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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보고 2
행 11:11-18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1-18 / 바로 그때 가아사랴에서 온 세 사람이 내가 머물러 있던 집으로 찾아와 함께 가자고 청하였습니다. 12) 성령께서는 이방인이라 해서 망설이지 말고 그들과 같이 가라고 내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있는 신도 여섯 사람과 함께 그들을 보낸 사람의 집으로 갔습니다. 13) 그는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 부르는 시몬을 찾아오라고 하더라는 것과 그러면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해 줄 것이다' 하고 말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15) 그런데 내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 나는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18) 이 말을 듣고 모든 의문이 풀린 사람들은 다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임한 환상을 5절부터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욥바에서 경험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11-12) 11절은 ‘마침’이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어제 본문에 베드로가 환상을 본 후 11절의 사건이 ‘마침’이라는 단어로 연결된다는 것은 성령님이 이 모든 것을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며 나갔을 때, 13절부터 베드로는 성령의 예비하심과 준비하심이 얼마나 철저하고 구체적인지 알게 됩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3-18) 15절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것과 같은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같은 선물을 주셨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즉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념과 전통을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겸손히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고넬료 집에서 이루어진 그 모든 역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역사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교의 문화에서 자랐지만, 유대교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깨닫게 하셔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끝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어 사도들이 보다 폭넓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장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일을 감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고집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가장 큰 방해는 베드로 자신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신앙의 싸움은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용: 기도는 여러 사람이 여러 지역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그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수렴하셔서 응답하시고 처리해가십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의 기도를 욥바의 베드로에게 연결시키심으로 이들 가운데 역사하신 일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져 복음의 빗장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은 기도와 복음전파의 역사에 함께하고 있는지요?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예배의 회복은 다시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 때 진정한 예배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1:11
세 사람이 - 10:19에서 고넬료가 욥 바로 보낸 사람이 두명으로 진술되어 있으므로 본절과 숫자상의 모순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계수(計數)할 때 여자나 어린아이, 시종(노예 포함)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두 구절을 종합해 볼 때 두 사람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도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10:7).
=====11:12
이 여섯 형제 - 10:23에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형제는 두어 명이었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두어 형제를 합치면 모두 여섯 명 정도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1절) 자기와 동행했던 사람 모두 데리고 갔던 것이 분명하다.
=====11:14
그가 너와 온 집의 네게 이르리라 - 10장에서 이 표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본 구절은 천사에 의해 고넬료에게 주어진 내용을 요약하여 보다 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0장 가운데서는 생략되었으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로부터 들은 보다 자세한 이야기 중에 본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 -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재한 때가 베드로 자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다. 그러나 10:34-44에 따르면 베드로의 설교가 한참 진행된 뒤거나 아니면 설교가 끝났을 때쯤이라고 언급된다(10:44 주석 참조). 여기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시점에 차이가 생긴다. 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의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1) 혹자는 본문의 강조점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나타난 성령 강림 현상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Haenchen). 따라서 본문에서는 성령이 임한 시점이 언제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2)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이미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해서 설교가 끝날쯤에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고넬료의 집에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성령이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도 시종일관 주장하셨음을 가리킨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했던 말이 다시 반복되지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처음'(* , 엔 아르케)이라는 단어를 첨가시키고 있다. 즉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을 체험했을 때를 가리키고 있다.
=====11:16
주의 말씀에 세례 받으리라 - 이 말은 10:47,48에서 베드로가 자신있게 이방인에 대한 세례 선언을 하게 된 숨겨진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기억해낸 주의 말씀은 1:5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베드로는 자기 및 다른 형제들과 이방인의 성령 체험을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예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로써 베드로 자신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사실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바 있듯이 성령 세례가 기독교인 됨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권위있는 보증임을 말해주고 있다.
=====11:17
하나님이 주신 것과 같은 선물 -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면서 이방인들도 사도된 자신들이 받았던 것과 동등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체포되시기 전 하셨던 기도의 성취로도 이해된다(요 17:22).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 본문은 10:47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말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이방인을 기독교인으로 용납하고 세례를 베풀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형제됨을 인정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못박고 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따름을 암시한다(5:29). 이러한 베드로의 선교 자세는 바울과 일치한다(갈 1:10).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 이 표현은 베드로에게 비난섞인 공격을 하였던 자들이 베드로의 설명에 아무런 이의(異意)를 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의 설명이 그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간접 묘사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베드로에게 도전해 왔던 할례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표현은 베드로가 계속하여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에 대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행위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돝사조'(* )는 일반적으로 `영광을 돌리다'로 번역되지만 `찬양하다'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감격으로 다가왔기에 기쁨으로 그 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베드로가 언급했을 법한 결론적 이야기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의미에 대해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음이 반대자들이었던 할례자들에 의해 선언됨으로써 초대 교회 안에 있어온 이견들이 통합되어 이방인 선교가 확실한 권위와 보증을 받게 되었다.
< 설 교 >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양향모 목사 / 행 11:11-18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하신 명령과 예언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보고 계십니다.
10장과 11장에는 사도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그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일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 소식을 듣고 있던 사도들과 형제들이 어찌된 영문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할례파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항의하자 베드로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그 결론을 내린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이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사는 일을 능히 막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로 정하고 그 말씀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본문 17절 말씀에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전도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유대인들에게 그 과정을 설명하고 결론적으로 그 모든 과정이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한 것은 여러분들도 죽 지켜보신 대로 전적으로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그런 일을 진행하신 것이 아니라 환상이나 특별한 말씀을 통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일들을 진행하셨습니다. 고넬료에게도 환상 중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그 초청에 응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넬료와 그 일행들이 베드로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을 때도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역사하심으로 이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난 일들은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들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다소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됩니다.
특별히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시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 성도들이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어려운 일들도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과 관계없이 우리의 잘못으로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더 잘 믿게 하는 훈련도구로 사용을 하십니다.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 가족이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그 믿음을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너무나 소중한 것을 선물로 주신 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선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노력을 하고 내가 깨닫고 내가 실천을 하여 그 목표에 도달할 때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공로가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쉬울까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쉬울까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행이나 의로움 정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좀 바르게 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사람들을 바르게 살게 해서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을 하지만 사실 그 길은 불가능한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길이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만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보면 이일 또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런 것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 믿음만 있으면 최고의 삶을 산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같은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선물이나 이방인들이 받은 선물이 다 같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선물이나 짐승과 같이 취급을 받고 살던 보잘 것 없던 이방인들이 받은 선물이 같은 선물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같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아무것이나 믿는다고 다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같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선물은 그 능력이 엄청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구원을 받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가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사도나 바울 같은 사람이 가졌던 믿음이나 고넬료나 이방인들이 받았던 믿음이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똑같은 믿음입니다. 다만 이 귀한 믿음을 선물로 받고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사는 사람과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그 믿음을 따라 기쁘고 즐겁게 사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본문 18절 말씀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설명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베드로사도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선물로 받은 이 믿음에는 회개를 동반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믿음은 회개를 동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믿음에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능력 중에 하나는 회개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바른 길로 간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제법 바르게 산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고집대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가장 먼저 외친 것이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장 어렵게 만든 것은 회개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욥기’를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욥기의 주제를 의인도 고난을 받는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을 평가하시기를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라고 하셨기 때문에 욥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로운 사람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와서 그가 의롭지 못해서 벌을 받는다고 주장을 했지만 욥은 끝까지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억울함을 항변하였습니다. 욥의 그런 항변을 읽어 보시면 우리가 생각할 때도 욥은 정말로 정직하게 살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았고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많이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들 편에서의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비교적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이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항변을 듣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십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욥이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 그저 하나님을 소문으로 듣기만 했을 때 자신이 제법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지금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봤을 때 그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신이 의롭다고 했던 것을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했던 것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욥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이전보다 갑절이나 많은 복들을 주셨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롭게 살려고 노력을 해도 늘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를 하는 것이 더 소중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사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종요한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기 착각에 빠져서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고 믿음도 중요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믿음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회개가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해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를 할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해 줍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육신의 생명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 살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며 이 육신이 병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좋은 것도 먹고 합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영혼이 다시 살아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영혼이 살아 있을 때 우리의 육신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시고 영혼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영혼의 생명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회개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막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을 소중히 여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사도행전 11:14-18 / 박정근 목사
여러분은 다음 말을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을 떠올리십니까? 보수적 그리고 자유적, 전통과 진보, 온건파와 급진파, 이 중 어느 쪽입니까? 아마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인류역사는 이 두 세력의 갈등에 의해서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보수적일까 아니면 진보적일까? 하나님이 보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얼마나 보수적이십니까? 보수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늘 변화를 즐기신다. 창조 자체가 변화요, 진보가 아닌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어둠에서 빛을 밝혔으며 흙에서 사람을 만들었다.' 얼마나 진보적이신 하나님인가!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이 모든 생각의 차이는 변화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떤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변화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느리게 변화합니다. 변화를 좋아하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싫어하는 쪽에서 보면 변질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성경적인 태도입니까? 보수입니까? 진보입니까?
