에 뭔가 그래도 지옥이 있을 것이다. 천국이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또 뭐냐하면, 원죄가 해결 안 되면 뭐가 온다 그랬습니까? 저주가 왜 오는지도 모릅니다. 저주가 계속 오니까!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것이 뭐냐하면, 종교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돼요. 그래서 종교하면서 뭡니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런 액운 없애 주시고' 이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나님 이런 액운을 없애 주옵소서' 그것이나 이것이나 종교에 빠져서 다 똑같은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절에 가서 뭐 '이것 없애 주시고 우리 잘 되게 하시고' 그것이나 철야기도하면서 '하나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백 번 그래봐야 똑같이 '그것 없애주시고 뭐 없애주시고 이런 액운 없애주시고'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해결이 안 되면 똑같이 사단은 무엇으로? 종교로 끌고 가 버립니다.
여러분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원죄 문제가 해결되는 동시에 여러분과 저는 완전히 구원받았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영생이 들어갑니다. 해결 되어 버렸어요. 그때부터 뭐냐? 이 생명 얻은 감격과 감사가 얼마나 진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형편과 사정에 처하던지 너무 감격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입만 열었다 그러면 감사입니다. 핍박받는 것도 '어쩌다가 이 자리에 앉히셨습니까! 감사합니다'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서 막 감사합니다. 밤중에 찬송하다가 옥문이 열리고 옥토가 열리고 야단났잖아요. 여기서 뭐냐? 기적이 나오더라 구요. 이것이 안 되니까, 기도라는 것이 안 되니까! 기도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문제! 원죄라는 문제가 간단한 것 같지만 여러분 우리도 모르게 죄 관이 뭐냐? 자범죄에 여러분 거의 눌려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자꾸 자범죄가 원죄보다도 이건 이 자범죄라는 것은 여기에 모두 빠져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회개한다고 그래도 뭐냐? 자범죄에 대한 회개! 그래서 죄 관이 너무 바꾸어져 버렸어요. 뒤틀려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또 말합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올해도 한번 또 나오고요. 지난주에 회개했던 것 이번 주에 와서도 또 하고' 이게 전부 자범죄의 배경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자녀 된 자로서 삶이 자연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안 되었다는 인식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인식이 그리고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인식이 이것이 뭐냐? 자꾸 나를 뭡니까 그런 데로 빠뜨리는 겁니다. 항상 자신이 없게, 염려하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런 모든 문제들입니다. 이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왜? 원죄! 바로 예수님은 모든 문제 해결 자! 바로 이게 뭐냐? 원죄! 사단의 손에서부터 완전히 해방 받았습니다. 가문과 가정에서 완전히 해방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여기서 확신되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제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 관입니다. 해방 받았다는 문제 바로 이런 배경인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때부터 뭐냐 하면요. '아하! 전도해야 되겠구나' 이게 나옵니다. 자연적으로 전도해야 되겠구나! 그러면 그럴 것 같으면 뭐냐하면, 나도 모르게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요. 어려울 때일수록 이사야서에 말씀한 것처럼 포로 되고 너무 어려울 때에 뭐라 그랬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그 다음에 여러분 신약에 완전히 로마의 속국이 되고 너무 어려운 시대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래 놓고는 뭐라 그랍니까? 세계복음화! 무슨 힘이 있다고 이스라엘에게 그랍니까? 오직 성령의 임재! 이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이 축복과 은혜가 내가 생명 얻었을 때에 이 큰 축복의 역사를 감격하고 감사했던 것처럼 생명의 역사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눈으로 보게 될 때에 바로 저 사람의 문제가 뭡니까? 아 이게 아니면 안 되겠구나!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전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겁니다. 본능적으로... 그리고 내가 잘 한다 못한다 이전에 마음속으로 본능적으로 품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죄 관을, 올바른 죄 관이 나온다 그럴 때에 뭘 깨달아야 되느냐 하면요. 여러분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회개가 무슨 회개냐? 