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24.3.3(일) 09;30-14;50
★코스;잠수교 남단-마포대교-공덕역-효창공원-청파로-서울로 7017 음수대1-남대문-북창동 전주회관-시청-청계천-탑골공원-
종로3가역(30km)
★참가;마라톤킴, 쉐도우수, 람보림, 오벨로, 아스트라전, 스머프차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탑골공원 팔각정-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봄은 봄이다. 겨울 없이 봄은 없다. 겨울의 끝은 봄의 시작이다. 봄을 맞이하여 첫 여정은 3.1절 기념 라이딩이다. 서울에는 항일유적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이번 라이딩의 하일라이트는 효창공원, 탑골공원 탐방이다. 여정의 시작은 잠수교 남단이다. 바이콜 전사 6명이 동참하였다. 옥량낙월 (屋梁落月)하며 일일여삼추(一日여三秋)했던 바이콜 전사들을 만나니 물만난 고기처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삶의 활력소를 불어 넣은 주는 것은 오로지 친구들 뿐이다.
잠수교 남단은 물 위에 꽃을 형상화하여 조성한 인공섬 '세빛섬'이 있다. 낮보다는 밤의 풍경이 휘황찬란하다. 상쾌한 기분으로 페달을 밟고 찬바람을 가르며 한강을 따라 달린다. 한강 자전거길은 바이커들로 언제나 활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가는 곳마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려 실루엣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여의도 한강공원에 당도하니 하프마라톤대회가 열려 자전거도로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중들 사이를 뚫고 마포대교로 진입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마포대교로 올라서서 한숨 돌린 후 효창공원으로 향했다.
효창공원은 조선왕조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던 곳이었다.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원(효창원)을 비롯하여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 정조의 후궁인 숙의박씨, 그의 딸 영온옹주 묘 등이다. 그러나 1944년 일제가 전쟁 희생자를 위한 충혼탑 설립 명목으로 고양 서삼릉으로 묘소를 이전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조성했다. 김구 선생의 묘와 세 의사의 묘(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안중근의 가묘, 의열사 7인의 묘 등이다. 효창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도로 양쪽으로 수많은 태극기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마치 벚꽃이 활짝 핀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휘날리는 태극기 도열을 받으면서 올라가면 이봉창 의사 동상이 등장하고 이어서 백범 김구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 중앙홀에는 김구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1층과 2층은 전시관이다. 김구의 출생부터 독립운동 가담, 임시정부 주석시절부터 해방이후의 정치활동까지 다루고 있다. 1층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나의 소원 중에서'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김구 선생 말처럼 우리나라는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선진국으로 우뚝섰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다. 전시관을 둘러본 후 청파로와 서울로 7017을 거쳐 북창동에 위치한 전주식당으로 향했다. 전주식당은 대열구국동지회가 자주 이용했던 식당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대열구국동지회 깃발을 계속 보관하고 있다.
점심메뉴는 제주 오겹살 구이와 된장찌개다. 시종소언(始終笑言)하면서 허기를 채우고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탑골공원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조선왕조때는 원각사가 있던 곳을 1897년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탑골공원 삼일문을 통과하여 자전거를 목줄로 보초를 세우고 관람하였다. 탑골공원은 조용하고 한산하여 마치 우리들 세상 같았다. 운치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팔각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유서 깊은 곳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0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본다.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독립선언서를 탑골공원에서 오후 2시경에 거행키로 했다가 참가한 학생과 시민들이 일경과 맞부딪치게 되면 희생자가 많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인근 태화관 별시로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행하였다. 비밀조직을 통해 탑골공원으로 모인 4천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예정시간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분위기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오후 2시경 희색 중절모에 흰두루마기를 입은 한 청년(정재용,33세)이 팔각정 단상에 오르며
호주머니속에서 선언서를 꺼내 큰소리로 거침없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감격해 함성으로 장내를 진동시켰고 만세소리를 우렁차게 외쳤다. 약 10분만에 38자 46행 8소절의 본문과 공약 3장을 일사천리로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학생들은 계속 모자를 벗어 하늘에 날렸고 서로 부둥켜 안으며 독립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자칫 3.1 혁명은 태화관선언으로 그쳤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3.1일 혁명의 횃불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해외거주 동포사회에서도 적극 동참하였다.
3.1운동은 침체한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고 이전의 투쟁세력들을 모아 체계적인 독립운동으로 변화시킨 변곡점이었다 임정수립*1919.4.11)의 계기가 되었고 독립군의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3.1운동은 민족 모두가 하나의 염원과 목표를 가지고 한반도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이다. 3.1 운동은 민족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결코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도 영원히 기억 될것이다. 독립군의 희생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고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해마다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1886-1976)은 해방 후 정부에서 3.1절 기념행사 때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정재용은 노후에 신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76년 12월31일 성울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90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 건국포장, 애국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3.1절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선조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기면서 생생하게 돌아봤다.
105년전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독립시키겠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헌신한 그 기상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라이딩을 마치고 종로3가역에서 오후 2시50분에 상황을 종료하였다.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꽃이 피기 시작하여 정녕 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새해 첫 여정이라 무리하게 운동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바이크 손대장은 카톡으로 반갑다는 인삿말과 함께 어지럼증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바이콜 전사들은 바이크손대장이 조속히 회복되어 여인동락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sd16 바이콜릭스(Bikeholics) 브라보!.
출발전 잠수교 남단 반포대교를 배경으로
한강대교를 지나서
여의도로 들어서서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마포대교로 진입
마포대교 남단에서 숨고르기
마포대교를 지나는 중
만리재로 만리재 고개
효창공원 입구 나무에 매달린 태극기가 휘날린다
이봉창 동상
백범 김구 기념관
기념관 중앙홀 백범 김구 선생 좌상
제1 전시실 김구 선생 어록
해주성 전투 김구 선생이 황해도 산포수 700명을 모아 황해도 해주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에 패했다
효창공원을 벗어나 숙명여자대학교 방향으로 향하는 중
청파로를 타고가다 서울로 7017로 진입
서울로 7017에서 서울역을 배경으로
숭례문을 지나서
북창동 전주회관
제주산 오겹살 돼지구이와 된장찌개로 식보
서울 시청을 지나
청계천을 따라
종로로 들어서서
탑골공원 삼일문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팔각정
독립선언서
3.1 정신 찬양비
3.1운동을 기념한 독립운동 부조판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조선 성종 2년(1471)에 세워졌다
원각사지 십층석탑(보물 제2호)
꽃이 핀 산수유 나무(탑골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