우리가 변화에 대해서 몇 가지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어떤 것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한 고대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변화 이외에는!" 시대가 다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어떤 것은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것은 반드시 변화하게 되어 있고 변화해야만 합니다.
또한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변화에는 우리의 적응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변화란 불편한 거예요. 그러나 그 불편에도 우리는 때로 적응해야 합니다.
한 예로 엘리베이터는 얼마나 편리합니까? 엘리베이터가 정전이 되어서 10층까지 계단으로 한번 올라가 보셨습니까? 얼마나 다리가 아픕니까?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엘리베이터도 불편할 때가 있어요. 처음 내가 그것을 작동할 줄 모를 때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적응을 거치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그것이 편리하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에는 적응이 요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변화에 대해서 알아야 할 상식 가운데 하나는 변화는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변화가 다 좋은 것인가? 아닙니다. 변화는 반드시 검증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변화를 하나님 말씀의 필터로 한번 걸러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변화인가 아닌가?
우리가 이 변화에 대해서 왜 그렇게 깊이 연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이 세대에 적절하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금도 놀라운 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그러면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적절하게 전할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요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그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변치 않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대한 적절한 내 자신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하지 않습니다. 요지부동이에요. 10년 전과 지금이 똑같습니다. 10년 전과 10년 후의 교회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자랑합니다. 우리 교회는 보수적인 교회라고요. 옳은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긴 변하는데 추하게 변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변질이에요. 소위 변한다고 하면서 진리에서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와 관계된 너무나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연구해야 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떤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 순간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마다 아름답게 변화되었습니다. 실패자가 승리자가 되었고, 도덕적으로 추한 자가 청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습니까? 그들 모두는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운 변화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본문은 몇 가지 방법을 진지하게 소개해 주기 원하십니다. 먼저 아름다운 변화를 위해서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대부분의 불협화음이 비본질적인 것에서 유래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본질적인 것들 때문에 싸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가정의 문제가 그렇고 어느 단체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본질적인 것들이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들, 반드시 싸우고 지켜야 할 진리들이 있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모하다 말이죠. 오늘날 어떤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에 틀린 것이 많다고 얘기합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우리가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에 나오실 때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셨습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곧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어요. 어떤 교파의 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침례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오늘 제가 이 말을 하는데 벌써 기분 나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왜 우리 침례교회를 맨 마지막에 넣느냐! 제가 침례교 목사이기 때문에 겸손해서 그렇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교파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령님을 모시고, 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형제 자매입니다. 교파가 어느 정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침례교인이 장로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못할까요?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까? 장로교인들이 성결교회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까? 대놓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오늘날 이런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침례가 옳습니까, 세례가 옳습니까? 저는 침례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침례가 옳은 것을 믿습니다. 제가 침례교회 목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경을 읽어볼 때 침례가 더 성경적임을 개인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을 믿는 것과 세례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입니다. 저는 세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서 세례 받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침례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이 비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냐 세례냐에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이 과연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일까요? 우리가 잘 알듯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는 무악파와 악기파가 있습니다. 무악파는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할 때 악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악기를 사용할 것인가? 그래서 교파가 나누어졌습니다. 이것이 잘한 일일까요? 우리는 악기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악기를 어디까지 사용해야 합니까? 피아노와 오르간만 사용해야 합니까? 기타는 어떻습니까? 드럼은 어떻습니까?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까? 과연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까? 우리가 싸우는 수많은 싸움의 이면을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질적인 문제로 싸우는가, 아니면 비본질적인 이슈가 그 핵심이 되어 있는가 입니다.
저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서울에서 국민일보 기자가 저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국민일보 한 면이 저의 기사로 나갔습니다. 제가 극구 사양했습니다만 21세기를 열어 가는 침례교 목회자로 소개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제가 자격이 부족합니다. 안 하겠습니다." 했지만 고집을 해서 할 수없이 취재의 첫 번째 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사진도 찍어가고 교인들도 신문에 날 겁니다. 제가 토요일이라 참 부담이 되었어요. 저는 늘 변화에 대해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얘기하는 중에 거기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 한 분 나오셨어요. 그분은 제가 얘기를 안 꺼냈는데 변화에 대해서 예화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니는데 일어난 어떤 일이었습니다. 마루바닥에서 예배를 드릴 때 까는 방석을 만드는 데 교회에서 굉장한 논란이 있었답니다. 추운 겨울이므로 방석을 만들어 그 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그깟 한 시간을 못 참아서 방석을 깔고 앉는단 말이냐! 꿇어앉아 드려야지!" 그래서 그 방석 하나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답니다. 나중에는 다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의자 문제가 나왔어요. "의자를 놓고 예배를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또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 의자라니? 하나님 앞에 꿇어앉아 예배를 드려야지! 등을 대고 예배를 드리다니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로 얼마나 많은 교회가 갈라졌고, 얼마나 많은 교파가 생겨났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쓸데없이 피를 흘리며 싸웠는지 아십니까? 왜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아름답게 변화되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이 주신 그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수많은 경우에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보수적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바꿀 수 없어요. 진리는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내용은 지켜야 하되 그릇은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오늘 이러한 면에서 실패했습니다. 비본질을 본질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본질을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아닌 그릇 때문에 그 그릇에 담긴 내용마저 다 엎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밥을 연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공기에 꼭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사는 한국인들은 접시에 밥을 먹습니다. 접시에다 밥을 먹으면 편리한 것이 많아요. 왜? 한쪽에 밥을 담고 그 옆에 반찬들, 즉 김치도 찢어 먹을 수 있고 내가 반찬을 마음대로 뒤척일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편한 것은 설거지하기가 쉽습니다. 씻기가 정말 편합니다.