전도 못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돌아갑니다. 나는 바울 서신을 통해서 뭘 보느냐 하면요. 바울은 죄 회개가 다른 것이 없었어요. 그리고 정말 벌받는 것이 뭐냐? 전도 못 할 때에 벌받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9장 16절 말씀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받아합시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 못 전하는데 있어서 화가 있을 지로다. 여러분 이것이 마음에 정말 부닥쳐 와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죠. 여러분 진짜 불효가 뭐가 불효냐? 부모에게 복음 못 전하는 것! 예수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니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결정하실 일이니까! 우리로서는 그것은 그 경력까지는 못 들어갑니다. 우리가 할 일이 뭡니까? 복음 전하는 일까지만 합니다. 이걸 못 했을 때에... 만약에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고 지옥 가셨다. 이럴 때에 바로 이 누가복음 16장에 19절부터 30절에 나오는 말 아닙니까! 가서보니 지옥이 있거든요. 그런데 내 아들은 예수 잘 믿었다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가 지옥에서 뭐라 그르겠어요. '이놈 불효 막심한 놈! 자기 혼자만 천국 가려고 그러고 나한테는 천국 있다는 소리 한마디도 안 해주고' 여러분 그럴 것 아닙니까? 다른 게 없어요. 제일 불효하는 것이 뭐냐? 부모에게 복음 못 전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웃을 가장 미워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뭐 사건 조만한 문제가지고 밉다, 어떻다. 이런 문제는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궁극적인 미움이 뭡니까? 이웃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데도 내가 복음을 통해서 그 나라 영광을 알면서도 못 전했다. 그게 영원히 미워하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었을 때에 이 이웃이 만약에 지옥 갔다. 그리고 어느덧 보니까, 앞집에 있는 믿는 사람은 천국 가 있거든요. 지옥에서 뭐라고 그르겠습니까? '이 못된 놈, 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천국 있는 줄 알고 그렇다면 왜 내게 한마디도 안 했느냐?' 원망할 것 아닙니까?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것이 이겁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전해야 되겠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그래서 이 전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유일하게 앞서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말씀이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왜? 복음전도하기 위해서 로마까지 복음 증거 하러 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계획하는 도중에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묶여서 결박을 당할 것이다. 아가보가 말렸거든요. 모든 성도들이 말렸단 말이죠. 그럴 때에 바울이 한 것이 말해줍니다. '아니다 내가 복음 전하기 위해서는 묶여도 좋고, 죽어도 좋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참 생명을 전하는 일에는 생명 내 걸어야 된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에 부닥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뭘 주었습니까? 생명주어서 여러분을 건져냈습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 다른 게 아닙니다.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길이더라 구요. 참 죄가 된다면 이 복음 위해서 구체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이 복음 위해서 우리 마음이라도 갖지 못한 것, 이것이 바울로서는 죄라 그랬습니다. 축복이 뭐냐? 너희가 나의 면류관이다 그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전도하는 사람보고 너희가 나의 면류관이라 그랬어요. 여러분 하늘나라에 가서 축복이 뭡니까? 여러분 통해서 전도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혔을 때! 그것이 여러분에게 면류관이라 그랬습니다. '개털'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지만 하도 '개털모자'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지. 전도한번 못했을 때에 개털모자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오늘 여러분 정말 뭐 솔직하게 양심적으로 한번 이야기를 해 보세요. 정말로 하늘나라가 있고 정말로 하늘 나라에 영광이 있다 그러면 이 말 안한 놈이 나쁜 놈이지! 이 말 안하고 죽어 가는 걸보고 있다는 것이 그게 나쁜 것 아닙니까? 이것을 마음으로라도 '이걸 해야되겠다' 이 생각조차 없다 그것은 안 믿는 겁니다. 정말 그 생명 알고 그 생명의 역사가 내 마음에 와 진다. 그러면 이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우리 삶이 어떻게 되느냐? 판단과 생각이 어떻게 되느냐? 오직 성령입니다. 왜? 여러분과 제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때부터 뭐냐? 이제는 내가 무슨 일이 생겼다. 무슨 사건이 생겼다. 그럴 때에 판단하게 되어 있느냐?