잔칫상 차릴 때 꼭 공기를 놓아야 하겠습니까? 그 안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그릇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릇 때문에 내용마저 엎어버리는 싸움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지요. 여러분의 가정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살펴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도 불편해 하고 있습니까? 본질입니까? 아니면 비본질적인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종종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이었어요. 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느냐고 바리새인들은 늘 예수님께 못마땅해 했습니다. 왜? 안식일은 쉬어야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법을 만들어 놓고 지팡이를 끌고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지팡이를 질질 끌고 다니면 거기에 골이 생긴다는 겁니다. 안식일 날 499미터는 가도 되지만 500미터 넘는 순간 그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안식일이라도 500미터밖에 나가야 되겠는데,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집 문에다 실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허리에 실을 매달고 500미터 바깥을 벗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너 500미터 바깥으로 나왔잖아, 너희 집에서!"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고, 이 줄을 보라고 내가 지금 우리 집에서 아직도 묶여 있다고 했습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일주일 내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된 일에 전념하지만 특별히 한 날 정해놓고 그 날만은 하나님만을 기억하라,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라.' 이것이 안식일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본질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간 곳 없고 비본질적인 것들만 가지고 안식일을 논쟁했습니다. 몇 Km를 가야 하는가. 안식일에 자장면을 사먹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 버스를 타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주일날 과연 우리가 쇼핑을 할 수 있는가, 아닌가. 오늘날도 이런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손을 씻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왜 손을 씻습니까? 위생적인 문제입니까? 영적인 청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을 아셨습니다. 매번 식사를 앞두고 내 손을 씻을 때에 내 마음을 씻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은 씻지 않고 의식만 행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일부러 그러한 의식이라면 행치 않는 것이 낫겠다 라며 부딪혔습니다.
마지막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로 마땅히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주님께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괜히 교제가 막혀 있고, 어떤 문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기억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물음을 던져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사람과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일이 과연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고집과 전통, 비본질적인 것들 때문입니까? 진리 때문이라면 등을 돌려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면 오늘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잡고 고집할 때 우리 주위에 수많은 상처들이 생겨나고 우리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변화가 생겨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합니다. 본질은 보수적이 되어야 하고, 비본질에는 개방적이 되어야 합니다.
2. 제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제도주의! 우리 인간은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제도화되기 쉬운 존재입니다. 율법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형식에 빠지기 쉬워요. 이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우리 자신을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내용은 간 곳 없고 나중에는 그릇만 남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목적으로 시작했던 한 단체가 내용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교회가 그렇습니다. 이 교회라는 것도 날마다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가보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어요. 어떤 교수님이 제게 부탁한 말씀이 "절대 오래된 교회에 가지 마라!"였습니다. 제가 불순종했어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많이 변화한 줄 믿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래 믿은 신앙이 위험할 수 있어요. 이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제도화되기 쉽다는 겁니다.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가 본문에 나타납니다.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서 이방인들과 부둥켜안으며 놀라운 교제를 했습니다. 그의 평생에 먹어보지 못한 삼겹살 구이를 먹고 입에 채 기름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달려온 거예요. '아, 이 기쁜 소식을 형제들에게 전해야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셨구나! 이제 우리에게 부정한 음식은 없구나! 내가 삼겹살을 먹어봤더니 얼마나 맛있던지...' 이런 마음으로 그는 달려왔습니다.
베드로가 담임목사요 지도자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눈초리가 이상한 겁니다. 다 굳어 있습니다. 그 눈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웬일일까? 그 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에 거품을 품고 얘기합니다. "베드로여, 회개하시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자유주의자요? 그 단에서 내려오시오! 더 이상 설교할 자격이 없소! 베드로 당신은 변질했소! 어떻게 불신자와 같이 삼겹살 구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르지 않겠소!" 간단한 말로 지나갔지만, 이 사건이 그 당시 교회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음을 사도행전 15장은 연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남을 함부로 쉽게 비판하게 됩니다. 왜? 제도주의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의 동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이미 교과서가 있습니다. 규칙 제한이 있어요. 헌법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법에 어긋난 사람은 무조건 틀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함부로 남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비판하게 된다고 본문은 지적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손가락에 찔려 상처를 받아왔는지 모릅니다. 부모님들 밑에서, 선배 교인들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 받으며 마음 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한 제도주의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겁니다.
저의 은사 중 한 분인 진 겟츠라는 유명한 교육학자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그 개인과 단체에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가를 언급하시면서 7가지 특징을 얘기했습니다. 먼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사람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업이 중요하지 부부관계나 자녀가 중요하지 않아요. 항상 일이 먼저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특성과 창조성이 완전히 말살됩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에서 우리 사회의 병폐를 지적했어요. 유교문화가 준 병폐! 여기에서 유교는 제도주의라는 겁니다. 그 결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고 개인의 특성이 부각되지 않았어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보다는 위협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론을 제시할 수가 없어요. 함부로 질문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어른 앞에 반대 의견을 내어놓는단 말입니까? 딱딱한 구조를 가지게 되고 항상 규칙을 강조합니다. 제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서는 조직원들이 조직의 목표보다는 조직 자체를 섬기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왜 모였습니까? 왜 교회를 만들었습니까? 증인이 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면 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 자체와 조직 자체가 중요시된다는 말씀입니다. 의사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모든 조직이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게 되고, 밑에 있는 사람은 늘 '나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 영안교회에 마당만 밟을 뿐이지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제도적인 교회의 특징입니다. 또 가정에서는 아버지 혼자 장땡이입니다. 나머지는 다 수단에 불과한 거예요. 제도주의를 지닌 사람이 가는 곳은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혹시 남을 쉬 비판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함부로 당신의 잣대로 남을 측정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강압하지는 않았나요? 오늘 여기에 모인 모든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복음을 받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제도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성경은 그들을 우리에게 고발합니다. 그들뿐일까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제도주의에 빠질 수 없단 말입니까? 아니요. 우리 모두 희생자요, 우리 모두 그런 면에서 가해자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아름다운 변화가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생겨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늘 저는 두 종류의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기 원합니다. 먼저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의 태도를 4절에서 간단히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까? 잘 아시지요? "내가 죽는 데까지라도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말고(Malchus) 종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니까 검을 빼 가지고 그의 목을 치려다가 귀만 딱 잘랐어요. 이런 베드로의 성격으로 볼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날 성도들이 앉아서 수석 사도에게 삿대질을 해가면서 당신은 자유주의자이며 변질되었다고 했어요. 베드로가 두리번거리다가 물 컵을 던지든지 해야 하는 건데, 베드로의 태도를 보세요. 베드로가 일어나더니 차례로 설명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에 따라 보수적인 요소가 있고 진보적인 요소가 있어요.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도하지 않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 베드로와 같이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그리고 차분한 태도를 견지해야 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차례로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보면 10장에 나온 얘기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어요. 성경이 굉장히 함축적인 책인데 왜 이렇게 긴 사건을 뒷장에서 다시 설명하는가?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구조가 약간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10장과 11장에 일어난 사건을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엄청난 것들을 보여주셨다는 거지요. 베드로가 네 가지 사건을 이 사람들에게 설명하는데 하나씩 살펴봅시다.
거룩한 환상에 대해서 설명합니다(10절)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이런 일이란,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거예요. 거기에 온갖 부정한 짐승이 있어요. 돼지와 먹지 못하는 뱀장어 같은 것들이 득실득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아먹으라!" "내가 잡아먹을 수 없나이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속되다 하지 말지니라!" 또 내려옵니다. "잡아먹으라!" "못 먹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세 번! 그러나 사실 이것은 여섯 번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면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환상으로 세 번 보여주시고 음성으로 세 번 들려 주셨어요. 보자기에 짐승들을 보여주시며 잡아먹으라 하시고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섯 번 이 일이 있고 난 후,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이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데, 그것이 11절과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이방인의 집에 갔어요. 이방인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혼자 가지 않고 여섯 명이 같이 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바클레이 주석가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 애굽의 법에 의하면 중요한 일에는 7명의 증인이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여섯 형제와 베드로, 이렇게 7명입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중요한 규칙을 변화시킬 때는 7개의 인감도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7명이 갔던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가라!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준비를 하셨어요. 가보니까 이미 고넬료의 집에 다 준비를 시켜 놓았습니다. 13절, 14절을 보세요.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그가 너와 네 온 집에 무엇을 얻을 말씀을? 구원 얻을 말씀! 하나님이 이미 고넬료를 준비시켜 놓으셨어요. 거룩한 환상이 있었고, 거룩한 명령이 있었고, 거룩한 준비가 있었고, 마지막에 보니까 거룩한 일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늘 이 모든 설명을 차근차근히 한 다음 17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태도였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베드로는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내 철학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어릴 때 받은 교육을 고집하지 않았고, 나의 전통과 습관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유대교 가운데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의 마음 문을 열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왜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었는가? 초대 교인들의 놀라운 태도를 성경은 18절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당신은 자유주의자요? 단에서 내려오시오! 이제 우리는 당신을 따를 수 없소!" 그 험악한 분위기 가운데서 베드로가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자, 그들이 듣고 잠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려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삼겹살을 먹을 수 있어요? 어떻게 이방인들과 교제할 수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그들은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을 바꿉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분노가 찬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평생을 예수 믿으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를 믿고 있고, 미신과 불교를 믿고 있고, 자기의 습관과 가훈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얼마나 우리가 이러한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들고 살아나가는지요.
여러분의 가정생활을 보십니까? 딸이 하루는 용돈을 줬더니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왔습니다. 욕을 하며 청바지를 찢는 아버지, 이것이 본질적인 겁니까? 제가 얼마나 개방적입니까? 그런데 저도 애들을 이해 못할 때가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듣는 음악을 살짝 들어봅니다. 솔직히 표현해서 그것은 음악이 아니고 발광입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몰라요. 제 마음이 몹시 불편해집니다. 도대체 저런 음악을 왜 듣는가? 좋은 음악도 많은데... 제가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들을 이해해야지, 이건 비본질적인 거야, 그리고 그 가사를 한번 들어봤어요. 그런데 가사가 좋은 게 많아요. '꿍따리 사바라~ 가슴이 답답할 때 산에 올라가서 한번 외쳐 봐! 꿍따리 사바라~' 가사가 좋더라구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 내용은 괜찮구나. 역시 우리 아들이로고! 가락이 틀리구나!' 아리랑을 부르는 이 세대하고는 가락을 맞출 수가 없는 것이었어요. 내용이 중요하지 가락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그 곡을 따라하려고 해도 따라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저는 거기에 대해서 마음을 열기로 했습니다. 가사와 내용만 괜찮다면요. 오늘 우리의 수많은 잘못된 태도로 인하여 사랑하는 자녀들과 우리 주위 사람들이 상처받으며 살아갑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탄의 술수에 빠져 얼마나 수많은 교회가 갈라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요한복음 2장에 보니 가나에 혼인잔치를 여셨어요.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어요. 무엇을 상징해서입니까? "얘들아,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 줄 아니? 변화야, 변화!" 창녀가 예수님을 만나 거룩한 성녀가 되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의 재미요 의미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변질이 아닌 참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합시다. 본질에는 보수적이되 비본질에는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제도주의를 멀리 하시고, 베드로와 초대교회 교인들과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내 전통을 과감히 벗어 던지는 올바른 열려진 태도를 가집시다.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이대성목사 / 행 11:11-18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여러분! 지난 주 중에 노회 목사님들과 모임을 가진 후 식사를 했는데 우연히 정치 얘기가 나와서 목사님들끼리 보수니 진보니 갑론을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목사님께서 자기는 진보 즉 진짜 보수라고 말하면서 저에게 동조해 주길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운동권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께서 깜짝 놀라시면서 “이 목사님! 학교 다닐 때 운동권이었습니까?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 데요?”
그래서 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저는 매일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찐 운동권 목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수이실까요, 진보이실까요?
하나님이 보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이 얼마나 보수적인 분이십니까? 보수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늘 변화를 즐기신다. 창조 자체가 변화요, 진보가 아닌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어둠에서 빛을 밝히셨으며, 흙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이 얼마나 진보적이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이 모든 생각의 차이는 변화에 대한 반응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변화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느리게 변화합니다.
변화를 좋아하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또 하나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싫어하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변질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 순간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름다운 변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아름답게 변화되었습니다. 실패자가 승리자가 되었고, 도덕적으로 추한 자가 청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들 모두는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운 변화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몇 가지 방법을 진지하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라!”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대부분의 불협화음이 비본질적인 것에서 유래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본질적인 것들 때문에 싸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가정의 문제가 그렇고, 어느 단체건 발생하는 문제들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들, 반드시 싸우고 지켜야 할 진리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본질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곧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고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 교단은 크게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한자로 쓸 때 뭐라고 쓸까요? 기독교라고 씁니다.
예를 들면 예장과 기장은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 순복음 교회를 말하는 기하성과 예하성은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와 예수교 하나님의 성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예수와 그리스도가 서로 다투고 있는 꼴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은 다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령님을 모시고, 한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한 형제요, 한 자매들입니다.
교파가 어떤 면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교파가 생겨났으며, 얼마나 많은 교회가 갈라졌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장로교에서 크게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교단은 예수교 장로교 통합측과 예수교 장로교 합동측 입니다. 그렇다면 예장 통합측과 예장 합동측이 성경 말씀의 이견으로 갈라졌을까요? 아니지요?
서로 이권 다툼으로 인해서 나는 합동이다. 그러면 나는 통합이다. 뭐 그렇게 해서 갈라진 것입니다. 합동이나 통합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올 한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4층에 우리 교회가 버젓이 있는 데 이 상가 건물 3층에 교회가 두 개나 들어 온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단이 아니고서는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두 교회 목사님들을 만나보니 두 분 다 합신측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합신은 이단이 아닙니다. 합동 신학의 약어로 합동 측에서 또 갈라져 나온 교단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한 건물에 교회가 있는 데 또 들어온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이처럼 아름답게 변화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이 주신 그 아름다운 변화를 온전히 체험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수많은 경우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보수적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용은 지켜져야 하되 그릇은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비본질을 본질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본질을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 걸고 쓸데없는 싸움을 계속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내용이 아닌 그릇 때문에 그 그릇에 담긴 내용마저 다 엎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오늘도 불편해 하고 있습니까? 본질적인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비본질적인 것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종종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 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느냐고 바리새인들은 늘 예수님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이름 그대로 아무 것도 안하고 편안하게 쉬어야 하는 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가 때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참으로 신기한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 안식일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것조차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겁니다. 십층 이상에 투숙하고 있었던 우리들은 저녁 식사하려고 내려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 모릅니다.
매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자동으로 열리고 그리고 위에서부터 다 차면 그냥 내려가고 그리고 다시 올라오고... 이 일을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열불이 납디다.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건지?
그런데 호텔 식당에 가서 또 한 번 진풍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시 돈이 많아서 주말이면 온 가족이 외식을 하는구나!’ 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식사조차도 호텔에 와서 사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더 화가 났습니다. 여러분! 누구는 입이고 누구는 주둥아리란 말입니까?
그들을 위해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주방 봉사자들은 뭐란 말입니까? 그들을 위해서 서빙을 하고 있는 종업원들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려면 모두 다 함께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나만 거룩하게 지키면 된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안식일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예배요, 찬양이요, 나눔과 섬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본질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간 곳 없고 비본질적인 것들만 가지고 안식일을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들로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렇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로 마땅히 변화되어야 함에도, 전혀 변화되지 못하고 우리 주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소원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누군가가 있습니까? 괜히 교제가 막혀 있고, 지금 어떤 문제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물음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과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일이 과연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생각과 견해 등... 비본질적인 것들 때문은 아닙니까?