만약에 종교인으로서의 판단은 간단합니다. 사업이 좀 안 된다. 내가 지난번에 십일조 떼어 먹었더니만 안 되는 구나! 이렇게 돌아갑니다. 여러분 십일조 어쩌다가 안 드릴수도 있어요. 저는 십 일조하고 십 이조하고 모아 놓았다가 어떨 때 바쁠 때는 몽땅 어디에 다 써버리고 그리고는 항상 뭐냐하면, 봉투에다가 몇 십 만원 빚졌다, 몇 십 만원 빚졌다. 이렇게 써 놓고 어쩔 때는 그래놓고 만약에 무슨 문제 생기면 뭐냐 하면요. 나도 모르게 내가 십일조 드릴 거 내가 유용해서 썼으니 공금횡령 아니냐? 오늘 아침에도 30만원이 빚져 가지고 30만원 얼른 갖다가 집어넣어 가지고 오늘 다 넣어놓고 이걸 놔두면 자꾸 유혹이 그리로 가니까! '안되겠다 내어 버려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왜 그렇게 돌아가느냐? 아직까지도 다만 내 속에, 뭐가 생겼다 그러면 꼭 무슨 사건 때문에 일어난 줄 압니다. 여러분 사건이 약간 잘못 되어 가지고, 여러분이 약간 잘못 되어 가지고 뭔가 하나님이 그래가지고 여러분 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저는 늘 그렇게 말합니다. 옛날에 망했습니다. 지금까지 올 것도 없어요. 벌써 초반에 다 망했어요. 받아합시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믿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죄인이 아니요" 뭐라고요? 의인은 뭡니까? 의인은 뭡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잘하던지 못 하던지 사랑을 받습니다. 병들면 더 사랑 받습니다. 연약하면 더 사랑 받습니다.
희락이가 몇 일 감기를 했어요. 전에는 감기를 안 할 때는 건강할 때는 온 가족이 그렇게 신경을 안 썼어요. 그러니까 감기를 좀 하게 되니까, 이 아프고 음식 잘 안 먹고 이러니까 온 가정이 신경을 쓰게 되더라 구요. 그러니 이놈이 그렇게 되니까, 완전히 왕이라! 옛날에 안 아플 때보다도 더 왕이라! 어느 정도로 왕이냐? 제 앞에서 앉아서 밥을 먹을 때도 물을 이제 다른 사람이 주려고 그러면 그 사람이 물주는 것을 받아 가지고 나한테 가지고 와서 내 손으로 물을 또 달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건이 생겼느냐 하면요. 전 가정이 이제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저의 할머니가 물을 주면 내 손으로 한번 되밀어요. 내 손을 한번 대어 줘야 돼요. 그 다음에 또 가지고 가면 또 밀어요. 그러면 또 고모 손도 한번 대어 줘야 돼요. 또 그 다음에 또 가면 또 밀어요. 저의 어머니 손도 한번 대어 줘야 돼요. 세상에 온 가족의 손을 한번씩 다 대어 가지고 가족이 받들어서 줘야돼요.
나는 그걸 보면서 참 하나님께서 여러분 잘못하고 병들었을 때에 때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준비해 놓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이게 원죄가 해결되고 복음의 확인이 안 되면 확신이 없어져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뭐냐? 두들겨 맞을 걱정을 합니다. 또 내가 어떻게 도 두들겨 맞을까! 또 이 잘못 때문에 어떻게 두들겨 맞을까! 이번에는 다리가 부러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말로 이해 못하는구나! 너희 부모들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모르느냐? 그럴 것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문제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부터 뭡니까? 여호와의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죄의 해결입니다. 그러니 이 구원받았다는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바울이 이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감격해서 날마다 기뻐하고, 날마다 감사하고, 날마다 찬송하고 무조건 문제가 생길 때에 감사합니다. '엎어져도? 감사합니다! 자빠져도? 감사합니다!'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진짜 여러분들이 참 복음의 행복이 뭔가를 깨닫게 됩니다. 아니면 복음 가지고 얼마나 고통 하는지 몰라요. 복음가지고 얼마나 눌리는지 모릅니다. 이걸 가지고 자꾸 '종교, 종교!' 그럽니다. 이런 문제를 계속해서 우리가 잘 안 되죠.
그러면 이때부터 오는 판단이 뭡니까? 판단과 진단과 그 다음에 삶이죠. 그러면 예를 들어서 첫 번부터 이제 복음의 기초가 바로 안 되었을 때는 뭐냐하면 이제 이런 판단이 나오잖아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이런 판단이 나오고 저런 판단이 나오고 이러면 이것이 문제가 있구나 이것이 문제구나 그러면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그래서 심지어는 어떠냐? 그 사무엘이 말하기를 '나는 기도하는 죄를 범치 않는다' 이러니까 그냥 계속해서 7시간, 8시간 하루종일 기도한다고 있고 그러는데, 여러분 그 배경을 잘 알아야합니다. 사무엘이 기도한다는 그 배경 속에, 여러분들이 기도 한다는 그 배경 속에 무엇 때문에 성령의 인도 받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냐? 여러분 범사에 판단이 '아, 문제가 생겼다! 사건이 생겼다! 아, 하나님이 나를 또 성령의 인도로 들어오게 하는구나! 하나님이 축복의 인도로 나를 들어오게 하는구나!'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도 모르게 뭐냐? 참 죄악이라는 개념이 전도 안 한다는 개념도 개념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나님의 뜻을 내가 떠났구나! 내 마음대로 살았구나!' 그게 뭐냐? 성령의 임재! 그 다음에 기도하게 될 때에 '내가 새벽 기도 안 나갔더니만 이렇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 받는 곳으로 나를 인도합니다. 범사에 생각이...