여러분! 진리 때문이라면 계속 등을 돌려야 합니다. 계속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이유들 때문이라면 오늘 당장,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잡고 고집할 때 우리 주위에 수많은 상처들이 생겨나고,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변화가 생겨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본질에는 보수적이 되고, 비본질에는 개방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변화를 온전히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제도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도주의에 빠지지 말라!” ‘제도주의’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제도화되기 쉬운 존재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형식과 외식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우리 자신을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내용은 간 곳 없고 나중에는 그릇만 남게 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목적으로 시작했던 한 단체가 내용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그런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래 믿은 신앙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제도화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가 사도행전 11장 1절에서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같이 1절부터 3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서 이방인들과 부둥켜 안으면서 놀라운 교제를 했습니다. 그는 평생에 먹어보지 못한 삼겹살 구이를 먹고서 입에 채 기름이 가시기도 전에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달려왔습니다.
'아! 이 기쁜 소식을 형제들에게 전해야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셨어! 이제 우리에게 부정한 음식은 없구나! 삼겹살을 먹어 봤는데 삼겹살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흥분된 마음으로 그는 달려왔습니다.
베드로가 담임목사요,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기에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눈초리가 이상합니다. 다 굳어 있습니다. 웬일일까요?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여, 회개하시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말합니다.
"당신은 자유주의자입니까? 어서 그 단에서 내려오시오! 더 이상 설교할 자격이 없소! 베드로 당신은 변질되었소! 어떻게 불신자와 같이 삼겹살 구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르지 않겠소!"
제가 지금 간단히 각색해서 말씀드렸지만, 이 사건이 그 당시 교회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음을 사도행전 15장은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남을 함부로 쉽사리 비판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제도주의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의 동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는 이미 교과서가 있습니다. 규칙과 제한이 있습니다. 헌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 어긋난 사람은 무조건 다 틀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향해 삿대질 하고 비판하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손가락에 찔려 상처를 받아 왔는지 모릅니다. 율법적인 부모님 밑에서, 오래 믿은 교인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받으며 가슴 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한 제도주의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모였습니까? 왜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예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이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면 그런 것 보다는 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나 조직 자체가 더 중요시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혹여 남을 쉽사리 비판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함부로 여러분의 잣대로 남을 측정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모인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복음을 받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제도주의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찌 그들 뿐 이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이런 제도주의에 결코 빠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다 희생자요,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제도주의에 빠져있는 우리들 모습을 되돌아봄으로써 아름다운 변화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음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태도를 가져라!” 오늘 저는 베드로의 올바른 태도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베드로의 태도를 사도행전 11장 4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여러분? 베드로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는지 다들 잘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혈기를 부리며 검을 빼가지고 말고라는 종의 귀를 잘랐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성격으로 볼 때 그 순간 어떻게 해야 맞을까요? 그 날 성도들이 앉아서 수석 사도 베드로에게 삿대질을 해가면서 당신은 변절자라고 말했을 때 과거의 베드로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가 마시던 물 컵을 던지든지, 책상을 뒤집어업든지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태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일어나더니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했다고 4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적인 요소도 있고, 진보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임에도 서로가 서로를 의도하지 않게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베드로처럼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 차분한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차례로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보면 10장에 나온 이야기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굉장히 함축적인 책인데 왜 이렇게 길게 뒷장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구조가 약간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10장과 11장에 일어난 사건을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시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에게 엄청난 것들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교인들에게 이를 하나 하나씩 설명하는데 제일 먼저, 거룩한 환상에 대해서 그는 설명합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이런 일이란,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온갖 부정한 짐승이 있었습니다. 돼지와 먹지 못하는 뱀장어 같은 것들이 득실 득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아 먹으라!" "내가 잡아먹을 수 없나이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속되다 하지 말라!" 또 내려옵니다. "잡아 먹으라!" "못 먹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이러길 세 번이나 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이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11절과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여섯 형제와 함께 이방인의 집에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혼자 가지 않고 여섯 명이 같이 가고 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서 바클레이 주석가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 애굽 법에 의하면 중요한 일에는 7명의 증인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섯 형제와 베드로, 이렇게 7명입니다. 또한 로마법에 의하면 중요한 규칙을 변화시킬 때는 7개의 인감 도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7명이 함께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가라!” 그 뿐만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가보니까 이미 고넬료의 집에 다 준비를 시켜 놓았던 겁니다. 13절과 14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무얼 받을 말씀을? 구원 받을 말씀을... 하나님은 이미 고넬료를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거룩한 환상이 있었고, 거룩한 명령이 있었으며, 거룩한 준비가 있었던 것입니다.
15절도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그렇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에 전혀 힘썼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설명을 차근 차근히 말한 다음 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답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어릴 때 받았던 교육이나 전통과 습관을 끝까지 고집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 그는 유대 전통에 흠뻑 젖은 보수적인 사람이었음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마음 문을 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 중심의 사고 방식!’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태도의 변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초대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초대 교회 교인들의 놀라운 태도를 성경은 18절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음성을 들은 후에는 그들 모두는 다 잠잠해졌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변하여 찬양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노라!"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신앙도 변화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얘들아, 예수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정말로 다른 점이 무엇인 줄 아니? 그것은 변화야, 바로 변화란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녀가 예수님을 만나 거룩한 성녀가 되는 것, 제사장과 레위인이 예수님을 만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말씀이 삶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변화 되어야 합니다. 아름답게 변화 되어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질이 아닌 변화를 추구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내 생각과 내 뜻은 다 내려놓고, 주님 생각과 주님 뜻으로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후로는 우리 주님의 찐 제자답게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서 변질이 아닌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라
행 11장 11~18절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라!”그런데 여러분? 변질과 변화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변질과 변화는 바뀐다는 사실은 똑같지만, 그 바뀌는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변질은 ‘Go bad’를 뜻하며, 변화는 ‘Go good’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변질되어가는 신앙과 변화되어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변질은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며, 변화는 하나님 뜻대로 마음을 늘 새롭게 하는 것 즉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세상에 물들어 변질(Go bad)되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물들어 점점 더 변화(Go good)되어 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변화는 좋지만 변질은 나쁘다.’는 사실입니다. 변화는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이요,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반면에 변질은 더 나쁜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변질이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더 이상 쓸모없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변질은 음식이 부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변질이 되면 악취가 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질이 아니라 아름답고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진정 성장하고 성숙하길 원하십니다.
자녀가 초등학생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참된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변화를 원하시지 변질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들이 결코 변질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변화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저는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코로나가 횡행한 지난 3년 동안 오로지 건강관리에 신경 쓰느라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해서 우리네 신앙이 무척 무감각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사탄 마귀의 노리개 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똑바로 믿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한없이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잘못된 것은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변화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느리게 변화합니다. 변화를 좋아하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또 하나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싫어하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변질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 순간 아름답고 창조적인 변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자는 누구든지 창조적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실패자가 승리자가 되었으며, 도덕적으로 추한 자가 청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들 모두는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답고 창조적인 변화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답고 창조적인 변화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진정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라!’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대부분의 불협화음은 비본질적인 것에서부터 유래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본질적인 것들 때문에 싸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가정의 문제가 그렇고, 어느 단체든지 발생하는 문제들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들, 반드시 싸우고 지켜야 할 진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본질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곧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고 예수님의 재림 또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가운데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단이 모두 다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한자로 쓸 때 뭐라고 쓸까요? 기독교라고 씁니다.
예를 들면 예장과 기장은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 순복음 교회인 기하성과 예하성은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와 예수교 하나님의 성회...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예수와 그리스도가 서로 다투고 있는 꼴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비본질적인 문제들입니다.