그러면 여러분들이 죄 관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떠났을 때에... 그래서 내 자의, 내 주관대로, 내 생각대로 뭘 했을 때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디로 가느냐? 다른 게 아닙니다. 사단의 인도를 받게 되기 때문이고 그 유혹을 받기 때문에 그게 범죄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분 나쁜 일이지 다른 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범사에 생각과 판단이 뭐냐하면요. 복음이 안 되어 있고 정말 구원의 감격이 안 되어 있고 정말 이 사실이 안 되어 있으면 뭐냐? 다른 걸로 자꾸 빠지게 됩니다. 자꾸 다른 것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뭡니까?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병 가지고 얼마든지 그 전도하고 뭐 다 해야되죠. 너무 감사! 병 가지고도 할 수 있으니까! 감사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의 어떤 면에서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병 가진 사람들의 오히려 소원이에요. '하나님의 그 나라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뭐라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이러면 '네 병이나 낫지!' 이랍니다. 그게 종교 의식이에요. 전부! 그리고 그 사람들은 뭔가 하면, 기적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병 나았다!' 기적입니다. 이것이 또 교인들 속이게 되더라 구요. 뭐 신비에 들어가고... 그러면 천리교도 병 낮게 합니다. 여러분 불교인 들 못 낫게 합니까? 아닙니다. 낫습니다. 신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그리스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이 땅에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입니다. 어디서? 영원한 그 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받을 축복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삶은 이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되면 이 땅에서 고해 받는다, 고통받는다, 이 땅에서 뭐 문제 있다. 뭐 양보됩니다 자연적으로... 양보되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서...
그래서 이 사실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뭐가 됩니까?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자식들에게 세계복음화 이 언약만 집어넣어 주었다.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송현 교회 세계복음화 딱 마음이 하나 되었다. 여러분 교회 건축이 뭡니까?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이 사실이 확실히 되어 있다. 모든 것이 이 안에서 해결이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한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범사에 감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제게 지금 갖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한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축복을, 나는 열거를 해 가지고 믿는 자의 받을 축복 말할 생각이 없을 정도입니다. 왜? 너무 확실한 것인데 거의 다 놓치는 겁니다. 그리고 조만한 문제 가지고 막 어찌할까 싶고 걱정하고, 조만한 문제 백 번, 천 번! 괜찮아요.
여러분 우리 가정이 참 평안하고 목사님이고 이러니까 맨 날 웃음 보따리고 이런 줄 알죠. 우리 가정에도 여러분 염려하는 것 다 있고요. 인간이 갖고 있는 염려와 고통이 다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가정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뭡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염려! 그래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고통! 그래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 원죄해결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설명되어 질 때에 하나님은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에게... 그 다음에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율법 자들에게 설명되어 질 것이 누구냐?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그래서 그리스도 그분은 '예수님이다!' 정도가 아닙니다.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단의 흑 암에 왕입니다. 이 땅에 완전히 꺾었고 흑 암에서부터, 영원한 죽음에서부터 완전히 일어 나셨습니다. 사단의 흑 암에 권세를 꺾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꺾으신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모든 원죄를 모르기 때문에 빠져오는 저주와 재앙에 주인인 사단의 세력을 오직 그리스도 그 분 이외에는 꺾을 자가 없어요. 완전히 꺾었습니다. 저주와 재앙에서부터 완전히 해결해 버렸습니다. 가문으로부터 오는 것, 종교 생활에서부터 오는 것, 그렇게 열심히 애를 쓰고 믿었지 만은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가정에 흐르는 저주와 고통,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결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옵니다. 세상에 떨어져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뭔가 이 끊어야 되겠는데 안되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합당하지 않은 생활인데 끊어야 되겠는데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뭡니까? 세상으로부터 나를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와 역사! 그 분의 힘을 의지해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정말 하나님이 너무 너무 축복되고 확실한 복음 속에 세운 이 축복의 역사를 희미하게 놓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너무 놓치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과 제가 누려야 될 이 엄청난 축복을 현실적으로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사단이 이용을 해서 틈타고 들어 왔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흩트려 놓고 우리 생활에 받을 축복을 놓치고 억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 속에서 이미 승리케 하신 축복이 여러분 가정과 삶에 기도할 때에 완전히 회복되는 감격이 체험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수감사 천국잔치
행 11장 6~9절 / 김중석목사
Thanksgiving-Heavenly Feast! 오늘 주일예배를 [추수감사 초청잔치]라 하고 여러분을 초대했다. 그리고 오늘 설교 제목은 [추수감사 천국잔치]이다. 추수감사 천국잔치에 초대된 여러분 축하한다. 환영한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 ‘추수감사’를 드렸다. 간증-연주-예물-찬양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추수감사’를 받으시고 그 응답으로 복을 주신다. ‘설교’는 ‘드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감사’에 대한 ‘복’을 주실 것이다. 한 분도 놓치지 말고 다 받아 가시기 바란다. 추수감사 천국잔치!