교파가 어떤 면에서는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교파가 생겨났으며, 얼마나 많은 교회가 갈라졌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아름답게 변화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이 주신 그 아름다운 변화를 온전히 체험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수많은 경우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보수적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용은 지켜져야 하되 그릇은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비본질을 본질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을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 걸고 쓸데없는 싸움을 계속해 왔던 겁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내용이 아닌 그릇 때문에 그 그릇에 담긴 내용마저 다 엎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늘도 불편해 하고 있습니까? 본질적인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비본질적인 것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종종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
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느냐고 바리새인들은 늘 예수님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안식(安息)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무 것도 안하고 편안하게 쉬어야 하는 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안식일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요, 찬양이요, 사랑과 섬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본질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간 곳 없고 비본질적인 것들만 가지고서 안식일을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들로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렇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로 마땅히 변화되어야 함에도, 전혀 변화되지 못하고 우리 주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소원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누군가가 있으십니까? 괜히 교제가 막혀 있고, 지금 어떤 문제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물음을 한 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과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일이 과연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 때문입니까? 혹여 여러분의 아집과 주장과 편견 등... 비본질적인 것들 때문은 아닙니까?
여러분! 진리 때문이라면 계속 등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계속 피터지게 영적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이유들 때문이라면 오늘 당장, 여러분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들을 계속 붙잡고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우리 주변에 더 많은 상처들이 생겨나고,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적 변화가 결코 생겨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본질과 비본질을 분명히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본질에는 보수적이 되시고, 비본질에는 개방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적인 변화를 온전히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제도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제도주의에 빠지지 말라!’ 여러분!우리 인간은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도화되기 쉬운 존재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까딱하면 형식과 외식에 치우친 껍데기만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우리 자신을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내용은 간 곳 없고 나중에는 그릇만 남게 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목적으로 시작했던 한 단체가 내용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그런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래 믿은 신앙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제도화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가 사도행전 11장 1절에서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같이 1절부터 3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서 이방인들과 부둥켜 안으며 놀라운 교제를 했습니다. 그는 평생에 먹어보지 못한 삼겹살 구이를 먹고서 입에 채 기름이 가시기도 전에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달려왔습니다.
'아! 이 기쁜 소식을 형제들에게 전해야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셨어! 이제 우리에게 부정한 음식은 없구나! 삼겹살을 먹어 봤는데 삼겹살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흥분된 마음으로 그는 달려왔습니다.
베드로가 담임목사요,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기에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눈초리가 이상합니다. 다 굳어 있습니다.
웬일일까요?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여, 회개하시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 말합니다.
"당신은 자유주의자입니까? 어서 그 단에서 내려오세요! 당신은 변절했소! 어떻게 불신자와 같이 삼겹살 구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르지 않겠소!"
제가 지금 간단히 각색해서 말씀드렸지만, 이 사건이 그 당시 교회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음을 사도행전 15장은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남을 함부로 쉽사리 비판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제도주의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의 동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정해놓은 정답이 있습니다. 규칙과 제한이 있습니다.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범주에서 어긋난 사람은 무조건 다 틀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향해 삿대질하고 비판하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손가락에 찔려 상처를 받아 왔는지 모릅니다.
율법적인 부모님 밑에서, 오래 믿은 교인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받으며 가슴 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한 제도주의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왜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예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복음 전파’ 그런 것 보다는 ‘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뭐 이런 것에 대한 회의나 조직 자체가 더 중요시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혹여 남을 쉽사리 비판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함부로 여러분의 잣대로 남을 측정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강압하지는 않았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모인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복음을 받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었음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도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이런 제도주의에 이미 빠지지 않았을까요?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다 희생자요,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제도주의에 빠져있는 모습을 되돌아보고 철저히 통회자복함으로써 아름답고 창조적인 변화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금 힘차게 솟아오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바른 태도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바른 태도 변화를 보여라!’ 여러분! 오늘 저는 베드로의 태도 변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는지 다들 잘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혈기가 넘친 나머지 검을 빼 가지고 ‘말고’라는 종의 귀를 잘랐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성급한 성격으로 볼 때 그 순간 어떻게 해야 맞을까요?
그 날 성도들이 앉아서 베드로 사도에게 삿대질을 해 가면서 당신은 변절자라고 말했을 때 과거의 베드로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가 마시던 물 컵을 던지든지... 책상을 뒤집어 업든지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변화된 태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일어나더니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 차례 설명했다고 4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적인 요소가 있고, 진보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임에도 서로가 서로를 의도하지 않게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베드로처럼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 차분한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성이 난 그들에게 차분하게 하나 하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보면 10장에 나온 이야기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굉장히 함축적인 책인데 왜 이렇게 길게 뒷장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구조가 약간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10장과 11장에 일어난 사건을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시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에게 엄청난 것들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교인들에게 이를 하나하나씩 설명하는데 제일 먼저, 거룩한 환상에 대해서 그는 설명합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이런 일이란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온갖 부정한 짐승이 있었습니다.
돼지와 먹지 못하는 뱀장어 같은 것들이 득실득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아먹으라!" "내가 잡아먹을 수 없나이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속되다 하지 말라!" 또 내려옵니다. "잡아먹으라!" "못 먹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이러길 세 번이나 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이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거룩한 명령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11절과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여섯 형제와 함께 이방인의 집에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혼자 가지 않고 여섯 명이나 같이 가고 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서 바클레이 주석가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 애굽 법에 의하면 중요한 일에는 일곱 명의 증인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섯 형제와 베드로’ 이렇게 일곱 명입니다.
또한 로마법에 의하면 중요한 규칙을 변화시킬 때는 일곱 개의 인감 도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곱 명이 함께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명령을 하십니다. ‘함께 가라!’
그 뿐만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가 보니까 이미 고넬료의 집에 준비를 다 시켜 놓았던 겁니다. 13절과 14절 말씀 다같이 한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그가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고넬료를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거룩한 환상이 있었고, 거룩한 명령이 있었으며, 거룩한 준비가 있었던 것입니다.
15절 말씀도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그러자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에 전혀 힘썼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다음이 더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설명을 차근 차근 말한 다음 17절에 보면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베드로의 답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어릴 때 받았던 교육이나 전통과 습관을 끝까지 고집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 그는 유대 전통에 흠뻑 젖은 보수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는 자기 마음 문을 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여러분! 바로 이런 태도의 변화가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놀라운 태도를 성경은 18절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음성을 들은 후에 그들 모두는 다 잠잠해 졌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변하여 찬양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노라!" 노래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후로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로 따라합시다.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라!’