1. ‘추수’는 ‘심판’이다. 보통 ‘추수’하면 ‘축복’을 떠올린다. ‘거두어 들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수에는 ‘걸러내어 버리는’ 것들도 많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추수를 가지고 ‘심판’을 말씀하셨다. 추수는 ‘구원과 버림’의 심판 작업이라고. 이른바 ‘가라지 비유’가 있다. 마13:24 어떤 사람이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밤에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가리지를 덧뿌리고 갔다. 싹이 날 때 보니까 가라지도 보였다. 농부들이 주인에게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도 나니 이게 웬일입니까?’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들은 천사들이고, 원수는 마귀이고, 좋은 씨는 복음이고, 가리지는 죄이다. 주인이 대답했다. ‘원수가 그랬구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을까요?’ ‘아니다 가만 두어라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으면 안되니까! 이제 추수 때가 온다 그때 내가 추수꾼들에게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할 것이다’/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가? 너희는 ‘알곡’ 아니면 ‘가라지’다. 지금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알곡과 가라지를 가를 것이며 그 때가 추수 때다. 그러니 해마다 ‘추수’를 보면서 ‘심판’을 생각하라는 비유말씀이다.
‘심판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심판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두려워한다. 그러나 싫건 좋건 심판은 있다. 심판은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 곧 하나님이 하시는데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한다. 그의 심판은 정확할 것이다. 세상 법정과는 다를 것이다. 누구든지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된다. 모든 감춘 것이 드러날 터인데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다. 모든 죄와 의가, 선과 악이 드러나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된다. [마이크로 필름] 보다 더 정확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는 알곡인가? 가라지 인가? 알곡은 ‘복음’의 씨를 받은 사람이다. 복음의 씨를 받고 자라는 사람은 고난이 많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병충해도 있다. 홍수와 가뭄 피해도 있다. 일기의 피해 냉해나 웃자람도 있다. 가라지 피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가라지가 알곡보다 더 잘 자란다. 가라지가 더 많이 섭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라지는 세상과 잘 맞는다. 내세가 없기 때문이다. 가라지는 정말 심판이 싫다. 그 양심이 벌써 심판이 자기를 불태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곡은 심판이 싫지 않다. 오히려 기다린다. 더 나은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칭찬을 받고, 위로를 받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쓰고, 곳간 곧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자기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알 듯 하다. 복음을 받았는가? 복음을 가지고 자라려다가 고난을 받았는가? 심판이 두렵지 않고 기다려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알곡’이고 아니면 ‘가라지’이다. 그런데? 표정이 별로인 분들이 많다. 심판이 싫은 분들이 많다. 이게 복인가? 복이다. 심판을 아는 것이 복이다. ‘알곡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복이다. ‘알곡이 되는 기회를 주심’이 복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된다.’회개’하면 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주님께 고백하면 된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했으니 이 시간 모두 마음으로 믿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를 원하셨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 없는 자가 죄인을 위하여 대신 피흘려 죽어야 했다.
그러나 죄 없는 인간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하나님을 인간으로 만들어 땅에 내려 보내왔으니 이가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인간의 죄, 곧 나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
이를 믿는 자는 그 죄가 사해진다.
이제 여러분 모두 ‘알곡’ 되는 복을 받기 바란다. 할렐루야!