찬송가 421장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서 죄 사함 받아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가 씻겼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이 찬송가 가사 그대로 ‘내가 예수 믿고서 나의 모든 것이 다 변했노라.’ 기쁘게 간증하면서 저 천국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힘차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할 뿐만 아니라, 결코 흔들림 없이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내 생각과 내 뜻은 다 내려놓고, 주님 생각과 주님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깨달아 알아 늘 항상 변질이 아닌 변화를 선택함으로 아름답고 창조적인 변화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리얼 크리스천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잠잠히 하나님께 영광을
행 11장 17~21절 / 이규왕목사
오늘날 불신자는 말할 것 없고 하나 됨과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이 한 교회를 다니면서도 패가 갈라지고, 의견 통일이 잘 되지 않고 논쟁을 일삼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부부, 부자, 형제, 친구, 교우 간에도 사소한 문제로 끝없는 논쟁과 심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오랜 세월 동안 선악이라는 이원론과 흑백이라는 이분법 논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 자신과 뜻을 달리 하는 사람을 적대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을 놓고서도 그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설령 나와 의견이 다를지라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와 다른 의견을 수렵하여 더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얼마든지 좋은 친구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교회 안 밖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들을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잘 잘 연소시켜 땅 끝 복음화를 이루는 일에 추진력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그 비결과 방법을 배우고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비난 받는 지도자
우리는 지난 시간에 베드로가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말미암아 로마 백부장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로 말미암아 칭찬대신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음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행 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여기서 ‘힐난’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베드로의 처사에 반대하고, 의심하고, 다투고, 판단하는 공세를 중단하지 않는 미완료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당시 유대인들이 생명을 걸고 지키던 랍비의 유전을 범했다는 죄목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유대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당시 랍비의 유전은 불변의 진리라기보다는 언제나 수정할 개연성이 있는 종교 문화적인 전통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의 원리는 예수님이 오시기전 까지 이방 종교의 유입을 방지하기위한 한시적인 울타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울타리는 허물어지고 개방이 된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한 술 더 떠서 그와 같은 랍비들의 가르침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불변의 진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는 랍비들의 전통을 고집한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족속, 모든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로 그와 같은 전통에 얽매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 강제로라도 온 땅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고넬료 가정을 통해서 뒤늦게 그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다른 사도들은 여전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듣고 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고넬료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한 것을 확대해석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 11: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예루살렘 교회는 지상 교회의 시작으로서 어머니 교회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위치는 예루살렘 교회에 있어서 행정적인 총수와도 같은 존재로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영향이 큰 위치에 있는 지도자입니다.
지금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팀이 되어 외부적인 도전과 내부적인 반목을 추스르며 복음을 땅 끝까지 복음을 확장하는 일에 동역자인 사도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베드로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잘 알고 늘 가까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그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층들의 비난은 곧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에게 일방적인 비난을 퍼붓기에 앞서 상식선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지도자인 베드로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부터 듣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수순을 무시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직접 목격하고, 직접 대화 해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자기가 느끼는 대로 남을 함부로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교회 안 밖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지도자의 권위가 손상을 받고 공동체의 분위기가 냉각되고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도 비판과 정죄의 대상이 되는 자기 함정을 파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어떤 공동체이든지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권위를 상실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권위주의라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힘이 바로 리더십으로서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인정받지 못할 때 부부의 화목이나 자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 가정의 기능은 고작 식당이요 여관이요 세탁소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는 부모의 권위가, 교회 공동체에서는 목회자의 권위가, 국가 공동체에서는 통치자의 권위가 보장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항상 물고 물리면서 문제가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겸손한 지도자로 심지어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 또는 만물의 찌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자기를 비울 줄 아는 겸허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사도 권이 무시당할 때는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반격을 가한 것은 사도의 권위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신뢰가 깨어져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같은 어리석음이 가정 안에 가족 중에서, 단체 속에 회원 중에서, 국가 속에 지도층 중에서, 교회 안에 직분자 중에서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물론 공동체를 옹호하기 위해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지도자의 처사까지 미화하고 은폐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지켜져야 할 공동체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는 하나님께서 더더욱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고, 그 자신도 결국 공동체를 떠나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2. 해명하는 지도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게 될 때 즉각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그 같은 비난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의 약점을 찾아 역공격하므로 그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이라고 복수극을 벌리게 됩니다. 그 결과 비판자나 비판받는 사람이 둘 다 진흙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대응을 하였습니까?
1) 자초지종을 차례로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변명이 아니라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사실을 객관성 있게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는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행 11: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행 11: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행 11: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잘못된 시작은 사실을 사실대로가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하게 증폭시키는데서 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사실은 사실 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사실에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희석시키지 말고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대부분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낸 동기나 마음은 제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이 사람을 죽인 결과이지만 그 동기 여하에 따라 사형이나 무기 징역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집행유예나 무죄를 받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도들과 차이와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물론 베드로가 이방인과 교제를 하였고, 다른 사도들은 교제를 하지 않은 것이 큰 차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환상을 보기 전에는 비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늘로 부터 내려온 부정한 것을 잡아먹기를 거절하였던 심정을 왜 바꾸게 되었는지 자기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행 11: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행 11: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오해하기 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동일하지만 그 마음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왜 자기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의 집에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구차스럽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을 성령께서 어떻게 주관하셨는지 자신의 업적보다 성령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행 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베드로도 지금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편견을 가졌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권고하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것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평소 베드로의 소신이며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예가 앞서 핍박자들이 베드로를 잡아끌어다가 공회에 세우고 채찍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하였을 때 베드로가 한 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3. 주께 영광을 돌리는 비난자들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도들과 형제들은 어느 누구보다 베드로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평소 베드로를 신뢰하였다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서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전에 그 사연을 먼저 알아본 후에 비난을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베드로가 잘못을 범했을 지라도 그런 식으로 비난을 당한다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맞대응을 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도들과 형제들의 왜곡된 편견이 바로 고넬료를 만나기 전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싸잡아 비난하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이성적으로 차분히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는 나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온유한 심정으로 상대방의 비난을 해명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며 승리케 하는 비장의 무기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인격적인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자총지종의 경위를 베드로에게 직접 듣고 난 후에 베드로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한 것이 베드로의 판단이나 의지가 아니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습니다. 베드로가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된 편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베드로를 더 이상 비난하지 못하고 잠잠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여기서 잠잠히 라는 말은 적막감이 돌 정도로 아무런 말도 못하는 침묵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비난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깨닫고 감격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더불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복음의 무차별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나님의 참 뜻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되고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죄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지금까지는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으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땅 끝 복음화의 섭리와 시급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하신 땅 끝 복음화는 베드로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사도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모두 힘을 합해서 해야만 하는 시대적인 사명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땅 끝 복음화로 말미암아 비난하던 사람과 비난 받던 사람들이 편견과 갈등을 깨뜨리고 다 하나가 된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땅 끝 복음화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만의 힘으로 되어 질 수 없는 대 역사로 전 예루살렘교회 전 수원제일교회 전 세계교회가 힘을 합쳐야만 할 수 있는 대장정이고 대 프로젝트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처럼 잘못 생각하고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직책이나 직분이나 신앙 연조 때문에 자기 생각만이 옳은 줄로 착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고넬료 사건을 통해 깨우쳐 땅 끝 복음화의 동지가 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작업을 하시는 것은 앞으로 확산될 이방 선교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 마음을 닫고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와 무명의 평신도들을 통해 땅 끝 복음화 사업을 계속 확산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복음이 은연중에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헬라인들에게 전파되어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옴으로 세계 선교의 주도권이 편견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촛대가 옮겨지는 전초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왜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고 예수를 믿게 하셨고 열두 제자의 비전과 선교를 노래하는 이 교회에 출석하게 하시고 오늘의 설교를 듣게 하시는 섭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신학이나 이론이나 생각의 차이로 마치 서로 다른 종교처럼 반목하고 갈등하고 분열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가 편견을 무너뜨리고 서로 하나로 통합하여 힘을 모아 주님이 명령하신 땅 끝 복음화의 대장정을 이루기 위한 전열에 참여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를 계속 도전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고 땅 끝 복음화의 일꾼이 되자는데 무슨 이론이 있을 수 있고 무슨 핑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나를 택하셨으며, 내가 부름을 받았으며, 내가 쓰임을 받는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누가 감히 거역을 하고 핑계를 하고 비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우리도 사도들처럼 잠잠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내가 핑계하며 지체하고 있을 때 다른 교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땅 끝 복음화를 이루어가고 계심을 깨닫고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을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과 바꾸는 어리석은 삶을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그 동기는 자기 생각을 앞세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조정을 당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이거나 셋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생각은 다 합리성을 가져야만 다른 사람이 동의를 하고 공감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규범이나 법 정신에 위배되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은 때로 그 같은 규범이나 정신과 충돌하기 때문에 베드로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오해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베드로를 통해서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닮아 오늘 우리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고 정죄하던 원수를 친구로 만들고, 방해꾼을 동지로 만들어 땅 끝 복음화의 동역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회개함으로 부흥하는 교회
행 11장 18절 / 강성찬목사
왜 교인들은 밤낮 죄인이라고 난리치며 울고 야단이우? 네. 그러나, 장님은 자신의 옷에 무엇이 묻었는지 모르는 법이지요.