2. ‘감사’는 희망이다. 감사는 나에게 하지 않는다. 남에게 감사한다. 감사는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을 인정하려면 ‘하나님’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면 타인도 인정할 수 없다. 인간은 다 욕심이 있고 탐욕적이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남’이 없는 것이다. 남은 다 경쟁자요 이용해 먹을 대상이다. 이런 인간에게 ‘복음’이 들어오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면’ 감사라는 것이 생긴다. 최근 유명 일간지에 독자들을 초청해서 애기를 들어봤다. 독자들이 이렇게 요청했다. ‘요즘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면이 많은데 신문이 좀 희망적인 애기를 많이 싫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희망’이 어디 있나? 모두 장사가 안되고 수입이 줄어서 야단인데 어디 희망이 있나?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감사하러 모였다. 감사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불경기지만 감사가 있다면 여기에 희망이 있다.
미국에 이민간 어느 가정이 믿음이 좋았다. 그런데 그 집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슬퍼하는 아버지에게 기자가 물었다. ‘얼마나 슬프십니까?’ 그랬더니 그 아버지 하는 말: ‘네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내 아들과 18년을 함께 지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더 나은 곳이 있으니까요.’ 아들이 그 아버지의 희망이었을 수 있다. 그 아들이 사라진 마당에서 만약 아버지가 끝없이 절망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가 있는 그 아버지를 보면 ‘희망’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 감사할 때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때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3. 천국이 있다. 성경은 ‘천국’을 말씀한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천국과 지옥(스올)을 말씀하는데 미래적인 것이 있고 현재적인 것이 있다. 먼저 미래의 천국이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그 후에 ‘알곡신자’들이 들어가는 ‘영원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의 참된 집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의 ‘여관’ 일 뿐이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어있고 그 사회는 ‘새 예루살렘’으로 지칭되는 ‘죄와 악이 없는 사회, 고통과 사망이 없는 사회’이다. 사11:6-9에서 보여진다. 계21장22장에는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보여준다. 미래의 천국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실현 될 것이다. 이 천국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을 준다. 세상에 무슨 일을 당해도 이 천국을 생각하면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 300년 간에 무수한 순교자들이 이렇게 이겨냈고 그 후에도 수천만 순교자들도 이 소망으로 순교할 수 있었다. 스데반도 순교할 때 천국에 서신 예수님을 봤다.
현재의 천국이 있다. 많은 사람이 불경기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행해 할 때 어렵지만 자족하며 감사하며 심지어 남을 돕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다. 딤전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의 현재성을 말씀한다. 눅17:20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마음천국이다.
반대로 현재의 지옥이 있다. 먹을 것을 곳간에 가득 쌓아놓고도 계속 욕심을 부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욕심은 ‘밑 빠진 독’과 같이 끝이 없다. ‘밑 빠진 독’이 바로 ‘지옥’이다.탐욕은 지옥의 불이다. 온갖 좋은 것을 다 지옥으로 만든다. 빈부갈등 부정부패 억압 질병 전쟁 경제공황 환경파괴 기후변화. 성경은 이미 경고했다. 딤후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잘아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괘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 현실지옥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의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영이 살아있으면 천국을 현실에서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감사한다. 조금 더 주신다고 교만해지지 않고, 조금 덜 주신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이렇게 산다. 딤전6:17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 사람은 천국을 살고 있다.
현재를 지옥같이 사는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현재를 천국처럼 사는 사람은 천국으로 간다.
잔치를 한다. 천국잔치를 한다. 경제공황이 있은 다음에 신앙부흥이 왔고 경제가 회복되는 것이 성경이요 역사이다. 잔치는 이웃과 더불어 하는 것이다. 이번 추수감사헌금으로 가난한 탈북자 전도사를 도왔으면 좋겠다. 이번 ‘추수감사절을 탈북자와 함께’하자고 전통을 띄었다. 잔치에 사람들이 오는 이유는 거기에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하나님이다.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복음성가)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일본이 아시아 국가이면서 왜 저렇게 발전했는지 아는가? 1859년에 개신교가 일본에 들어왔다. 선교사들의 인격과 우월한 문화를 보고 일본 지도층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이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한국보다 단지 26년 앞서 기독교의 단물을 빤 덕으로 저렇게 앞서 나가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추수감사절은 오늘로 지나가지만 천국잔치는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제 기도하자).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알곡신자 되기를 원합니다.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어려울 때 감사함으로 희망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현실을 이기게 하옵소서. 현재를 자족하므로 하루 하루를 천국에서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