본래 죄라는 것은 원죄와 자범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밖에서 살았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그는 원죄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의미의 회개라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의 연약함은 회개한 이후에도 이런 저런 죄를 짓게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회개(자백)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됩니다(요일 1:9-10).
(요일 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회개란 단순한 후회나, 죄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그 죄를 고백하고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회개 기도를 하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감사한 일이나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볼 때 우리는 오갈 데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남을 때리지는 않았어도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내가 주일날 교회에는 나왔어도 온전히 주일 성수를 못한 것, 더 헌신하고 더 봉사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마 22:36-38).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심으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셔서 회개의 은혜도 허락하셨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되 회개함으로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희생은 상한 심령 곧 회개하는 심령입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조지 워싱턴이 어렸을 때에 그 아버지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쓰는 조그만한 도끼를 하나 사주었습니다. 손으로 던지면 빙빙 돌다가 벽에 탁 박히는게 어린 워싱턴은 너무도 신이 났습니다. 그래, 도끼를 들고 사방에 뛰어 다니다가 실수로 그만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체리나무를 찍어버렸습니다. 이것, 큰일 났습니다. 겁이 난 워싱턴은 아무도 몰래 땅을 파고 그 나무를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른 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보기가 민망해서 슬슬 피해다녔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조지 워싱턴은 더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도끼를 휘두르다가 실수로 그 체리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나는 네가 한 짓인줄 벌써 알고 있었단다. 너 외에 누가 했겠느냐 그러나 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단다. 너는 참으로 위대하구나.' 칭찬해 주었습니다. 거기서 조지 워싱턴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회개는 확실한 용서의 위로를 얻고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갖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눅 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합니다.
교회 옆에 사는 아주 방탕한 술주정뱅이가 하루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목사에게로 달려왔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꿈속에서 '네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에 너를 데려갈 것이다.'라는 말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목사는 '그러면 이제부터 술을 끊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정말로 술을 끊고 도박도 절제하면서 교회에 잘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얼마정도 착실히 잘 나오더니 그 열심이 식어지기 시작했고 아예 교회에 발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왜 그렇게 금방 열심이 식어졌습니까?'고 물었더니 그는 '목사님은 그 꿈을 믿으십니까? 그건 개꿈일 뿐이라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얼마 안 있다가 그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해 걷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버렸습니다. 그날은 1년 전 꿈을 꾼 바로 그날이었습니다.(21세기 예화)
회개는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 필요한 준비입니다.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일본에 다카바다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와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는 '일본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유물사관밖에는 읽으라고 장려할 만한 책이 없다.'라고 하며 <자본론>을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그는 결핵에 걸려 끝내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그는 성경과 찬송을 찾아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떠날 시간이 임박해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환해졌스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하나님께로 가네. 모든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부끄러움 없이 간다네.' 이렇게 말하고는 고요히 세상을 떠났습니다.(21세기 예화-무신론자의 임종과 회개)
회개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게 합니다.
(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합니다.
'유쾌하게 하는 때'는 구원의 결정적인 때입니다.
주유소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알 존슨이 20세 되던 해, 두 친구와 함께 캔사스의 한 은행을 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두 친구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또한 당시 사건을 목격한 은행원들의 잘못된 진술로 존슨은 범인으로 지목을 받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그대로 묻혀 보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존슨도 이제는 자신이 범죄자인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크리스천인 아가씨와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가 배달되었습니다. 평소 아내와 함께 교회에 출석은 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그에게 이 책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존슨은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자신이 과거 지었던 범죄를 다시금 깨닫고, 깊이 뉘우쳤으며, '이제야말로 용서받을 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새로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의 죄지은 과거를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을 영영 해결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주 당국에서는 범죄자가 자수를 해온 데 대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신문마다 이 일을 대서 특필로 보도했고, TV 뉴스에서도 '알 존슨'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슨은 이 모든 상황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껏 맛볼 수 없었던 평안이 임하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속되어 처벌을 받을 줄 알았던 그는 캔사스 주의 효력 정지 법령에 의해 석방되었고, 단지 그가 훔쳤던 돈만 다시 갚으면 되었습니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귀중한 아들로서 생활하고 있다합니다. 이렇듯 회개에 따르는 것은 과거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마음의 평안과 복입니다.
참된 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들의 예를 따라서 하루에 세 번 기도의 시간을 갖은 듯합니다. 기도하러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혼자 있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픈 중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온갖 짐승과 파충류와 조류를 담은 그릇을 내려 보내시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짐승들을 먹으라고 명하셨을 때, 그의 대답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율법을 통하여 부정한 짐승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는 이 환상이 주는 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고민하던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로 세 사람의 사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이 세 사람의 도착에 대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자들은 고넬료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베드로에게 자기들이 온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맞아들여 유숙하게 했습니다. 그는 환상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고넬료는 그의 일가와 친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들어오자, 고넬료는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겨 극진한 공손을 표했습니다. 들어가서 베드로와 고넬료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자기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만나게 된 경위를 피차 설명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의 하신 모든 일의 직접적인 목격자임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그 주님은 부활하셨고, 사도들은 바로 부활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심판 아니면 구원이 됨을 분명히 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예수에 대한 그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에 내려오신 성령의 부음으로 갑자기 끝났습니다. 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하게 이방인들이 받는 이 증거를 보고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은 놀랐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방언을 말함으로 물 세례를 주고, 그들과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는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자 그가 본 환상과 그것의 성취,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갔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택한 백성을 두셨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베드로의 증언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베드로가 설교하는 동안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조차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 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 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 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겔 36:26-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미국 어느 동네 공장에 다니는 불량한 아들과 믿음이 좋은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공장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문 앞에 외등을 켜 두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병에 들었는데 병세는 날로 더 심해졌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밤늦게 돌아와 보니 밖에 전등이 켜있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유서 한 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내 사랑 하는 아들아, 나는 너의 방탕한 생활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매일 세 번씩 기도했다. 또 너로 하여금 빛 되신 예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매일 밤 불을 켜 놓았다. 네가 예수를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천국에서 너를 만나보기를 바란다.' 아들은 어머니의 유서를 읽고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하신 사랑과 기도의 감화를 받아 지금까지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진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천로역정에는 절망의 우리 속에 갇혀 짐승같이 머리카락이 자라고 눈이 움푹 들어간 사람이 탄식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또한 믿노라고도 하면서 회개 못한 교인이었습니다. 바로 성령이 떠나버린 절망적인 교인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주자주 감화 감동을 주셨는데도 끝끝내 복종치 않다가 성령께서 아주 떠나가 버린 절망인의 모습을 죤 번연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며 겸비한 심령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무한한 긍휼과 사유하심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세기의 어떤 랍비 이야기입니다. 이 랍비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스승의 외침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서 누가 자신의 사망일을 알겠습니까? 지금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일년 후에 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랍비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최후의식을 갖고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이고 당장 회개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 곧 회개요 회개가 용서와 위로를 받게 하며 하나님을 뵈옵게 하며 유쾌케 하며 생명을 줍니다. 이 사실 믿고 회개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